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302화 (302/316)

302화 등장

혈마교주는 패배를 상정하지 않았다.

그의 뜻은 원대했으며, 그의 재능은 하늘이 내려 주었다. 또한,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천마신공을 대성하였으며, 마기(魔氣)를 단순히 휘두르기만 했던 전대의 천마들과 달리 혈교의 무공과 조합하여 담축성이라는 기술마저 창안했다.

황극린이 선경이면 다행이다.

그를 취함으로써 마기를 다루는 부작용을 해소할 수 있을 테니까.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황극린은 지나쳐 가는 작은 관문에 불과했다.

‘그럴진대…….’

천화련주를 해치우기 위해 새로이 만들어 낸 담축성이 황극린의 뇌전에 분해되고 찢겨 나가고 있었다. 마기라는 건, 그 누구도 극복하지 못할 자연의 모든 것이 담긴 힘이다. 그런데 어찌 자연의 일부분에 불과한 뇌전에 녹아내린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다.

혈마교주는 눈을 까뒤집는 순간까지도 황극린이 펼치는 뇌전과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이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없었다.

모든 힘에는 성질이 있으며.

그 성질은 우열을 가릴 수 있다. 가령 목(木)의 기운은 화(火)에 먹히고, 화의 기운은 수(水)에 패배한다. 그 당연해 보이는 이치가 적용된다면, 담축성의 힘에 뇌전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소멸했어야 정상이었다.

‘왜?’

의문만이 남는다.

“커헉!”

혈마교주가 피를 토해 냈다.

음양오행의 장점만을 뭉친 담축성의 힘이 삽시간에 흩어졌다.

“대체……!”

결국, 황극린에게 질문하지도 못한 채로 혈마교주가 쓰러졌다. 황극린은 가만히 그런 혈마교주를 내려다보았다.

“네 말대로 난 선경이었을지도 모르겠군.”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었지만, 혈마교주는 듣지 못했다. 황극린이 그의 몸을 유심히 살펴본다. 권격에 당해 부서진 뼈나 멍이 든 부위는 빠르게 상처가 아물고 있다. 하지만 뇌혼에 당한 상처는 쉽게 낫지 않았다. 뇌전이 그의 회복을 방해하고 있었다.

‘단전의 내공이 그때부터 바뀌었지.’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의 마기를 정화하기 위해서 혈석을 가공하던 시점부터였다.

황극린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가진 힘이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했다. 놀랍게도 혈풍뇌전신공과 혈석을 만드는 적혈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황극린이 혈마교주를 어깨에 둘러메고, 시선을 옮겼다.

* * *

흑살문주는 빠르게 만뇌문의 문도들을 제압하고 혈마교주를 도와주려 했다. 정확히는 황극린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만뇌문도들과의 전투는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눈앞에서 얼음 조각을 쏟아 내는 여인의 존재가 가장 컸다.

북해빙궁주 빙백마후.

그녀는 사생결단을 낼 속셈인지 내공을 아끼지도 않으며 유령과 흑살문주의 앞을 가로막았다. 빙백마후 한 명이었다면, 금방 결판을 낼 수 있었을 수도 있다.

문제는 뇌불이었다.

일찍이 배신한 부궁주는 왜인지 과거보다 힘이 약해져 있었다. 그런데 뇌불은 다르다. 과거 유령에게 제압당하여 천화련에 끌려간 전적이 있었지만, 뇌불은 그때보다 더 성장했다. 소림사에서 받은 반야신공과 혼원장공 덕분이었다. 거기다 최근 북해빙궁의 무공까지 결합하여 더 성장한 상태였다.

그러나 조금씩 유령과 흑살문주가 승기를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합심하여 최초의 유령이 남긴 무영심결을 해석했으며, 그 결과로 혈마교주에 버금가는 마기를 품을 수 있게 되었다.

무영기검(無影氣劍).

인간의 감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무형의 검이 흑살문주의 손끝에서 발현되었다.

빙백마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손바닥으로 공간을 때린다.

사가각!

공간마저 얼려 버릴 듯한 한기였지만, 무영기검은 그것을 뚫고 빙궁주의 어깨에 닿았다. 그리 깊진 않았지만, 빙궁주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몇 달 사이에 흑살문주의 무위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상승했다. 황극린에게 패배하던 당시만 하더라도 빙궁주가 흑살문주보다 반 수는 앞섰다. 그러나 지금은 흑살문주가 반 수 이상 앞서고 있다.

“넌 잘못된 선택을 했다.”

“본녀의 선택이 틀린 적은 없다.”

“오만이로군. 후회하게 될 것이다.”

흑살문주의 그림자가 지면을 타고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빙궁주가 땅을 박차고 올라섰지만, 유형화된 그림자가 그녀를 쫓아 솟구쳤다.

