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154화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산속. 일단의 무리가 빠르게 숲을 달리고 있었다.
모두 사십여 명.
그들이 휙휙 지나칠 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달린 그들이 멈춘 곳은 협곡이 잘 내려다보이는 능선이었다.
달빛에 드러난 그들은 모두 야행복 차림이었다. 그들은 청운의 명령을 받고 출동한 동창과 금의위였다.
무림맹을 출발해서 한나절을 꼬박 달려온 그들이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그들을 이끄는 정 소감은 협곡 안쪽을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지는 않군.’
협곡에는 삼십여 호 정도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화전민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경비가 너무 삼엄했다.
마을 외곽을 두르고 있는 이 장 높이의 목책은 성벽처럼 튼튼해 보였다.
정 소감은 곁에 있는 금의위에게 전음을 보냈다.
-석 천호님, 금의위가 외곽 경비들을 맡아주세요.
-알겠네. 그럼 동창에서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니에, 중앙을 치고 들어가서 안쪽을 차지할 것이옵니다. 외곽에서 지원 오는 자들을 막아주셨으면 하옵니다.
-걱정 말게. 그보다 동창 숫자가 너무 적은 것 아닌가? 금의위를 데려가는 건 어떤가?
금의위는 서른이지만 동창은 열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 마을 안에 적은 몇 명 있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그러나 정 소감은 자신이 있었다.
-마을의 규모로 봐서는 경비무사들이 많이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건물이 삼십여 호면 보통 사는 사람이 백여 명 정도 된다.
그렇다면 경비무사는 많아야 이십여 명에 불과할 것이다. 그중에서 바깥 경비를 서는 자들을 제외하면 내부에 십여 명 정도가 있다고 봐야 했다.
-알겠네. 혹, 위험하면 소리치게. 곧장 달려갈 테니.
정 소감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리도록 맑은 달이 휘영청 떠서 대지를 감싸고 있었다.
‘기습하기 좋은 조건은 아니군.’
구름이라도 달빛을 가려주면 좋겠지만 낮부터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었다.
하지만 정 소감은 머뭇거리지 않고 옆에 있는 동창 무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금의위가 길을 열면 중앙을 치고 들어간다. 너희의 임무는 적의 주살과 저기 갇힌 이들의 구출이다.”
나직한 소리로 명을 내린 정 소감은 손을 살짝 들었다.
그 수신호에 금의위가 미끄러지듯이 산을 타고 내려갔다.
그들은 곧장 목책 사이에 지어진 망루로 몸을 날리더니 경계를 하고 있던 자들을 소리 없이 처리했다.
동창 무인들도 소리 없이 산을 타고 내려가서는 통나무로 만든 목책에 몸을 기댔다.
망루에 있던 금의위가 아래쪽으로 수신호를 보냈다.
신호에 맞춰서 정 소감과 동창이 경공을 펼쳐서 이장 높이의 목책을 타고 넘었다.
휘리릭.
목책을 뛰어넘은 그들은 재빨리 근처 건물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사이 금의위는 마을을 빙 두르고 있는 목책을 따라 솟은 망루를 하나씩 제압하기 시작했다.
-너희는 저쪽 건물을 경비하는 자들을 제거하고, 너희는 저기 경비를 제거해라.
정 소감의 명령에 동창 무사들이 빠르게 내달렸다.
정 소감도 움직였다. 빠르게 안쪽으로 파고든 그는 경비를 서는 자들을 제거했다.
하나둘 경비가 제거될 때 고함이 터져 나왔다.
“웬 놈들이냐!”
덜컹!
통나무집의 문이 세차게 열리며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집에서도 몇몇 인물이 나와서 소리쳤다.
“쥐새끼들이 숨어들었다! 잡아!”
그 소리에 막 경비 하나의 목에 검을 쑤셔 넣던 정 소감의 미간이 좁혀졌다.
‘경비 막사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다른 건물에도 있었군.’
정 소감은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바닥을 기듯이 빠르게 나아간 정 소감은 웃통을 벗고 뛰쳐나온 사내를 향해서 검을 찔렀다.
