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뇌기
천마(天魔) 마무량.
그는 전대 천마교주의 아들로 태어나 패배를 모르는 삶을 살아왔다.
아버지이자 혈마교의 교주였던 전대 천마는 그를 최고의 천마로 키우려 노력했다. 마무량은 혈교와 마교가 만들어 낸 최고의 걸작이었다. 소교주로 책봉되기 전부터 전대 천마는 그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마무량이 처음 살인을 했던 나이는 고작 다섯이었다.
‘하찮군.’
인간이란 참으로 하찮다.
고작 쇠붙이에 살점이 잘려 나가고 뚫려 버린다.
그런 마무량에게 전대 천마는 자신의 팔을 내어 주었다.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팔을 베기만 한다면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마무량은 그때 천마와 인간이 어떻게 다른지 깨달았다.
검으로도 베이지 않는 천마의 육신.
그런 육신이 되려면 ‘천마신공’을 익혀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는 비슷한 재능을 품고 태어났던 형제자매들을 모두 꺾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린 마무량보다 강한 혈마교의 장로들이나 마인들이 있었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성장하여 그들을 추월했다. 15살의 나이에 소교주에 책봉되고, 25살의 나이에 천마의 위를 물려받았다.
천마의 옥좌에 오른 마무량.
그날 그가 뒤집어쓴 피는 전대 천마의 것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진정한 천마로 완성되었다.
당시 마무량은 당장이라도 중원을 지배할 수 있다고 여겼다.
평화에 찌들어 살아가는 중원인들과 매 순간순간이 생존 경쟁인 혈마교도들은 차원이 달랐으니까.
혈마교도들을 모두 이끌고 중원에 나서려는 전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천마총(天魔冢)에 진입했다. 그곳에서 전대 천마들이 남긴 유품들과 심득을 확인하였고, 그는 처음으로 회생비록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겪게 되었다.
* * *
“아직 덜 아물었구나.”
“네놈, 누구지?”
천마의 시선에도 늙은이는 아무렇지 않게 그를 마주했다.
‘교도가 아니다?’
그런 의문이 생겨났지만, 이곳은 십만대산에서도 가장 깊고 어두운 곳. 평범한 교도들뿐 아니라 원로들도 진입하지 못한다. 오로지 천마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다. 천마총은 마경의 중심부에 있었다.
“네가 이번에 천마가 되었다는 아이더냐.”
“아이?”
불경한 말에 분노하지 않았다.
단지 짜증이 났을 뿐이다. 적당히 팔과 다리를 잘라 버리면 살려 달라고 사정하리라.
마무량이 천마군림보를 펼친다. 한 보 한 보에 담긴 힘이 공간에 울려 퍼진다. 천마총 전체에 뻗은 마기(魔氣)가 그의 군세에 화합하듯 울렁인다. 마무량이 가까이 갔음에도 상대는 무심하게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뚝.
뚜우욱.
“……!”
마무량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검은 무언가가 어깻죽지를 관통했다. 고통보다는 놀라움이 더 컸다.
“당신은 누구지?”
“나는 계광이라 한다.”
“계… 광…….”
마무량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중원일통을 노리기 위해서 거쳐야 할 관문. 혈교의 원수, 천화련주의 이름이었다.
“더 성장하도록 해라.”
계광이 혈마교주가 손에 쥔 서책에 시선을 돌린다.
“그걸 보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운명이 널 인도한다면 말이란다.”
그렇게 계광은 떠나갔다.
마무량은 여태껏 느껴 보지 못한 치욕을 느껴야만 했다. 천화련이라는 이름이 그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세상은 넓다는 것을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마무량은 그때부터 회생비록이라는 것에 집착했으며, 운명이라는 단어에 심취했다.
* * *
치욕스러운 패배를 경험한 이후, 그는 더욱 강해졌다. 힘을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패배로써 성장한다. 심지어 천화련주와의 전투에서도 그는 많은 것을 배웠다. 혈마교주는 완성되지 않았다.
그런 마음가짐이 지금의 혈마교주를 만든 것이다.
그는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 치욕스러운 패배를 상기하면서 말이다.
“패배한 적이 있더냐?”
당연했다.
그의 삶은 207호라는 이름부터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전생이 있었기에 현재의 삶이 존재한다. 황극린이 대답하지 않으니 혈마교주가 말한다.
“너의 한계에 부딪혀 볼 상대를 만난 적이 없었겠지. 흑살문주와의 전투에서도 진의 힘을 빌려 싸웠을 뿐이고.”
“비겁하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혈마교주의 말이 맞았다.
진 내에서는 보통의 무림인이라면 내공을 운용하기가 어려워진다. 황극린은 오히려 도움이 된다.
