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48)
그가 알고 있기로는 팔왕가다. 그런데 봉란은 구왕가라고 하였다.
왕가라는 명칭은 시대마다 사용했지만 여덟 개에서 아홉 개의 가문을 총괄하여 왕가라고 칭했던 때는 전란의 시대뿐이다.
게다가 봉란은 고대라고 하였다.
“구왕가를 아세요?”
“구왕가는 모르지만 팔왕가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고 있죠?”
“마가, 화가, 해가, 전가, 혈가, 철가, 사가, 암가 여덟 가문을 팔왕가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선조는 방문자들과 싸웠던 노예들이었고요.”
“그걸 어떻게…….”
봉란은 멍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전란의 시대를 알고 여덟 가문의 탄생 배경까지 아는 건 여덟 가문 중 한 곳에 속한 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아니, 그곳에서도 수뇌라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문득 그런 것들을 모두 알고 있는 금장생의 정체가 궁금했다.
“당신은 누구죠?”
“강신술사이자 장사꾼이라고 말했을 텐데요?”
“방금 당신이 말한 건 강신술사나 장사꾼이 알 만한 것들이 아니에요.”
“전에 진가장에서 강시를 발굴할 때 고용된 강신술사의 한 명이 나였다고 하면 설명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삼천인을 발굴한 사람 중 한 명이라는 말인가요?”
“그 사람일 뿐만 아니라, 마천인을 데리고 낙양 진가장으로 갔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봉란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의 사건은 잘 알고 있다.
만인물성 또한 은밀하게 마천인을 쫓았다. 하지만 둔황에서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모든 이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유유히 사라진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장생이라니.
놀랍기보다는 묘한 인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황가에 대해 말해 주십시오.”
“조금만 더 가면 광장이 나와요. 거긴 여기보다 훨씬 따뜻해요.”
“옷은…….”
“거긴 쉼터이긴 하지만 천 년도 더 된 곳이라 천은 물론이고 커다란 나뭇잎도 없어요.”
“그래도 따뜻하다니까 여기보다는 낫겠네요. 어서 가요.”
“네.”
두 사람은 부지런히 걸었다.
태초의 상태였지만 둘뿐이라 부끄러움은 덜했다.
석굴 형태의 통로를 따라 십여 장 정도를 걸었을까? 갑자기 환한 빛과 함께 널따란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은 지름이 십오 장 정도였다. 원기둥 형태였는데, 둥근 벽을 따라 눈에 익은 등이 이 장 간격으로 걸려 있었다.
마법등이었다.
봉란의 말처럼 광장은 지금까지 지나쳐 왔던 통로보다 훨씬 따뜻했다.
금장생의 시선이 광장 후미로 향했다.
따스함의 원천은 그곳에 있었다.
후면 벽 바로 아래쪽에 지름이 반 장 정도 되는 못이 있었다. 그곳에서 피어오른 열기가 광장을 따뜻하게 해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기로 가면 따뜻한 물로 목욕도 가능해요.”
봉란은 못을 가리켰다.
“그런데…….”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따뜻한 물이 있으면 공기가 습해지는 건 당연하다.
습해진 공기는 위로 올라가 천장에 물방울로 맺히게 되고 일정 무게가 되면 아래로 떨어진다.
오랜 기간 떨어진 물방울은 설사 바닥이 바위라고 해도 흔적을 남긴다.
그런데 못 주변 바닥은 깔끔했다. 게다가 광장 공기도 습하지 않았다.
“내가 신기한 거 보여 줄까요?”
봉란이 말했다.
“신기한 거요?”
“와 보세요.”
봉란은 금장생을 데리고 못으로 갔다. 그리고 상체를 숙여 손바닥으로 물을 받았다.
“나무 관세음보살!”
금장생은 불호를 읊었다.
봉란은 자신이 알몸이란 사실도 잊은 것처럼 보였다.
“흔한 경험 아니니까 실컷 즐기세요.”
봉란은 싱긋 웃었다.
“보여 준다는 게 뭔데요?”
금장생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이거예요.”
봉란은 손바닥에 받았던 물을 자기 가슴에 뿌렸다.
“애걔.”
금장생은 어이없는 얼굴로 봉란을 보았다.
뭔가 대단한 걸 보여 줄 것처럼 하더니 기껏 가슴에 뿌리고 있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알몸 여자의 선정적인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데요?”
“이걸 보세요.”
봉란은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아, 글쎄 성주 가슴은 중원 최고…… 어?”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유두 끝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져 나오더니 연못을 향해 날아갔다. 반 장 정도를 날아간 물방울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거기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곳을 타고 흐르던 물방울도 일제히 못을 향해 날아갔다.
금장생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한 번 더 해 보세요.”
금장생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알았어요.”
봉란은 못으로 가서 물을 떴다. 이번에는 자기 몸이 아니라 바닥에 뿌렸다.
스윽! 스윽! 스윽!
이번에도 역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바닥에 뿌렸던 물이 살아 있는 것처럼 못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연못 속으로 들어가 다른 물과 합쳐졌다.
“어떻게 된 거죠?”
