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마기
총군사 제갈서운.
그러고 보니 전생에선 제갈소희가 무림에서 천음마녀(天音魔女)라 불렸던 때가 있다. 따지자면 현재에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그녀가 당시 북해빙궁과 손을 잡았던 것을 황극린은 알고 있었다. 제갈소희는 어떻게 북해빙궁과 손을 잡았을까?
‘어쩌면 총군사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군.’
무림맹의 두뇌라 불리는 총군사가 사파와 결탁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컸다.
황극린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 * *
“이게 무엇입니까?”
“양이라네.”
제갈서운이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한다. 군사부로 오며 어느샌가 말을 놓아 버린 제갈서운이었지만, 황보휘는 개의치 않았다. 배분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그가 말을 놓는 건 당연했다. 그가 놀란 건, 눈앞의 목줄에 매인 짐승 때문이었다.
“양… 말입니까?”
- 메에에에!
사나운 울음소리. 양이라기보단 한 마리의 늑대처럼 흉포한 기세를 내뿜고 있다. 거기다 평범한 양과는 달리 검은 털을 가지고 있었다. 눈동자는 얼마나 붉은지 괴기함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당연히 평범한 양은 아니지.”
“설마 영물인 겁니까?”
“그렇다네.”
“……!”
살아 있는 영물!
영물이 무엇인가? 인간처럼 내단을 가지고 있는 짐승을 말한다. 무림에서도 그나마 흔히 볼 수 있는 내력을 품은 하수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자원이라 할 수 있었다. 영물 하나를 발견해서 내단을 취한다면 단번에 고수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강호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꼴깍.
항보휘가 침을 삼켰다. 영물의 내단을 취한다면 단번에 얼마나 많은 내공이 늘어날까? 내공이 많아진다는 건, 무공을 더 빠르고 강하게 펼칠 수 있다는 뜻이다. 검기상인의 경지에 갓 접어든 황보휘였다.
‘저것만 있으면 나도 진짜 검기를 만들 수도 있다. 아니지. 천우기공의 힘과 내 핏줄에 담긴 재능이 있다면 검강까지!’
황보휘의 눈동자에 탐욕이 흘러넘치고 있다.
제갈서운은 그런 황보휘에게 고개를 젓는다.
“저건 평범한 영물이 아니라네.”
“예?”
오히려 더 좋지 않은가?
하지만 총군사 앞에서 이성을 잃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없다.
“그렇군요. 어떤 점에서 평범하지 않은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영물들은 모두 특별하긴 하지. 그렇기에 평범한 영물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겠지만, 그래도 저 양은 특별하다네. 왜인 줄 아나?”
“제가 영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저건 마기(魔氣)를 품고 있다네.”
“……!”
강호를 떠돌다 보면 ‘마공’이라는 단어를 참으로 많이 접하게 된다. 마공이 그리 흔한 무공의 종류는 아니다. 하지만 무림에서는 자신보다 강한,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 ‘마공’을 익혔다며 몰아가기도 한다.
불경하고 불길한 힘.
정종 무공은 순수한 자연의 힘을 탐구한다. 그러나 마공은 다르다. 하늘을 역행하는 힘이라 불린다. 순리와 이치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제갈서운이 마기라고 칭하는 것은, 흔히 무림에서 마공이라 말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리라. 총군사는 그런 농을 내뱉을 위치는 아니었다.
“여기에 자네를 부른 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네.”
마기라는 말에 황보휘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자신은 정파 무림의 수호자가 되어야 할 존재였다. 제갈서운이 마기를 품은 영물을 가져온 이유가 무엇일까?
‘날 시험하는 건가?’
그럴 가능성도 있다.
여기서 어떻게 대처해야 총군사와 나아가 무림맹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
“허허, 무언가 착각한 모양이로군.”
“착각이요?”
“난 자네의 품성을 시험하고자 이곳에 데려온 것이 아니야. 자네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데려온 것이지.”
“능력이라 하심은…….”
“고대의 서적을 보았다네. 그것엔 용황신가의 핏줄들이 어떤 힘을 가졌는가가 적혀 있었지. 그들의 피엔 복마(伏魔)의 능력이 있었다고 하네.”
황보휘는 멍청하지 않았다. 상단에서 자라서 그런지 기민한 편이었다.
그는 총군사의 말을 모두 이해했다.
“제 힘으로 마기를 정화해 보란 말씀이시군요.”
“더 나아가서 천우기공의 심법으로 마기를 내력으로 흡수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무리일 테지.”
“해 보겠습니다.”
총군사가 진중한 얼굴로 황보휘를 바라본다.
