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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마존-4화 (4/257)

# 4

4화

청운은 이를 악물고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가랑이로 내려가려던 물체가 다시 허벅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방갓 사내도 자신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청운은 숨까지 멈추고 느릿느릿 최대한 적은 움직임으로,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몸을 바위틈 깊이 더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낡은 가죽 끈에 달려 목에 걸려 있는 묵옥 구슬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어머니가 남긴 목걸이였다.

어머니는 언젠가 그 목걸이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또한 목걸이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어머니의 핏줄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청운은 힘든 일이 있거나 비참한 마음이 들 때마다 목걸이를 쥐고 머릿속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와 어머니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그럼 마음이 편해졌다. 아무리 힘든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어머니, 도와주세요.’

그때 절벽 쪽의 금의위가 큰 소리로 외쳤다.

“오늘의 원한을 꼭 갚을 것이다! 내가 살아나면 네놈들을 모조리 찾아내서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말 것이다!”

그러고는 둘이서 뒤쪽 폭포 아래로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방갓 사내는 다시 몸을 돌려서 그들이 서 있던 곳으로 급히 뛰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폭포 아래는 거대한 포말이 가득한 데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귀청을 울리는 굉음만이 들려올 뿐.

이를 으드득, 간 그가 뒤를 향해 소리쳤다.

“찾아라! 놈들의 생사를 확인해! 죽었으면 시체라도 가져와야 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위틈에서 청운이 기어 나왔다.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산 아래쪽을 내려다보던 그는 한참 후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났다.

가늘어졌던 빗줄기가 또다시 굵어지고 있었다.

* * *

우르르르릉-

콰과과과광!!

천둥과 번개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시퍼런 번갯불이 하늘을 찢어발겼다.

억수같이 퍼붓는 비와 함께 천지가 개벽이라도 하는지 사방에서 뇌성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그때 깊은 산속을 조심스레 걷던 청운의 눈에 벽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낡은 사당이 들어왔다.

사당의 지붕은 이미 무너져 내린 지 오래였다. 뜯겨 나간 입구 안쪽으로 커다란 바위가 보였다.

문득, 산속 깊은 곳에 이런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오래전 누군가에게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 이곳이 혈황묘인가 보구나.’

이삼백 년 전부터 존재했다고 알려져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을씨년스러운 주변의 기운 때문에 짐승들조차 오기를 꺼려한다고 했다.

물론 청운에게는 비를 피할 수 있는 고마운 곳이었다.

사당 안으로 들어간 청운은 붉은 줄이 둘러 쳐진 커다란 바위 뒤쪽 구석에서 몸을 웅크렸다.

번쩍이는 번개가 칠 때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두 눈에서는 번개가 무색할 정도로 차디찬 한광이 번뜩였다.

‘혁련휘!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심장이 타버릴 것만 같았다.

혁련휘는 전시에서 낙방했다. 그의 실력을 생각하면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최소한 탐화는 될 거라 생각했거늘.

‘개 같은 놈! 아무리 그래도 나를 죽이려 하다니.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다니!’

문득 아버지도 이런 식으로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혁련휘의 말을 들은 후 아버지의 죽음은 물론 혁련휘의 아버지 혁련종도에 대해 알아보았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친구처럼 지냈다고 했다.

과거를 보러 갔던 그들은 산적을 만났고, 그 와중에 아버지는 과거시험도 보지 못하고 시신으로 돌아오셨다고 했다.

반면 혁련휘의 아버지 혁련종도는 탐화가 되어서 금의환향했다고 한다. 삼 년도 지나지 않아서 관리를 그만두고 상인이 되었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혁련종도의 급제를 의외라 생각했다고 한다.

혁련종도는 탐화가 될 정도로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급제하고, 막상 학식이 그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이정은 시험조차 보지 못한 것이다.

‘결국 혁련휘의 아버지가 질시 때문에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몰았을 가능성이 커.’

청운은 장원을 한 후 힘을 길러서 복수를 하려고 했다. 그 때문에 황궁에 남아서 황제의 눈에 들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오히려 놈의 습격에 당해서 죽을 뻔했다.

다행인 것은 자신이 목숨을 구했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이상 복수할 기회는 얼마든지 남아 있었다.

