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5 / 0331 ----------------------------------------------
2. 사체 운반 헌터
“비쌀 텐데. 우선은 대여해서 써 보고 결정을 하죠.”
임정이 말했다.
“그러죠. 근데 왠지 나랑 잘 맞을 것 같아요.”
“제가 봤을 때 지우씨는 꽤나 팔랑귀인 것 같아요.”
“익스트림 팔랑귀죠.”
“그럴 줄 알았어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지우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런 거요. 이상하다는 생각 안 해 봤어요?”
“뭐가요?”
“괴수가 늪에 나타나고. 괴수의 체력이 딜러의 공격력만큼 감소하고. 레이더 입장 후에 24시간이 지나면 괴수의 체력이 리셋되고 치명상을 입혀도 회복되고. 왜 괴수한테는 일반 생명체에 적용되지 않는 시스템이 적용되는 걸까요. 아, 그리고 ‘적용’이라는 말. 나는 그게 가장 이상한 것 같아요. ‘적용’이 된다는 게.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 저렇게 하면 저렇게 된다 라고 하는 시스템의 많은 규칙들도 그렇고. 그런 걸 도대체 누가 정한 걸까요? 우리는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거죠?”
그 말에 임정이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내면에서 그동안 쉬지도 않고 떠오르던 질문을 지금, 타인이 타인의 목소리로 물어오고 있었다.
“그거 알아요? 지우씨는 나같아요. 가끔 그렇게 느껴져요.”
“우리한테는 공통점이 전혀 없잖아요. 전교 꼴찌가 어느날 갑자기 전교 1등이랑 짝이 된 것 같은 기분인데.”
“아직은 모르는 거잖아요.”
그리고 임정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말 들어본 적 있어요? ‘이미 심판의 날은 끝이 났고, 이 세상에 남겨진 우리는 아마게돈에 살고 있다.’ 라는 말.”
임정이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지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그럴리는 없을 것 같네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아마게돈이라면 나는 아직 혼자겠죠.”
지우가 말했다.
아직 임정을 뭐라고 지칭하는 게 좋을지 몰라서, 임정에 대해서 얘기를 할 경우가 생기면 목적어를 생략해서 말하곤 했다.
“나를 만날 수 있어서 여기가 천국 같다는 거예요?”
“아니. 천국이라고 하는 건 너무 나간 거고.”
지우가 깔깔거리고 웃는 동안 임정도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경험치는 못 얻었지만 밥 사줄게요.”
지우가 말했다.
“내일 일이 있어서 안 돼요.”
지금 밥을 먹자는 건데 내일 일이 있는 거랑 지금 밥 먹는 게 무슨 상관인지 그 말이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가보다고 생각하고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우의 오피스텔에 이를 때까지 두 사람은 거의 쉬지도 않고 떠들어댔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 또 했는데도 아쉬움이 남는지, 지우가 내릴 때가 되었을 때 임정은 자기 전에 전화를 하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키스를 한 날은 어떻게 하고 헤어지는 건지 몰라서 망설이다가 지우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임정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었다. 웃는 모습으로 임정이 떠난 후에 지우는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굉장한 하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간 지우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씻을 정신도 없이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어버렸다.
그렇게 죽은 듯이 열 네 시간을 자고 일어났을 때는 시간을 도둑맞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게라도 일어난 것은 강현의 전화 덕이었다.
-형. 오늘 무기 보러 가기로 했잖아요. '익스트림 헌터' 매장에서 만나죠. 어차피 거기로 가야 되니까요.”
“그래. 그러자.”
전에 차크라를 바닥까지 쓰고 났을 때 강현이 어땠었는지를 기억하고 있던 지우는 강현의 쌩쌩한 모습을 보고 놀랐다.
“겨우 겨우 기어나올 줄 알았더니 제법 쌩쌩하네?”
지우가 말하자 강현은 흐뭇해하면서 웃음을 가득 지었다.
