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49)
정령의 땅
그르릉!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석문이 열렸다.
석문 안쪽은 아주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어스름한 새벽 같은 밝기다.
“왜 갑자기 경건해지는 거죠?”
안으로 들어선 금장생이 물었다.
몇 번 숨을 들이켜자 머릿속이 차분해지며 착 가라앉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성스러운 기운으로 가득 찬 어떤 장소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너무 조용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봉란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녀 역시 성스러운 기운에 압도돼 아무도 없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말하지 못했다.
“전에 들어와 봤다고 하지 않았나요?”
“하지만 왜 그런 기분에 휩싸이는지는 몰라요.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요.”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만 끄덕였을 뿐 너무 조용해서 그런 것 같다는 봉란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곳에는 고요함을 넘어선 어떤 것이 있었다.
그것은 범접하는 게 죄스러울 정도로 순수하고 고결했다. 발을 내디뎌 땅을 밟는 것조차 불경스러울 지경이었다.
문득 옷을 벗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입은 채 이곳에 서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어색했을 텐데.
다행히 기온은 따스했다.
“그런데 여기가 어떻다는 거죠?”
금장생은 물었다.
지금까지 상황으로 보면 그다지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곳의 고요를 ‘죽음 전 안식’이라고 해요.”
“‘죽음 전 안식’이라고요?”
“네.”
봉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건가요?”
“그건 두고 보면 알아요.”
봉란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금장생은 좌우를 살피며 봉란을 따랐다.
주위는 크고 작은 물웅덩이와 구덩이로 가득했다.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바람도 부는 것 같았다.
잔뜩 긴장한 채 일각 정도를 걸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응?”
금장생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앞서가던 봉란이 봉분을 향해 절을 하고 있었다. 금장생은 봉란 뒤에 서서 절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엎드리자 모든 것이 다 보였지만 피가 빨리 돈다거나 욕정이 인다거나 하지 않았다.
만일 세상이 이런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면 겁탈 같은 성범죄는 일어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누구죠?”
그녀가 절을 마치자 물었다.
“제게 무공과 내공을 주신 분이예요.”
“절색絶色 봉우라?”
“네.”
“여긴 성주가 기연을 얻은 장소였군요.”
“그분 말고도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최후를 맞았어요.”
“그런데 이 안에 무슨 비밀이 있다는 겁니까?”
“우리 황가는 무공만으로 적과 싸우는 종족이 아니었다고 해요.”
“그럼?”
“자연이 지닌 힘 중 몇 가지를 몸 안으로 끌어들여 그 힘과 무공을 합쳐 싸웠다고 해요.”
‘그런 힘을 아세요?’
금장생은 라에게 물었다.
―광령전사狂靈戰士의 후예가 아직 남아 있을 줄은 몰랐구나.
‘광령전사가 뭐죠?’
―광령전사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정령전사를 알아야 한다.
‘정령을 받아들인 전사를 정령전사라고 하는 모양이군요.’
―그렇다. 하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인 게 아니다. 정령을 잡아 와서 강제로 계약을 맺게 한다. 그럼 정령은 늘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취약한 정신 상태는 분노의 정령 퓨리의 좋은 먹잇감이 되고, 약간의 정신적 충격만으로도 퓨리의 노예가 되고 만다. 보통 퓨리의 노예가 된 병사를 광전사라고 부르는데, 광전사는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쏟아 낼 때까지 무기를 휘두르는 미친놈을 말한다. 팔이 잘리거나 다리가 잘려도 절대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광전사를 재우는 방법은 목을 치는 것밖에 없다.
‘광령전사는 퓨리의 노예가 된 정령전사를 말하는 거군요.’
―그렇다. 내 기억에 의하면 그들은 늘 선봉에서 싸웠다. 광령전사가 되면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여덟 가문 또한 그들의 존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탐탁지 않게 여긴 이유가 뭐죠?’
―원래 황가는 방문자들로부터 가장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노예 가문이다. 그 덕분에 방문자들로부터 받은 대우는 노예 이상이었다. 서열을 매긴다면 중간 계급 정도는 됐을 게다.
‘또 다른 지배계급이었단 말이군요.’
―맞다. 그리고 또 강했다. 팔왕가의 왕들은, 방문자들을 몰아낸다고 해도 황가의 지배를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여덟 가문은 방문자들이 연합하여 황가를 공격할 거라는 정보를 입수하고도 돕지를 않았다.
‘양패구상하기를 바랐군요.’
―그랬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방문자들은 전력 손실을 거의 입지 않은 채로 대승을 거뒀고 황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다. 가장 강했던 황가와 방문자들의 전쟁이 어떻게 해서 방문자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 오니까 알 것 같구나.
‘황가가 일방적으로 당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바로 여기, 정령의 땅 때문이었다.
‘정령의 땅이라고요?’
―정령의 땅은 정령들에게 휴식의 장소다. 즉, 아무리 분노한 정령이라고 해도 정령의 땅으로 들어서면 순한 양이 된다는 거다. 그건 분노의 정령 퓨리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그럼 이곳 정령의 땅을 만든 자들은 방문자들이라는 건가요?’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런 다음 광령전사들을 이곳으로 유인했을 게다.
‘이곳으로 들어온 광령전사들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테고요?’
―방문자들은 광령전사들을 파리 잡듯 죽였겠지.
‘그런데 여기가 어떻게 황가의 성지가 된 거죠?’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 여자가 널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해요.’
금장생은 봉란을 보았다.
“누구와 전음을 나눈 거죠?”
그녀는 금장생이 누군가와 전음을 나눴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게…….”