절대! 절대 용서치 않으리라!

시간이 흘러 자시가 되자 하늘이 서서히 붉은 기운을 띄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점점 잦아들며 천둥과 번개도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그렇게 자시가 끝날 무렵, 하늘을 덮고 있는 구름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푸른빛이 붉은 구름 속을 휘돌기 시작했다.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하늘에서부터 들려왔다.

청룡이 구름 위를 노닐기라도 하는 듯 그르렁거림이 심해지자, 바위 뒤에 숨어 있던 이청운이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무너진 지붕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여전히 으르렁거리는 하늘은 잔뜩 성이 나 있었다. 무언가 잔뜩 불만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늘이 기묘하군.’

웅크린 채 묵옥 목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청운은 책 속에서도 본적 없는 기이한 현상에 넋을 놓고 하늘을 보았다.

붉은 구름이 회오리치듯 원을 그리며 몰려들고 있었다. 그런데 붉은 구름 사이에서 푸른 기운이 쉴 새 없이 번뜩였다.

“뇌기인가?”

그때, 푸른 뇌전에 의해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바위를 두른 붉은 줄 안쪽에 뭔가가 끼워져 있었다. 무척 오래된 듯 모서리가 닳고 닳은 나무판이었다.

나무판에는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 붉은 줄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와중에도 호기심이 동한 청운은 붉은 줄을 풀어내고 그 나무판을 빼려고 했다. 그런데 나무판이 잘 빠지지 않아서 억지로 빼려다 보니 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청운은 끊어진 줄을 신경 쓰지 않고 나무판을 바라보았다.

번쩍! 콰광!

시퍼런 번갯불이 번쩍이자, 나무판에 적힌 글자가 보였다.

전서체로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부 절단(不 切斷)]

줄을 끊지 말라는 뜻?

그런데 이미 줄은 끊긴 후였다.

청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지금 나무판에 신경 쓸 때인가?

청운은 나무판을 한쪽에 던졌다.

그때 회오리치는 붉은 구름 사이의 푸른 기운이 폭발했다.

쩌저저저저정!

세상을 새파랗게 밝힌 강력한 섬광과 함께 강력한 뇌전이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콰과과광!

그런데 뇌전이 하필 청운이 몸을 숨기고 있던 혈황묘로 떨어졌다. 그것도 혈황이 봉인되어 있다고 알려진 커다란 검붉은 바위를 직격했다.

그 바람에 곁에 있던 청운도 시퍼런 번개의 기운에 휩싸였다. 푸르스름한 광채가 그의 몸을 삼켜버렸다.

찰나의 순간 주마등처럼 과거의 시간이 흘렀다.

‘아, 안… 돼…!’

커다란 고통에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청운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지지직거리며 그의 전신을 태울 것처럼 번쩍거리던 시퍼런 광채가 그의 가슴 쪽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순간 가슴 쪽에 튀어나와 있던 묵옥 목걸이가 청광으로 물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크크크크.]

어디선가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스로 눈을 뜬 청운은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차갑고 끈적거리는 짙은 어둠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뭐지?’

곁에 있던 붉은 바위가 크르렁거리며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쩍 쩌저저적-

바위 위쪽에서 시작된 실금이 그대로 아래로 전해지며 길게 이어졌다. 정확히 위에서부터 아래로 이어진 실금에서 붉은빛이 스며 나왔다.

붉은 바위가 부르르 진동하자 실금이 점점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쩍! 하고 둘로 쪼개졌다.

쿠웅!

화아아악!

붉은빛이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사당 일대를 환하게 밝힐 만큼 엄청난 빛이었다.

강렬한 빛이 빗줄기에 사그라졌다가 다시 칠흑같이 차가운 어둠에 잠겼다.

그럼에도 오직 한 곳만은 여전히 밝았다.

벼락에 직격당한 붉은 기운이 뭉쳐 있는 곳.

[드디어 봉인이 풀렸군!]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쪼개진 붉은 바위가 있는 곳의 중심에 붉은 무언가가 우뚝 서 있었다.

안개 같은 붉은 아지랑이가 사방을 휘감았다. 기쁨에 춤이라도 추는지 사방으로 붉은 아지랑이가 요동쳤다.

