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담유설은 순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심온이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이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제가 괜한 것을 물었네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사실 후흑문에 오기 전에 아버지에게 심온에 대해 물었지만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대충 나이와 함께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만 들었으며 아버지는 ‘모른다’와 ‘네가 가서 직접 물어보렴’ 정도로만 말하였던 것이다.
오늘에서야 왜 아버지가 말을 하지 않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했다.
“허허, 이거 방종당주답지 않게 왜 그러시나?”
심온이 되려 어깨를 툭 치며 하는 말에 담유설이 슬쩍 고개를 들고 약간 미소를 머금었다.
“난 그런 것에 개의치 않으니까 너무 진중하게 마음 쓰지 말라구. 그럼 도리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 놈이 되고 말잖아.”
“네.”
담유설은 그래도 잠시 동안은 어색한 듯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 문득 한 광경이 들어와 놀람으로 가득 찼다.
“앗!”
그녀의 시선의 끝자락에는 누군가가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그와 함께 그녀는 다시금 ‘엇!’ 하는 소리를 질렀다. 백색 광채의 한줄기가 곧장 쭉 뻗어서는 추락하는 이에게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녀는 흰 줄기가 추락자의 삼분의 이 지점까지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이 심온이란 것을 깨달았다.
백의를 걸친 심온의 신법이 너무 빨라 그 잔영이 길게 이어져 흰 줄기가 공간에 그려진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추락자는 그 떨어지는 위치로 보아 절벽에서 불쑥 튀어나온 암벽에 부딪치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이다.
‘제발!’
심온은 그야말로 직선으로 쭉 뻗어가 추락자를 돌출한 암벽 바로 위에서 낚아채고는 그 뒤로 너풀거리면서 훌훌 지상으로 내려섰다.
담유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신형을 날려 심온에게로 다가갔다.
‘어때요?’
그녀는 말을 뱉지 못하고 이 말을 속으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심온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담유설도 곧바로 마찬가지의 얼굴이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암벽에 부딪치지 않아 무사할 것이라 생각했던 아이는 어이없게도 희락동자 이호였던 것이다.
“사숙?”
이호는 심온의 품에서 벗어나면서 귀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너, 여기서 뭐 하냐?”
“그러는 사숙은요?”
“그야 뛰어내리기 놀이를 잠시 하고 있었지.”
“어째 놀이라고 하기엔 기괴하지 않나요? 수련이라면 모를까.”
“그래서 네가 어리다는 거야.”
이어 이호는 담유설 쪽을 보면서 해죽 웃었다.
“너로구나. 얼굴을 보니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은걸?”
담유설도 반가운 표정이 가득했다. 심온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능력이 있다면, 희락동자는 주위 사람들을 동심으로 빠뜨리는 마력이 있었다.
“네, 어르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죠.”
“크크, 아부가 늘었구나.”
그때 위에서 한 음성이 들렸다.
“형님, 뭐 하시는 겁니까?”
위를 바라보았지만 소리만 들릴 뿐 아직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심온과 담유설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칠대기왕(七大奇王) 중 한 명인 통증왕(痛症王) 굉운(宏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희락동자가 위쪽을 향해 답했다.
“어, 이리 와봐. 후흑문주가 납시었어. 담천변의 딸도 왔는걸.”
“오, 그래요. 저도 곧 갑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푸른 그림자가 가공할 속도로 뻗어오는가 싶더니 쿵, 소리와 함께 내려섰다. 사뿐히 내릴 수도 있으련만 장난이 목적인 듯 고의로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반갑구나.”
활짝 웃는 얼굴을 접하며 심온과 담유설은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두 사람이 예상하고 있던 통증왕은 그의 별호만큼이나 무시무시하게 생겨서 가히 염라대왕을 방불케 하는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지금 눈앞의 통증왕이란 작자는 가냘픈 서생 같기도 하고 기생오라비 같기도 해서 불면 훅 날아갈 것처럼 연약해 보이는 것이 통증왕의 막내 제자라고 해도 믿을까 말까 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심온 인사드립니다.”
“후흑문의 방종당주 담유설이 통증왕을 뵙습니다.”
“오, 이런이런. 천하의 후흑문주를 보게 되다니, 이거 영광 중의 영광인걸.”
심온을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과장되게 말한 굉운은 이어 담유설을 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변왕의 딸이로구나. 변왕에게 이렇게 예쁜 딸이 있는 줄은 몰랐는걸.”
그 후 모두는 몇 마디 더 인사말들을 나누었고, 희락동자의 제안에 따라 잠시 앉아 풍광을 벗삼아 술 한잔을 기울이기에 이르렀다.
술은 통증왕 굉운의 허리춤에 매인 호리병에 담겨 있었는데, 이 술의 정체는 오는 길에 우연히 주귀(酒鬼)와 마주친 이호가 얻어낸 것이었다.