금장생은 말끝을 흐렸다.
라에 대해 말해 줘야 할지, 선뜻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가 망설이자 봉란의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봉란은 금장생 앞에 똑바로 섰다. 그리고 말했다.
“날 보세요.”
금장생은 봉란을 보았다.
“난 지금 당신 앞에 알몸으로 서 있어요. 이곳으로 오기 전에는 사랑도 나눴고요. 물론 사랑을 나눈 걸로 당신을 붙잡을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당신이 내 몸을 원한다면 거절하지 않을 거예요. 대가는 바라지 않아요. 책임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한 가지, 성적 노리개였다는 느낌은 받고 싶지 않아요.”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사랑을 나눈 사실을 들먹이지 않아도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건 알려 주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분은…….”
금장생은 왼팔을 들었다. 그러자 악마수 표면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나는 라다.”
금장생이 말하기도 전에 라가 자신을 소개했다.
“엄마야!”
갑자기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봉란은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얼른 가슴과 아래를 가렸다. 그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뭐, 뭐죠?”
“나는 이 녀석 팔에 차고 있는 물건 속에 있다.”
“맙소사.”
봉란은 금장생의 팔로 시선을 주었다.
말을 할 때마다 악마수의 색이 약간씩 변했다.
“반갑다.”
“네.”
“나는 앞을 못 보니까 그렇게 가릴 필요 없다.”
“그, 그래요?”
봉란은 안도의 숨을 쉬며 두 팔을 내렸다.
그녀는 너무 놀라 ‘그렇게 가릴 필요 없다.’는 말에 어폐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문득 수갑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이 녀석의 자아라고 보면 된다.”
“그 수갑의 영혼이란 말인가요?”
“그렇다.”
“그랬군요.”
봉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지 않느냐?”
“제가 놀라야 해요?”
봉란은 되물었다.
“방문자라면 모를까, 중원인이라면 놀라야 정상이다.”
“이곳을 한번 들어왔다 나가면 이 세상에 놀랄 일은 더 이상 없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이곳에서 큰일을 겪은 모양이구나.”
“곧…… 기다릴 필요도 없겠네요. 지금부터 나를 따라와야 해요. 알았어요?”
봉란은 금장생을 보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스아아악! 스아악! 스아악!
금장생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태고의 정적을 깨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금장생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일상적인 공포가 아니라,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되는 신성한 뭔가를 깨트렸을 때의 불길함이 온몸을 짓눌렀다.
“뭐죠?”
금장생은 봉란 곁으로 바싹 다가가며 물었다.
“가요.”
파앗!
봉란은 바닥을 찼다.
금장생은 얼른 봉란을 따라 달렸다.
캬아아아아! 크아아아아! 캬우우우우우!
섬뜩한 소성이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땅속 저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악마의 울부짖음 같았다.
금장생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푸아악! 츄아악! 푸아악! 츄아악!
사방에서 투명한 물줄기와 새빨간 불길 그리고 푸른색 기체가 솟구쳐 올랐다.
“맙소사!”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허공으로 솟구친 그것들의 끝에는 사람의 얼굴과 비슷한 것이 자리해 있었다.
그런데 커다란 눈만 있을 뿐 코와 입과 귀는 없었다.
주먹 크기의 커다란 눈동자는 번들거리는 광기로 가득했다. 길이는 십 장 정도고 두께는 어른 허벅지만 했다.
십오 장 높이까지 솟구쳤지만 아직 꼬리는 커다란 구덩이 속에 박혀 있었다.
쿠어억! 캬아아악! 크아아아!
괴성과 함께 허공으로 솟구쳤던 물체가 일제히 방향을 틀어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머리 모양 또한 달라져 있었다.
눈만 있던 얼굴 형태는 사라지고, 끝이 뾰쪽하고 날카로운 무기로 변해 있었다.
구덩이에서 나온 물체의 의도는 명백했다.
“우릴 죽이려는 건가요?”
금장생은 봉란 곁으로 바싹 붙으며 물었다.
“네.”
봉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움직였다.
퍼억! 퍼억! 퍼억!
일 장 떨어진 곳으로 거대한 무기가 틀어박혔다.
‘이것들은 뭡니까?’
금장생은 라에게 물었다.
―정령이다.
‘정령은 원래 다 이렇습니까?’
―아니다. 정령은 자연계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안정적인 종족이다.
‘그럼 이건 다 뭡니까?’
“이크!”
금장생은 오른편으로 한 걸음 이동했다.
퍼억!
둔탁한 소성과 함께 어른 허벅지 두께의 정령이 땅속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끝이 날카롭게 바뀐 정령이 파고든 깊이는 무려 일 장에 달했다.
푸아악!
공격에 실패한 정령은 고개를 쳐들었다.
캬아아아! 크아아아! 캬우우우우!
또다시 네 존체의 정령이 구덩이처럼 보이는 곳에서 솟구쳤다.
‘저건 안정적인 게 아니라 폭주 상태인 것 같은데요?’
―폭주 상태 맞다.
‘왜 그렇게 된 겁니까?’
―계약자가 계약을 해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정령은 계약자가 계약을 해지하지 않고 죽으면 폭주하게 되나요?’
―그렇다. 하지만 대부분 폭주하다가 소멸한다.
‘그런데 저것들은 왜 소멸하지 않는 거죠?’
―여긴 정령의 땅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정령이 소멸할 수 없는 장소란 말이군요.’
―맞다. 그래서 저 녀석들은 소멸하지 못하고, 살아 있는 생명체를 향해 광기를 발산하고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