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24화
“이 공자는 대단히 귀한 상을 타고 났군.”
“관상도 보실 줄 아시나 보군요.”
“청성파가 도가 계열이다 보니 조금 공부했다네.”
강호풍은 무공만큼 다방면에 다재다능했다. 그중 관상도 제법 볼 줄 알아서 처음 사람을 만나면 관상을 봐주기도 했다. 상대에게 호감을 주고 친해지려는 행위 중 하나이긴 했지만.
“이 공자는 관리가 된다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오를 타고난 관운을 지니고 있네. 덕망과 신의가 있어서 주변에 사람들이 모일 상이야.”
“하하하.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청운은 포권을 취했다.
자신 역시 관상을 볼 줄 알고 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들과 친해져서 나쁠 것은 없었다. 사람 됨됨이도 괜찮았고, 대련을 하면서 호감도 생겼다.
저들이 가까이 다가오려는데 굳이 밀어낼 필요는 없었다.
또한 자신의 일을 하다 보면 언제 도움이 될지 누가 안단 말인가.
[괜찮은 아이들이군.]
혈황 역시 그들이 마음에 든 듯했다.
[강호에 발을 들였으면 너도 어엿한 무림인이다. 강호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곳이지. 이들과 관계를 맺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구나.]
혈황의 말에 청운은 미소로 답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앞으로도 좋은 관계가 유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청운이 먼저 나서서 말을 꺼냈다.
답례하듯이 강호풍이 나서서 답했다.
“그거 좋지. 정식으로 소개하겠네. 나는 청성의 강호풍이네.”
“실례가 많았습니다. 남궁세가의 차남 남궁룡입니다.”
“오라버니, 제갈세가의 제갈해미에요. 잘 부탁드려요.”
진설란을 빼고 모두가 청운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룡오봉과 작은 인연이라도 만들려고 연줄을 댔다. 그럼에도 그들은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오늘처럼 스스로 친해지려고 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것을 청운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청운과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청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이청운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사문에 대한 것은 은원이 걸려 있어서 자세하게 말씀드리지 못하는 것을 양해해주십시오.”
진설란 등은 내심 아쉬움이 있었지만 굳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무슨 은원인지 모르지만,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안휘성 합비에 있는 남궁세가로 연락을 주시오. 내 힘닿는 데까지 도우리다.”
“남궁 형,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처음 까칠했던 남궁룡은 이 자리에 없었다.
대련을 통해서 많은 것을 느끼고 얻은 그였다. 마음도 몸도 이미 청운에게 승복한 상태였다.
“남궁 아우의 말처럼 안휘에서라면 무조건 남궁 아우를 찾게. 저리 맹해 보여도 세가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네.”
강호풍의 그 말에 청운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도움을 떠나서라도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이 공자의 방문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강호풍과 제갈해미 역시 청성파와 제갈세가 근처를 지나가면 꼭 방문해 달라고 했다.
그 이후로도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덕분에 청운은 현 강호의 상황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제갈해미가 넌지시 청운에게 물었다.
“그럼 청운 오라버니는 하남으로 가시는 길인가요?”
“그렇소. 개봉에 볼일이 있어서 내려가는 중이오.”
“히잉. 아쉬워라.”
볼을 부풀리는 제갈해미의 귀여운 모습에 모두가 즐겁게 웃었다.
그때 진설난이 무언가를 떠올리고 눈빛을 빛냈다.
“개봉으로 언제 떠나시나요?”
“진 소저를 뵈었으니 이제 길을 나서야지요.”
“혹시 이틀 정도 후에 떠나시면 안 되나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이틀 후에 장안으로 떠나는 표행이 있는데 개봉을 거쳐 갈 거예요. 저 역시 표행과 함께 화산으로 갈 생각이거든요. 강 오라버니나 남궁 공자, 해미 동생도 그날 갈 것이고요.”
그녀의 사문인 화산파는 섬서성에 있었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씩 사문에 갈 때는 장안으로 가는 표행과 함께 가고는 했다.
이번에도 마침 장안으로 떠나는 표행이 있기에 함께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 표행에 의외의 물건이 하나 섞여 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다.
“좋습니다. 그럼 함께 떠나도록 하지요.”
청운은 진설란의 청을 받아들였다.
이틀이면 자신의 일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어차피 개봉에서의 일은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니까.
더구나 먼저 개봉으로 보낸 금의위 위사들이 정보를 수집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아마 이틀 후 출발해서 자신이 도착할 때쯤이면 원하는 정보가 모아져 있을 것이다.
“그럼 이틀간 쉴 곳은 있으신가요?”
진설란이 환한 표정으로 청운에게 물었다.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괜찮은 객잔이 있으면 알려주시지요.”
청운의 말에 진설란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객잔까지 가실 필요 있나요. 이곳 패주에서 가장 좋은 곳은 이곳 진가장이랍니다.”
“하하, 고맙습니다. 여러 가지로 폐를 끼치는군요.”
* * *
은은한 달빛이 천하를 어루만지는 늦은 밤.
청운은 달빛이 쏟아지는 창가에 앉아서 혈황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수와 대련을 할 때는 흐름을 신경 써야 한다. 상대의 흐름을 끊어야 해. 나의 흐름은 면면부절 이어야 하고. 그런데 낮의 대련에서 제갈가의 천기미리보(天機迷離步)에 당황하더군.]
“설마 그 자세에서 그렇게 움직일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네가 그렇게 당황할 줄은 몰랐다.]