“비겁하다고 하는 건 아니다. 하나.”
혈마교주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한다.
“스스로의 한계를 알지 못하는 무인은 발전하지 못한다.”
동시에.
혈마교주의 손끝에서 검은 무언가가 쏘아졌다. 인간의 감각을 속이는 힘. 참으로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황극린은 그 속에 담긴 위험성을 인지했다.
‘막아야 한다.’
황극린의 머리가 쭈뼛 섰다. 혈풍뇌전신공으로 쌓아 올린 뇌전의 기운이 그의 전신에 퍼졌다. 뇌전의 반탄지기가 황극린의 몸을 휘감았다.
쿠르으응!
뇌전과 검은 힘이 부딪쳤다.
콰앙!
황극린의 몸이 튕겨 나무에 박혔다. 혈마교주는 가만히 그것을 보더니 감탄을 터트린다.
“제법이로구나.”
“…….”
황극린은 멀쩡하게 앞으로 걸어 나왔다. 멀리 튕겨 나간 것치고는 멀쩡해 보였다. 그러나 혈마교주는 황극린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진 것을 보았다.
혈마교주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혈천혼암(血天混暗)이다.”
계광이라는 노인이 혈마교주에게 보여 줬던 무공이었다.
이 자리에서 혈마교주는 황극린에게 가르침을 내려 줄 생각이었다. 패배로써 얻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황극린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알고 있다.
그는 누구도 믿지 못할 만큼 수많은 업적을 쌓아 올렸다.
그가 대단해서?
아니다.
진짜를 만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암천성휘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마기의 응축이라 말할 수 있지. 막아 냈다고 생각했겠지만, 네 어깨에 닿은 혈천혼암은 너를 계속 괴롭힐 거다.”
콰지직! 콰직!
혈마교주의 말이 사실이라는 듯이 황극린의 몸에서 뇌전이 튀었다.
“이것은 우주만동(宇宙萬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천마신공 우주만동.
천마의 손끝은 우주를 헤아린다. 쉽게 말하여 오행(五行)의 기운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면 쉬웠다. 마기는 삼라만상의 기운이 뒤섞이고 혼합된 것. 오행을 다루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다.
혈마교주가 사라졌다.
동시에 황극린의 앞에 나타났다.
쫙 펼쳐진 손바닥엔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담겨 있었다.
고오오오.
콰아아아-!
오행의 힘은 환(環)의 묘리를 증명이라도 하듯, 고리에 고리를 물고 응축되어 앞으로 쏘아졌다. 그 폭발력으로 주변의 나무가 죄다 쓰러져 버렸다. 주변에 미친 파급력이 그 정도였으니 정면으로 맞은 황극린이 받은 피해를 예측할 수조차 없다.
“확실히 다르긴 하군.”
혈마교주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황극린은 이번에도 버텨 내고 되돌아왔다. 그의 옷은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입이나 코에서 피가 흐르진 않았다. 우주만동을 정면으로 받고도 큰 내상을 입지 않았다는 뜻이다.
“넌 어떠한 방식으로 강해진 거지?”
혈마교주가 묻는다.
그에게 긴장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마치 이제까진 장난에 불과했다는 듯이 말이다.
황극린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선경이니 뭐니를 묻고 싶은 건가?”
“회생비록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그것의 본질은 스스로 파악해야 하더군. 회생비록이 가리키는 건 하나였다. 언젠간 모든 저주를 끝낼 절대적인 과실이 맺힌다는 것.”
“그런가.”
황극린은 모든 회생비록을 읽진 못했다.
사실 예전엔 그 서책에 세상의 비밀이 수록되어 있으리라 생각하고, 열심히 찾으려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딱히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회생비록에서도 해결하지 못한 천형(天刑).
황극린은 이미 회생비록이 말하는 저주를 해주 할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혈마교주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선경이라는 것이 어쩌면 인형혈삼이라는 영약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혈마교주에게 도움이 될 생각은 없었다.
“아무튼, 네가 보여 줄 건 이게 끝인가?”
“허장성세로 이룰 수 있는 건 없다.”
“허세라고 생각하나?”
혈마교주의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네놈은 아직 배우지 못했구나.”
두웅!
북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듯, 혈마교주의 한 걸음마다 막대한 내력이 터진다. 천마군림보를 펼친 혈마교주가 황극린의 앞에 당도했다.
“다시 혈천혼암이다.”
손가락을 펼친다.
지근거리에서 저 기술을 맞는 건, 황극린에게도 부담이 된다.
하나, 그건 혈마교주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뇌탄이라고 한다.”
“……!”