“위험할 수도 있다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릇 기회란 위기에서 오는 법이 아닙니까? 위험하다고 도전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쟁취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제갈서운이 감탄하는 표정을 짓자, 황보휘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짜릿함을 느꼈다. 말 한마디에 총군사가 놀라고 무림맹주까지 경악한다. 언젠가는 중원 무림 전체가 그를 우러러볼 것이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내단을 취하면 되는 겁니까?”
“거기까진 내가 도와주겠네. 자네는 가부좌를 틀고 기다리게.”
“예.”
구슬픈 울음소리. 제아무리 영물이라고 해도 제갈서운에겐 당할 도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배 속을 뒤져 제갈서운이 내단을 꺼냈다. 고작해야 손가락 두 마디쯤 될까? 검붉은 빛깔에 황보휘가 침을 삼켰다.
“조심하게.”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호기롭게 외친 황보휘가 내단을 삼키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
“……!”
어두운 공간에서 그림자가 꿈틀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건가? 총군사 제갈서운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인간을 마주했다.
“네, 네놈!”
황보휘는 금방 황극린을 알아보았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가문의 은혜도 모른 채로 혼자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배은망덕한 놈을!
“황극린!”
“파천뇌권 대협? 대체 어떻게 여기에……?”
“저걸 취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래도 할 텐가?”
“뭐, 뭐라고?”
황보휘가 깜짝 놀란다. 죽을 수도 있다고?
그러자 제갈서운이 한숨을 내쉬고 말한다.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걱정되셨나 보군요.”
“좋지 않소. 그러나 경고는 하고 싶었소.”
“흥! 네놈의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너만! 너만 우리 가문의 혈통을 제대로 알고 있었을 것이야! 그 힘으로 거기까지 올라갔겠지?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난 진즉에 알아보았다!”
황보휘를 보며 황극린은 생각한다.
‘사람은 참 쉽게 변하지 않는군.’
황극린은 황씨 가문을 거의 멸문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그처럼 고생했으면 배운 게 있어야 한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돌이켜 봐야 했다. 그런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럼 마음대로 해라.”
“못 할 줄 알고? 너만 강해질 줄 아느냐! 나 또한 강해져서 무림의 영웅이 될 것이다!”
황보휘는 흥분하며 외쳤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마기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다. 가장 소중한 건 자신의 몸이었다. 호기만 가지고 내단을 취하겠다고 선언한 건 아니었다.
제갈서운은 묘한 미소를 지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황보휘가 내단을 입에 털어 넣은 순간이었다.
“총군사, 당신이 어떻게 북해의 무공을 익혔는지는 결과를 본 후에 말하도록 하겠소.”
“……?”
이놈 뭐지?
총군사 제갈서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팔짱을 낀 황극린. 그의 옆모습은 빈틈투성이이다. 어찌어찌 잘 노려 본다면 회심의 일격을 날릴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제갈서운은 손을 내려놓았다.
‘아직은 아니다.’
제갈서운은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지만, 빠져나갈 길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 * *
‘부디, 부디 성공해라!’
제갈서운은 솔직히 황보휘가 실패하기를 바랐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만약 여기서 그가 마기를 정화하고 그걸 흡수하는 데 성공한다면, 여태껏 계획했던 일이 많이 꼬이게 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목숨이 아니던가?
살아남아야지만 야망이나 숙원 따위를 이룰 수 있지 않은가?
황극린은 벽이었다.
넘지 못할 거대한 벽. 어쩌면 천화련주보다 더한 괴물이 될지도 모르는 놈.
‘그러고 보니 황극린도 용황신가의 피를 이어받았던가.’
고작해야 절정에도 미치지 못하는 황보휘. 그는 제갈서운이 마음만 먹는다면 죽일 수 있다. 하지만 황극린은 다르다. 그의 경지는 천하칠대고수 중에서도 최상위권. 거기다 용황신가의 핏줄들이 가졌다는 힘까지 있다면?
제갈서운이 긴장하고 있을 때, 황보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화하고 있었다.
“으으으……!”
황보휘는 마기를 제어하지 못하는 듯하다. 당연하다. 마기에도 종류가 있다. 저 양은 ‘그곳’에서 자란 놈이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은 절대 감당하지 못한다. 애초에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힘. 영물이라 불리는 양 또한 조만간 내단의 힘에 잡아먹혀 죽고 말았으리라.
‘역시 그런 설화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건가.’
제갈서운은 끝이 도래했음을 짐작했다.
조만간 황보휘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온몸의 혈관이 터져 나가고, 칠공에선 피를 쏟아 낼 것이다.
그렇게 제갈서운이 포기했을 때, 변화가 시작되었다.
