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5화
천지를 집어삼키던 폭풍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어스름한 새벽이 사라져버린 구름을 대신했다.
거대한 벼락이 직격한 혈황묘에도 새벽은 찾아왔다.
도끼로 내려친 듯 쩍 갈라진 커다란 바위와 불타버린 잔해들이 을씨년스러웠다.
쩍 갈라진 바위 옆에는 여전히 붉은빛의 고치가 허공에 떠서 깜박거리고 있었다.
[놈!]
우르르릉!
붉은색과 푸른색이 한데 어우러진 공간에서 쩌렁쩌렁한 사자후가 메아리쳤다.
붉은색 공간의 한가운데에 곤룡포를 입은 중년 사내가 버티고 서 있었다.
반대편의 푸른색 공간에는 약관의 사내가 힘겹게 서서 숨을 헐떡거렸다.
청운과 혈황석에서 봉인이 풀린 혈황이었다.
그들이 있는 공간은 현실 세계가 아니었다. 청운의 영혼이 머무는 심상 공간이었다.
그곳에 혈황의 영혼이 들어와 청운의 영혼과 다투고 있었다. 정확히는 청운의 몸뚱이를 놓고 다투는 중이었다.
[그만 비켜라!]
“그럴 수 없습니다. 제 몸입니다!”
[닥쳐라! 죽은 놈 살려줬으면 몸이라도 내놓아야지, 어디서 버틴단 말이냐!]
“지금 살려줬으니 보따리를 내놓으라는 겁니까? 아마 제가 줄을 끊지 않았다면 벼락이 떨어졌다 해도 봉인이 풀리지 않았을 겁니다! 갇혔던 분을 구해줬으니 그 보따리는 오히려 제가 요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무판에 끊지 말라는 글이 있었고, 줄이 끊어지자마자 벼락이 바위에 떨어졌지 않은가 말이다.
그 후 눈앞의 괴물 같은 영혼이 봉인에서 풀려났고, 자신의 몸을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절대 못 줍니다!”
[이, 이놈이……!]
혈황의 붉은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보기보다 고집이 지독한 놈이었다.
다 죽어가던 놈 아닌가. 손짓 한번이면 소멸할 줄 알았다. 그런데 몇 시진째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덕분에 혈황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는 상태였다.
다 죽어가는 청운의 몸을 치료해서 몸을 차지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엉뚱하게 흐르고 있는 것이다.
무공의 무자는 고사하고 운동이라고는 한 번도 하지 않았을 놈이 분명하거늘 생긴 것도 비리비리한 놈이 고집은 쇠고집이었다.
저놈이 문제야, 뇌기가 문제야?
처음부터 우려했던 부분이었다.
파사의 효과가 있는 뇌의 기운을 청운이 품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의 기운이 흩어지지 않고 청운의 몸에 남았다.
원래대로라면 뇌기의 특성상 머물지 못하고 자연으로 흩어져야 할 기운이었다.
그런데 혈황이 청운을 살리려고 요상결을 펼치자, 흩어지던 뇌의 기운이 혈기와 함께 청운의 몸에 자리를 잡아버렸다.
[젠장 충분히 흐트러뜨릴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아무리 파사의 기운이 있는 뇌기라 해도 충분히 몰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청운의 몸에 담긴 뇌기만 생각했지, 청운의 고집스런 성격을 몰랐던 것이 문제였다.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청명한 뇌의 기운이 뜨거운 혈기와 함께 몸을 휘감았었다.
정신을 차린 청운은 끈적거리는 혈기보다 청명하고 시원한 뇌기에 정신을 집중했다. 덕분에 흩어지려던 뇌기가 청운의 몸에 자리 잡고 주변에 산재해 있던 막대한 기운마저 흡수할 수 있었다.
[마지막 기회다, 이놈! 영혼마저 찢겨져서 소멸당하고 싶지 않으면 비켜라!]
청운을 다그친 혈황은 빠드득 이를 앙다물었다.
흉신악귀같이 변한 혈황의 모습에 청운은 오금이 저렸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눈앞에 죽음이 닥쳤어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된다는 옛 성현의 말씀을 곱씹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반드시 할 일이 있었다.
“죽이려면 죽이세요! 이대로는 억울해서 물러설 수 없습니다!”
[억울해? 억울하긴 뭐가 억울하단 말이냐! 어차피 네놈은 벼락을 맞아 뒈질 놈이 아니었느냐?]
“어쨌든 살았으니 그냥은 죽을 수 없습니다!”