황극린의 뇌탄과 혈천혼암이 부딪쳤다.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섬광이 공간을 물들였다. 그러나 혈마교주는 눈을 감지 않았다.
‘어떻게……?’
의문점은 하나.
혈천혼암은 가로막는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하나의 점에 응축되고 또 응축되는 힘은 점점 강해지며 삼라만상을 삼키는 무공이다. 반탄지기로 막는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빛조차도 빨아들이는 그 힘을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하지만.
혈천혼암은 뇌탄을 이기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이번에는 혈마교주가 뒤로 물러났다.
“네놈…….”
콰지지직!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름 돋는 괴음. 뇌전이 터지는 소리에 혈마교주가 황급히 뒤를 돌아본다. 그러나 황극린은 그곳에 없었다.
‘뇌기를 담은 구슬?’
혈마교주가 황급히 물러섰지만, 뇌기의 폭발이 더 빨랐다. 황극린이 남겨 둔 뇌기의 구슬은 그 자리에서 사방으로 뇌전을 뿜어 댔다.
뇌기에 적중당한 팔과 다리가 저릿하다.
고통을 느끼는 건, 천화련주와의 싸움 이후에 처음이었다.
‘내 감각을 속이고 있다.’
사방에서 느껴진다.
언제라도 터질 듯이 움찔거리는 뇌기의 향연. 황극린이 남겨 놓은 뇌탄은 혈마교주가 가는 곳마다 터져 나왔다.
쿠릉!
쿠르으응!
“이까짓 잔기술이 통할 것 같으냐.”
“잔기술이 아니다.”
“……!”
이번에도 뇌탄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뇌탄이 아니었다.
뇌기를 사방으로 분출하는 황극린이다.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뇌기가 솟구치고,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뇌전은 공간을 뜨겁게 달구는 듯하다. 뇌신(雷神)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혈마교주가 황급히 천마일세(天魔一勢)의 초식을 펼친다.
황급히 뽑은 천마검에 담긴 오롯한 혼돈의 마기. 뇌신이 된 황극린의 권격. 주먹과 검이 충돌했다.
쿠웅!
‘어떻게 뇌기 따위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마기는 모든 것을 품고 있다. 그렇기에 혼돈이라 불린다. 그 어떤 것도 혼돈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극한의 마기는 음양오행의 기운 따위는 쉽게 집어삼킨다. 그러나 황극린의 뇌기는 막아 낼 수가 없다.
주르륵.
경합 한 번에 혈마교주의 입가에서 핏줄기가 얇게 흘러내렸다.
“예전엔 너희가 다루는 힘을 따라 하려 했었지.”
“…….”
혈마교주도 본 적이 있다.
황극린이 흑살문주를 죽일 뻔했던 힘. 그것은 분명히 암천성휘와 비슷한 결의 무공이었다. 그걸 보고 혈마교주는 황극린이 선경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게 꼭 정답은 아니더군.”
“헛소리를!”
혈마교주는 이제 봐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처음엔 계광에게 패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황극린에게 첫 패배를 선사하려 했다. 그러나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놈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솨아아아-!
혈마교주의 손바닥에 검은 기운이 맺혔다. 손바닥에 담긴 인력이 얼마나 강한지 황극린이 그의 손바닥에 담긴 힘에 이끌려 목덜미를 붙잡혔다.
“고작 뇌기 따위로!”
꾸루욱.
기괴한 소음이 혈마교주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왔고.
폭발했다.
콰아앙-!
“네놈…….”
그러나 마지막 순간, 황극린이 인력에서 벗어났다.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건 혈마교주의 손에서 나는 것이었다. 황극린은 순간적으로 혈마교주의 가슴을 박차고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도 감탄이 어려 있었다.
“신기한 힘이군. 단전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애초에 정말 당황했다면 저딴 감상 따위를 늘어놓지 않았으리라.
“어떻게 벗어난 거지?”
혈마교주는 이해하지 못했다. 방금 펼친 건, 그가 최근에 창안한 무공 중 하나였다. 암천성휘는 상대의 기운마저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힘이다. 그걸 응축하고 또 응축하게 되면, 상대가 가진 힘이 강할수록 벗어나기 힘들어진다.
애초에 이건 천화련주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기술이었다.
그런데 황극린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수월하게 그 인력에서 벗어났다.
“말했지 않나? 너희를 따라 하려 한 적이 있었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네가 그걸 믿을 필요는 없지.”
황극린이 다가가며 말한다.
“하나 말해 주자면, 네놈들이 다루는 힘은… 스스로를 망치는 힘이다.”
황극린의 시선이 혈마교주의 손끝으로 향한다.
피범벅이 된 것도 모자라 손가락 하나하나가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그가 발현한 마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