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마기를 찢는 힘
“네가 내게 조언할 수준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낮게 가라앉은 음색. 혈마교주의 말에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언이라기보단 내가 느낀 걸 말해 주는 것이다.”
“네가 뭘 아느냐?”
살의. 혈마교주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른다. 흑살문주와 동수를 이루던 수준이었다. 그것도 진법의 도움을 받고서 말이다. 혈마교주는 천화련주를 제외하고 자신을 이길 존재는 없다고 판단했다. 지금은 그 천화련주도 마찬가지라 여겼다.
황극린은 지나치는 존재였다.
그런 놈이 뭘 안다는 듯이 지껄인단 말인가?
“마기는 그 어떤 힘보다 위대하다. 이것을 막아 낼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마기로 발현되는 힘은 황극린조차도 현혹됐을 정도로 강력했다. 암천성휘를 처음 보았을 때, 솔직히 황극린은 감탄했다. 인간의 마음을 현혹하는 힘. 암천성휘를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떤 존재라도 꺾을 수 있으리라 판단했었다.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
혈마교주의 눈썹이 꿈틀한다.
“너도 정상은 아닐 텐데?”
“무슨 말이지?”
“혈천혼암의 힘이 네 몸속을 잠식하고 있을 터.”
황극린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아니, 만약 다른 이가 혈마교주의 상대였다면 정녕 그랬을 것이다. 황극린은 어머니와 만난 이후, 이제껏 생각하지 못한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어찌하여 자신은 타인의 저주를 해주 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저주를 받았다는 이들은, ‘마기’를 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마경도 마찬가지다.
회계산 마경에 처음 발을 디뎠을 당시, 황극린은 익숙함과 동시에 거리감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마기라는 게 황극린과 잘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마기를 품고 있지 않았음에도 황극린은 저들과 같은 암천성휘와 비슷한 기술을 펼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가 용황신가라는 핏줄을 타고나서 그럴 수도 있었으며.
북해 출신의 어머니를 두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인형혈삼이라는 존재로 체질이 바뀌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무영심결. 황극린의 삶에서 달라진 건, 처음부터 무영심결을 익혔다는 점이다. 전설적인 살수인 유령이 남긴 심득. 처음엔 내공심법을 익히기 좋게 ‘길’을 닦는 심결이라 여겼다. 그러나 며칠 전 어머니와 만난 후, 생각이 달라졌다.
‘어쩌면 무영심결은 마기를 다루기 위한 기틀이었을지도 모르겠군.’
황극린은 우연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경험했으며 얻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게 적지 않았다. 무림에서 깨달음이라 하면 여태 쌓아 왔던 것들이 한 번에 폭발하는 과정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그가 겪은 깨달음은 천마조차도 상상할 수 없는 곳에 닿아 있었다.
“내게 그건 통하지 않는 것 같군. 오히려 제대로 된 천마신공을 익혔다면 또 모를까.”
“또 무언가를 아는 듯이 이야기하는구나.”
혈마교주가 검을 들어 올렸다.
“네 한계가 어딘지 확인해 주도록 하마.”
사악!
공간을 가르는 검. 순식간에 접근한 혈마교주가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황극린의 뇌전이 담긴 권격과 혈천혼암의 기운이 다시 한번 충돌했다. 처음엔 황극린이 힘에서 밀렸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두 사람 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공방을 나눈다.
쿵! 쿠웅!
검과 권이 부딪칠 때마다 공간이 부서질 듯이 괴성을 질러 댔다.
혈마교주의 두 눈이 번뜩인다. 힘과 힘의 대결에서 마기가 패배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놈의 내공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모르겠지만, 곧 한계가 찾아오리라.
쉬이이익!
천마의 검이 허공을 가른다. 황극린이 그의 검을 피했다. 힘 싸움을 피한 게 아니다. 천마가 검을 휘두르고, 그 틈을 노리는 것일 뿐.
타닷!
천마군림보가 아닌 귀영마변보(鬼影魔變步)를 펼친 혈마교주. 이제껏 그의 싸움은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현란하면서 유려한 보법을 익히고 있다. 당연하게도 중원제일을 다툴 만큼 완벽했다.
복부를 노린 황극린의 주먹을 간발의 차이로 피한 혈마교주.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황극린의 다리를 본다.
‘틈.’
혈마교주가 보기에 황극린에겐 빈틈이 넘쳐 났다. 힘 싸움을 해도 밀리지 않겠지만, 황극린의 싸움을 받아들인 것이다.
중단을 꿰뚫는 천마의 검. 자칫 잘못하다간 황극린의 가슴이 꿰뚫릴 수도 있는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에 또 뇌전이 튀어 오른다.
