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156화
배시시 웃는 그녀의 미소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심장이 요동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운은 다른 자들과 달리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자존심이 상했을까? 그녀의 두 눈에서 살짝 빛이 번쩍이더니 빠르게 사라졌다.
그러나 이 찰나의 순간을 청운은 놓치지 않았다.
‘흠, 속 모를 여인이군.’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비무를 하면서 보였던 그녀의 차가운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먹이를 노리는 살모사의 눈. 겉과 속이 다른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문희는 살며시 눈웃음을 지으며 몸을 살짝 틀었다.
그 모습에 사방에서 한숨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지켜보는 자들이 탄식했다.
문희는 그런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반응하지 않고 청운에게 말했다.
“진무사님을 꼭 한번 뵙고 싶었어요.”
“나를 말이오?”
아무런 연고가 없는 문희를 굳이 만날 이유가 없었다.
청운이 반응을 보이자 문희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대인의 명성을 들을 때마다 어떤 분일까 상상을 했었어요.”
“…….”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하는 짓을 보니 다음에 나올 말이 뻔했다.
청운은 서둘러 그녀의 말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청운보다 먼저 나서는 이가 있었다.
“이게 어디서 남의 낭군님께 꼬리를 흔들어?”
척!
뭉클한 느낌이 왼팔을 타고 전해졌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헉!’
깜짝 놀란 청운은 몸을 옆으로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단단히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온몸이 굳은 것인지 고개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기를 쓰고 말랑거리는 감촉을 전하고 있는 왼쪽을 보았다.
예상대로 백청청이 자신의 팔을 붙잡고 매달리듯이 몸을 비비고 있었다.
백청청은 언제 옷을 갈아입었는지 모르지만 월광선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문희는 차갑게 눈을 빛내며 백청청에게 말했다.
“꼬리라니요? 백가장의 금지옥엽이라고 말씀을 너무 막 하시는 것 아니에요?”
“임자 있는 사람에게 꼬리를 흔드는데 가만히 있어?”
“진무사님과 정인 사이라도 돼요?
“어! 이제 알았으면 꺼지시지.”
백청청은 말을 하며 청운을 뒤에 돌리고는 앞을 막았다. 백만대군이 몰려와도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그 모습과 소리에 문희가 화가 났는지 더듬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머, 뭐라고요?”
“이게 어디서 인상을 써? 처 맞기 싫으면 꺼지라고!”
백청청이 버럭 소리쳤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기세를 끌어올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그녀가 기세를 끓어 올렸다면 무림대회에 모인 자들이 전부 달려왔을 것이다.
청운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분명히 말려야 하는데 백청청의 기세에 밀렸다. 차라리 백만대군과 싸우는 게 더 편할 것만 같았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혈황이 백청청을 응원했다.
[아이고 예쁜 거. 내 이제부터 널 확실히 지지하마!]
뭘 지지한다는 것인지 모르지만 굳었던 얼굴이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하지만 다른 자들은 아니었다. 주변에 모여 있는 사내들은 무언가 억울하고 분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서는 이는 없었다. 아니 하지 못했다.
백청청의 가문인 백가장이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지 이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과거에 천하제일세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지금은 변방의 그저 그런 가문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백청청 뒤에 버티고 있는 청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에게 맞설 수 있는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의 권력과 무공은 자신들이 어쩔 수 없는 거대한 성벽이었다.
분한 마음에 몇몇이 이를 갈았다.
“감히 변방의 이름뿐인 세가가.”
“선자님을 저렇게 대하다니.”
“두고 보자.”
이를 가는 그들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청운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백청청도 들었을 텐데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문제는 문희도 그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흑, 어떻게 그런 말씀을.”
“머, 뭐야? 울어? 왜 울어? 방금 그 기세는 어쩌고?”
백청청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문희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버럭 화를 냈다.
“이게 장난하나!”
“흑, 죄송해요.”
문희는 청운을 한 번 힐끔 보더니 눈물을 흘리며 뒤로 달려갔다.
“어? 어디 가? 야!”
그 모습에 백청청이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다.
청운은 뛰쳐나가려는 백청청의 팔을 붙잡았다.
“놔 봐요. 저 여우 같은 계집의 꼬리를 잘라버리게.”
“소저, 참으시오.”
청운의 따스한 목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었는지 백청청이 금세 다소곳해졌다.
따스한 봄날에 녹아내리듯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청운을 올려다보았다.
“상공도 보셨지요? 저년, 아니 문희라는 여자가 여우짓 하는 거요?”
“하하, 물론이오.”
간절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에 청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훗, 예쁘긴 하군.’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애써 참았다. 그도 백청청이 싫지는 않았다.
문제는 문희 소문주였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접근했는지 모른다. 무언가 신경을 거슬렸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앞에서 방방 뜨며 재잘거리는 백청청 한 명으로도 감당하기 힘든데 다른 여인이라니.
절로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렸다.
그 모습에 혈황도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다.
[못난 놈.]
* * *
문희는 곧장 자신이 사용하는 별채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중간마다 멈춰 서서 눈물을 훔쳤다.
그 모습을 뒤를 따르는 무리가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했다. 그들의 가슴에 청운과 백청청에 관한 원한의 씨앗이 심어졌다.
* * *
모든 일정이 끝나자 청운은 제갈신기를 찾아갔다.
제갈신기는 청운을 보자마자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농을 건넸다.
“아니 이게 누군가? 춘풍을 몰고 다니는 진무사 대인이 아닌가?”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청운은 난데없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갈신기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선녀문 소문주를 발로 찼다며?”