사내는 움찔 놀라며 상체를 젖혔다. 정 소감의 검이 사내의 목이 있던 허공을 찌르더니 그대로 방향을 바꿨다.
“헉!”
사내는 기겁을 하며 뒤로 훌쩍 물러섰다.
촤악!
그러나 온전히 피하지 못하고 가슴이 베어졌다.
점 소감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한 발 내디디며 아래에서 위로 검을 쳐 올렸다.
서걱.
웃통을 벗고 호기롭게 뛰쳐나온 사내의 몸이 사선으로 베어지더니 그대로 허물어졌다.
정 소감은 바닥을 차며 뒤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때였다.
파바밧!
무언가 정 소감이 있던 자리에 날아와서 박혔다.
바닥에 내려선 정 소감은 오른쪽 건물을 바라보았다.
뚜벅뚜벅.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중년 사내가 걸어 나왔다.
다부진 덩치에 균형 잡힌 몸매가 돋보이는 자였다.
지금까지 나타난 자들과는 다르게 그의 전신에서 상당히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사내가 야행복을 입고 있는 정 소감을 향해서 외쳤다.
“이거 쥐새끼인 줄 알았더니 제법 실력이 있는 놈이구나!”
사내의 음성에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정 소감은 위축되지 않고 가슴을 펴며 말했다.
“네놈이 이곳 대장이냐?”
“훗, 쥐새끼가 보는 눈은 있군.”
“기특하구나. 찾아다니는 수고를 덜어줘서.”
“뭐?”
“고통 없이 죽여주겠다는 말이다.”
파밧.
정 소감은 그대로 사내에게 돌진했다.
사내 역시 곧장 검을 들어서 정 소감의 공격을 막아냈다.
차자장!
사내는 밀리지 않고 정 소감의 검을 쳐 내며 반격했다.
정 소감은 빙그르 몸을 돌리더니 바닥을 차며 사내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사내는 가슴으로 검을 당기며 빙글 회전시켰다.
부딪쳐 오는 정 소감의 검을 밀어내며 공간을 벌리고는, 검코를 정 소감 쪽으로 돌려서 훤히 드러난 가슴을 향해 찔렀다.
쒜엑!
사내는 능히 절정 경지에 오른 고수였다. 정 소감으로서도 쉽게 제압하기가 힘들었다.
순식간에 십여 번의 공방이 벌어졌지만 어느 쪽도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어린놈이 제법이구나!”
사내가 소리치며 더욱 강하게 몰아붙였다.
“흥! 내가 할 소리!”
정 소감도 코웃음 치며 한 소리 내질렀다.
그는 이번 일을 어떻게든 성공해야만 했다. 청운을 위해서라도.
날아드는 검을 보며 이를 악다문 정 소감이 자신의 검으로 사내의 검을 휘감고는 앞으로 크게 한 걸음 내디뎠다.
순간 정 소감의 검을 잡지 않은 좌수가 번쩍이더니 기묘하게 움직였다.
정 소감은 사내의 검신을 타고 올라간 좌수를 응조로 바꾸어서 손목을 찍었다.
구음신공이 깃든 일수.
얼음 바늘이 꽂히듯 차가운 기운이 사내의 손목으로 스며들었다.
“윽!”
극심한 통증에도 사내는 검을 놓치지 않고 좌우로 흔들었다. 그 바람에 검이 정 소감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며 살까지 베었다.
순간, 사내의 가슴에 허점이 드러났다.
정 소감은 이를 악문 채,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일장을 갈겼다.
펑!
“크윽”
사내가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정 소감은 자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내를 따라붙으며 가슴을 향해 검을 뻗었다.
검에서 뻗어나간 검기가 사내의 가슴을 그대로 꿰뚫었다.
눈을 부릅뜬 사내는 입을 두어 번 달싹거리고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후우, 다행히 성공했군.’
몸에 상처가 나긴 했지만 그리 깊지는 않았다. 더구나 그 대가로 상대를 쓰러뜨렸으니 손해는 아니었다.
정 소감은 쓰러진 사내를 한 차례 흘겨보더니 주위를 살폈다.