“그동안 훈련을 한 효과가 나타나기는 하는 모양이예요. 어제 돌아갔을 때는 진짜 죽을 것 같더니 아침에 일어나니까 움직일만 하더라고요.”
“다행이네.”
태인은 나오지 못했다.
태인의 누나가 웬 신문기자와 갑자기 열애를 하더니 느닷없이 가족 상견례를 하기로 약속을 잡아버려서 거기에 가야 했다는 것이다.
“지우 형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 누나?”
강현이 지우에게 물었다.
"그러게."
지우도 약간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태인의 누나가 아니었다면 임정과 잘 될 수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고마운 마음까지도 갖게 되었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익스트림 헌터’에는 두 사람만이 가게 되었다.
이태인은 좋은 도끼가 있으면 꼭 봐 달라고 거듭 부탁을 했다.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면 사진 찍어서 보내주면 고맙고.]
이태인은 구체적인 바람을 문자로 적어 보내면서 부담을 주었다.
그래서 지우와 강현은, 도끼 알아보기, 미지의 헌터가 사용하던 단검 알아보기, 크리티컬 훅과 주 무기로 쓸 적당한 검 알아보기라는 미션을 가지고 ‘익스트림 헌터’ 매장에 올라갔다.
불과 몇 달 전에, 김인아를 만나러 백화점으로 가면서 이곳을 지나가던 기억이 나서 지우는 감회가 더욱 새로웠다.
매장으로 들어가는 헌터들을 보면서 부러워했던 게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었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았다.
***
아이보리 계열의 은은한 가죽으로 장식된 실내에, 고급스런 유니폼을 입은 남자 직원들이 서서 안내를 돕고 있었다. 커다란 샹들리에가 '익스트림 헌터' 매장의 바닥과 벽에 색색의 빛을 뿌렸다. 선아영이 매장에 내려갔을 때 매장은 무기와 장비를 보려는 헌터들로 북적였다.
아영을 발견한 직원들이 허리를 숙여 아영에게 인사를 했다. 아영은 친근한 웃음으로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면서 인사를 받아주었다.
스물 아홉 살의 선아영은 ‘익스트림 헌터’라는 제국을 다스리는 여황이었다.
선아영의 아버지는 노련한 탱커였고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공격대를 꾸려서 2,3급 늪을 공략하고 다녔다. 아버지가 갑자기 병원에 실려갔을 때 아영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의사는 아영에게 설명을 하려고 애썼지만 사실 의사도 아영의 아버지에게 일어난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영의 아버지는 거리에서 쓰러져 있다가 그를 우연히 발견한 사람에 의해서 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아영의 아버지는 장기가 모두 으깨져 있었다. 집도의와 스탭들이 수술을 강행했지만 아영의 아버지는 끝내 깨어나지 못한 채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혼자 남겨진 아영에게는 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재산이 있었다. 아영이 ‘익스트림 헌터’를 생각해낸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상처들이 도저히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처가 아닌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아영은, 아버지가 레이드를 하면서 얻었던 상처들이 결국 아버지의 발목을 잡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에게는 더 막강한 보호장비가 필요했던 거라는 생각을 한 시도 지울 수가 없었다.
‘익스트림 헌터’가 생기기 전에 '영화사’라는 회사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아영은 헌터들에게 더 좋은 장비와 무기를 제공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투적으로, 한편으로는 강박적일만큼 장비와 무기 개발에 힘을 썼다. 그렇게 ‘익스트림 헌터’를 세웠다.
지상 15층짜리 건물의 각 층에 아이템별로 진열이 돼 있었고 각 층이 거의 언제나 성황을 이루었다.
대여가 주를 이루었지만 단기로 대여를 해 보고 아예 구매를 하기로 결정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세계적으로 괴수의 사체로 만든 장비와 무기 시장은 빠른 성장을 보여왔지만 사우디 왕족이 소유한 업체의 독점 시장으로 점점 굳어가는 형국이었다. 그런 와중에 아영이 한국에서‘익스트림 헌터’를 지속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장비와 무기를 대여하면서 틈새 공략에 성공을 한 면이 컸다.
