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
155화
청운은 오전 마지막 경기가 끝나기 전에 돌아왔다.
제갈신기와 여러 가지로 조율할 문제가 남았지만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
남은 건 위염천이 말한 이들의 감시였다. 그 부분은 제갈신기가 맡기로 했다. 덕분에 청운은 홀가분한 상태였다.
오후 예선이 시작되자, 청운은 혈황과 함께 비무를 구경했다. 영호천의 경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어디 다녀온 거냐?]
-참 빨리도 물어보시네요. 그렇게 궁금하시면 함께 가시지 그랬습니까?
[삐졌냐?]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청운은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혈황에게 해주었다.
-그리된 것입니다.
[흠, 이번 기회에 노룡회 놈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겠군. 잘하면 본거지도 알 수 있겠는데?]
혈황의 말대로 청운도 기대하고 있었다.
무림맹에 관해서 자신이 잘 알고 있다면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제갈신기만큼 알지 못하기에 뒤처리를 그에게 양보했다.
청운이 혈황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비무가 시작되었다.
영호천의 상대는 오대세가의 하나인 남궁세가였다.
남궁세가는 오룡 중 한 명인 질풍신룡 남궁룡의 가문이다. 비무대 위에 선 자는 남궁룡의 사촌형인 위수검 남궁창천이었다.
영호천은 한 발을 앞으로 내밀고 뒤꿈치를 든 상태에서 자세를 낮추며 검을 들어서 검첨이 상대를 향하게 했다.
이에 맞서는 남궁창천은 다리를 교차하며 몸을 반대로 틀고 주저앉듯이 자세를 낮게 잡았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공격했다.
챙! 채채챙!
순식간에 오 초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이 장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자세를 다시 잡았다.
“우와!”
구경하는 이들이 환호했다. 이번 경기 역시 기대하는 경기 중 하나였다.
청운도 둘의 비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저 녀석, 생각보다 검에 소질이 있구나. 검법도 뛰어나고. 어쩌면 창궁무애검법도 익혔을지 모르겠군.]
남궁룡이 처음으로 창궁무애검법을 사용했을 때가 떠올랐다.
창궁비연검법을 주로 사용하던 녀석의 검이 갑자기 바뀌며 자신의 옷자락을 처음으로 베었었다. 어찌나 좋아하던지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자신의 옷자락을 벤 검. 과연 저자가 펼친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혈황의 말대로 남궁창천은 대단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대기가 요동쳤다. 날카로운 소리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만큼 대단했다.
영호천은 침착하게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둘의 공방은 백여 합이 넘어갔는데도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영호천의 눈빛이 번뜩였다.
“타앗!”
일갈을 내지른 그가 남궁창천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정확히는 남궁창천이 펼치는 대연검법의 검로 속이었다.
채앵!
영호천의 검이 남궁창천의 검이 나갈 길을 막았다. 그러고는 다음 수를 봉쇄하듯이 미리 검을 찔러 넣고는, 그대로 방향을 틀어서 남궁룡의 목 앞에서 검을 멈췄다.
두수 만에 백여 합을 끌던 비무의 승패가 결정된 것이다.
심판이 나서서 둘의 비무를 멈췄다.
“영호천 승!”
이를 악문 남궁창천은 힘없이 검을 늘어트렸다.
“운이 좋았소.”
“…….”
남궁창천은 아무 말 없이 포권만 취하고 비무대에서 내려갔다.
영호천마저 비무대에서 내려오자, 혈황이 스르르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청운이 그를 보며 전음을 보냈다.
-어디 가세요? 지금 노룡회 때문에 바쁘다니까요.
[나도 바쁘다.]
-아니 바쁘실 게 뭐가 있어요? 직접 무공도 못 가르…… 설마, 가르치시고 계세요?
청운은 설마 하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질투하지 마라.]
청운은 입을 쩍 벌렸다.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가르치는 거지?
* * *
무림대회는 본선에 들어가며 절정을 향해서 치달렸다.
몇몇 새로운 강자가 탄생했고 정통의 강호들은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일부 정파의 거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파일방과 세가연합, 그리고 거대 문파들의 일부 장문인과 장로들이 뒤늦게 합류한 것이다.
그들이 관람석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관중들이 환호했다.
“우와아!”
“정도무림 만세!”
“무림맹 만세!”
정파의 거두들이 손을 흔들며 수많은 무림인의 환호에 화답했다.
승자 승.
본선은 둘이 싸워서 승자가 위로 올라가는 방식이었다.
예선전 처음과 같은 방식이었다. 기회는 단 한 번. 대진운이 없다면 더 올라가지 못하고 떨어지게 된다.
이번 무림대회에서 예상치 못한 이변을 뽑으라면 단연 이남이녀의 출현을 꼽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이들 네 명을 가리켜 이천이문이라 불렀다.
이천은 영호 장군부 출신의 영호천과 천검문의 천일영.
이문은 선녀문 문희와 월녀문 월광선녀.
전통 강자들은 자신들의 제자를 물리치고 승승장구하는 그들을 경계는 해도 싫어하지는 않았다.
이천은 무림과 군부에서 이름 높은 영웅가문 출신이고, 이문으로 불리는 문희와 월광선녀 역시 정파의 신비문파로 이름이 높은 문파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정한 이변이 본선에서 벌어졌다.
“우와아아!”
“사홍린 만세!”
예선전을 겨우 통과한 인물이 본선에서 상대를 연이어 물리쳤다. 그것도 화산파 제자를 검으로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어찌 화산의 천류옥검이 저렇게 허망하게 꺾일 수가 있다는 말인가?”
“방금 보셨소? 순간적으로 삼십육방을 점하는 그 검술을.”