터져 나갈 듯 붉게 변했던 황보휘의 얼굴이 점점 회복되고 있었다. 또한, 불규칙적으로 내뱉던 숨도 안정되었다. 제갈서운은 황보휘의 맥을 짚어 보지 않았지만, 마기가 천우기공의 내력으로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무리 천우기공이라는 희대의 심법을 익혔다고 해도, 그곳에서 자란 영물의 내단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은.
‘용황신가의 피를 이어받으면 정말……!’
황보휘가 눈을 떴다.
놀랍게도 그의 눈동자엔 황금빛의 광채가 감돌았다. 금방 사그라들긴 했지만.
주제에 맞지 않게 현기가 가득 들어찼었다.
“후후.”
황보휘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주먹을 쥐어 본다. 단단한 바위라도 악력으로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물론, 정말로 부술 수 있을지는 해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네놈이 강해진 이유를 알겠다.’
황씨 가문의 장남이자 금황상가의 후계자였던 황보휘.
그는 황극린을 따라잡을 수 있는 길을 깨달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금방 네놈을 추월해 주마! 내가 무신이 되어 주마! 무림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 네놈이 가진 모든 것을……!’
쿠당탕!
황보휘가 결연하고 굳건한 맹세를 되뇌고 있을 때, 전투가 시작됐다.
“무, 무슨!?”
그리고.
황보휘는 무신(武神)을 보았다.
* * *
화아아악-!
제갈서운의 눈동자에 지독한 독기가 서렸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황보휘가 실패하거나 성공하거나 둘 중 하나의 경우에 그는 행동을 결심했다.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빙설난분(氷雪難分).
수천, 수만의 얼음 조각이 제갈서운의 손바닥에서 회전했다. 그것은 작은 폭풍이 되어 황극린의 관자놀이를 노렸다. 머리를 노린 이유는 하나였다. 인간에게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차가운 기운은 인간의 머리 회전을 어렵게 한다.
이것으로 황극린을 제압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그렇기에 제갈서운은 다음 수, 그다음 수까지 계산했다.
빙천백옥수(氷天白玉手). 마치 백지장처럼 하얀 손으로 황극린의 심장을 노린다. 황보휘가 영단을 흡수하고 있는 와중에 줄곧 준비한 연환격이다.
‘다음은…….’
제갈서운의 머리가 미칠 듯이 회전한다.
계산적인 무공. 상대의 대응까지 모두 계산했다. 빙설난분과 빙천백옥수는 막힐 것이다.
그가 준비한 마지막 한 수.
한빙소혼장(寒氷消魂掌)이 황극린을 덮쳤다. 고작 세 개의 초식을 펼쳤음에도 제갈서운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이 정도면 됐다. 반 각 정도의 시간만 벌어도 도주할 수 있다.’
방 내부가 냉기로 가득했다. 황보휘는 무공에 격중당하지도 않았건만 온몸을 덜덜 떨며 굳어 있었다.
그러나 제갈서운은 움직일 수 없었다.
콰지지직-!
검은 뇌전.
순간적으로 등불의 불들이 모두 꺼진 듯했다. 눈을 멀게 할 것만 같은 광채를 뿌리는 뇌전이 아니다. 주변의 빛을 흡수하며 공간을 찢어 버리는 뇌전이다. 뇌전이 방을 가득 메우고, 사방을 얼어붙게 했던 냉기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보통 특정한 성질을 지닌 기운은 앞으로 쏘아 내거나 사방으로 터트릴 뿐이다.
하지만 황극린의 뇌전은 다르다. 마치 그의 의지를 받드는 듯이, 마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팔과 다리처럼 정교하게 움직였다. 단 하나의 뇌전도 제갈서운의 몸에 닿지 않았다.
“대체…….”
그게 더 놀라웠다.
뇌전은 오로지 제갈서운이 전력으로 펼친 빙공의 기운만 거두어들였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은가? 대체 저놈은 얼마나 강한 건가?
“방금 펼친 무공, 한빙백골소혼장과 비슷하군.”
“……!”
어찌 저놈이 그 이름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제갈서운이 딱딱한 목각 인형처럼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다. 처음 모습 그대로 팔짱을 낀 채로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다.
“재밌군. 내가 알기로 사내는 그러한 무공을 익히지 못한다던데, 아닌가?”
황극린의 시선이 제갈서운의 아랫도리로 향했다.
“이, 이노오옴!”
제갈서운이 발작하듯 한빙소혼장을 펼쳤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갓 운기행공을 마치고, 금방 황극린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희망에 가득 찼던 황보휘. 그는 절망해야 할지 경탄을 터트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끔뻑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