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회복 (2)
지하 깊숙이 내려온 준혁은 진법으로 여러 겹의 결계를 설치한 후, 지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곤 지상에도 보호진과 몇 가지 술식을 남긴 후, 다시 거처로 돌아와 넓은 공동을 만들고 공동 옆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작은 석실을 만들었다.
간단한 거처가 완성되자 공동 중앙에 자리 잡고 내면으로 침잠했다.
‘아마르곤 수사, 제 말이 들리십니까?’
마선경의 시선과 괴조의 목소리를 피하겠다는 듯이 단(丹) 안에 쥐 죽은 듯 기운을 감추고 있는 원영.
그런 원영 주위엔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구슬이 둥실 떠 있었는데, 비술을 이용해 준혁과 함께 선계로 온 종속들이었다.
다만 네 개의 구슬은 지구에서 비술을 사용하기 전과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싱그럽고 밝은 녹색을 띠고 있던 아마르곤의 구슬은 검회색으로 탁해져 있었고, 청호와 산들바람의 구슬도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듯 단단하게 굳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나마 깨어나기 직전 상태였던 도마뱀 두 마리가 잠들어있는 청색 구슬만이 푸른빛을 이따금 내비쳤다.
한동안 내면으로 기운을 흘려보내며 비술을 사용해 구슬에 숨어든 종속들을 부르던 준혁은 깊은 한숨과 함께 천천히 눈을 떴다.
“후우…. 내가 회복하기 전엔 강제로 깨우긴 불가능하겠구나.”
계면 사이, 공간의 틈.
그 안은 연형기 후기에 근접한 준혁에게도 쉬운 곳이 아니었다.
처음엔 아마르곤을 비롯한 영수들의 안전을 고려해 도움을 받지 않으려 했으나, 점점 가중되어가는 압박에 결국 아마르곤의 능력을 끌어다 써야만 하는 상황이 오고 말았다.
문제는 아마르곤의 능력이 도움은 되었지만, 걱정대로 그의 존재가 암흑기를 버틸 수준은 되질 않았던 것.
도움을 주던 아마르곤은 무리를 감행하게 됐고, 결국 반서를 맞아 존재가 위태로워질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아마르곤의 상태가 나빠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암흑기가 내부로 침식해 들어왔고 준혁에게까지 피해를 주기 시작했다.
준혁은 하는 수 없이 다른 영수들의 기운마저 끌어다 몸을 보호해야 했고, 그 결과 지금처럼 모두 화석처럼 굳은 채 죽어가는 상황에 부닥치고 만 것이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영수들의 생명력을 보충해주고 막대한 영기를 불어넣어 주는 게 최선이었지만, 준혁의 상황마저 여의치 않았다.
몸 상태가 나쁜 건 말할 것도 없었고, 마선경의 시선과 괴조의 목소리를 피하고자 무영기로 수행까지 막아놓은 상황.
“절대 그대들이 죽게 두진 않을 것이다. 내 반드시 살려내고야 말 것이야.”
준혁은 내면에 잠든 채 죽어가는 종속들이 들으라는 듯, 목소리에 힘을 실어 작게 읊조렸다.
그리고는 공간대에서 청아한 기운이 느껴지는 검붉은 단약을 꺼내 한참을 바라보았다.
“화신단….”
하늘정원에서 가지고 온 세 알의 화신단 중 남은 두 알.
연형기 후기에 근접한 지금, 적절한 준비만 갖춰진다면 화신단 두 알이면 화신기에 오르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것을 복용한다면 수행을 올리는 것보다는 종속들을 살리는 데 소비되어 버릴 가능성이 컸다.
예전에 아마르곤을 살릴 때처럼.
그럼에도 준혁은 화신단을 소비해 그들을 살릴 생각이었다.
다만 당장은 복용하지 않고, 우선 몸을 회복하는 게 급선무였다.
화신단의 약효를 되새겨보면 지금 준혁의 몸 상태로는 견딜 수 없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때, 거처 입구에 꽂아놓은 깃발이 강렬한 진동과 함께 누군가의 방문을 알려왔다.
거처에 자리 잡은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기에 준혁은 의구심과 함께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입구의 결계를 열어 주었다.
“크흠.”