“보고도 믿지 못하겠구려. 저것이 쾌검이요, 아니면 환검이오?”
방금 비무에서 패한 낙위붕은 화산이 기대하는 인재 중 한 명이었다.
적어도 삼십이강 안에는 들 거라고 예상했는데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떨어졌다.
듣도 보도 못 한 사홍린이라는 자에게 말이다.
사홍린이 누구인지 사람들은 모른다. 그의 사문도 그의 고향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열광했다. 강자라 불리는 화산의 검을 꺾었기 때문이었다.
이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비무가 이어질수록 예선전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던 자들이 속속들이 출현했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정통의 강자들은 긴장했다.
본선 첫날에 이어서 둘째 날도 난리가 났다.
그동안 실력을 숨긴 것인지 몇몇 인물들의 실력이 하룻밤 사이에 일취월장했다.
덕분에 예상한 판도가 뒤집히는 경우도 있었고, 상대가 좋지 못해서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차라라라랑.
파바바방!
검기와 장력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숨 막히는 공방이 이어졌다. 분광검법을 사용하는 비산검 유철산이 어렵지 않게 승리할 거로 생각했다.
그의 상대인 쌍수신협(雙手神俠)은 산동성에서 이름 높은 협객이지만 그의 무공은 일류로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무위가 어느새 절정에 올라 있었다. 예선전을 치르면서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일취월장하더니 지금은 점창파의 고수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아니, 조금씩 압도하더니 결국 승리했다.
“우와아아아!”
“쌍수신협 최고다!”
“이겼어! 점창파 고수를 이겼다고!”
구경꾼들이 열광했다. 약자로 치부하던 자가 승리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환호했다.
관람석에서 지켜보던 무림 인사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중에는 청운도 있었다.
‘이것 봐라?’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청운이 수많은 경기를 전부 구경한 건 아니지만 쌍수신협의 상대인 비산검 유철산의 경기는 알고 있었다. 백청청과 예선전에서 겨루다가 패한 인물이었다.
상대가 백청청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예선을 통과했을 강자였다.
더군다나 쌍수신협이 경기하는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다. 도를 사용하는 자의 공격에 밀려서 비무대 밖으로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분광검법의 기세를 압도한다고? 그것도 닷새 만에?’
그사이 기연을 얻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회 기간에 무림 기인을 만나 기연을 얻고 하룻밤 사이에 환골탈태했다는, 이야기 속에나 나올 만한 일이 아니라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혈룡단이군.’
청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그의 눈은 더없이 차갑게 빛났다.
막 전음으로 말하려던 청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또 어디 가신 거야?’
조금 전까지 혈황이 함께 구경했었다. 그런데 언제 사라졌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청운은 기감을 넓혀서 혈황을 찾아보았다.
‘멀리 가지는 않으셨네.’
반대편 비무대 뒤쪽에서 혈황이 느껴졌다.
청운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음 경기가 월광선녀의 경기였지만 굳이 구경할 필요는 없었다. 경기를 보지 않아도 승패를 알 수 있었다.
‘구경 안 했다고 토라지는 건 아니겠지?’
절로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아니 분명했다.
청운은 혈황을 찾아서 건너편 비무대 뒤쪽으로 갔다.
수많은 자가 청운이 지나갈 때마다 인사를 하며 수군거렸다. 청운이 지나칠 때마다 그를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삼원진사 이청운.
오호평천대장군 이청운.
진무사 이청운.
세간에는 청운이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위치에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니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돌아서 간 무대 뒤에 혈황이 있었다.
‘어? 위험한데.’
혈황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 채 턱이 살짝 들려져 있었다. 기분이 무척 나쁘다는 신호였다.
좀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인데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청운은 한달음에 달려가 보았다.
그곳에는 영호천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면사녀가 있었다.
‘문희?’
청운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순간 문희와 청운의 두 눈이 마주쳤다.
씽긋.
문희가 눈웃음을 지었다.
청운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분명히 싱그러운 웃음이다. 그러나 백청청이 지었던 그런 싱그러운 웃음은 아니었다. 무언가 끈적임이 묻어났다.
‘뭐지? 이 끈적거림은?’
문희의 변화를 느낀 영호천이 고개를 돌렸다.
청운을 보았음에도 그는 못 본 척하며 전음을 보냈다.
-오셨습니까?
-무슨 일이야?
-선녀문의 소문주가 조금 이상합니다. 저에게 시간을 내달라는군요.
-오! 인기 많은데.
청운은 실없는 농담을 던지려다가 그만두었다. 방금 보았던 영호천의 굳어진 얼굴을 봤을 때 문희의 제안을 그리 달가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때 혈황이 말했다.
[뭐하러 왔냐?]
-상의할 게 있어서요.
혈황이 무슨 일 때문에 짜증 났는지는 모르지만 화난 음성이었다. 무언가 짜증 섞인 그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아무래도 이년, 수상하다.]
-왜요?
[다짜고짜 꼬리부터 흔든다. 저년을 따라다니는 놈들 눈빛도 마음에 안 들고.]
청운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법 많은 사내가 이쪽을 보며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마치 사랑하는 정인을 빼앗긴 사내의 눈빛이 있다면 저럴 것이다.
‘아, 저들 때문에 기분이 상하신 거군.’
저들이 향하는 눈빛은 분명히 혈황이 아닌 영호천을 향하고 있었다.
영호천을 적대시하는 저들과 이런 상황을 만든 선녀문의 문희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다.
문희는 영호천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그를 지나쳐서 청운에게 다가왔다.
청운은 우두커니 서서 문희를 마주했다. 딱히 그녀와 만날 이유는 없었지만 피할 이유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진무사 이청운 대인이시죠.”
“반갑소.”
면사로 가리지 않은 문희의 눈가에 웃음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