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25화
표사들이 앞쪽으로 뛰쳐나갔다.
수레만 해도 열두 대로 이뤄진 긴 행렬이기에 전부가 뛰어간 건 아니었다.
쟁자수들은 수레끼리 최대한 붙여서 수레를 끌고 있는 말들이 날뛰지 않게 했다.
진설란과 강호풍, 남궁룡, 제갈해미도 몸을 날렸다.
청운은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기감을 널리 퍼트렸다.
채재재재쟁!
차자자장!
선두에선 먼저 싸움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청운은 자신의 위치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강한 기운을 가진 자들이 중앙 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스르릉.
청운은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황제가 하사한 어도는 금의위가 갖고 있었다. 지금 가진 검은 풍천호가 선물한 것이었다.
겉보기로는 흔해 빠진 청강검 같지만, 그 날카로움은 신병이기에 버금가는 뛰어난 명검이었다.
오른쪽 숲속에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복면을 하고 있었다.
“내자불선 선자불래(來者不善 善者不來)라는 말이 있지.”
청운은 성큼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곁에 있던 표사들이 각자의 무기를 든 채 자세를 잡았다.
적의 숫자는 서른 남짓. 한눈에 봐도 기도가 뛰어난 자들이었다.
‘첫 실전이군.’
청운은 검을 지그시 움켜쥐었다.
그동안 짐승은 많이 죽여 봤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을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과연 자신이 망설이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후우…….”
청운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강호에 발을 디딘 이상 살인은 운명이다. 바보처럼 머뭇거리다가는 동료를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었다.
“쳐라! 최대한 빨리 물건을 회수하고 이곳을 떠야 한다!”
키가 큰 복면인에게서 명령이 떨어지자, 복면인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청운은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검을 떨쳤다.
서걱!
먼저 공격을 시작한 사내의 목에 실선이 그어지더니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공격하던 자들이 순간적으로 우뚝 멈췄다.
동료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는지 눈빛이 흔들렸다. 어떻게 당했는지 제대로 본 사람조차 없었다.
그들이 잠시 머뭇거린 시간에 청운은 두 명을 더 베고 지나갔다.
딱히 상승 검법의 초식을 펼친 것이 아니었다.
쾌(快)!
그저 적절한 검로를 따라서 빠르게 검을 휘둘렀을 뿐.
청운은 그 셋을 벤 후에야 자신에게 살인에 대한 두려움이 없음을 확인했다.
아니, 두려움은커녕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자신이 살인에 재주가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어차피 너희들이 먼저 나를 죽이려 했다. 내 손이 독함을 원망하지 마라!’
복면인들은 예상치 못했던 강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숫자의 우위가 두려움을 상쇄시켰다.
이번에는 칠팔 명이 한꺼번에 청운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덕분에 표사들의 부담이 덜어졌다.
“차핫!”
슈슈슈슈슉!
우렁찬 기합과 함께 청운의 검에서 검기가 뿜어졌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검기 다발에 청운을 공격하려던 복면인들이 검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청운은 양 떼 속에 뛰어든 호랑이처럼 거침없이 움직였다.
어차피 베어야 할 자들이라면 손속에 정을 남길 이유가 없었다.
“크억!”
“켁!”
단말마가 이어지며 순식간에 십여 명이 쓰러졌다.
남은 건 수장으로 보이는 복면인과 뒤에 기립한 십여 명이 전부였다.
오죽하면 표사들조차 놀라서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다른 놈들은 상관하지 말고 저놈만 쳐라! 진세를 펼쳐서 합공해!”
수장으로 보이는 복면인이 청운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존명!”
그의 뒤에 서 있던 자들이 일제히 경공을 펼쳐서 청운을 포위하듯 내려섰다.
청운도 표사들을 향해 말했다.
“여긴 나에게 맡기고 다른 곳이나 도와주시오!”
표사들은 자신들이 청운의 싸움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알겠소이다, 공자!”
표사 십여 명이 둘로 나누어져서 선두와 후미로 달려갔다.
청운은 공력을 끌어올리며 차가운 눈으로 복면인들을 노려보았다.
“이제 와봐!”
“개진!”
키가 큰 복면인의 외침에 다른 복면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운은 그들의 움직임을 살피며 합격진의 요체를 파악하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기문진학의 지식을 떠올렸다.
‘사상진을 기본으로 한 움직임이군.’
“용호출동!”
키가 큰 복면인의 외침과 동시에 사방으로 움직이던 복면인들이 드디어 공격을 시작했다.
슈슈슉!
청운은 검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며 곧추세웠다. 그러고는 한 발 내디디며 곤(坤) 방위로 뛰어들었다.
갑작스러운 난입이었지만 복면인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이 펼친 진세는 사상에 팔괘를 가미한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진법이었다.
진법을 조금 아는 자들은 청운처럼 곤 방위를 먼저 공격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겨 있는 허실의 변화를 순간순간 대처할 자는 많지 않았다.
채쟁!
선두의 곤 방위를 점하고 있던 자가 뒤로 물러섰다.
뒤쪽에 있던 두 명이 청운의 진로를 방해했다. 손발을 오랫동안 맞추어왔는지 움직임이 기민했다.
차자자챙!
사방에서 검이 청운을 향해 날아들었다.
청운은 한 바퀴 빙글 몸을 돌리며 요혈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을 쳐냈다.
그 후 남방의 리(離)를 향해서 짧게 검을 찔러 넣은 후, 곧장 감(坎) 방향을 휘저었다.
검진의 파악을 마친 청운은 섬전팔영보를 펼치며 거침없이 검진의 내부를 헤집었다.
아무리 뛰어난 검진이라 할지라도 이치를 파악당한 상태에서는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서걱.
