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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227화 (227/408)

227화. 회복 (1)

검은 암석과 사이사이 보이는 회색빛 수정.

흑석대륙이라는 이름이 실감 나는 모습을 지루하게 감상하며 준혁은 선계 수도자의 뒤를 쫓고 있었다.

‘벌써 열흘이 넘게 움직였건만. 아직도 같은 모습이라니.’

지구에서 반대편 표면까지 날아가는데 마음먹고 움직인다면 반나절이면 충분했기에, 흑석대륙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이 나질 않을 정도였다.

준혁은 앞서 날아가고 있는 두 사람에게 묻고 싶은 말들이 한가득이었지만, 혹시나 하계에서 비승 했다는 것이 탄로 날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상대방이 알게 된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었지만, 지금 몸 상태는 최악 중의 최악. 되도록 어떤 일도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랬기에 화목단을 쥐여주면서까지 안전한 장소를 찾아가려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상황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다.

‘마선경….’

공간의 틈을 간신히 뚫고 구지대륙과 맞닿아있던 산봉우리 위로 내려선 순간, 자신의 세포 하나하나를 파악하듯 내려보던 거대한 눈동자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선계에 가게 된다면 귀찮게 될 겁니다.

귀원패의 경고 아닌 경고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치 종속의 인으로 연결된 것처럼 시야를 공유 당하는 것 같던 느낌.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고는 원영에 집중했다.

‘그래도 방법이 있었기에 다행이지.’

마선경에게 노출된 후,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갖은 방법을 전부 동원했지만, 모든 게 무용지물이었다.

마지막에 이르러, 선계에 오른 후엔 사용할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무영기를 사용한 후에야 겨우 그와 이어진 연결을 끊을 수 있었다.

‘이곳에 와서도 계면의 압박을 피할 때처럼 수행을 억누르게 될 줄이야. 우선 몸을 회복하고, 마선경과의 연결을 끊을 방법을 찾아내는 게 먼저다. 그다음엔….’

오래전 귀원패가 남긴 말에 의하면, 여러 마선을 거느린 준혁을 법문과 선마궁 양쪽 세력이 가만두질 않을 거라고 했다.

물론 공격이 아닌 영입에 가까운 접촉이 있을 거라고 했지만, 지금 준혁은 어떤 세력에도 편입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세력에 들어간다는 것, 특히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손아귀에 잡힌다는 것은 자유를 잃고 그들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인연실로 전생의 인연을 찾아줄 적지주를 찾아야 하는 준혁으로서는 행동이 제한되는 그런 일은 절대 지양해야 할 일이었다.

‘여서령을 찾은 후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귀속 당할 순 없지.’

마선경의 시선을 느낄 때쯤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도 있었다.

오래전 하늘정원에서 만났던 괴조. 그자 역시 선계에 도착하자마자 어떻게 안 것인지 바로 말을 걸어왔다.

-어라? 넌 뭐지? 왜 여러 명의 기운이 느껴지는 거지? 너 뭐야? 어? 야? 내 말 안 들려? 야?

하늘정원에서 만났던 조각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존재감이 느껴졌지만, 그와 다르게 경박하기 그지없던 목소리.

다행히 무영기로 인해 그 목소리도 차단할 수 있었기에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거부할 수 없는 간섭으로 꽤 고생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제 하루만 더 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겁니다.”

그때, 앞서 날아가던 구로반이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자, 뒤따르던 독고진과 준혁 역시 속도를 늦췄다.

“이곳부터는 보이지 않는 결계가 보호 중이니, 제 뒤를 잘 따라오셔야 합니다.”

속도를 늦춘 이유에 관해 물으려는 찰나, 구로반이 설명과 동시에 바닥으로 내려섰다.

여전히 검은 암석과 회색 수정뿐이었지만, 구로반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몸에 가해지는 압력이 수배 늘어나기 시작했다.

‘암흑기다!’

“압력을 피하겠다고 경로를 이탈하면 지금 받은 압력의 수십 배를 견뎌야 할 겁니다. 조심히 따라오십시오.”

공간의 틈에서 지겹게 겪었던 암흑기. 온몸을 내리누르는 힘은 그것과 비슷했다.

그때 구로반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 지역 일대가 어르신의 영역으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안전한 수련처가 영역 안이라고?’