[그런데… 이 비리비리한 놈은 뭐지?]

붉은 그림자가 쓰러져 있는 청운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차가운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주변에 울려 퍼졌다.

뭐가 그리도 못마땅한지 전신을 휘감고 있는 아지랑이가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냈다.

그림자에서 붉은 아지랑이가 뻗어 나오더니 쓰러져 있는 청운의 몸을 휘감았다.

허공으로 서서히 떠오르는 청운은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뭐야, 번개에 맞아서 몸이 엉망이잖아?]

붉은 바위와 붙어 있던 청운도 벼락을 맞은 터라 새까맣게 타 죽거나 몸이 터졌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천운인지 그 자리에서 즉사하지 않고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제길, 곧 죽겠군.]

겉모습은 그나마 괜찮은데 혈맥이 제멋대로 터지고 막혀버렸다. 죽지 않고 숨이 붙어 있는 것이 용할 정도였다.

아마도 껄떡거리는 숨결에 마지막 미련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러나 붉은 아지랑이에 쌓인 그림자는 죽어가는 몸에 관심이 없었다.

[새로운 육체를 찾아봐야겠어.]

붉은 아지랑이들이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길게 뻗은 가느다란 빛줄기가 끝없이 뻗어 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뻗어 나가던 빛줄기가 다시 돌아왔다.

[젠장, 이러면 곤란한데.]

인근에 원하는 육체가 없었다. 화전민이나 약초꾼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사실 아무도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몇몇 인간을 발견하기는 했다.

꼬부랑 할망구 셋과 뼈만 남아서 곧 죽게 생긴 늙은이 둘.

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그런 몸으로 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빌어먹을. 골치 아프게 됐군.]

봉인이 풀렸는데 차지할 육체가 없다니.

스르르 붉은 안광이 아래로 향했다. 곧 죽을 청운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다시 붉은 아지랑이가 청운의 몸을 휘감아서 들어올렸다.

혹시 몰라서 이리저리 청운의 몸을 살폈다.

[그냥 이 자식이라도 써먹을까?]

그런데 아무리 살펴도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몸이 엉망이었다.

[흐음. 몸이야 고치면 되고… 뇌기가 문제인데…….]

파사의 힘을 품고 있다는 뇌의 기운은 자신에게 상극이었다.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었다. 눈앞의 다 죽어가는 청운 말고는 영혼의 행동반경 안에 제대로 된 육체가 없었다.

[방법이 없나?]

시간만 많다면야 다른 육체를 찾아보겠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봉인이 풀리고 정해진 시간 안에 육체를 차지하지 못하면 그대로 영혼이 소멸되고 만다.

햇살을 받아도 마찬가지다.

이제 곧 해가 뜰 터…….

[어쩔 수 없이 이놈이라도 살려야겠군.]

스으으윽.

붉은 아지랑이가 청운의 몸을 감쌌다.

아지랑이는 수천수만 가닥의 실타래가 되어서 청운의 몸을 둘둘 말았다.

붉은 아지랑이에 쌓여 있던 사람의 모습이 점점 드러났다. 흐릿한 영혼의 상태였는데, 황룡이 수놓인 붉은 장포를 입고 있는 중년의 사내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꼼짝달싹하지 않을 것 같은 강인한 인상.

그가 천산의 대호처럼 부라린 눈으로, 고치가 된 청운의 모습을 내려다봤다.

고치가 반딧불이같이 깜빡이며 붉은빛을 발했다.

깜박이는 시간이 서서히 빨라졌다.

깜박임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중년 사내의 오른손이 스윽 올라갔다.

손끝에서 한 줄기 굵은 핏빛의 빛줄기가 고치로 변해버린 청운에게 뻗어 나갔다.

둘이 연결되는 순간, 중년 사내의 영혼도 같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할수록 중년 사내의 형상이 점점 흐려졌다.

이윽고, 중년 사내의 영혼도, 둘을 잇고 있던 붉은 줄기도 바람결에 흩어졌다.

휘이이잉.

청운을 감싸고 있던 빛의 누에고치는 여전히 붉은빛을 깜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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