콰지지직-!
뇌운보(雷雲步)는 본래 뇌불이 혈풍뇌전신공의 보법으로 창안한 것이지만 황극린에게 오면서 개선 과정을 거쳤다. 천마군림보가 걸음을 뗄 때마다 사방으로 수만의 군세가 압박하는 형세였다면, 뇌운보는 걸음을 뗄 때마다 대지에서 벼락이 솟구치는 보법이다.
최선의 공격은 방어라는 말이 있다.
황극린의 뇌운보는 상대를 공격하는 초식이기도 했다.
“흡!”
저도 모르게 신음을 삼킨 혈마교주.
황극린이 이동할 때마다 뇌전이 터져 나오는 통에 제대로 찌르지 못했다. 보통 이딴 뇌전 따위는 무시하는 천마였지만, 황극린의 것은 무언가 다르다.
마치 뇌전이 그의 마기를 녹여 버리는 듯했다.
황급히 뒤로 물러선 천마. 그는 낮은 자세로 검을 쥐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저 수준의 뇌전을 계속 뿜어 대고 있으니 조만간 내력이 고갈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힘 싸움을 하는 건, 황극린이 원하는 방향이리라.
현란한 움직임이 이어진다.
황극린이 뇌운보를 펼쳐 혈마교주의 움직임을 제약하면, 그는 천마군림보로 뇌운보를 잠재운다. 동시에 검을 휘두르며 황극린의 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삽시간에 백 번 이상의 합을 나누었다. 정면으로 제대로 부딪치지 않았지만, 심력 소모가 상당했다. 한 번의 틈이라도 허용하면 치명상이었다. 이런 전투는 참으로 오랜만에 겪는 것이었기에 천마로서도 신선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전투는 서로의 경지를 확인하기 위한 친선전 따위가 아니다.
‘놈의 몸을 감싼 뇌기를 뚫어 내는 건 쉽지 않다.’
상시 반탄지기를 펼치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틈이 없다는 건 아니다.
‘그렇게 뇌기를 남발하는 게 실책이 될 것이다.’
한 점에 뇌기를 모으지 않으면 막을 수 없는 한 방. 혈마교주의 눈동자가 매처럼 매섭게 번뜩였다.
‘지금.’
황극린은 육신 전체에 뇌기를 머금고 있다. 한곳에 뇌기가 집중되지 않는 이상 막을 수 없는 일격을 선사한다. 혈천혼암도 통하지 않았다. 우주만동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황극린에게 통할 것은 무엇인가?
‘담축성(坍缩星).’
황극린이 당황했던 기술이다.
마기를 응축하고 또 응축한다면, 주변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인력을 가진 힘이 생겨난다. 그것을 검에 깃들게 한다. 담축성의 힘을 천마일세의 초식에 담는다.
한 번의 틈을 노리고자 혈마교주는 수십 번의 공방 중에도, 차분한 마음으로 황극린의 다리를 보았다. 인간은 결국 발로 이동한다. 그가 어디로 움직일지 예상하려면 발의 움직임을 보면 된다.
황극린의 전투 중에 은근히 드러난 사소한 버릇 따위를 모두 기억해 두었다.
‘아래로 피한 후, 오른 주먹을 내지르고 왼발을 뻗어 전진할 때는 금방 다시 뒤로 물러선다. 각을 재기 위한 보법이다.’
다섯 번의 공방이 지나간 뒤.
천마는 황극린의 버릇이 나오기를 유도했다. 천마의 검이 상단을 가르자 황극린이 허리를 숙임과 동시에 오른쪽 주먹을 뻗는다.
다음은 왼발을 움직일 터.
움찔!
천마의 눈동자는 황극린의 눈을 보는 듯했지만, 실상 그의 보법을 살피고 있었다. 왼발이 움직이려 한다. 찰나의 순간, 그것을 감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혈마교주는 가능하다.
‘지금.’
혈마교주는 준비했던 마기를 검에 담았다. 담축성의 힘. 아직 제대로 다룰 수 없다. 이미 한쪽 손이 망가질 정도로 다쳤지만, 그만큼 내포한 힘이 거대하다는 방증이다. 혈마교주의 검에 담축성의 기운이 맺힌다. 처음 한 번 사용한 후, 이제야 다시 펼치는 비기였다.
‘온다.’
혈마교주는 검을 내지른 그대로 담축성의 기운을 담았다. 황극린의 눈동자에 당혹스러운 빛이 내비친다. 그의 몸이 살짝 공중에 떴다. 담축성이 담긴 인력은 상대의 내력이 고강할수록 위력을 발휘했다.