준혁이 영역을 사용할 수 있는 소천경(小天境)에 이르지는 못했다지만, 어설프게나마 영역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고,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의 상식선에선 영역은 사용자의 의지가 미치는 공간. 그런 곳에서 수련을 한다는 건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말씀이 다르시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안전하게 수련할 수 있다고 하시더니, 누군가의 영역 안에서 어찌 수련을 한단 말입니까?”

준혁의 질문에 구로반이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어르신께선 대천경(大天境)의 끝자락에 이르러 진선(眞仙)에 발을 딛고 계신 분입니다.”

‘대천경이라니….’

선계에 오르자마자 엄청난 강자 곁으로 간다는 사실에 준혁은 찝찝함이 밀려왔다.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경청하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뒤를 따르며 준혁이 대답하자, 겉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역력히 드러내던 독고진도 세차게 고갤 끄덕였다.

“영역을 의지로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 말은….”

“지금 우리가 가려는 은신처의 수도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르신께서 일대를 영역으로 보호하고 있을 뿐, 안쪽은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반원구 형태가 아닌 도너츠 모양의 영역으로 거대한 지역을 뒤덮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것이 가능하다니!’

그것 하나만으로 대천경이라는 경지가 얼마나 까마득한 것인지 깨달은 준혁은 자연스럽게 납득하고 말았다.

***

하루를 꼬박 걸어 도착한 곳은 검은 암석 따윈 찾아볼 수 없는 푸른 풀잎과 꽃이 가득한 곳이었다.

시야 끝에 아른거리는 먼 곳, 낮은 구릉들이 여럿 보이는 것을 제외하곤 청정만이 가득한 장소였다.

“설마. 이것도 영역의 힘입니까?”

결계를 경계로 신천지가 펼쳐져 있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게 아님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럼 두 분은 잠시만 이곳에 대기하고 계십시오. 두 분이 머물 곳을 할당받아 오겠습니다.”

준혁이 또 다른 질문을 꺼내려는 찰나, 무엇이 급한지 구로반은 곧바로 낮은 구릉이 보이는 곳으로 둔광을 일으키며 날아갔다.

그리고는 한참이 지난 후, 하얀 수염을 배꼽까지 기른 노인과 함께 나타나더니 그를 소개했다.

“인사하십시오. 동요문 님입니다. 이곳을 관리하시는 일을 도맡아 하십니다.”

동요문이라는 노인은 뱁새 눈에 얇디얇은 입술을 하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성격이 깐깐하고 계산적으로 보였다.

“두 분께서 이곳에 머물고 싶다 들었소. 크흠.”

노인은 준혁과 독고진을 노골적으로 훑어보더니 턱을 꼿꼿이 세운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에 독고진이 작은 보자기를 꺼내 건넸다. 미리 얘기가 됐던 건지, 노인은 독고진이 건넨 보자기를 가볍게 만지고는 만족한 듯 살짝 웃음을 내비쳤다.

스르륵-

곧 보자기는 흔적도 없이, 마치 손바닥으로 흡수되듯 사라져 버렸다.

‘허, 분명 공간대로 물건을 넣은 것 같은데, 공간대로 여겨지는 물건이 보이질 않다니.’

준혁이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긴 사이, 구로반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수사, 무얼 하시는 겁니까? 성의를 보이셔야지요.

갑작스러운 구로반의 전음에 준혁은 고개를 갸웃하며 상념을 날려버렸다.

-성의라니요?

-이곳에 머무르려면 대가를 지급해야 합니다.

-화목단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준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구로반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건 안내하는 대가 아니었습니까. 당연히 따로 상납해야 합니다.

‘허, 당했구나.’

기억을 되짚어본 준혁은 실제로 안내해준다는 말을 제외하곤 다른 사항을 제시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안전한 곳으로 안내한다길래 당연히 장소의 제공까지 함께라고 생각한 자신을 탓해야 했다.

-단약은 전부 드렸고 가진 것이 없습니다. 후에 따로 드리면 안 되는 겁니까?

-영석도 없으십니까? 100개 정도면 한 달은 머무실 수 있을 겁니다.

영석 100개라는 말에 준혁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공간대를 스쳐 하급 공간대에 영석을 담아 건넸다.

천제단을 발동하는 데 대부분을 소비하긴 했지만, 수중에 십만 개 가량이 남아있었다.

‘다행이군.’

