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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1급 괴수
그 말은 한 번에 여러 가지의 뜻을 품고 있어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지 못한 채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이라는 게 지우와 천기정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회의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인지 애매하게 들렸던 것이다.
처음에 말을 했던 전무가 그 부분을 짚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이라는 게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이익헌이 웃으면서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아. 제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군요.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에서 세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말한 겁니다. 그 세 사람은 저와 오늘의 특별 초대손님 두 분이 되겠고요.”
이익헌의 말에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이 발끈하며 소리를 쳤다. 고성이 오가면서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지만 이익헌은 그 소요를 일으킨 당사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태연하게 굴었다.
지우는 천기정을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가 왜 여기에 있어야 되는 건지 대리님은 아세요?”
지우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묻자 천기정이 웃었다.
“모르긴 하지만 재미있는데요?”
“이익헌 부사장이 지금 우리를 골탕먹이려고 그러는 건 확실한 거죠?”
“제 생각에는 우리보다 다른 사람들을 골탕먹이려고 한 것 같은데요?”
“정말 이 사람들을 다 자를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이런 일은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없잖아요. 이사회라도 열고 그래야 되는 것 아니예요?”
“생각이 있는 모양이죠.”
천기정은 사태를 관망하면서 내내 여유있는 표정을 지었다.
“대리님은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
지우가 묻자 천기정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냥 구경하려고요. 재미있을 것 같잖아요. 누가 져도 상관없는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게 어디있어요?”
천기정이 말하자 지우가 손가락으로 이익헌을 가리켰다. 저 사람은 우리 편 아니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에 천기정이 킥, 하고 웃으면서 얼른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회의실은 이제, 벌집을 들 쑤셔 놓은 격이 되었다. 이익헌은 한동안 그들이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도록 내버려두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회사를 떠나는 이유로 적당한 걸 저한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왜 떠나야 하는지 모르시는 분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내일 제가 알려드리죠. 그때가 되면 그 이유는 여러분이랑 바디 펌의 전 임직원이 동시에 알게 될 겁니다.”
그렇게 말을 해 놓고 이익헌은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지었다. 그 표정은, 나는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전부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말년에 교도소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집에 들어앉아 있는 편이 나을 거라는 정도로만 말씀을 드리죠.”
갑자기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런 이익헌의 모습은 그들에게 한없이 낯설었다. 순둥이. 우유부단. 결정장애. 현실순응. 그들이 알아왔던 이익헌은 그런 모습이었다.
지우는 여전히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을 굴리면서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살인자가, 그것도 연쇄 살인범이 기껏해야 배임이나 횡령을 저질렀을 사람들을 겁박하는 희한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가 확 불어버리면 어쩌려고 우리를 데리고 온 거지?'
지우는 그런 의문을 품었다.
'우리를 너무 믿고 있는 건가? 우리가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나? 그래도 이건 좀 심한데.'
천기정의 눈은 조금 더 날카롭게 빛났다. 천기정은 이익헌이 지난 밤에 그를 찾아와 어쭙잖은 사과를 하고 했던 말을 기억했다. 그러면서도 설마 이런 일을 계획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기에 천기정이 받은 충격도 상당했다.
***
지난 밤의 일이었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아 고심하던 천기정에게 이익헌이 찾아왔다.
클랜 A의 자산관리는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건 무슨. 냇가에 가서 조약돌을 주워오는 것도 아니고. 천기정은 저녁에 기진맥진해서 돌아오는 사람들이 건네주는 러프 스톤을 받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이게 얼마짜리인지에 대한 감도 점점 없어지는 중이었다.
1억짜리 5급 러프스톤은 하도 많이 만져봐서 그런가보다 했고 10억짜리 3급 러프 스톤을 처음 받았을 때도 나름대로 놀랐지만 거기에도 또 금세 무감각해져 있었는데 50억짜리 2급 러프스톤이 들어왔다.
“우와!”
솔직히 놀랐지만 놀라움이 지속되는 시간은 3분도 안 되는 것 같았다.
하긴. 임정이 그에게 클랜 A의 자산관리를 맡아달라고 하면서 50개가 넘는 2급 러프스톤을 맡겼을 때의 놀라움에 비하면 별 것 아닌 걸 수도 있다.
천기정은 클랜 A의 헌터들이 재테크에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러프 스톤을 매각하는 것도 귀찮아서 금고에 넣어두자는 헌터들에게 천기정은 그들의 자산관리사로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마음을 먹고 러프스톤을 팔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달러를 사들였다.
이익헌은 천기정과의 악연도 있고, 자기가 나서서 말을 하면 괜히 딴지를 걸고 나서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처음에는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 참지는 못했다. 그는 천기정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천기정은 거리낄 것이 없어서 그를 상대해 주었다.
“러프 스톤을 판 돈으로 달러를 사고 있다고 들었어요. 지금으로서는 나쁜 선택이 아니지만 이 판도가 바뀌면 그건 멍청한 선택으로 판명이 날 겁니다.”
“판도가 바뀌게 될 건가보죠?”
이익헌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천기정이 웃으면서 되물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래도 이익헌은 굴하지 않았다. 이 애송이가 애초에 자기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위인이 아니었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저도 똑같이 비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A급 헌터를 보유한 나라. 그 나라가 강대국입니다. 그리고 지금 미국에 두 명, 프랑스에 한 명이 있죠. 하지만 그 후에 A급 헌터가 나올 나라는 한국이 될 겁니다. 한 사람도 아니고 여러 명일 거예요.”