“제가요?”
“그런 일 없나? 문희 소문주 안 만났나?”
“낮에 아는 척하길래 잠깐 몇마다 한 게 다입니다.”
제갈신기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언가 살짝 이상했다.
“몇 마디? 그런데 왜 그런 소문이 돈 것이지?”
“무슨 소문인데 그러십니까?”
“자네가 문희 소문주를 발로 차고 낮부터 백 소저와 아주 뜨거웠다고 하더군.”
“예에?”
한 가지 소문이 무림맹에 은밀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 소문은 제갈신기의 귀에도 들어왔다. 오늘 밤이 지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제갈신기는 한 가지 소문이 더 흐르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백청청이 청운을 등에 업고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굳이 알려줄 필요 없는 소문이었다.
제갈신기는 소문을 둘의 사랑싸움으로 치부하려고 했다. 청운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문 소저는 오늘 처음 만났습니다. 사랑이라니요.”
“처음? 그럼 소문주가 자네를 사모하고 있었던 것이군.”
“그럴 리가요. 저를 만나기 전에 영호천과 따로 만나자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영호천? 영호장군부의 그 영호천 공자를 말하는가?”
“예, 상당히 불쾌하다고 하더군요. 아, 영호천과는 조금 아는 사이입니다.”
둘 다 관부 출신이니 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문제는 장난기 가득했던 제갈신기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선녀문 소문주가 꼬리를 흔들고 다닌다라…. 그 고상한 문파의 소문주가?”
생각해보니 무언가 이상했다.
뛰어난 영웅을 보고 방심이 흔들리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고상하다 알려진 선녀문의 소문주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청운뿐만이 아니고 영호천까지 관심을 뒀다면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선녀문이 인재 욕심을 부리는 것인가?’
단순하게 친분을 쌓기 위함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소문을 전해 들은 제갈신기의 생각은 달랐다.
‘무언가 있어.’
분명히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다고 했다. 그 모습을 군웅들이 보고 화를 냈다는 소문도 있었다.
‘알아봐야겠군.’
시기가 시기인 만큼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칠 수 없었다.
생각을 굳힌 제갈신기는 다시 굳었던 표정을 풀고 짓궂은 표정으로 청운에게 말했다.
“사실인가? 백 소저와 백년가약을 약속한 사이라는 거?”
“할 일이 있어서 여자를 만날 생각이 아직은 없습니다.”
“그래? 내가 백가장 가주를 조금 아는데, 소문이 귀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게. 한번 화나면 무섭네.”
“예, 그런 것 같긴 하더군요.”
황궁에서 백철군과 겨룬 적이 있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하고 말았지만.
그때보다 강해진 지금도 그와 다시 겨룬다면 자신이 없었다.
‘혈황신공으로 겨룬다면 어떻게 될까?’
문득 자신이 가진 최고의 무공이 떠올랐다.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지며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럴 때 혈황이 곁에 있다면 답이 바로 나오는데 아쉬웠다. 혈황은 여전히 영호천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지요.”
“험, 그러세.”
* * *
무림대회 본선이 시작된 지 사흘이 흘렀다.
대전은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서 치러진다.
여러 개의 비무대에서 동시에 치러지는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청운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중앙 비무대에 마련된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대전을 관람했다.
‘관전하는 것도 무공수련에 도움이 되는군.’
다른 사람이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들의 무공을 머릿속에 담고 펼치기도 해보고 그들의 무공을 상대로 싸워보기도 했다.
노령회의 수작만 없었다면 좀 더 집중할 수 있을 텐데 아쉬웠다.
‘흠, 이번에는 도천인가?’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커다란 덩치를 가진 사내가 중앙 비무대를 휩쓸고 다녔다. 그의 상대 역시 상대만큼 덩치가 좋았다.
둘이 다른 점은 하나였다. 한 명은 커다란 도를 사용했고 다른 한쪽은 적수공권이었다.
도를 사용하는 이는 오룡 중 한 명인 패천신룡 팽도천이다.
적수공권의 사내는 황보세가의 진천뇌벽권(震天雷霹拳) 황보진도였다.
적수공권인 황보진도가 팽도천을 맞아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가 펼치는 벽력신장과 천황삼권은 황보세가의 비전절기였다. 그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벼락같은 소리와 함께 태산을 부술 기세가 쏟아졌다.
팽도천은 한쪽 다리를 살짝 내밀어서 범의 자세를 취하고는 도를 아래로 향했다.
황보진도는 오른손을 허리에 차고 왼손을 펼친 채 앞으로 내쳤다. 그의 두 다리는 넓게 벌린 체 태산이라도 받칠 기세였다.
청운은 둘이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도천이가 이기겠군.’
먼저 움직인 건 성격이 급한 팽도천이었다. 그는 바닥을 차며 앞으로 쇄도했다.
황보진도는 기다렸다는 듯이 두 눈을 빛내며 내민 손을 뒤로 물렸다. 허리에 차고 있던 주먹을 내질렀다.
팡!
황보진도의 주먹에서 발출된 강맹한 권기가 팽도천에게 날아갔다.
팽도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가 거대한 도를 빙글 돌리더니 아래에서 위로 올려 베었다.
캉!
권기를 튕겨낸 팽도천의 도가 위에서 아래로 방향을 틀더니 사선으로 베어지며 도기를 쏟아냈다.
황보진도는 피하지 않고 뒤로 물린 손을 앞으로 내밀며 천황삼권을 연달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