혈황은 혀끝을 차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낮의 대련에서 혈황은 청운과 함께 움직였었다. 그런데 청운의 움직임이 마음에 안 드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청운의 움직임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혈황이 생각하는 움직임과 청운의 생각이 달랐을 뿐.
문제는 청운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몇 차례 있었다는 것이다.
[머리 좋은 제갈세가 놈들이 작정하고 만든 보법이 천기미리보다. 상대를 현혹하는 변화가 많아서 다시 붙는다 해도 신법만으로는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거다.]
천기미리보를 이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다.
청운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청운과 혈황은 그런 무식한 방법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방법을 원했다.
[경험만 쌓이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으니 이틀간 잘 해봐라.]
“예.”
쉬어가는 김에 이틀간 대련을 하기로 했다.
젊은 사람들에게 전력을 다해서 타 문파 고수와 대련할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모두들 좋은 기회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얻어낼 것은 최대한 얻어내.]
“알겠습니다.”
청운은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잘 알고 있었다.
생사투를 벌여야 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전에 최대한 경험을 쌓고, 실전 감각을 끌어올려야만 했다.
* * *
이틀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게 흘렀다.
청운에게 이틀은 부족한 부분을 나름대로 알차게 채울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태행산에서 일 년 동안 혈황과 대결을 벌였지만, 아무래도 혈황의 공격이 자신에게는 별 영향이 없다 보니 긴장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놓치고 넘어간 부분이 많았었다.
그런데 오룡오봉과의 대련으로 그러한 부분들을 어느 정도 채울 수 있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자 진천표국의 표행이 시작되었다.
청운은 진설란과 함께 상단을 따라서 개봉으로 출발했다.
짐을 실은 마차만 열두 대나 되었고, 쟁자수와 짐꾼들이 백 명이 넘었다. 거기에 표사가 칠십여 명이나 호위로 붙은 대규모 표행이었다.
진천표국을 나선 지 사흘째.
어느덧 표행은 하북성의 남단 끝에 있는 감단(邯鄲)을 지나서 하남성의 입구인 안양(安陽)을 눈앞에 두었다.
안양까지는 대부분 평야 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산이라고 해봐야 나지막한 구릉이 대부분이어서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곧 안양이에요.”
남색의 무복을 입은 진설란이 말했다.
그녀는 전형적인 화산파의 무복을 입은 상태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 일도 없어서 다행이에요.”
“하하, 태평성대에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표사들이 하는 말씀 못 들으셨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는 했습니다.”
청운은 표행을 따라오면서 진설난 외에도 표사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주로 강호에 관한 이야기였다.
누가 강하고, 누가 결투를 벌여서 이겼다는 이야기가 주였다. 특별히 관심을 가질 만한 이야기는 많지 않았다.
“요즘 중원 곳곳에서 도적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해요.”
“도적은 어느 때든 항상 있었지 않았나요?”
그랬다. 어느 시대건 도적은 있었다.
녹림도처럼 도적들이 뭉쳐서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다.
심지어 관에서도 함부로 토벌을 못할 만큼 큰 세력을 형성한 자들마저 존재했다.
“아니요. 흑도나 사파의 무리들과 도적은 형성 이유가 달라요. 일반 백성들이 살기 위해서 무리를 이뤘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살기 위해서라니요?”
청운은 언뜻 이해가 안 되었다.
전란의 시대가 아니었다. 현 황제는 통치를 잘하고 있었고, 관리들 역시 큰 잡음이 없었다.
또한 중원 곳곳에 감찰사들이 돌아다니며 부정부패를 막고 있었다. 도적무리가 생길 정도의 문제라면 황제가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표면적으로는 태평성대가 맞아요. 황제 폐하께서는 잘하고 계세요. 성군은 아니지만 폭군도 아니시니까요.”
“그건 그렇소.”
“관리가 문제가 아니에요. 지역의 호족들이 문제죠.”
“흠…….”
지방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호족(豪族)이 존재했다. 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뿌리를 내리고 엄청난 부와 권력을 쌓은 자들.
그들은 황권에 복종하는 척하면서 관리들을 뒤에서 조정하기도 했다.
심지어 관리를 수하로 두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도 있었다.
“물론 모든 호족이 나쁘지는 않아요. 오히려 괜찮은 호족도 많죠. 문제는 썩은 호족들이에요.”
청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정부패를 일삼는 관리가 있다 해서 모든 관리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부만 부패해도 나라가 휘청거릴 수 있다.
호족 역시 마찬가지다. 힘을 가진 자들이니 일부만 문제를 일으켜도 그 지방에 큰 혼란이 올 수밖에 없다.
‘호족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
호족 문제는 오래전부터 골칫거리였다.
관리가 되는 자들의 대부분이 호족이나 유력가 집안 인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부패한 자들을 처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하긴 혁련세가만 해도 관에서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으니…….’
그러니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몰고도, 자신을 죽이려 하고도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복수를 끝내고 나면 그 문제를 한번 살펴야겠구나.’
아버지와 자신처럼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재생 가능성이 없는 썩은 부위를 과감히 도려내지 못하면 멀쩡한 부위도 썩어버린다. 황제가 칼을 들지 못한다면 내가 대신 들겠어.’
딸그락, 딸그락.
수레 끄는 소리가 길게 이어지며 표행은 계속되었다.
한두 시진만 더 가면 안양에 도착할 것 같았다.
그런데…….
슈슈슈슉!
퍼버버벅!
“으아악”
앞쪽에서 난데없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화살 공격을 받은 몇 명이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여기저기서 악다구니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습격이다!”
“표물을 보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