이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지 않은 건 아무래도 이호의 모습이 동자이기에 사람들의 쓸데없는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서였다.
“캬아! 주귀가 만든 술이 역시 최고야.”
이호가 호리병에 입을 대고 벌컥거리며 마시고는 병을 굉운에게 넘겼다. 굉운도 지체없이 나팔을 불었다.
“크악! 좋구나, 좋아.”
심온은 주귀를 본 적은 없었지만 들은 적은 있었다.
주귀를 설명하는 말들은 강호에 숱하게 많이 회자되지만 그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이것이었다.
<술은 모두의 친구이지만, 오로지 한 사람을 고른다면 술은 반드시 주귀를 고를 것이다.>
그만큼 그는 술을 좋아했고, 술을 잘 빚었으며, 술에 취해 있지 않은 날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술꾼들 중에는 평생 주귀가 빚은 술을 마셔보는 것이 소원인 사람이 있을 정도였고, 강호인들 중에서도 그의 술을 마셔본 자는 드물었다.
그런데 지금 주귀가 빚은 술이 눈앞에 있는 것이니 심온으로서도 당연히 기대가 되었다.
통증왕 굉운이 심온에게 병을 건넸고, 심온도 망설이지 않고 술을 꿀꺽대며 마셨다.
입 안 가득 들어찬 술은 처음에는 상쾌하게 입 안을 매끄럽게 감싸 안는 듯하더니 이어 싸한 느낌이 입 전체로 번지면서 쿡쿡 찌르는 신맛과 쓴맛을 내면서 목을 타고 넘어갔다.
향은 지나치게 자극적이지 않았고, 목을 타고 넘어간 직후 취기가 아스라이 온몸으로 퍼져 가는 것이 잠깐이나마 황홀한 상태에 이르렀다.
고작 술 한 모금으로 이런 기분을 느낀다는 것이 신기한 심온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크햐~ 멋지다, 멋져! 주귀가 최고다!”
술이라면 빠지지 않는 사람이 담유설이었기에 그녀는 심온이 건네려는 순간 빼앗듯이 낚아채서는 얼른 한 모금을 부어 넣었다.
그녀 또한 앞서 세 명의 반응과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계속 돌아가면서 술이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감탄을 연발하면서 술을 마셨고, 그사이 같은 술꾼으로서의 동지애 같은 것이 생겨났다.
발 아래로 펼쳐진 암벽의 정경과 함께 싸하게 기분 좋은 취기가 올라오니 온 천지가 자신들의 것만 같았다.
호기로운 말들이 오간 후 통증왕이 심온을 향해 말했다.
“일전에 형님이 말하길, 네가 내 수법 몇 가지를 배우기를 원한다고 하더구나.”
심온은 아쌀하게 기분이 좋은 때를 맞춰 듣고 싶은 말이 들려오자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답했다.
“네, 제가 사숙께 적절한 고문 수법이 없어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어르신의 이야기를 해주셔서 배우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 있습니다. 가르쳐 주신다면 힘을 다해 배워보겠습니다.”
그러나 이내 통증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건 너무 쉽잖아. 내가 무엇인가를 해주길 바란다면 너도 나에게 뭔가 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형님은 생일 선물 어쩌고 하는데, 사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물론이고 세상에 누가 생일이 없는 사람이 있단 말이냐?”
“그럼 통증왕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 이봐, 그냥 형님이라고 불러라.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으면서 그러냐?”
물론 겉으로 보기엔 정말이지 한 서너 살 정도밖에는 차이가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심온은 이제껏 많은 사람을 겪어본 터라 잠깐이나마 살펴본 통증왕이 허례허식을 싫어하고 격식을 따지길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괜히 예의를 차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하하하… 그럴까요? 혀, 형님.”
“그래. 얼마나 좋아.”
“형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통증왕은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야 뭐 이 나이 되도록 마음에 드는 제자 놈을 구하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아쉬움이라고나 할까.”
이호가 끼어들었다.
“크크. 얘, 온아. 어디서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놈 하나 알아봐라. 약간 말도 어눌하게 하고 서생티가 물씬 나는 녀석으로 말이다.”
굉운은 즉시 반발했다.
“형님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난 그런 녀석을 원치 않아요. 그보다는 좀 괴팍한 놈이 좋단 말입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못된 놈 하나를 고쳐서 바르게 만드는 것이니까.”
그는 이어 심온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 통증왕 형님의 삶의 가치관은 이것이란다. 오로지 고통이란 악한 자를 선하게 만드는 데 쓰일 때 진정 아름답다. 음하하하하!”
“오호, 그러셔? 그런 인간이 길 가다가 쳐다봤다고 주먹을 날리냐?”
이호의 비꼬는 말투에 담유설이 참지 못하고 웃었다.