금장생은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나도 몰라요. 나도 여기서 목욕을 하다가 발견한 거예요.”
봉란은 연못 안으로 들어갔다.
“아! 좋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어루만져 주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녀의 얼굴에 흡족한 표정이 어렸다.
“들어오세요.”
봉란은 금장생을 불렀다.
“찝찝하지 않으세요?”
금장생은 미심쩍은 얼굴로 못 앞으로 가며 물었다.
“처음엔 그랬는데 몇 번 하다 보니까 오히려 닦을 필요가 없어서 더 편해요.”
“못이 몸에 묻은 물기를 모두 빨아들인다는 건가요?”
“조금 전에 직접 봤잖아요. 또 보고 싶어요?”
츄악!
봉란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물이 흘러내렸다.
‘완전 유혹 덩어리네.’
금장생은 내심 신음을 내뱉었다.
봉란의 몸에서 물이 떨어져 나가는 건 보이지도 않았다. 물기를 머금은 충격적인 몸매만 눈 안 가득 들어왔다.
‘요물이야, 요물…… 응?’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분명 물속에 뭔가가 있었다.
금장생은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 온도는 조금 전 봉란이 그랬던 것처럼 ‘아! 좋다.’라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올 정도로 딱 알맞았다.
그 와중에도 봉란의 몸에 있던 물이 떨어져 나갔다.
‘죽지 않는 자들 같네.’
문득 조각조각 잘려도 다시 붙는 언데드처럼 보였다.
“등 좀 밀어 주세요.”
다시 물속으로 앉은 봉란은 금장생 앞으로 다가와 등을 들이댔다.
금장생은 봉란의 등을 뽀득뽀득 소리가 나도록 문질렀다.
봉란의 피부는 전분 가루를 쥔 것처럼 부드러웠다.
봉란의 등을 문지르면서도 그의 눈은 물속으로 향해 있었다.
물속에는 바위 사이에 작은 틈이 나 있었는데, 조금 전 눈동자가 나타난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또 나왔다.’
금장생은 틈을 발로 막아 버렸다.
‘당신은 누굽니까?’
그리고 눈동자에게 사념을 보냈다.
눈동자가 원래 크기보다 한 배 반 이상 커졌다. 그리고 금장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동자에는 ‘어떻게 날 볼 수 있지?’ 라는 질문이 담겨 있었다.
‘이름 없어요?’
금장생은 다시 물었다.
―아그리니아다!
‘이름 말고 정체를 묻는 겁니다.’
―날 어떻게 볼 수 있는 거지?
‘내가 먼저 물었습니다.’
금장생은 아그리니아라고 하였던 존체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물의 정령이다.
“허!”
금장생은 신음을 내뱉었다.
정령에 대해서는 무혼과 바타르에게 들었다.
그들은 중원은 정령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서 정령이 태어나지도 않고, 설사 태어난다고 해도 살아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황가 성지라는 곳에서 정령이란 존재를 만난 것이다.
“왜 그래요?”
봉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 아닙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알아듣는다면 말해 주겠지만 봉란을 비롯한 중원인들은 아직 정령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정령에 대해 말하면 혼란만 가중될 게 뻔하다.
시간이 나면 천천히 설명해 주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문지르고 있는 데는 등이 아닌데요?”
“네?”
금장생은 시선을 내렸다.
“어?”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두 손으로 열심히 문지르고 있는 곳은 봉란의 등이 아니라 가슴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자기 손이 여자 가슴을 주무르는 것도 몰라요?”
“조금 있다가 설명해 줄게요.”
“계속해도 돼요.”
“네?”
“계속해도 된다고요.”
봉란은 금장생의 가슴에 등을 기댔다.
하지만 금장생은 봉란의 행동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다시 물의 정령 아그리니아를 보았다.
‘혼잔가요?’
―아니다. 나는 다른 정령과 함께 있다.
‘그 정령은 누굽니까?’
―불의 정령 카르디아다.
‘그럼 물을 데워 이곳을 따뜻하게 만드는 존재가 바로 카르디아겠네요?’
―그렇다.
‘정령은 원래 중원에서 생활할 수 없다고 내 친구가 그러던데, 당신들은 아닌 모양이죠?’
―마나가 부족해서 활동이 불가능한 것은 맞다.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이곳이라면 어디를 말하는 거죠?’
―저 문 안쪽을 말한다.
아그리니아는 황천지문이라고 쓰인 출입문 쪽을 가리켰다.
‘문 안쪽은 어떤 곳입니까?’
―중원 천지에 딱 한 곳뿐인 정령의 땅이다.
‘정령의 땅?’
―그렇다.
‘그럼 혹시 당신이 사는 곳도 저 안쪽인가요?’
―그렇다. 나와 카르디아는 거기서 살고 있다. 이 못 또한 그곳과 이어져 있고.
‘여기서 떠날 수 없나요?’
―우린 이곳에 묶인 몸이다.
‘지박령이란 소리네요?’
―우린 귀신이 아니고 정령이다!
아그리니아가 버럭 소리쳤다.
‘어쨌거나 만나서 반가워요. 당신들을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면 어떻게 하면 되죠?’