사방에서 동창 무인들과 이곳을 지키는 자들이 싸우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경비의 숫자가 많아서 언뜻 봐도 이십여 명은 될 듯했다.
정 소감은 지체 없이 신형을 날렸다.
때마침 바깥을 정리한 석덕조도 안으로 뛰어들었다.
싸움은 오래 걸리지 않아 끝이 났다.
부상자가 몇 명 있었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정 소감은 집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마을 중앙의 공터로 불러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삼십여 명쯤 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두려운 표정으로 동창과 금의위 무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석덕조가 나섰다.
“그대들을 구하러 왔소. 혹, 위염천의 가족이 있소?”
그러나 대답하거나 나서는 이가 없었다.
정 소감은 출발하기 전에 위염천이 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위염천 대인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족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하더군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고향인 막간산 덕청에 큰 집을 짓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아이고! 나리.”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여인이 소리쳤다. 그의 곁에 모여 있던 이들도 모두 놀란 눈치였다.
정 소감은 그들이 위염천의 가족임을 알 수 있었다.
“위 대인께서 가족을 잘 보살펴달라고 말했습니다. 이곳은 위험하오니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다행히 위염천의 가족을 찾아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구한 사람들과 무사히 빠져나가는 일이 남아 있었다.
* * *
“해냈군.”
청운은 전령이 전한 서신을 받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소감이 보낸 서신이었다.
-성공했습니다, 대인. 구한 사람들을 데리고…….
청운은 곧장 군사부로 갔다. 군사부에는 총군사인 제갈신기와 군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청운이 방문하자 군사들이 자리를 내주었다.
제갈신기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시달림이 크신가 보군.’
이틀밖에 안 지났는데도 제갈신기의 얼굴이 핼쑥해진 상태였다.
조금 전에도 무림맹 장로 몇 명이 몰려와서 군사부를 한바탕 휘젓고 돌아갔다는 보고를 받은 터였다.
이 기회에 눈엣가시 같은 총군사의 권한을 최대한 축소시키려 작정한 듯했다.
보다 못한 청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 소감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그제야 제갈신기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알겠네. 가세.”
청운은 제갈신기와 함께 군사부 지하로 향했다.
그곳은 중요한 문서를 보관하기 때문에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금지 같은 곳이었다.
지하로 내려온 둘은 삼(三) 자가 써진 방을 열고 들어갔다.
제갈신기가 한쪽 벽면에 꽂힌 서가의 책을 뽑고 그 안에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그르릉.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서가가 뒤쪽으로 밀려났다.
서가 안쪽에는 총군사만이 사용하는 밀실이 있었다.
밀실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침상에 누워 있는 위염천에게 다가갔다.
“몸은 어떻소?”
“어제보다 낫소.”
청운은 전서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가족을 구해냈다는 연락이 왔소.”
“후우.”
위염천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전서를 내려다보았다.
청운이 전서를 읽는 위염천에게 다시 말했다.
“그들은 이곳으로 오지 않을 것이오. 다른 곳으로 옮겨서 생활하다가, 그대가 소원으로 말했던 고향 덕청에 자리 잡거나, 다른 안전한 곳에서 살게 될 것이오.”
“고맙소. 하지만 내 눈으로 가족의 얼굴을 보기 전에는 말할 수 없소이다.”
청운은 위염천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도 위염천이 왜 이러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뜻을 받아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흠, 흥정을 하자는 것이면 얼마든지 응할 생각이 있소. 그러나 그대가 가진 것이 떨어진다면 그때는 나와 어떻게 흥정할 생각이오?”
“그, 그건…….”
청운은 위염천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말했다.
“그대와 줄다리기를 할 만큼 한가하지 않소. 내가 말한 건 지킬 것이니 믿고 협조해주면 안 되겠소?”
“그, 그것이….”
“싫다면 더는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오. 시간은 걸리겠지만, 그대 말고도 정보를 얻을 인물은 많으니까.”
청운이 손을 털었다.
위염천의 눈빛이 흔들렸다.
소문이 자자한 청운이다. 그리 좋은 소문은 아니지만, 충분히 자신을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손을 들었다.
“알겠소. 모두 말하겠소.”
“그럼 아는 것을 풀어놔 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