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 약속 (4) >
처소로 날아가던 준혁은 차 수사의 공간대 속을 확인하고는 방향을 틀어 속초 쪽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해안가 끝 집은 조용한 어둠에 잠겨있었다.
준혁은 기감을 퍼트려 주변을 확인하다 주택 내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빠르게 다가갔다.
주택 안에 들어서자 10대 중,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화들짝 놀라며 준혁을 맞이했다.
“누, 누구세요?!”
준혁은 그녀의 얼굴에서 마동화의 얼굴이 느껴지기에 다행이라 여기며 말했다.
“혹시 어머님이 마동화씨?”
“네. 누, 누구세요?”
“겁먹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마동탁 수사의 사제인 최태식이라고 합니다.”
“아···. 혹시. 얼마 전 어머니를 만나고 가신 분인가요?”
“알고 있었습니까?”
준혁이 긍정하자 여자아이는 거실 협탁위에 올려져 있던 노트를 건넸다.
그리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준혁을 향해 호소했다.
“아저씨. 저희 엄마를 죽인 사람 좀 찾아주세요! 경찰들은 수도자가 얽힌 일인 것 같다면서 관심도 두질 않아요. 제발 도와주세요!”
준혁은 그녀를 일으켜 세워 거실 한쪽의 소파에 마주 보고 앉으며 노트 내용을 살폈다.
여자아이가 건넨 노트는 마동화의 일기장이었다. 다른 부분은 볼 필요도 없이, 맨 뒷장을 확인하니. 준혁이 다녀간 후의 심정이 절절하게 적혀있었다.
‘아, 그녀는 이미 마 수사의 죽음을 알아차렸구나.’
일기장엔 준혁의 출현과 갑작스레 생긴 재산. 그리고 그 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오빠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적혀있었다.
아니 추측이라기보다는 확신 같았다. 그와 함께 일기장 하단부는 눈물로 얼룩덜룩해져 있었다.
준혁은 일기장을 소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미 죽었습니다.”
“네?”
“마동화씨를 살해한 자···. 그자의 악행이 드러나, 이미 처리하고 오는 길입니다.”
“아···. 누, 누가 그런 짓을 한 건가요?”
소녀의 질문에 준혁은 바로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흠···. 꼭 알아야겠습니까?”
“네.”
사실을 알게 된다면 소녀에게 인간 불신이 생겨날까 염려스러웠지만, 소녀는 단호했다.
“마 사형의 위 사형이었던 수도자가 벌인 일입니다.”
“왜, 왜요?”
“마 사형이 동화씨에게 많은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걸 욕심낸 자가 벌인 일입니다.”
소녀는 눈물 가득한 눈으로 준혁을 바라보았다.
“삼촌도 죽었군요?”
준혁이 고개를 끄덕여 주자, 소녀의 눈에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잠시 후 슬픔을 참지 못하고 결국 대성통곡을 하며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었다.
준혁은 그녀가 진정하길 기다리며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
서럽게 울던 소녀는 울다 지쳐 잠들었다가, 반나절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죄,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이제 진정 좀 되셨습니까?”
“네···.”
언제까지나 그녀를 돌봐줄 순 없었기에, 준혁은 차 수사의 공간대에서 1,500개의 영석을 꺼냈다.
“이게 무언지는 알 겁니다.”
“...”
“원래는 마 수사의 유산을 다시 전해준 후 떠날 생각이었지만. 흠···. 제안할 게 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네.”
준혁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소녀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영석을 그냥 두고 가자니, 혹시나 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염려가 되어 드리는 제안이니, 잘 생각해 보시고 대답해주시길 바랍니다.”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 우선 영석을 저에게 맡기고, 해마다 50개씩 받아 가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제가 다른 곳으로 떠나거나 한다면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을 수도 있으니, 그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안 돌려줄 건 아니니, 원할 땐 언제든지 한꺼번에 찾아가도 됩니다.”
“두 번째는요?”
“두 번째로는 이 영석으로 저와 거래를 하는 겁니다.”
“거래요?”
준혁은 고개를 끄덕여 준 후 대답했다.
“이 영석의 가치만큼의 영단과 일반인이 사용할 수 있는 부적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저에게 범인들도 익힐 수 있는 수련용 기공법이 있으니 영단과 함께 그걸 수련한다면. 수도자는 될 순 없지만. 죽는 날까지 무병장수하며 일반인을 뛰어넘는 강인한 육체를 보유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돈이야 벌면 되는 것이니까요. 어떠십니까? 제 제안이? 맘에 드시는 게 있으십니까?”
소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세 번째는 없나요?”
