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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되새기자 명치가 바닥으로 쑤욱 내려앉는 것처럼 생경한 고통이 느껴져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것을 과연 고통이라 명명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어째서. 폐하께서는 어째서 나 같은 것에게 이토록 과분한 것을 주신 것인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떠올리고 싶었으나 짐작 가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마마, 불을 꺼드릴게요.”
그때 아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놀라 화운은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아진을 바라보았다. 그러해도 세상이 으스러지지 않는 걸 보니 또 이것이 정말 꿈이 아닌 현실이었나 싶어 화운은 안도와 불안을 동시에 느껴야만 했다. 꿈이면 서러울 만큼 아쉽고, 현실이라면 감히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폐하께서 급히 가시던데… 마마께 또 무어라 하신 건 아니시죠?”
이리저리 구겨진 화운의 이불을 정리하며 아진이 물었다. 아진 입장에서는 저에게 가능 여부를 물었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침실 안으로 들어갔던 폐하께서 갑자기 도망치듯 후다닥 나와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돌아가시니, 설마 아픈 사람에게 그랬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저의 주인과 무언가 틀어졌을까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진의 물음을 들은 화운은 그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그런 거. 그냥 나를 빨리 쉬게… 쉬게 해 주시려고 가신 거야.”
말을 하는데 목소리는 물론이고 자꾸만 손이 떨려서 화운은 두 손으로 가슴을 덮은 이불자락을 꼬옥 쥐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몸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혹시나 이렇게 떨고 있는 걸 아진에게 들킬까 봐 아예 두 손을 이불 속으로 집어넣고 있으려니 촛불을 하나만 남기고 전부 꺼 방을 어둡게 만들어 준 아진이 그제야 곁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그럼 마마, 제가 바로 앞에 있을 테니까 혹시라도 통증이 심해지시면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아셨죠?”
“응. 으응, 그럴게. 걱정하지 마.”
“조금이라도 푹 주무실 수 있게 수면향을 피워드릴게요.”
보통이라면 괜찮으니 불편하게 앞을 지키지 말고 가서 편히 자라고 말하였을 화운이지만 오늘은 그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방이 어두워져서인지 다행히 화운의 얼굴색을 제대로 보지 못한 아진은 향을 피우고 다시 침대로 되돌아와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이불을 잘 덮어 준다. 그리고 아진은 화운의 이마를 짚어 체온을 한 번 확인한 후 아프시면 자신을 꼭 불러야 한다고 거듭 다짐을 받아내고 나서야 침실을 나섰다.
어두워진 방에 화운이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제야 이불 속에 꼭꼭 감추었던 손을 꺼내 자신의 이마를 가만히 매만져 본다. 황제의 입술이 닿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황제와 후궁이라는 자리를 따지고 본다면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닐 것이다. 부부 사이에 서로 입을 맞추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이듯 황제와 후궁도 본래 그렇게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관계였으니까. 그러니까 황제는 그저 다친 후궁을 위로해 주려 평범하게 다정한 행위를 해 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이 화운에게는 달랐다. 화운에게는 흔하고 평범한, 그런 일이 아니었다. 화운에게는 오늘의 입맞춤이 황제에게 받은 첫 번째 입맞춤이었고, 그의 일생에 처음이기도 하였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심지어 부모에게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친밀한 접촉이었다는 말이다.
숨이 차올랐다. 가만히 누워 있는데도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심장이 정말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어댔는데 한 번도 이러한 일을 겪어 본 적이 없어 화운은 제가 느끼는 이 과하게 거대하고 격렬한 감정이 단지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본 친밀함 때문인지, 아니면 그 대상이 오로지 황제이기 때문인지 알 수 없어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화운은 불현듯 황제의 손에 잡혀 있던 저의 손을 떠올렸다. 하얗고 자그마한 연화운의 손. 허나 폐하께서 생김새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그리 말씀해 주시기도 하였던 손. 그래서 흉터가 남아 있는 그런 거친 손으로 상상해 보기도 하였던.
그러하면 얼굴은 어떠할까.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연화운의 얼굴처럼 이렇게 곱고 어여쁜 얼굴이 아니어도. 그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는 미색을 지닌 이런 얼굴이 아니어도. 그래도 폐하께서는 이 입맞춤을 두고 너의 생김새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리 말씀하여 주실까.