혈황은 강하게 맞서는 청운을 보며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는 청운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사실 급한 건 혈황이었다. 무한정 기다리며 싸운다면 제까짓 놈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끝내는 자신의 승리가 확실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시간이 없어.’
일각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게다가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해가 떠오르면 영혼이 그대로 햇살에 소멸된다.
[몸의 주인이어서 마지막 온정을 베풀려고 했건만,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원한다면 그리해 주마.]
후아아악!
혈황이 서 있는 붉은 공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공간 전체가 출렁거렸다.
거대한 흐름의 변화에 청운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여기까진가? 아니야,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해! 나는 살아야 돼!’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붉은 공간은 서서히 혈황을 중심으로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혈황이 딛고 선 바닥이 용암지대라도 되는 듯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촤아아악!
크아아아앙!
거대한 혈룡들이 바닥을 뚫고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육중한 몸에 두 발로 서서 사방을 휘젓는 아홉 마리의 혈룡들.
청운의 두 눈에서 시퍼런 번갯불이 튀었다.
“으아아아아!”
온몸의 힘을 쥐어짜내며 고함을 질렀다.
청운이 서 있던 파란 공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어만 하던 공간이 청운의 다급한 마음에 응답했다.
도도하게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 같이 처음은 고요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서서히 출렁거리더니 거센 풍랑처럼 거칠어졌다.
쩌저저정!
푸른 하늘이 요동치며 거대한 빛줄기가 하늘에서 거미줄처럼 뻗어 나갔다.
수많은 번개가 사방으로 뻗어 나갈 때 거세게 몰아치던 바닥에서 무언가 솟구쳤다.
전설의 영물인 청룡이었다. 푸른 비늘의 영롱한 청룡이 하늘을 날며 기세를 올렸다.
혈황은 조소를 지었다.
[놈. 제법이구나! 하지만 그깟 청룡 한 마리로는 나의 혈룡들을 이길 수 없느니라!]
후아아악!
말을 마침과 동시에 붉은 기운이 푸른 기운을 덮쳤다.
붉은 대지에 강인하게 서 있던 혈룡들도 육중한 몸을 쿵쿵거리며 뛰쳐나갔다.
청운은 온몸의 기운을 쥐어짜듯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힘을 줬다.
푸른 기운들이 덮쳐오는 붉은 기운과 부딪쳤다.
거대한 청룡도 화답하듯 앞으로 아홉 마리의 혈룡과 부딪쳤다.
크아아앙!
콰과과광!
천지가 개벽한다면 이럴 것이다.
세상의 끝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방이 터져 나가고 휘몰아치며 뒤집혔다.
온전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도 안전하지 않았다.
푸르스름한 둥근 막에 휩싸인 청운은 허공에 두둥실 떠 있었다.
혈황은 여전히 여유로운 상태였다.
사방으로 아지랑이 같은 붉은빛의 실이 넘실거렸다.
슈슈슈슉.
혈황의 아지랑이들이 곧장 청운에게 쏘아졌다. 빛처럼 빠른 공격에 청운을 감싸고 있던 둥근 막이 출렁였다.
티디디딩!
바늘 부딪치는 소리가 수도 없이 울려 퍼졌다.
청운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온몸의 기운을 쥐어짜는 게 전부였다. 일 초식의 무공도 익히지 않은 청운이 천하제일마인 혈황을 상대로 승리하기는 요원했다.
속절없이 부딪치는 요란한 공격에 둥근 보호막이 요동쳤다. 금방이라도 뻥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공격에 위태로웠다.
거대한 청룡은 이미 혈룡들에게 물어뜯겼고 푸른 기운은 붉은 기운에게 잠식되어 갔다.
언제까지 지속될 것 같은 격렬한 싸움에도 끝은 있었다.
펑!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청운의 온몸이 붉은 실에 꿰뚫렸다. 청운을 보호하던 보호막이 터져 나간 것이다.
청운의 몸이 뒤로 축 처진 채 허공에 매달렸다.
“커윽, 끅끅.”
가래 끓는 소리가 청운의 입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한 가닥 정신이 남았는지 붉은 아지랑이에 둘러싸인 혈황을 내려다보며 입을 달싹였다.
“모… 옷… 줘…….”
주르륵, 한 줄기 피눈물이 청운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끈질긴 놈….]
혈황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미 영혼이 흩어졌어도 골백번 흩어지고 남을 시간이었다.