캉, 카카캉!

빙궁주가 만든 강철보다 단단한 얼음들이 깨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승산이 없다.’

살수에게 정면 대결에서 밀린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유령을 막아 세우는 뇌불과 부궁주 그리고 만뇌문도 몇몇이 선방하고 있었지만, 빙궁주보다 상태가 더 심각했다.

‘…어쩔 수 없군.’

혈마교주와 황극린의 싸움은 교주의 승리라 예상된다.

그는 십만대산의 마경에 진입하여 막대한 마기를 단전에 품고 있었다. 그의 힘은 빙궁주가 잘 알고 있다. 얼른 승부를 결정짓고 황극린을 도우러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승부수를 띄워야 했다.

빙궁주의 한쪽 눈동자가 빛을 잃는다. 그녀는 하단전뿐 아니라 눈동자에도 내력을 쌓을 수 있었다. 당연히 단전만큼 효율이 나오지는 않는다. 거기다 눈에 쌓아 온 내력을 소모하게 된다면 영원히 실명한다.

한쪽 눈이 실명한다면 빙궁주의 무위는 최소한 반 단계는 떨어진다. 완벽한 육신이 균형이 깨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패배하는 것보다는 승부수를 띄워 승리하는 게 효율적이란 판단이다.

그녀는 언제나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물론, 이대로 그냥 도망치는 길도 있었지만… 하나밖에 없는 손주를 위해서 그녀는 눈 하나 따위는 희생할 수 있었다.

한빙백골소혼장.

혼마저 얼려 버린다는 빙궁의 비기. 초대 빙궁주가 창안했으며, 세대를 거듭할수록 점점 그 위력이 강해졌다. 당대 빙궁주가 진심으로 펼치는 한빙백골소혼장. 거대한 기운이 그녀의 손바닥에 모이자 일대의 공간이 얼어붙는 듯했다.

“제법 잘 만든 무공이긴 하다.”

흑살문주는 피부에 전해지는 한기에 고통을 느꼈지만,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유령의 무공 앞에서는.”

사아아…….

“무용지물이다.”

흑살문주의 신형이 사라졌다.

빙궁주가 드물게도 당황했다. 표적이 있어야 얼려 버릴 수 있지 않겠는가? 코앞에 있던 흑살문주가 사라졌다. 목소리는 사방에서 들려온다.

“설마…….”

“그 설마가 맞다.”

빙궁주의 그림자에서 검은 칼날이 직선으로 솟구친다.

소위 말하는 진법은 공간에 관여하는 술법이라 칭할 수 있다. 흑살문주의 무공은 그런 진법과 관계가 있다. 공간 자체를 비틀어 버린다. 한계는 있겠지만, 그 찰나의 순간 모습을 감출 수 있는 것만으로 절대고수 간의 승부가 결정된다.

“이 정도로 당할 줄 알았더냐!”

그러나 빙궁주는 굴하지 않았다. 검은 칼날이 빙궁주의 팔 하나를 날려 버렸다. 심장을 노렸지만, 겨우 피해 냈다. 그녀는 검은 칼날이 튀어나온 그림자에 한빙백골소혼장을 펼쳤다.

“으음…….”

조금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고.

어느샌가 흑살문주의 몸에서 쉴 새 없이 하얀 연기가 솟구친다. 실시간으로 몸이 얼어붙고 있다. 마기로 저항하고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역시 쉽게 볼 기술은 아니로군. 하나, 끝이다.”

흑살문주의 발언에 빙궁주의 몸이 흠칫 떨렸다.

한순간이었지만, 공간 전체가 어둠으로 물든다. 그리고 눈을 깜빡하기도 전에, 그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섬광이 빙궁주의 심장을 노렸다. 흑살문주가 펼친 것이 아니었다.

암월개천은형살(暗月蓋天隱形煞).

기회를 엿보고 있던 유령. 북해빙궁의 나찰과 선녀들의 방비를 뚫고 혈마교의 부교주들이 등장하자마자 빙궁주를 노린 것이다.

“마…….”

삐이이이-!

“…녀!”

뇌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빙궁주의 몸이 꿰뚫렸다.

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겨우 맞추고 있던 균형이 무너졌다. 빙궁주가 쓰러진다면 흑살문주와 유령의 합공에 만뇌문은 금방 무너질 것이다. 황극린이 지키고자 한 만뇌문이 쓰러진다. 설사 황극린이 혈마교주에게 승리한다고 할지라도… 그 승리는 온전한 승리라 할 수 없었다.

‘패배’

모두의 마음속에 떠오른 단어였다.

“그때와 같은 무공이로군.”

“……?”

뜬금없이 들려오는 목소리.