“……!”
천기정은 갑자기 이익헌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는 클랜 A에서 A급 헌터들이 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익헌이 말했다.
“A급 헌터가 되려면 B급은 돼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죠. 저 사람들이 B급이 될 때까지 얼마나 걸릴 거라고 생각합니까? 시간요? 그건 정말 무의미해요. 저 사람들이 뭉치면 괴수를 학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저 사람들은 2급 괴수를 크게 무서워하지 않아요. 그러다가 언젠가는 1급 괴수를 사냥하는 것도 성공할 거고 그렇게 되면 1급 괴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사라지겠죠.”
“한국이 최고의 강대국이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흐름이 그러니까요. 투자를 하려면 바디 펌이나 익스트림 헌터가 좋겠죠.”
“바디 펌요? 사심을 드러내는 겁니까?”
“사심요? 내가 왜요? 바디 펌보다는 익스트림 헌터가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지금은 기회와 시장이 모두 좋죠. 불행은 시장을 만들거든요. 1급 괴수가 휩쓸고 간 폐허를 보면서 사람들은 좋은 무기의 필요성을 생각할 겁니다. 자기가 사용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기를 사는 일반인들이 생긴 걸 알고 있습니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1급 괴수의 발 아래에서 무참히 살육당하는 것을 생생하게 지켜본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헌터용 무기들을 사들이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생각하면 헛된 짓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겠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그 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싶어하지 않았다. 부적을 사는 사람의 심정으로 무기를 사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괴수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구입하는 것이라 돈은 얼마든지 충당을 해왔다. 익스트림 헌터도 그런 이유로 잠깐 사이에 막대한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익스트림 헌터는 그동안 공격력을 증폭시키는데 한계에 묶여 있었어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기는 했지만 다른 나라가 찐따같이 군다고 우리나라도 그럴 필요는 없죠.”
이익헌이 말했다.
“그럼. 우리나라에는 방법이 있다는 말입니까?”
“있습니다.”
“있는데 그동안은 왜 익스트림 헌터가 공격 증폭률을 늘리지 않은 겁니까?”
“그걸 견딜 수 있는 괴수의 장기를 공급받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란 말입니까?”
“바디 펌이 물고를 터주면 됩니다.”
“……!”
“달러는 다시 팔고, 바디 펌과 익스트림 헌터의 지분을 소유하세요.”
이익헌이 말했다.
그는 시장을 읽고 분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장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조언에 토를 달 이유가 없었다. 솔직히 이익헌으로부터 그런 말을 듣고 있는 그 순간에 천기정의 모든 패러다임이 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한계를 스스로 설정하고 그 안에 갇혀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자기가 설정해 놨던 경계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A급 헌터는. 누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천기정이 물었다.
“캐츠 아이 스톤을 얻으면 A급 헌터가 될 수 있습니다. 이건 라미실한테서 직접 들은 얘기인데, 라미실이라고 1급 괴수를 못 잡고 도망친 A급 헌터가 있거든요. 그 놈이 라미실인데. 캐츠 아이 스톤을 얻고도 A급 헌터가 되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A급 헌터가 되지 못한 게 아니라 되지 않았다고 해야하겠군요. 미국에서 발견된 캐츠 아이 스톤은 모두 미국 정부에서 매입했다고 합니다. 헌터에게 사용하지 않은 캐츠 아이 스톤이 두 개 있다고 하더군요.”
“왜 헌터한테 바로 사용하지 않고요? 그랬다면 A급 헌터를 두 명 더 늘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천기정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안지우, 이태인, 김강현. 세 명의 헌터가 똑같은 공격력과 방어력을 가졌다고 하면 천기정씨는 누구의 등급을 올려주고 싶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히. 공격력이 셋 다 같다고 하면.”
천기정은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이익헌이 하려는 말을 알았던 것이다.
“가장 유능한 B급 헌터에게 기회를 주려는 거군요. 유능한 헌터가 A급 헌터가 될 수 있는 거군요. 그게 국가 차원에도 도움이 되는 거고.”
천기정이 말했다.
“캐츠 아이 스톤을 획득한 헌터들은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는 거죠. 굳이 헌터 생활을 계속하면서 레이드를 하고 돌아다니느니 캐츠 아이 스톤을 팔아 돈을 벌고 그걸로 여생을 평화롭게 보내자는 생각을 하는 게 더 영리한 생각일 수도 있고요.”
“그렇겠군요. 저라도 그렇게 할 것 같긴 합니다. 캐츠 아이 스톤이 얼마에 거래되는지는 모르지만 2급 러프스톤보다도 훨씬 더 비싼 가격이겠죠. 1급 러프 스톤 가격도 책정되지 않았지만 그 가격보다도 높을 거고요. 그만한 돈이라면 당장 모든 일을 다 그만두고 놀겠죠.”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레이드가 이루어졌는데 지금까지 나온 게 다섯 개라는 겁니다. 극악한 확률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거기에 기대야 돼요. 만약에 우리 힘으로 캐츠 아이 스톤을 구할 수 없다면 그때는 미국에서 캐츠 아이 스톤을 사는 것도 방법이 될 겁니다.”
“미국이 그걸 판다고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어쩔 수 없이 따를 조건을 내걸면 가능할 수도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