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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었을 땐 조금 당황하였으나 화운의 질문은 오히려 이한의 생각을 조금 더 선명하게 만들어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여도 이한은 처음 보는 것도 아닌 연화운의 모든 것이 왜 이제 와 이리도 생경하고 새삼스러운가 싶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말을 꺼내지 못하는 화운을 두고 이한이 말을 이었다.
“네 손이 작아 좋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화운의 손을 쥐고 있는 이한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그냥… 나는 그냥….”
“…….”
“네가 다른 사람이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너와 나의 관계가 조금 달라졌으니 모든 것이 새롭게 눈에 들어와 그런 것이지.”
너와 나의 관계가 조금 달라졌으니.
이한은 아주 무겁게 말을 고르고 골라 그 문장을 겨우 만들어냈다. 화운과 자신의 관계가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것은 여전히 이한에게도 정의하기 곤란한 문제였으나 어찌 되었든 연화운이 변한 뒤로 그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 역시 달라졌음을 이제 와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한의 엄지손가락이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화운의 손등을 문질렀다.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감각이 지나치게 저릿하여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이한이 말했다.
“네 손이 컸다면 커서 신기하다 했을 것이고….”
무엇이든 그랬을 터다. 돌아보면 연화운이 폐하의 사람으로 다시 살고 싶다고 말한 이후로 이한은 줄곧 화운의 모든 것을 새롭게 보고 있었다.
“네 손이 거칠었다면 그것 또한 지금처럼 보았을 것이니,”
화운이 어여뻐서. 타고난 미색을 가진 이라서 다시 본 것이 아니라 그가 이토록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어서. 그래서 그의 얼굴을, 손을, 눈매와 입술을 새삼스럽게 눈에 담게 된 것뿐이었다.
“네가 지금의 너인 이상 어떤 모습인들 보기 싫다고 하였을까.”
이한의 목소리가 보름이 떠오른 날의 달빛처럼 화운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정말 신기하게도 화운은 황제의 손 안에 잡힌, 희고 마른 손 위에 덧그려지는 하운의 상처를 본다. 지금보다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거친 손이 화운의 눈동자 안에서 이한의 손 안에 잡혀 있었다. 몹시도 기묘한 감각이었다.
괜히 마음속 어딘가가 간질거려 화운이 저도 모르게 이한에게 잡힌 손을 꼬물거리자 이한 역시 저의 손바닥을 간질거리는 느낌에 명치 끝 어딘가가 찌릿해져 그제야 손을 놓고 흠흠, 헛기침을 했다. 어색한 기운이 순식간에 두 사람을 휘둘러 방 안을 채웠다. 화운은 다시 주먹을 쥐어 저의 손을 소매 안으로 감추었고 괜히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던 이한은 문득 어둠이 더 깊어진 창밖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화운에게 말했다.
“피곤하지 않으냐. 약 기운이 달아나기 전에 자는 것이 좋을 텐데….”
“아…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폐하께오서도 이만 돌아가 쉬셔야지요.”
사실 화운은 온 감각이 온통 이한에게 쏠려 등이 아픈 것도 잊고 있었다. 동시에 이한은 화운과 이리 마주 앉아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좋아 지난밤에도 잠을 설쳤으나 피곤한 줄을 모르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서로의 상태야 정확하게 알 길이 없으니 상대를 위해서는 이만 물러나 주는 것이 옳은 일이리라, 두 사람은 모두 그리 생각을 하였다.
그때,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망설이던 이한이 이내 화운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잠을 잘 자야 낫는 것도 빨리 낫는 법이다. 자리에 눕혀줄 테니 이리 내게… 기대 보아라.”
“아, 아닙니다, 폐하. 제가 혼자! 혼자 누울 수 있습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불편한 자신을 위해 손수 안아 자리에 눕혀 주려는 이한의 행동에 화운이 화들짝 놀라 격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환자라고 한들 존귀하신 폐하께서 자신의 수발을 드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화운의 격렬한 거부에 오히려 오기가 생긴 이한은 스읍, 하고 입소리를 내어 화운을 단속하고는 두 팔을 뻗어 그를 안고 천천히 저의 품에 기대게 하였다.
“가만히. 어서.”
화운의 귓가에 이한의 입술이 다가왔다. 이한의 목소리는 아주 작고 낮게 속삭이고 있었으나, 어쩐지 그 목소리가 더더욱 무겁게 자신을 옭아매는 것 같아 화운은 그저 숨을 참고는 이한이 이끄는 대로 제 몸을 맡겼다.
화운을 자신의 품에 안고선 한 손으로 허리를 끌어안아 몸이 흔들리지 않게 고정한 이한은 다른 손으로 낮게 세워두었던 베개를 다시 바닥에 평평하게 놓았다. 그리고 저의 몸을 함께 천천히 기울여 품에 있는 화운을 아주 조심스럽게 눕혔다.
상처가 난 한쪽 등이 너무 닿지 않도록 천천히, 아주 조금 몸을 기울여서, 조심스럽게.