최후의 일격에도 이처럼 버티다니, 정신력이 엄청난 놈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감탄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 이제 곧 일출이 시작된다. 수백 년의 기다림이 수포로 돌아가고 자신의 영혼은 산산이 흩어질 것이다.
혈황의 손이 위로 서서히 들렸다. 주위의 아지랑이 같은 붉은빛의 실들이 고개를 들었다.
손을 휘젓자 곧장 날아가는 붉은빛의 실이 청운의 마지막 남은 숨통을 꿰뚫었다.
슈슈슉-
퍼버벅!
잠시 후, 청운과 연결되어진 빛의 실들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청운의 몸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청운의 몸이 서서히 파묻혀졌다.
청운의 몸이 전부 사라졌을 때 하늘도 땅도 모두 붉은색이 되었다.
혈황은 고개를 들어서 위를 보았다.
온 세상이 붉게 변했건만 저 하늘 위에 흐르는 푸른 뇌전의 기운은 제거할 수 없었다.
여전히 으르렁거리며 혈황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네놈이 남았구나. 이미 이 몸은 내 것이다. 조만간 네놈의 숨통도 끊어주마.]
뇌기를 향해서 읊조린 혈황의 몸이 서서히 흐릿해졌다. 모든 사물도 스르르 흩어졌지만 뇌기는 마지막까지 꿈틀거렸다.
그렇게 혈황은 심상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번쩍.
허공에 떠 있던 혈황이 눈을 떴다. 붉은 고치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스르르 바닥에 내려선 혈황은 주위를 둘러봤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고개를 숙여서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절로 인상이 써졌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고개를 든 그는 저 멀리 산등성이를 바라봤다.
[얼마 만인가. 햇살을 마주한다는 것이.]
어떤 도사 놈 때문에 영혼이 붉은 바위에 봉인된 지 수백 년이 흘렀다. 따스한 햇살을 느껴보고 싶어서 수없이 그리워했었다.
그런데 붉은 여명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산등성이 너머에서 밝은 햇살이 떠오르고 있었다.
혈황은 점점 다가오는 햇살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떠오르는 태양의 햇빛이 발치에 드리워졌다.
전율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점점 온몸을 휘감는 햇살에 상체를 뒤로 젖히며 양팔을 벌렸다.
“그래, 바로 이거야. 후후후.”
따스함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얼마나 느껴보고 싶었던 햇살인가.
“……응?”
청운의 몸을 차지한 채 잠시 햇살에 몸을 맡긴 혈황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몸속에서 파지직 소리와 함께 무언가 꿈틀거렸다.
“흥! 뇌기인가? 아무래도 완전히 없애버려야겠군.”
몸속에 웅크리고 있던 뇌기가 꿈틀거렸다. 청운의 영혼이 사라졌건만 뇌기가 아직도 반항하고 있었다.
찌르르릉.
찌릿한 전율이 점점 강도를 더해갔다. 몸에서 푸른 정전기가 발생했다.
파지지직.
“이놈이!”
와락 인상을 구긴 혈황은 혈황신공을 운기했다.
사공이되 신공으로 불릴 만큼 천하를 질타했던 최고위 신공이 수백 년의 시공을 넘어서 펼쳐졌다.
붉은 아지랑이가 청운의 몸 주변에 스멀스멀 피어났다.
빠지지직.
여전히 청운의 몸을 타고 푸른 번개가 흘렀다.
몸 밖으로 나오던 붉은 아지랑이가 푸른 번개에 스칠 때마다 가닥가닥 끊어지며 허공에 흩어졌다.
“크윽.”
혈황은 불꽃이 튈 때마다 신음을 흘렸다.
문제는 반항하는 뇌기가 아니었다. 뇌기만이라면 어떻게든 힘으로 누르고 흩어버릴 수 있다.
그런데 일출과 함께 온몸을 적시고 있는 햇살이 문제였다.
“젠장! 아직 몸에 적응이 덜 됐군.”
청운의 몸을 차지하기는 했어도 완벽하게 동화된 것이 아니었다.
뇌기와 햇살이 만나서 아직 청운의 몸에 적응하지 못한 혈황의 영혼에 타격을 줬다.
단순한 기운이 아니었다. 둘 모두 사마의 기운을 멸할 수 있는 기운이었다.
쉬이이익.
청운의 몸에서 붉은 연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얼굴에 심줄이 뚝뚝 불거지며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살아온 세월의 경험이 많았다. 이보다 더한 상황도 극복했던 혈황이었다.
그는 흩어지는 혈기를 추스르며 무너져 내리는 청운의 몸을 바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