노인은 준혁의 행동에 환하게 웃어주며 공간대를 건네받더니, 잠시 후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이게 무엇이오?”

“영석 100개면 한 달을 머무를 수 있다길래 천 개를 담았습니다.”

준혁의 당당한 태도에 노인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어리둥절해하다가, 잠시 후 파안대소했다.

“하하하, 농이 심하십니다. 범인들이나 쓸법한 이런 쓰레기를 영석이라 내미시다니?”

노인의 웃음에 구로반이 공간대를 낚아채더니 준혁을 가만히 주시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수사, 이런 최하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영석은 아무런 값어치도 하지 못합니다. 여기 담긴 천 개의 돌멩이는 영석 하나의 가치도 없습니다.”

구로반의 설명에 준혁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준혁이 하계에서 가져온 영석은 이곳에선 최하급 영석이라 부르며 범인들이 화폐로 사용할 뿐, 수도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했다.

오직 중급 이상의 영석만을 거래 대상으로 인정해줬다.

문제는 최하급 100개가 하급 하나였고 하급 100개가 중급 하나와 동등한 가치를 지녔다는 것.

그 말인즉 준혁의 공간대에 담긴 영석 십만 개는 이곳 계산대로라면 영석 10개의 값어치밖에 안 된다는 뜻이었다.

“수사 정녕 이런 것뿐입니까?”

생각을 거듭한 준혁은 이미 두 병밖에 없다고 말했던 단약을 또 꺼내는 것보다는 조금 비굴해지더라도 사정을 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 남은 영석을 전부 꺼냈다.

“이걸로 안 되겠습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수련까진 아니더라도 몸을 회복할 때까지만이라도 머물 수 있게 해주실 순 없습니까?”

벌레를 보는듯한 노인의 표정을 보면 절대 허락해줄 것 같지 않았지만, 준혁은 점점 몸 상태가 나빠지는 걸 느꼈기에 사정 조로 말을 꺼냈다.

헌데 어찌 된 일인지, 노인이 반색하며 영석을 받아 갔다.

“사정이 딱한 듯하니, 이번만 봐주겠소. 대신 영기가 짙은 중심부엔 머무를 수 없고, 대황대륙에 근접해 있는 영역의 끝에 자리를 배정해 주겠소. 괜찮소?”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수사.”

준혁은 노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후, 이상한 눈빛으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던 구로반에게도 감사의 표시를 했다.

그러자 구로반이 움찔하더니,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파앙-

구로반이 서두르는 기색으로 자리를 뜨자, 준혁도 빠르게 뒤를 쫓았다.

잠시 후, 준혁이 구로반과 떠나자, 노인은 독고진에게 낮은 구릉이 모여있는 곳을 가리켰다.

“우리는 저곳으로 가면 되오. 갑시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독고진에게 친절한 미소를 보인 노인은 준혁의 뒷모습을 눈에 담고는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단 말이지…. 후훗.”

***

구로반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낮은 구릉들이 모여있는 중심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설명에 의하면 외곽이나 중심지의 차이는 영기의 밀도뿐이라 했다.

“이 근방에 자리를 잡으시면 됩니다. 지상이든 지하든 거처를 마련하신 후, 이 깃발을 꽂아놓으시면 깃발을 중심으로 반경 십리는 누구도 간섭하지 않을 겁니다.”

기본적인 사항에 관해서 설명을 늘어놓던 구로반은 부족한 상납금에 대해서도 말했다.

“우선 수사가 딱해 동요문 님께서도 일정부분 사정을 헤아려주신 듯한데…. 아마 계속 특혜를 줄 순 없을 겁니다. 우선은 회복에 전념하시고, 그 후에 이 일에 대해 다시 논의하면 될 것 같습니다.”

상대의 말이 이치에 맞았기에 준혁은 수긍하고 그를 배웅했다.

그리고는 떠나는 모습을 확인한 후, 분광소를 소환해 지하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하지만 분광소를 조종해 거처를 마련하면서도 한편으론 조금 전 구로반의 태도 변화와 노인의 입술이 살짝 일그러지던 모습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여겼겠지만, 초팔을 흡수한 후 월등해진 초감각은 작은 것도 놓치지 않았다.

‘분명 전음으로 대화를 나눈 후 내 사정을 헤아려준 것이다. 흐음…. 혹시 모르니 준비를 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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