“아니, 형님. 보시고도 모릅니까? 그 녀석은 그냥 쳐다본 게 아니었단 말입니다. 아주 이상한 눈초리였어요. 그런 표정은 반드시 속으로 욕을 씨부릴 때만 가능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럼 보름 전에 객점에서 음식 늦게 나온다고 주방으로 들어가서 주방장을 패대기친 건 뭐냐?”
“몰라서 그런 겁니까? 녀석이 우리의 겉모습만 보고는 만만하게 봐서인지 나중에 들어온 인상 좀 더러운 놈의 음식을 먼저 만들었잖습니까? 그런 놈이 바로 악당인 거죠.”
심온은 속으로 고소를 금치 못했다.
‘에에… 그러니까 악당이란 것이 자신에게 좋지 않게 보인 사람이란 거구나. 이 형님도 참…….’
그때 심온의 귓가로 우렁찬 통증왕의 음성이 들렸다.
“아, 그럼 내가 천하에서 가장 욕 잘하는 인간을 제자로 삼아 사람을 만들도록 하죠!”
선언하듯 외치는 말에 이호가 배꼽을 움켜잡고 웃었다.
“푸하하하하! 그게 무슨 소리냐? 넌 농담을 너무 진중하게 해서 탈이야. 아주 사람을 잡는구나. 잡어. 우하하하하!”
그러나 그 순간 심온은 번개같이 한 생각이 떠올랐다.
얼마 전 은하전장주 은천협이 보낸 의뢰서의 내용이었다.
―은하전장주 은천협이외다.
후흑문은 천하에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본인이 이처럼 후흑문에 의뢰를 하려 한 데는, 얼마 전에 장원 내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 때문이지요……. (글체)
그 뒤로 은천협은 네 명의 하녀가 소곤거렸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여 적어나갔다.
…나는 아무에게도 함부로 지껄이지 않았거니와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신체적인 부분이든 정신적인 부분이든 모자란 점을 통해 비웃는 일 따윈 해본 적이 없습니다.
한데 이번 일로 마음은 참담하기만 합니다. 그리하여 후흑문에 한 가지 부탁을 할까 합니다. 이것은 의뢰라고 하기보다는 어쩌면 그저 당부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습니다.
후흑문은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하니 분명 나의 당부도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당부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면 합니다. 무심결에 내뱉은 욕설이 듣는 이의 마음을 얼마나 찢어놓는지 작으나마 교훈을 주었으면 싶군요.
이 의뢰가 받아들여질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수락이 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글체)
심온은 은천협과 통증왕의 고민을 한꺼번에 해결할 기막힌 생각을 떠올렸다.
“형님, 그럼 제가 찾아드리겠습니다. 아무 염려 마십시오!”
11. 천하욕설대회
하나의 대회가 온 땅을 뒤흔들었다.
―천하욕설대회!
대회가 열린 곳은 낙양이었고, 이것은 우스갯소리가 아닌 진짜였다.
사람들은 처음엔 이 소식을 듣고 반신반의했지만 욕설대회가 사실로 확인되자 저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중원은 일대 광풍이 불듯 천하욕설대회에 대한 이야기로 들끓었다.
“허허, 내 칠십 평생을 살았지만 설마하니 이런 희한한 경우를 보게 될 줄이야.”
“이거 말세의 징조가 아닌지 모르겠구먼.”
“썩을 놈의 세상, 내가 빨리 죽든지 해야지.”
이제껏 각종 무림대회들을 접하긴 했어도 욕설대회란 들어도 보지 못했던 연배 높은 노인들은 이처럼 세상을 한탄하며 말세를 점치기 바빴고, 중년층은 기대 반 염려 반의 마음이었다.
“세상살이가 늘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니 이런 대회가 신선해 보이긴 하군.”
“그래도 이건 아닌데……. 좀 더 건전한 방향이었으면 좋으련만, 요즘은 너무 자극적인 것만 찾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이보게들, 너무 염려하지 말게. 근본 취지는 좋지 않던가. 감춰진 욕들을 다 드러내서 되도록 욕을 하지 않고 살자는 것이니 말일세.”
“물론 그 뜻이야 좋지. 하지만 과연 요즘 젊은것들이 그 취지대로 받아들이겠는가가 문제지. 어쩌면 욕 중에서 어떤 것들은 유행을 타게 될지도 모르잖는가.”
세대 중 가장 뜨거운 반응을 보인 건 역시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까지였다. 이들은 아직까지 사고가 굳지 않았고, 관습과 전통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지라 욕설대회에 엄지손가락을 추켜들고 환호했다.
“내가 기다렸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야. 난 반드시 대회에 참가하겠어.”
“멋진 세상이야. 대회를 구상한 이들에게 축복이 있으라.”
“아무렴, 틀에 얽매어 일평생을 산다면 그건 자신만의 삶이 아니니까.”
“모두들 구경만 하진 않을 거지?”
“당연하지. 참여가 없이는 변화도 없다. 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