오로지 그것만 신경 쓰며 움직이던 이한은 미처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누운 화운의 몸을 자신이 덮쳐 내린 듯한 자세로 화운의 양옆으로 팔을 짚어 그를 내려다보게 되는 이런 상황이 될 줄은 정말로 몰랐다.
“…….”
“…….”
시선이 부딪히는 거리는 너무나도 가깝고, 코끝으로 흩어지는 숨이 너무나도 생생하여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한이 조금만, 아주 조금만 고개를 숙이거나 몸을 내리면 그의 입술이 화운의 얼굴 어디에라도 닿을 수 있을 만큼의 거리였다.
놀라고 민망하여 상황을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입을 열어 말을 하면 이 순간이 깨질까 봐 두렵기도 하여 누구도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저 흔들리는 두 사람의 시선만이 허공에 어지럽게 얽힐 따름이었다.
바닥에 흐트러진 화운의 긴 머리카락이 그 바닥을 짚은 이한의 손에 닿았다. 별것도 아닌 그 접촉에도 이한은 이상하게 손끝으로부터 불씨가 일어나 제 마음까지 번져오는 것만 같아 자꾸만 몸이 더워졌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몸을 굽히면.
모르는 척. 몰랐던 척. 실수인 척 그리 고개를 한 번 내리면.
그러면 아마도 언제부터인가 자꾸만 저의 시선을 잡아채 마음을 요란하게 만들었던 그 입술에 닿을 수도 있을 터인데.
이한의 몸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고 그렇게 두 입술이 마주 닿기 직전, 갑자기 번뜩 정신이 든 이한이 순간적으로 고개를 살짝 들었다. 이한의 입술은 곧 화운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
열이 올라 뜨거운 체온이 입술을 통해 전해졌다. 누군가의 살결에 입술을 댄 것이 처음도 아닌데 닿은 곳으로부터 생경한 감각이 터져 나와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마치 몸 안에서 폭죽이 펑펑 터지는 것 같아 이한은 아주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화운에게서 물러났다. 심장이 너무나도 큰 소리로 쿵쿵 뛰고 있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화운의 반응이 어떠한지는 더더욱 살필 엄두가 나지 않아 이한은 그저 어린아이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이만… 이만 가 볼 테니 너는 인사할 생각 말고 어서 잠이나 자라!”
“폐…….”
“아무 말도 말고! 얼른 자!”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황제는 경박하게 뒷걸음질을 치며 급기야는 화운에게 손가락질을 하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도 혹시나 화운이 자신을 배웅하려 들까 조바심이 났기 때문이다.
이마에 입을 맞춘 것도 놀라 나자빠질 일이건만 그보다 더 심한 것은 자신이 사실 그의 입술을 취하고 싶었다는 사실이었다. 모르는 척 그 입술을 머금지 않고 고개를 들어버린 것이 아쉽고 후회가 되었다. 그것을 인정하기가 싫어 이한은 화운을 더 보지 못하고 재빨리 그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폐하, 어찌 그러십니까.”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쫓겨나듯 나온 이한을 보고 밖에서 기다리던 오 태감이 다가와 물었으나 이한은 그저 고개를 세게 젓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손을 들어 화운의 이마에 닿았던 입술을 가만히 매만져 보았다. 입술에도, 손끝에도 심장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마치 온몸이 거대한 북이라도 되는 것처럼 온통 쿵쿵거려 이제는 이 박동이 정말로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하늘과 땅이 울려대는 것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이게 무어라고. 입술 좀 닿은 것이 황제와 후궁 사이에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한은 거기에 서서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며 그리 자신을 진정시킨다.
연화운이 아파서 마음이 더욱 약해진 것이다. 그가 숙비를 대신해 다치는 바람에 고통을 겪고 있으니 그게 가련하고 안쓰러워서, 황제가 되어 저의 후궁에 입을 맞추어 위로를 해 줄 수도 있는 일이다. 이한은 자꾸만 그렇게 선명하게 울려오는 저의 심장 박동을 모른 척하기로 했다.
깨닫는다면. 알아차린다면 결코 좌시할 수 없을 감정이 겁이 나서. 두려워서. 깨달으면 혹시라도 잃게 될까 봐 그게 무서워서. 다시 한 번 고개를 가볍게 저어버린 이한이 오 태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안정전으로 돌아가자.”
여전히 열기가 식지 않은 사내의 얼굴이었다.
화운은 두 손을 자신의 가슴 앞에 꼭 마주 잡은 채 천장을 보고 누워 숨만 할딱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것이 꿈인 것만 같았다.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이 꿈에서 깨어버릴까 봐 겁이 나 숨을 한 번 쉬는 것조차도 너무나도 조심스러웠다. 꿈이라면. 정말 이것이 자신의 꿈이라면 화운은 아주 오래오래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등의 고통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한 번 감고 뜰 때마다 앞이 기묘한 모양으로 일그러졌는데 이것이 꿈이기 때문인지, 약 기운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제가 너무 놀랐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황제의 입술의 이마에 닿았다. 부드럽고 따스한 그분의 얇은 살결이 저의 피부 위로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