잠시 후, 수직으로 뚫린 통로를 따라 내려온 자들이 널찍한 거처 안, 공동에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실용적으로 꾸미셨습니다. 거처라기보다는 수련장이란 이름이 어울리겠습니다.”
모습을 드러낸 자는 영석을 받아 갔던 노인, 동요문과 구로반이었다.
“무슨 일로 방문하신 겁니까? 몸을 회복할 때까지는 자유롭게 지내란 듯이 말씀하시더니?”
준혁이 살짝 경계하듯 말끝을 올리자, 노인이 헛기침하며 음흉하게 웃음 지었다. 헛기침이 신호였는지, 구로반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시선이 흔들리는 구로반을 보며 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말해보시지요.”
한참 동안 망설이던 구로반은 노인과 눈을 마주치더니 말을 이었다.
“수사께선 혹시 하계에서 비승하신 겁니까?”
‘이것이었구나.’
갑작스레 태도를 바꿀 때 이상하다고 여겼던 것이 단번에 이해가 갔다.
그렇다는 건 무언가 원하는 바가 있어서 준혁을 결계로 이루어진 영역 안에 머물게 한 것이 분명했다.
‘다른 이들과 동떨어진 외곽에 자리를 마련해준 것을 보면 좋은 의도를 가진 건 아닐 테지.’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준혁이 긍정도 부정도 아닌 반문으로 답하자, 구로반은 확신을 가진 듯 씨익 웃었다.
“역시 그러셨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연형기 초기에 이른 수사께서 최하급 영석을 가지고 다니는데 누가 보아도 이상한 것 아닙니까? 제가 알기론 하계엔 영기 밀도가 낮아 영석의 품질이 매우 나쁘다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쓸데없는 의심을 피하려고 일부러 기운을 내보였거늘….’
준혁이 그들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 혹시나 너무 수행이 낮아 보이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기에 적당히 수행을 조정해 보여주었다.
수행과 가진 물건의 괴리가 의심을 불러오고 만 것이었다.
준혁은 구로반을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헌데 그것이 두 분의 방문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준혁의 당당한 태도가 의외였는지, 구로반과 노인은 잠시 당황하다가 서서히 기운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자는 연형기 후기가 맞구나. 저 노인은….’
구로반은 처음 예상했던 대로 연형기 후기 끝자락에 닿아있었고, 동요문이라 불린 노인은 영기의 기질이 사뭇 다른 것이 화신기 초기 혹은 그 이상으로 느껴졌다.
“하하. 그렇지 않아도 하계의 수사를 그리 찾았는데, 동 선배께서 원하던 바를 찾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뻐하던 구로반은 노인에게 양보한다는 듯 한발 옆으로 비켜났다. 그러자 노인이 앞으로 나오며 비열한 표정을 흘렸다.
“흐흐, 하계에서 올라왔다니, 내 하나만 묻겠소. 그대는 혹 태양목(太陽木)이란 걸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소.”
“처음 듣는군요. 나름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자부하는데, 그런 이름은 생소합니다.”
준혁이 찰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젓자, 노인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 순간, 노인의 손바닥에서 옥간 하나가 날아와 준혁 앞에 당도했다.
“이름이야 계면마다 다를 수 있으니, 한번 확인해 보시겠소이까?”
의사를 묻는 노인의 목소리엔 강요가 담겨있었다. 준혁은 잠시 동요문의 눈빛을 마주 보다, 기감으로 옥간을 살핀 후 이마에 가볍게 스쳤다.
‘이건!’
옥간 안에는 태양목이라 불리는 나무에 대해 상세히 적혀있었다.
태양목은 화신기에서 소천경으로 올라갈 때 꼭 필요한 재료 중 하나였는데, 태양의 기운을 스스로 응축하는 특성을 가진 나무였다.
태양목의 특징 중 하나는 영기 밀도가 높은 곳에선 기운을 응축하지 못하고 수십 년도 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것은 영기 밀도가 낮은 하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종이었다.
그리고 그 특성과 외관은 준혁이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본 적은 없지만, 몇 번이나 가까이에서 본 적 있던….
‘적유목이 이곳에선 태양목이라 불리는구나! 목족에게 태양력을 전해주는 신비한 나무인 건 알았지만, 그것이 소천경에 오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니.’