“세 번째라···. 흠···. 이건 어떠십니까? 영석을 모두 제게 주고 그냥 살아가십시오. 대신 언제가 되었든 원할 때 단 한 번, 그대가 원하는 부탁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단! 부탁을 말하는 시점에 제가 들어줄 수 있는 일일 경우에만.”
준혁은 말을 하고 나서 속으로 피식 웃음을 지었다.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세 번째 제안은 당연히 선택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안전하게 첫 번째 제안을 선택할 것이었고, 돈에 욕심이 없다면 매력적인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할 게 분명했으니까.
소녀는 결심한 듯 두 주먹을 꽉 쥐며 준혁과 시선을 마주쳤다.
“결정했어요!”
“??”
“세 번쨀 선택할게요!”
“세, 세 번째 말입니까···? 그걸 선택하고선 영석 3천 개를 달라고 한다거나, 뭐 그런 깜찍한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요? 분명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고 했습니다?”
“네. 세 번째요. 이제 가족도 친척도 없어요. 세상에 홀로 남겨졌는데 부자가 되거나 장수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이 아이···.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것인가? 아니면 타고난 성격인가?’
너무 빨리 철들어있는 모습에 준혁은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십대의 대답이라 하기엔 담긴 뜻이 너무 무거웠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생각을 마친 준혁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영석을 전부 수거한 후, 공간대에서 전음부 한 장을 꺼내 허공으로 던졌다.
부적이 펄럭이며 자유낙하 하자 재빨리 수결을 맺은 후 두 손가락으로 부적을 잡아챘다.
순간 부적이 빳빳하게 변하며 겉면에 새로운 검은 테가 생겨났다.
“이걸 가지고 있다가 원할 때 찢으시면 됩니다. 그럼 어디에 있든 시간을 내어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단 외국으로 떠나 너무 멀어진다면 바로 반응하지 않을 테니 그 점 염두에 두시고요.”
일반적인 전음부에 영기를 재주입해 성능을 배로 증폭시켜 놓았다. 그렇다 한들 그 범위가 수백 킬로 이상은 되지 않을 테지만, 강원도 내에서라면 바로 신호가 올 터였다.
찌이익-
소녀는 두 손으로 부적을 받더니 바로 찢어버렸다. 그녀의 손에서 재가 되어가는 부적을 보며 준혁의 눈이 동그라질 때.
“소원은 지금 빌게요.”
당돌한 아이 때문에 잠시 헛웃음을 흘린 준혁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무얼 부탁하실 겁니까?”
소녀가 말했다.
“절 제자로 받아주세요!”
+++
“그럼 건강하시고,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랍니다.”
준혁이 비행 법기에 올라 사라지자 소녀는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그의 궤적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진짜 가버리시네···.”
소녀는 멀어져가는 준혁을 바라보다 손안에 든 보따리 꾸러미와 부적 한 장을 바라보았다.
몇 번을 사정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이내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그래···. 이 정도 인연이면 감사한 거지. 앞으론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해. 마음 단단히 먹자!”
+++
마동화의 딸을 홀로 두고 떠나온 준혁은 곧장 처소로 향했다.
“당돌하기는···. 하나 내 코가 석 자인데 안될 일이지.”
제자로 받아달라는 소녀의 부탁은 일언지하 거절했다. 청룡가에 쫓기고 있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이곳 설악산에서도 조만간 떠나야 할지 몰랐기에.
“그 웃음.”
준혁은 소녀를 만나기 전 강만학의 마지막 웃음이 떠올라 또 한 번 소름이 돋는 듯했다.
그건 마치 새로운 보물을 찾았다는 즐거움 같았다.
예상이 맞는다면 강만학은 조만간 자신을 부를 테고, 마동탁이 남긴 보물에 관해 물어볼 것이 틀림없었다.
그랬기에 준혁은 빠른시일 내에 연구회에 들어가 반영근에 관한 자료를 습득하고는 설악산을 떠날 계획이었다.
거짓말이 쌓여갈수록 결국 어디선가 진실은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니라고 해도 떠나는 게 맞아.”
만약 강만학이 마동탁이 남긴 보물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해도, 사형제들이란 자들의 태도를 보면 이곳이 오래 머물 곳은 아니란 건 분명했다.
안전하게 수련에 임할 장소임은 맞지만, 시기 질투가 어떤 식으로 되돌아올지는 예상할 수가 없었으니까.
+++
동굴 앞에 도착한 준혁은 처소로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는 능선 가장 아래 위치한 차경수의 처소로 이동했다.
차 수사의 처소는 마 수사와 달리 굉장히 화려했다.
어두워야 할 동굴엔 괴수의 피로 만들어 수명이 긴 촛불들이 벽면에 가득 배치되어, 한낮처럼 밝았다.
동굴 끝에 놓인 침대 위엔 화려한 금침이 덮여있어서 그의 씀씀이와 성격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곳곳에 위치한 진열장도 어느 것 하나 평범한 것 없이, 원목을 정성스레 깎아 만든 장인의 가구 같았다.