위험부담은 있었다. 값비싼 무기의 경우에는 무기 하나에 3천억을 넘어가는 것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 무기를 대여해 갔다가 레이드 도중에 사망한 것으로 처리한 후에 잠적하는 헌터가 나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리스크를 혼자서 감당하는 것은 아무래도 벅차서 '익스트림 헌터'에서는 보험금 10조의 보험을 들어 위험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가는 보험료만 해도 한달에 수억원에 육박했지만 그것을 아깝다고 볼 수가 없었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아직까지는 아영을 배신한 헌터가 나타나지 않았고 아영의 사업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사장님.”
가까이에 있던 직원이 나직한 목소리로 아영을 불렀다. 남의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목소리에 아영이 고개를 들자 그가 조용히 눈짓을 했다.
“치안대장이 또 왔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편두통이 도졌다.
자신은 관심이 없다는 뜻을 아영이 아무리 명백하게 밝혀도 지치지도 않고 아영의 매장을 문턱이 닳게 찾아오는 것이다.
아영이 고개를 돌리자, 이미 손쓰기도 어려울 정도로 가까이에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치안대원 임재욱이었다.
아영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익스트림 헌터’의 대표였다.
치안대장의 신원이 비밀에 감춰져있다는 것 정도는 아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임재욱은 치안대에 몇 안 되는 B급 헌터였고 가끔 헌터 협회의 협회장과 동등한 입장에서 허물없이 전화 통화를 하기도 했다. 임재욱이 바로 그 비밀스런 존재인 치안대장이라는 말이 처음에 누구의 입에서 나온 건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헌터 협회와 치안대의 사정에 밝은 사람들은 임재욱이 치안대장이라고 생각해 오고 있었다. 그것은 임재욱의 의도대로 된 결과였다. 누구도 임재욱에게, 당신이 치안대장이 맞냐고 물어본 적은 없었다. 임재욱의 면전에서 감히 그런 질문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 두 사람이 치안대장에 대해서 추측을 했고 자기들끼리 비밀스럽게 정보를 공유했다.
‘저 사람이 치안대장이야.’
그런 은밀한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임재욱은 자신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것을 즐겼다.
임재욱은 선아영에게 공을 들였다.
그는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해서 아내와 아들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영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에 선아영은 임재욱이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존재로 느껴졌지만 갈수록 사정이 변했다. B급 헌터가 되고 치안대원이 되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치안대장으로 믿게 하는데 성공을 하자 임재욱은 점점 자신감이 넘쳤다. 임재욱은 오래전부터 재혼을 심각하게 생각해오고 있었다. 예뻤던 아내는 나이가 들면서 그저 그런 여자로 변해갔다. 아내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 것은 꽤나 오래 되었기에 임재욱은 자기가 내세울 수 있는 조건으로 마음에 드는 다른 여자를 찾아보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치안대의 업무로 선아영을 만나게 된 이후로는 선아영을 향한 마음이 굳어졌다.
치안대에서는 매번 ‘익스트림 헌터’를 통해서 장비와 무기를 구입했다. 그 물량은 절대로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임재욱은 그 일을 스스로 나서서 도맡아 해 왔다. 자기 돈을 들이지 않고 선아영에게 선심을 쓰듯 할 수도 있었고 권력을 누리는 맛도 있었다.
처음에는 눈에 차는 여자가 많더니 선아영을 본 이후로는 눈에 들어오는 여자가 없었다. 선아영을 갖고 싶다는 생각은 치안대장이 되고 싶다는 욕망에 버금갈 정도로 뜨겁게 끓어올랐다. 그래서 이렇게 밤낮없이 시간만 나면 ‘익스트림 헌터’로 별별 용무를 다 만들어 출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선아영의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