문득 황가 성지의 비밀을 지니고 있는 자가 물의 정령 아그리니아와 불의 정령 카르디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봉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장생이 아그리니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그녀는 돌아 앉아 금장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하세요.”
“이건 뭐죠?”
봉란은 금장생 왼팔에 끼워져 있는 악마수를 가리켰다.
“이름은 악마수고 암기를 발사하는 무기면서 팔 하박을 보호하는 보호댑니다.”
“가슴 보호대와 비슷한 거군요.”
봉란은 금장생이 옷과 함께 벗어 던진 방패 형태의 가슴 갑옷을 떠올리며 물었다.
“네.”
‘영감님!’
금장생은 라를 불렀다.
―왜! 여긴…….
라는 깜짝 놀랐다. 그의 감각으로 아주 익숙한 기운이 잡혀 들었던 것이다.
그건 바로 고향의 기운이었다.
‘정령의 땅이라고 하더군요.’
―정령이 있다는 거냐? 아니, 있군.
라는 전면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동자 두 개가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라다. 넌 누구냐?
라는 정령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아그리니아다.
―죽고 싶은 게냐?
라는 강한 기운을 쏟아 냈다.
―흥! 감히 에고족 놈이 내게 눈을 부라린다는 거냐?
아그리니아도 지지 않고 광포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츄아악!
두 기운이 부딪치자 물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헉!”
“억!”
금장생과 봉란은 깜짝 놀랐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금장생은 버럭 소리쳤다.
조금 전 상당한 양의 내기가 라를 통해 빠져나갔던 거였다.
―저 계집이…….
‘말로 하세요, 말로. 자고로 여자와 어린애와 싸우는 놈은 소인배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저것이 여자인 줄 어떻게 하는데?
‘인사를 했으니까 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게 뭔지 아느냐?
‘물의 정령이라고 하더군요.’
―물의 정령? 흥!
라는 코웃음을 쳤다.
‘왜요?’
―저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자.
라는 다시 아그리니아에게 집중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라는 물었다.
―데블 본이라고 불렸던 미친놈 아니더냐?
―그런데도 눈을 부라린단 말이냐?
라는 버럭 소리쳤다.
―중원에서는 네놈이 대단했을지 모르지만 여긴 내 구역이다, 놈. 한 번만 더 주둥일 놀리면 소멸시켜 버릴 것이다!
아그리니아는 버럭 소리쳤다.
―이런 썅!
악마수가 시뻘겋게 변했다.
그러자 금장생의 단전에서 엄청난 내공이 빠져나갔다.
‘그만!’
둘 사이에 끼어든 사람은 금장생이었다.
―상관하지 마라, 금장생!
라가 버럭 소리쳤다.
‘내가 악마수를 빼기를 바라는 건가요?’
―그, 그건…….
‘그러니까 지금부터 입 다무세요. 아셨죠?’
―알았다.
‘그리고 사과하세요.’
―무슨 사과?
‘저분께 막말을 하셨잖아요.’
―자식아, 난…….
‘사내는 이럴 때 사과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라는 수천 년을 더 산 분 아닙니까.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었다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알았어, 자식아!
라는 버럭 소리쳤다. 그리고 아그리니아에게 사과를 했다.
―미안하게 됐다.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종족을 만나서 흥분한 모양이다.
아그리니아도 라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왜 이곳에 있는 거냐?
라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린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가 없다.
―그건 무슨 소리냐?
―우리의 숙주가 이곳으로 들어와서 목숨을 잃었다. 다행히 나와 카르디아는 안쪽과 이곳을 오가고 있지만 다른 정령들은 숙주가 죽은 장소에 속박돼 버렸다.
―움직일 수 없다는 거냐?
―그렇다.
―거기서 벗어날 방법은 있는 거냐?
―있다.
―뭐냐?
―우리를 받아 줄 수 있는 새로운 숙주가 있어야 한다.
―이 녀석은 어떠냐?
―그 녀석을 선택하는 건 내가 아니다.
―하면?
―광령장군을 찾아야 한다.
―그놈은 어디 있는데?
―모른다.
―그놈을 찾는다고 해도 계약을 해야겠지?
―물론이다. 하지만 계약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본령이 있는 곳까지 와야 하는데, 쉽지 않다. 어쩌면 오는 도중에 죽을지도 모른다.
―나는 데블 본이다, 아그리니아.
―저들이 죽는다고 해도 내게 책임을 묻지 마라.
―물론이다.
―그럼 기다리겠다.
아그리니아는 틈새를 향해 갔다.
“어?”
금장생의 눈이 커져다.
발이 저절로 들어 올려지더니 틈새로 눈동자가 사라진 거였다.
―발 좀 닦고 다녀, 자식아.
‘풋!’
금장생은 내심 피식 웃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겁니까?’
금장생은 라에게 물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라.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못을 나갔다.
츄악!
그의 몸에 붙어 있던 물기가 일제히 못 안으로 흘러들어 갔다.
금장생에 이어 봉란도 일어났다.
“저기로 가면 됩니까?”
금장생은 황천지문이라고 쓰인 글을 가리켰다.
“네.”
봉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곧바로 황천지문 앞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