저도 모르게 허리가 꺾인 빙궁주의 눈동자가 의아하다는 듯이 깜빡이고 있다. 분명 자신은 한 줄기 섬광에 심장이 꿰뚫렸다. 그녀 또한 절대자라 불리는 고수였다. 찰나의 순간, 죽음을 보았다. 중원 최고 살수라 불리는 유령이 작정하고 펼친 오의였으니까.

그러나 한 줄기의 섬광은 빙궁주의 심장을 꿰뚫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쉴 새 없이 코와 입에서 피를 뿜어 대는 절대고수의 육신을 꿰뚫었다. 혈마교주는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파들파들 떨며 발작을 일으켰다. 마치 쓰레기를 치우듯 황극린이 혈마교주를 바닥에 던진다.

유령과 흑살문주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혈마교주가 패배했다고?

황극린에게?

상처 입은 부교주들이 등장하자마자 유령은 황극린의 패배를 알아차렸다. 혈마교주 또한 이곳에 당도하리라 판단했다.

“황 공자!”

“극린아!”

“장로님!”

여러 목소리가 들린다. 황극린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미소를 머금었다. 혈마교주와 싸우는 와중에도 불안했다. 그러나 문도들은 유령과 흑살문주의 공습에도 한 명도 죽지 않았다.

빙궁주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고맙소.”

기이하게 변색된 눈동자. 황극린은 빙궁주의 왼쪽 눈이 실명됐다는 걸 알아챘다. 빙궁주는 평소답지 않게 턱을 잘게 떨고 있었다.

“악연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길고 길었던 악연이다.

흑살문주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혈마교주의 담축성을 깨부쉈던 뇌혼이 다시금 발현된다. 응축된 뇌기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그의 세맥을 회전하기 시작했다.

쿠릉!

황극린이 수작을 부린다는 걸 깨달은 유령이 먼저 움직였다.

* * *

‘대체 이놈은 뭐지?’

유령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의문이 떠올랐다.

황극린은 혈마교주와 싸웠다. 혈마교주는 유령도 인정하는 강자다. 그런 상대와 싸우고 왔더라면 황극린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라는 걸 뜻한다.

그런데 몇 번 황극린과 부딪치며 느꼈다.

황극린의 강함은 압도적이다.

어쩌면.

천화련주에 버금가는 고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가능한 건가?

황극린의 육신에선 마기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너무 정순했다. 그냥 타고난 천재라는 건가? 수많은 무인이 저주를 감내하고도 받아들인 마기를 압살하는 재능을 가졌다는 건가?

그런 재능이 어떻게 세상에 존재하는가?

오히려 삼라만상의 진리를 뒤흔드는 마기보다 더…….

‘이치에 맞지 않는다!’

황극린이 다루는 뇌기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었다. 유령은 이제껏 힘을 아껴 왔다. 선경으로 추정되는 황극린을 차지한다면, 혈마교주와 대립할 가능성도 없진 않았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까드드득!

수백 가닥의 그림자가 유령의 몸에서 솟구친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응축된 마기는 황극린의 심장을 노리고,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고리를 이룬 검강도 그의 그림자와 비교하면 종잇장과 같았다.

그러나 도저히 황극린의 뇌전을 뚫어 낼 수가 없다.

오히려 그림자가 황극린과 닿을 때마다, 유령은 단전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마치… 마기가 정화되고 있는 것 같다.

애초에 마기가 정화될 수 있는 성질인가?

아니다.

무당의 태극(太極).

화산의 자하(紫霞).

소림의 금강(金剛).

각 문파가 정의하는 단어는 달랐지만, 그 어떤 문파의 비급으로 쌓은 내공으로도 마기를 완전히 소멸하지 못했다. 그건 역사가 증명하고 있었다. 유령이 아는 중원의 역사에서 뇌기가 마기의 상성이라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랬다면 유령은 뇌불의 혈풍뇌전신공을 어떤 수를 써서라도 빼앗았을 것이다.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네놈… 대체 정체가 뭐지?”

혈마교주가 그러했던 것처럼.

유령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혈풍뇌전신공에 저런 힘이 담겨 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럴 수가 없다. 뇌불이라는 놈의 한계는 그가 잘 알고 있다. 제법 뛰어나긴 했지만, 거기까지일 뿐이다.

“글쎄.”

저들이 말하는 것처럼 황극린이 선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황극린은 저들의 선경 따위가 되어 줄 생각은 없었다.

“먼저 좀 맞자.”

“…뭐?”

유령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평생 살면서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다. 감히 누가 배교주이자 천화련의 유령에게 그딴 망발을 내뱉을 수 있었겠는가?

뇌혼의 힘이 담긴 권격.

황극린의 주먹이 움직일 때마다 유령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커헉……!”

살면서 처음 느껴 보는 종류의 고통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