“어때 정말 모르겠소?”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준혁은 또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처음 봅니다. 제가 머물던 곳엔 이런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준혁은 단호하게 고갤 저었다.
하지만 노인은 믿지 않는다는 듯 실실 웃음을 흘리며 옥간을 회수해갔다.
“그럴 리가 있겠소이까? 모든 계면엔 태양목과 태음목이 존재하거늘, 수사가 모를 리가 없지.”
“선배님의 말대로 모든 하위 계면에 존재할 순 있겠지만, 이미 누군가 가져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소천경에 오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면 지금껏 놔두었겠습니까?”
“뭐? 으하하.”
노인은 준혁의 말이 끝나자 가소롭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던 노인은 손가락으로 준혁을 가리키며 킥킥거렸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 정말 누가 가져갔다면 다시 자라는 데 천 년은 걸릴 테니 그대가 모를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럼 볼일이 끝난 것 같으니, 제가 회복에 전념할 수 있게 자리를 피해주시겠습니까?”
노인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크흐, 수사. 그것 아시오?”
“무엇을 말입니까?”
준혁은 상대방이 물러갈 생각이 없는 것 같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계에서 중천에 이를 땐, 승천문을 통해 올라오는 게 정석이외다. 헌데 수사는 계면의 틈을 강제로 비집고 올라왔지 않소이까?”
황금 기둥의 정체를 구로반이 알았을 테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기에 준혁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
“그 말인즉슨! 수사가 있던 하계엔 정식 통로가 없다는 말이고, 그 말은 아직까지 그 누구도 태양목이나 태음목을 가지러 그곳에 가지 않았단 것을 뜻하지 않겠소? 어떻게 생각하시오? 내 추측에 대해서?”
아니라고 해봐야 수긍하고 물러가지 않을 것 같은 동요문의 단호한 태도.
준혁은 쓰게 웃고는 노인의 눈을 직시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조금 전 말했다시피 그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태양목이니 태음목이니 하는 것들을 들어본 적이 없단 말입니다.”
그 순간, 웃음 짓던 노인이 손가락만 한 자기병을 꺼내 들었다.
“간단하외다. 이 안엔 진실만을 말하게 만드는 진지충(眞摯蟲)이 들어있으니,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대가 하는 말을 전부 믿어 드리리다.”
고서를 통해 진지충에 대해 알고 있던 준혁의 입술이 찌그러졌다. 진지충은 그것을 복용한 사람의 심장에 자리하고 있다가 복용자가 거짓을 말할 경우 심장을 파먹는 극악한 벌레 중 하나였다.
“선배님의 궁금증을 위해 제 목숨을 걸라니, 그것이 합당한 요구라 생각하십니까?”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 준혁이 차갑게 거부하자, 노인의 몸에서 흐르던 기세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흐흐, 쓴맛을 보고 싶다면 보여줄 순 있지. 하계의 술법들이 얼마나 비루한지 확인해 보고 싶다면 손을 써보아도 되네.”
노인의 기세가 바뀐 것을 신호로 구로반은 어느새 삼지창을 꺼내 들더니 살짝 뒤로 물러나 거처의 입구를 가로막았다.
“저를 죽이시려는 겁니까?”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나. 연형기 수사가 얼마나 쓰임새가 많은데.”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저를 받아주신 거군요.”
준혁의 목소리에 쓸쓸함이 담겨있자, 구로반이 살짝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반대로 노인은 기고만장한 듯 대놓고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흐흐, 어쩌시겠나? 진지충을 받아들이겠나? 아니면 실력 발휘라도 해보시려나?”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쉰 준혁은 구로반을 잠시 바라보다가 노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며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땅 꺼지겠구먼, 시간 끌어봐야 달라질 건 없는데, 어쩌시겠나?”
준혁은 답답한 듯 가슴을 살짝 두드리다가 노인을 향해 고갤 들었다.
“선배님, 제가 살던 하계엔 이런 말이 있는데, 혹시 들어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노인이 말해보란 듯 턱을 살짝 올리자, 준혁의 입술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 수 필 승.”
스르륵-
그 순간, 노인의 등 뒤 공간이 갈라진다 싶더니 용천무의 날개를 단, 준혁과 똑같이 생긴 사내가 나타났다.
동시에 그의 손이 노인의 심장을 뚫어버렸다.
푸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