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자란은 황후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곧 황제의 부인이 되고 싶었다는 말은 아니다. 자란은 좋은 지아비를 만나 사랑받는 삶 같은 건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다만 자란은 여인으로 태어나 오를 수 있다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보고 싶다는 포부가 있었을 뿐이다.
황제가 될 수 있었다면 황제가 되고자 하였을지도 몰랐다. 자란은 높은 곳에 앉아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을 굽어 살피고 싶었다. 자신의 현명함이 나라를 옳은 곳으로 이끄는 힘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란의 아비는 황후가 된다고 하여 너의 뜻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건 결코 아니라고, 오히려 그 자리가 네게 더더욱 큰 족쇄가 될 수도 있다고 그를 설득하였으나 자란은 그조차 자신이 뛰어넘어 볼 만한 일이라고 여겼다.
자란이 원하는 건 황후로서 황제와 함께 나라를 올바른 길로 끌어가는 것이었지 후궁들과 사사로이 황제의 총애를 다투고 얄팍한 암투에 명예를 내거는 그러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숙비가 된 비영이 처음 입궁하던 날, 그에게 전에 없던 내명부를 만들어 보자 하였던 건 황제보다는 자란 그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렇게 오로지 자신의 뜻으로 왕부에 들어와 황실의 일원이 되고, 바라던 황후가 되어 여기에 다다른 지금. 자란은 과연 그 어린 날 용감무쌍하게 내디뎠던 첫걸음을 후회하고 있을까.
“아무래도 내가 운화궁으로 가 보아야겠구나.”
정자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자란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연빈이 몸을 추스르려면 며칠 시일이 더 걸릴 터인데 그때까지 숙비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층 더 짙어진 밤의 공기가 수화원을 돌아 나가는 황후의 발자국 위에 어렸다. 지금껏 걸어온 걸음걸음을 후회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답은 오로지 자란의 마음속에만 있었다.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는 예를 면할 테니 무리해서 인사하려 하지 말거라.”
이한은 고집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제게 예를 올리려던 화운을 서둘러 붙들고선 다시 침대에 앉힌 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화운의 반박은 듣지 않겠다는 듯 재빨리 말을 잇는다.
“아픈 곳은 조금 어떠하냐.”
“…폐하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 이제 거의 다 나았습니다.”
“뻔한 거짓말을 잘도 하는구나.”
이한의 대답에 다소 놀란 화운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선택한 어휘와는 달리 다정한 표정을 하고 있는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그윽하게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감추지 않은 염려의 감정이 고스란히 보여 화운은 고개를 숙였다. 상처 때문에 몸에 열이 오른 탓인가,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때, 커다란 손이 화운의 이마를 가만히 덮어왔다. 이전의 기억이 손길을 타고 흘러들어와 화운의 몸이 덜컥 긴장으로 굳어졌으나 이한은 그것을 통증 때문이라고 생각한 건지 급격히 어두워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전히 열이 높질 않느냐. 편히 기대어 앉아라.”
마치 체온을 살피는 의원이라도 된 것처럼 이한의 손이 화운의 이마에서 내려와 뺨을 다시 한 번 감싸더니 이내 상처에 닿지 않게 베개를 적당히 세우곤 화운의 몸을 안아 천천히 기대어 앉게 해 주었다.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챙김을 받기만 하는 황제의 것이라기엔 놀랍도록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자세를 편하게 고쳐 주기 위해 이한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화운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내려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속이 울렁거리고 숨이 가빠졌다. 아마도 약이 너무 독한 모양이라고, 화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사이 한 걸음 더 화운에게 가까이 다가와 앉은 이한은 화운의 파리한 안색을 바라보며 눈꼬리를 한껏 늘어트린다. 하루 만에 좋아질 리가 없는 상처인 걸 몰랐던 것도 아닌데 여전히 이리 힘들어하는 화운의 모습을 보자니 속이 뒤틀리듯 아파왔다.
한숨처럼 숨을 한 번 깊이 내쉰 이한이 꼭 비에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곁에 있으면 오히려 더 편히 쉬지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궁금해서 아니 올 수가 없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폐하…. 폐하께서 이리 주시는 관심이 제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것을요….”
아진이 말한 것처럼 독한 약의 기운 때문인지 화운은 평소보다 조금 더 느리고 다소 어눌한 느낌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 말투가 묘하게 귀여워 황제는 속으로 자신을 자꾸만 다그친다. 이런 상황에 화운을 보고 귀엽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이 정말로 미친 것만 같았다. 허나 지금의 연화운 앞에서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좀처럼 의지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 이한의 혓바닥은 이번에도 제멋대로 말을 내뱉고 만다.
“허면 너도 내가 곁에 있는 것이 좋으냐?”
“…예?”