그런 생각을 하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가라앉았다. 찬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듯 온몸에 들끓던 열기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사람의 얼굴과 손은 엄연히 그 중요도가 달랐다. 얼굴이 완전히 달라지는 건 손에 흉터가 늘거나, 크기가 조금 더 커지는 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일이었다.
본래의 하운이 어찌 생겼는지 아신다면. 황제께서 그 얼굴을 아신다면.
그러하면 이 밤의 그 입맞춤을 혹여나 소름끼쳐하며 불쾌하게 여기시지는 않을까.
화운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쿵쿵 뛰어대던 심장은 조용해진 지 오래였다. 지금 제가 느끼는 고통이 이제 와 느껴지는 등의 상처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딘가에서 기인한 것인지. 화운은 굳이 그것을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죽음은 마음에 사무쳐 서럽겠으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삶 역시 서럽지 아니하다, 그리 말할 수는 없음을.
연화운의 죽음을 누구도 알 수 없어 진정으로 그를 애도할 이가 없듯이, 하운이 살아 있음을 아는 이가 없어 그의 존재를 인정해 줄 이 역시 넓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음을.
스스로 과분한 삶을 살고 있다 여기는 화운은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아 홀로 앉아 심란한 마음을 달래려 자수를 놓고 있던 숙진은 외마디 신음을 흘리며 바늘을 쥐고 있는 손을 놓았다. 바늘에 찔린 손가락 끝에서 방울져 흘러나온 피가 고운 비단을 적셔 더럽혔다. 거의 한평생 자수를 놓았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숙진이 바늘에 손을 찔리는 건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바느질을 하는 내내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숙진은 내도록 저의 아들, 화운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화운이 크게 다쳤다고 하였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또다시 다치기까지 하다니, 그것만으로도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어미로서는 마음이 쓰여 심란할 수밖에 없는 일이건만 주원으로부터 전해들은 일의 전말은 숙진의 마음을 더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화운이 타인을, 그것도 평소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하였던 숙비를 감싸다가 대신 상처를 입었단다. 그 말을 전해 준 이가 황제 폐하가 아니었다면 숙진은 그토록 터무니없는 소문 따위 절대로 믿지 않았을 것이다.
숙진은 제 아들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는 어미로서 아들을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었으나, 그의 성격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독해져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화운은 설령 제 눈앞에서 아비나 어미가 위험에 빠져도 그 자신의 목숨을 대신 걸어 살릴 아이가 아니었다.
“…….”
피가 묻어 이미 망가진 비단자락을 손에 쥔 채 숙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에 빠진 후 그 아이가 기억을 잃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지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사실 숙진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하고 있었다. 숙진은 저의 아들이 황제의 관심을 얻고 싶어 거짓을 꾸미고 있거나, 설령 정말 기억을 전부 잃어 본래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한들 머지않아 돌아올 거라 여겼다.
그런데 하물며 숙비를. 황제의 다른 여인을 위하여 저의 몸을 내던졌다니.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는 일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이를 감쌌다니.
어릴 적 말을 듣지 않는다며 작은 강아지를 무자비하게 차버리던 아들의 모습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숙진으로서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화운이 물에 빠진 이후로 도대체 그에게 무슨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인지 어미가 되어 곁에서 살펴볼 수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 아들이 있는 황궁은 이토록 멀기만 하고 아비는 무정하여 그를 돌아볼 생각을 하질 않으니.
천 개의 바늘이 심장을 찌르는 듯하여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 같은 건 느낄 틈조차 없는 숙진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마마!’
화운은 거기에 서서 환한 얼굴로 웃으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아진의 얼굴을 보았다. 덩달아 미소가 흘러나와 마찬가지로 웃으며 아진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는데 무슨 일인지 아진은 마치 화운을 보지 못한 것처럼 그대로 그를 지나쳤다.
‘아진…?’
당황한 화운이 자신을 지나치는 아진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진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걸음을 계속 옮겼다. 나를 부르지 않았던가. 분명 마마, 하고 나를 불렀던 것 같은데. 화운이 그런 생각을 하며 의아한 얼굴로 시선을 돌리는데 이번에는 저만치 또 한 명의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황제였다.
‘폐하!’
화운은 저도 모르게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황제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다. 그리 하려고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얼굴을 보는 순간 너무 반가워 절로 입이 열리고 발걸음이 움직였다. 그런 화운에게 호응을 해 주는 듯 다가오는 황제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리고 이내 ‘연빈.’ 하고 그 역시 화운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