‘끝이다.’
처음엔 간발의 차이로 피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대비할 시간을 주고 공격했던 것과 다르게 혈마교주는 수십 번의 공방을 거치며 황극린의 버릇을 파악했다. 그리고 그가 쉬이 빠져나가지 못하는 순간을 노렸다.
까드득!
검을 내지르고 회수하지 않고 또 초식을 펼치는 것이었기에 근육과 관절이 비명을 지렀다. 하나, 이런 작은 고통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 황극린은 심장을 잃게 될 테니까.
‘죽어라.’
본래 생포할 계획이었지만, 혈마교주는 이 자리에서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런 결심이 없다면 황극린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어느샌가 그는 황극린을 인정하고 있었다.
담축성과 천마일섬의 조화.
천마의 회심의 일격이 황극린의 심장에 꽂히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황극린이 입꼬리를 올렸다.
“너도 이런 전투는 오랜만인가 보군.”
“……!”
황극린의 목소리가 들린다. 분명 앞에서 들렸어야 하는데 옆에서 들린다. 어떻게 담축성의 인력에서 빠져나간 거지? 거기다 혈마교주의 감각을 속이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어떻게…….’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고통. 황극린이 주먹을 뻗어 오고 있다. 심지어 닿은 것도 아닌데도, 살점이 녹아내리는 듯하다. 혈마교주가 황극린의 특정한 행동을 기다렸고, 그걸 포착하여 공격하는 순간.
황극린 또한 그걸 역으로 이용했다.
오히려 혈마교주에게 보인 사소한 버릇은 그가 의도하여 보여 준 것이다. 살수는 보통 정면 승부에서 제대로 무공을 익힌 이들에 비해 불리하다. 고수일수록 상대의 사소한 버릇이나 보법에 금방 익숙해진다.
하지만.
살수는 그것을 역이용한다. 오히려 상대가 뛰어난 고수이기에 활용할 수 있는 함정. 황극린은 207호로 살면서 평생 익혀 온 기술이었다. 혈마교주가 여기에 당할 줄은 몰랐다.
‘의도했다고 하더라도… 저 힘은 위험했군.’
천마의 검에 담긴 기이한 기운. 지금도 황극린은 검에 빨려들 것만 같은 감각을 참아 내고 있다. 중단전의 힘을 최대한 끌어 올려 인력에서 벗어났다.
황극린의 주먹이 천마의 옆구리를 강타하는 순간이었다.
“이노오옴!”
분노한 듯한 혈마교주의 목소리.
중단전의 힘을 활용하는 순간에는 황극린의 감각이 평소의 배는 예민해진다. 천마의 몸에서 폭발하는 미증유의 힘을 느꼈다. 천마의 검에 맺힌 기이한 기운이 천마의 몸 전체에 깃들었다.
황극린이 인상을 찌푸린다.
천마는 마지막 한 수를 던졌다. 손에 저 힘을 담은 것만으로 손 마디마디가 꺾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저 힘을 몸 전체에 담는다는 건,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다. 승리하더라도 치명상을 입을 게 분명하다.
‘목숨을 걸었군.’
그렇다면 황극린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황극린의 주먹이 그의 기이한 기운과 정면으로 충돌할 것이다. 혈마교주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힘이다.
‘뇌혼(雷魂).’
뇌기에 혼을 담는다.
단전에서 치밀어 오른 뇌전이 심장을 거치고 황극린의 머리까지 차올랐다. 중원에서 상단전을 연다는 건, 죽음을 뜻했지만… 황극린이 활용하는 방식은 달랐다.
파지지지지직-!
한 번, 두 번…….
응축된 뇌기가 황극린의 세맥을 회전하기 시작한다. 마치 대주천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뇌전의 기운이 머리로 뻗을 때마다 황극린의 시간 감각은 극도로 느려지고 있다.
보인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간의 팔이 옆구리에 닿은 황극린의 주먹을 잡아당기고 있다. 자세히 보니 검은 손에는 수백 개의 이빨이 달려 있다. 기괴한 장면이었지만, 황극린은 혈마교주가 펼친 기술의 형상이 저러한 심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하나하나 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팔을 잃을 수도 있다. 이 힘은 기묘하다.’
그의 살점을 뜯어 먹는 듯한 마기로 만들어진 손의 형상.
황극린은 그에 대응하듯 뇌전을 끌어냈다. 수만 가닥의 뇌전이 인간의 팔을 하나하나 찢어 버린다.
콰지직.
콰지지직-!
까드드드드드득!
뇌성으로 가득 찼던 공간에서 마침내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커헉!”
결국, 혈마교주는 눈을 까뒤집고 피를 토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