순간 정적이 흐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화운이 눈을 크게 깜빡거리며 다시 이한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자신의 혓바닥이 무슨 헛소리를 토해낸 건지 깨달은 이한은 자신의 뺨을 후려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으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이한에게는 그보다 더 강한 충동이, 열망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터무니없는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낸 김에 이한은 대답을 듣고 싶었다. 이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내가 있으면 너는 예를 차려야 하고, 긴장할 것이고, 아픈 몸을 하고서도 편안하게 쉴 수 없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있는 것이 더 좋으냐고, 그리 묻고 있는 것이다.”
“…….”
“내가… 계속 곁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느냐….”
답지 않게 절로 말끝이 흐려졌다. 천자의 말은 언제나 하늘의 뜻과도 같았고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으며 한 마디, 한 마디가 곧 황명으로서 강한 힘을 가지니 이한은 언제 어느 때고, 누구의 앞에서도 이리 어물쩍 말끝을 흐릴 일이 없었다.
그런 황제가 한낱 후궁 앞에서 우물쭈물 말을 망설였다. 그의 속마음이 궁금하면서도 동시에 두렵기도 하여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연화운과 자신의 관계란 관계라고 칭하기도 무엇할 만큼 엉망인 날들이 훨씬 더 많았거늘 어째서 이리 허무맹랑한 질문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저는… 저는…….”
그런데도 화운이 입을 열었을 때 이한은 긴장했다. 저도 모르게 제 옷자락을 두 주먹 안에 힘을 주어 쥐고 있자니, 화운은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저를 저어하시지 않는다면….”
“…….”
“저는… 늘 폐하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생기가 없던 화운의 뺨이 연한 붉은빛으로 물들고, 지엄한 황제 폐하의 입꼬리가 경박하게 흔들리던 순간이었다.
“너는 손이 어찌 이리 작으냐?”
이한의 말에 화운이 황급히 주먹을 쥐고 소매 안으로 저의 손을 숨겼다.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러자 가벼운 웃음을 터트린 이한이 말을 덧붙인다.
“놀리려고 한 말이 아니라 신기해서 그랬다. 나와는 이리 차이가 나니….”
그러면서 이한이 소매 안으로 숨은 화운의 손을 은근슬쩍 다시 잡아 펼치더니 또 은근슬쩍 제 손바닥 위에 화운의 손을 놓아둔다. 희고 가느다란 화운의 손은 턱없이 작아 이한이 감싸 쥐면 거의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연화운의 손을 이제 와 처음 본 것도 아니건만 이한은 요즘 들어 부쩍 새삼스러운 것들이 많아졌다.
“세게 쥐면 부러질 것 같질 않아.”
“그 정도는 아닙니다, 폐하.”
“아니긴 무엇이 아니냐. 이것 보아라. 내가 쥐면 네 손은 보이지도 않는다.”
민망한 기분이 든 화운이 반박하자 이한이 지지 않고 대꾸를 하며 또, 또 은근슬쩍 화운의 손을 잡아온다. 이한이 말했던 대로 사내 치고도 커다란 이한의 손에 파묻힌 화운의 손은 손등만 아주 조금 겉으로 보일 정도였다.
허나 그 순간 화운은 자신의 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더없이 가녀리고 자그마한 연빈 연화운의 손이 아닌, 본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하운의 손을.
하운의 손에는 흉터가 많았다. 어릴 때부터 길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자란 데다가 검을 들고 검술을 배우기까지 하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남들에 비해 크다고 할 만한 정도는 물론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연화운처럼 세게 쥐면 부서질 것처럼 작고 연약한 손은 결코 아니었다.
어쩌면 약 때문에 정신이 또렷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제 손이 조금 더 크고 거칠었다면, 폐하께서 보시기에 좋지 않으셨겠지요.”
불쑥, 그런 말을 황제의 앞에 내뱉어버린 것은.
이한이 다소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화운을 바라보았으나 그가 놀랐다고 한들 화운보다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연화운이 아닌 하운의 모습은 후궁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모습인 건 당연한 일인데 굳이 그것을 폐하께 확인받으려 드는 연유가 무엇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어차피 폐하께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을. 그의 손이 연화운의 손이든, 하운의 손이든 폐하께는 아무런 감흥도 줄 수 없을 게 뻔한 것을. 도대체 자신은 무슨 대답을 바라고 이런 터무니없는 질문을 한 것일까. 순식간에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화운이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니, 그러니까 폐하, 제 말은…!”
“손 크기가 중요할 일이 무엇이더냐.”
하지만 화운보다 먼저 침착한 표정을 되찾은 이한이 더듬거리는 화운의 말을 끊으며 대답했다.
“내가 이제 와 손이 작다고 너와 이리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 같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