준혁은 그런 겉치장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진열장 위에 놓인 물건들만 살펴보았다.
“백두 비경 한 걸음부터?”
진열장엔 민간에 떠도는 잡다한 소문부터 시작해 주변 비경에 관한 지도와 정보들이 한 뭉텅이씩 모여져 있었다.
“보물이라도 찾아 떠날 기세군.”
완벽하게 객관적인 정보는 아니었지만, 일본의 비경으로 떠날 생각이었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전부 수거했다.
재산이 될만한 것들은 전부 공간대에 넣고 다녔는지, 서책과 옥간을 제외하면 더는 정리할 게 없었다.
“혹시 모르니.”
마동탁처럼 어딘가에 숨겨놓았을 수도 있었기에, 준혁은 기감을 퍼트려 벽면을 샅샅이 살폈다.
하지만 동굴 안쪽엔 비밀 공간 같은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정리를 끝내고 발길을 돌리려던 준혁의 기감에 이상한 것이 걸려들었다.
그것은 꼼꼼하게 살피던 동굴 안쪽이 아닌, 동굴의 입구, 그것도 문 역할을 하는 방음진 바로 밑 부분이었다.
준혁이 다가가 주변을 살핀 후 수결을 맺어 방음진을 해체해 버리자, 그 아래 반 평 정도 넓이의 구덩이가 나타났다.
“참나, 이걸 똑똑하다고 해야 할지, 어리석다 해야 할지.”
입구 역할을 하는 방음진 밑에 숨겨둔 건 누구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장소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진법에 관한 지식이 있고 기에 민감하다면, 굳이 동굴 안이 아니라 외부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는 장소였다.
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구덩이 안에 놓인 상자를 꺼내 들었다.
“오호~”
상자 안엔 원반 법기가 세 개나 놓여있었고, 그 옆엔 사람 모양의 손바닥만 한 목각 인형 하나, 옥간 하나가 놓여있었다.
입구가 해체되었기에, 누가 볼세라 물건들이 어떤 것인지는 확인하지 않고 빠르게 공간대 안에 옮겨 담았다.
주변을 살핀 후, 구덩이를 매어버리고 그 위에 방음진을 다시 설치한 준혁은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려 동굴을 빠져나가 버렸다.
+++
“정말 재물복은 타고난 녀석인가 보구나.”
“사형? 정말 이대로 두고 보실 건가요?”
“그럼 어찌하란 말이냐? 스승님이 재차 강조하셨거늘.”
은색 머리띠를 이마에 두른 사내가 한숨을 내쉬자, 그 옆에 있던 마른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입구에 저 비밀 공간은 못 찾을 줄 알았는데 쳇.”
“그러게 말이다. 막내의 진법 실력이 우리 예상보다 좋은가 보구나.”
공룡능선을 마주 보고 있던 산비탈 한쪽에서 두 사내가 실망한 듯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
준혁은 곧장 처소로 돌아와 차 수사의 공간대 속 물건들과 상자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꺼냈다.
공간대 안엔 마동화의 딸에게 주었던 1,500개의 영석 중 1,400개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제자로 받아달라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고 준혁이 제시한 건, 영석 100개와 태극단공, 그리고 연기기에 먹을 수 있는 충원단 1병과 축기기 초기에 먹는 강초단 4병.
그와 함께 자신이 직접 새겨넣은 표식이 그려진 부적 한 장을 건네주었다.
훗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아무리 어리고 약한 소녀라도 그 처지를 이용해 이익을 도모할 생각이 없었기에 나름 합당한 거래라고 판단했다.
처음엔 더 많은 단약을 주고 깔끔하게 인연을 정리하려 했지만, 조만간 설악산을 떠나려던 준혁에겐 단약도 꼭 필요한 것이었기에, 영석의 가치보다 훨씬 적은 양의 단약만 건네고 훗날을 기약한 것.
준혁은 영석을 자신의 공간대에 옮겨 담으며 소녀에 대한 상념을 날려버리고, 나머지 물건을 쓰윽 훑어보았다.
부채 모양의 법기, 모양이 같은 쌍칼 한 벌, 자기병 네 개, 옥간 하나, 그리고 잡다한 재료들과 부적 뭉치, 마지막으로 상자에서 꺼냈던 사람 인형과 똑같이 생긴 목각 인형.
거기다 더해 상자에서 꺼낸 물건들까지.
공간대가 두둑해지는 건 나쁜 일이 아니었기에, 만족할만한 미소를 지은 준혁은 그중 단약이 들었을 것이라 생각되는 자기병을 집어 들며 마개를 열었다.
“흐음···. 강초단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