중심에 서 있던 키 작은 복면인의 목에 금이 쩍 갔다.
그 직후 휘몰아치는 진법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머리가 떨어져나갔다.
그와 동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던 자들의 그물에 구멍이 뚫렸다.
순간, 청운의 입에서 일갈이 터졌다.
“차앗!”
우르르르릉!
뇌음과 함께 눈부신 섬광이 번쩍였다. 천지를 찢어발기는 사나운 청룡이 일대를 폭풍처럼 할퀴었다.
풀썩풀썩 쓰러지는 몸뚱이들.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뻘건 선혈.
청운은 미간을 찡그렸다.
‘과했군.’
조용하던 혈황도 한 소리 했다.
[이놈아, 공력을 적당히 조절해라.]
고수라 할 수 없는 자들을 상대로 너무 많은 공력을 쏟아냈다.
강호는 언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곳. 언제든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서 효율적인 싸움을 하며 힘을 남겨둬야 하는 법이다.
흔히 강호에서 살아남으려면 삼 푼의 힘을 숨겨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너는 아무래도 삼 푼을 드러내고 칠 푼을 숨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구나.]
청운도 동의하며 복면인들의 수장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그대 차례군.”
청운의 차가운 한마디에 복면인은 움찔 몸을 떨었다.
상상치도 못한 청운의 무위에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혼자서 합격진을 파훼하는 놈이 표행에 있었다니.
한편으로는 실패를 추궁당할 걸 생각하니 공포가 밀려들었다.
“네, 네놈은 누구냐?”
처음의 당당함은 사라지고, 당혹스러움에 목소리가 떨렸다.
청운은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단순한 도적은 아닌 것 같은데, 왜 표행을 습격한 것이냐?”
“…….”
“조금 전에 물건을 회수한다고 했던가? 노리는 물건이 무엇이지?”
질문이 계속 이어졌지만 복면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청운은 피식 웃었다.
“과묵한 자군. 좋아, 계속 입을 닫겠다면 별수 없지.”
파밧.
청운은 땅을 가볍게 차며 앞으로 미끄러졌다.
무영신투의 비천무영신법이 펼쳐졌다.
청운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헉!”
“어디?”
복면인은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청운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눈알을 굴렸다. 그러나 청운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들려오는 건 선두와 후미에서 들려오는 싸움 소리뿐.
그런데 어느 순간, 후미에서 들려오던 싸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설마?”
복면인들의 수장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벌써 후미를 정리했단 말인가?’
청운의 실력을 봤을 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모두 퇴각하라!”
복면인이 내공을 실어서 소리쳤다.
놈이 눈앞에 없을 때 도망쳐야 했다.
애초에 상단을 습격하려고 계획을 세웠을 때는 청운이라는 변수를 예상하지 못했다. 잘해야 진설란과 비슷한 경지의 무인 서너 명이 더 있을지 모른다고만 생각했을 뿐.
아니나 다를까 청성과 남궁세가, 제갈세가의 젊은 고수들이 있었다.
그들만 있었다면 무난히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무서운 괴물 같은 놈이 있었을 줄이야.
“어딜 가시나?”
복면인들의 수장이 몸을 날리기 직전, 청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복면인들의 수장 앞에 제압된 복면인 두 명을 던졌다.
툭.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와 할 이야기가 남았잖아?”
“……벌써 정리하다니.”
복면인들의 수장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자. 천천히 이야기 좀 해볼까?”
“내 입에서 어떤 말도…….”
“시끄러!”
청운은 상대의 말을 끊고 차갑게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자결하고 싶으면 지금 해.”
“뭐?”
“나 바쁜 사람이야. 할 거면 어서 하라고. 그래, 거기 두 사람도 죽고 싶으면 죽어. 당신들 말고도 대신 말해줄 사람 많으니까.”
빠드득.
청운의 말뜻을 알아차렸는지 복면인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들렸고, 다른 두 복면인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혈황은 차갑게 굳었던 얼굴을 펴며 팔짱을 꼈다.
‘허, 이 녀석. 이제 보니 이 방면에 재능이 있군. 어디 실력 한번 볼까?’
한편, 청운과 마주 서 있던 복면인은 눈을 씰룩거렸다.
어차피 임무에 실패한 이상 돌아가 봐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터.
피식 웃은 그는 가운뎃손가락을 세워서 청운에게 불쑥 내밀었다.
“네놈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거다.”
그러고는 청운의 눈이 살짝 커진 사이, 그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 옆 사혈인 이문혈을 찔렀다.
푹!
이문혈에 손가락이 박힌 그가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정말로 자결을 해버린 것이다.
“어?”
청운이 어이없어 하는 순간, 다른 두 복면인도 독단을 깨물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
[…….]
어떤 놈들인지 몰라도 정말 독한 놈들이었다.
“후우, 이럴 줄 알았으면 마혈부터 제압해서 꼼짝 못하게 해놓을 걸 그랬습니다.”
그것 또한 경험 부족이었다.
그런데 혈황이 아무 말도 없었다. 쳐다보니 무엇 때문인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청운이 묻자, 혈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놈들이 펼친 무공 말이다. 변형되긴 했는데… 내가 아는 무공 같다.]
“예? 그래요?”
단순히 아는 무공이라면 저리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혹시 혈황님과 관련된 무공입니까?”
[으음, 다 죽어서 확실한 것을 알 수가 없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너무 신경 쓰지 마라. 한 번 드러난 이상 언젠가는 또 나타나겠지.]
선두 쪽에서 표행을 공격했던 복면인들은 모두 도주한 상태였다.
진천표국은 표사 칠십여 명 중 이십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도 대부분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복면인들이 쟁자수와 짐꾼은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복면인들이 노리는 물건이 그곳에 없었나 보다.
청운은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놈들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