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용황신가
무림이 발칵 뒤집혔다.
천화련주. 존재만으로 전쟁의 판도를 뒤바꿔 버린 존재가 작고했다는 소식은 금세 퍼져 나갔다. 믿지 못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당연하다. 천화련의 련주는 과거 무림에 등장할 때마다 피바람을 일으켰다. 혈교와 마교라는 사파의 양대 산맥조차도 천화련를 막지 못했다.
그런 천화련주가 죽었다?
대체 누구에게? 그가 죽었다면 그를 상대한 무인은 누구란 말인가?
특히 무림맹이 난리가 났다. 특히 천화련주가 어떤 ‘존재’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던 무림맹주의 충격은 다른 이들이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어찌……. 이건 말도 안 된다.”
무림맹주 계립. 그는 천화련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남들은 모르는 천화련의 비밀을 알고 있다. 천화련주는 무림인들을 납치해 그들의 피를 수혈하여 그것으로 내공을 쌓아 올렸다. 추악한 비밀이다. 무림의 영웅으로 일컬어지는 천화련이 그런 수단으로 강해졌다고 알려진다면 무림공적이 될 수도 있다.
무림맹주는 그런 추악한 비밀을 알고 있음에도 침묵했다. 천화련의 존재가 사파의 준동을 막는 역할을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천화련은 그래도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 나설 것이다. 또한, 평화를 이룩할 것이었다.
분명 그리했어야 하는데.
“맹주님, 총군사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바깥에서 장로분들이…….”
맹주란 자리는 그런 자리였다.
계립이 폐부로부터 흘러나오는 깊은 숨을 토해 내곤 얼굴을 쓸어내렸다.
“들어오라 하게.”
맹주전에 무림맹의 난다 긴다 하는 간부들이 죄다 몰려왔다. 급이 되지 않은 이들은 총군사 선에서 돌려보냈지만, 그래도 삼십 명이 넘어선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지만, 무림맹에 있는 무인들은 각 지방의 문파를 이끄는 배분에 올라 있었다.
그들 모두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맹주님, 그 소식이 사실이오?”
“천화련주께서 작고하셨다니?”
“대체 누구한테 당한 것이외까!”
그때, 총군사가 손을 들어 올렸다.
“조용하시오!”
“……!”
총군사 제갈서운. 제갈세가는 대대로 무림맹의 책사 역할을 해 왔다. 대부분 그러하듯 책사들의 무공은 보잘것없었다. 맹주전을 방문한 대다수가 그리 생각했지만, 그 판단이 틀렸다는 게 드러났다.
한순간 드러났던 총군사의 기세.
그것은 여기 있는 무림맹의 간부들도 긴장할 수준이었다. 저런 실력을 숨겨 왔단 말인가?
“현 상황은 맹주께 떼를 쓴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오! 알지 않소!”
“…….”
“그럼 총군사께선 대책이라도 있으시단 말이오?”
모두가 총군사의 기세에 눌린 것은 아니다.
하북팽가 출신의 무림맹 장로 팽철후가 진중한 얼굴로 총군사를 마주했다. 총군사가 뭐라 말하려 할 때, 맹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천화련주께서 떠나시기 전,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비를 해 두는 게 좋겠다고 말입니다.”
“대비?”
“그 황씨 가문의 무인들을 말하는 것이외까?”
맹주령으로 황씨 가문의 전원이 무림맹으로 호출되었다.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황씨 가문은 과거 멸문한 것으로 알려졌던 용황신가(龍皇神家)라는 가문의 출신이라 했다. 무림맹의 서고에서도 쉽게 정보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가문이다.
“그렇습니다.”
그때, 점창 출신의 장로 철담도룡(鐵膽屠龍)이 말한다.
“우리 점창파에 용황신가에 대한 정보가 있었소. 그들이 마기를 몰아낼 수 있는 체질을 가진 핏줄이라는 문구가 남겨진 서책이 있었소이다.”
“마기를 몰아낼 수 있다?”
“설마 천화련주께서는 황씨 가문이… 아니, 용황신가가 혈마교를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건가?”
“잠시만! 그렇다면 설마 련주께서는 혈마교에게 당했다는 말이 되는 것 아니오!”
“대체 왜 천화련주를 보필할 무인을 같이 보내지 않은 것이오!”
“북경에서 고수를 죄다 불러 모았지 않습니까!”
“아니, 전선에 배치된 무인들이 없었소?”
저마다 말을 내뱉으니 다시금 시장통처럼 시끌벅적해진다.
“다들 그만두시지요!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대화해서야 결론이 나오겠습니까? 제가 발언권을 준 분만 발언하시길 바랍니다.”
제갈서운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이대로 가다간 혼란만 가중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먼저 맹주께서 말씀해 주시지요. 어찌하셨으면 좋겠습니까?”
“맹의 비고에 남겨진 고서(古書)가 있었습니다. 용황신가의 출신들이 무림맹이 창설되기 전, 구파일련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마공을 익힌 자들을 상대했다는 내용이었지요.”
“지금 무림맹에 있는 용황신가의 무인들은 그리 실력이 뛰어나지 않… 다고 알고 있습니다.”
장로 청산일권(淸山一拳)이 말을 하다가 총군사의 눈빛에 찔끔하더니 무림맹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저 말을 마무리했다.
“예, 맞습니다. 그래서 천화련주께서는 ‘대비’라고 말씀하셨겠지요. 그들에게 무림맹의 비고에 남겨진 천우기공(天宇奇功)을 익히도록 지시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확인해 보니 그들은 마기를 몰아내는 체질을 타고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벌써 대비를 하고 계셨군요.”
“역시 맹주님이십니다!”
제갈서운이 묻는다.
“굳이 용황신가의 존재들을 무림맹에서 키워 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미 용황신가의 출신이면서도 상당한 경지에 오른 존재가 있지 않습니까?”
“황극린!”
황씨 가문이 무림맹에 불려 오고 그들에 대한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용황신가는 과거 무림에서 상당한 업적을 남긴 가문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황극린도 그들의 피를 이어받았다.
제갈서운의 발언에 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파천뇌권 대협께서도 용황신가 출신이지요. 하지만 그는 황실의 사람입니다. 무림맹의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도움을 청해 보겠지만, 거절할 것도 생각해야 할 겁니다. 황실에서 벌어진 참극이 흑살문의 소행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밝혀졌으니까 말입니다.”
몇몇 이들이 침음을 흘렸다. 만뇌문을 무림맹에서 내친 결과가 지금 돌아오고 있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그리고 확실히 그들은 ‘정종 무공’에 재능이 있습니다. 천우기공을 익히는 속도가 몹시 빠릅니다.”
“오오!”
감탄도 잠시.
그들이 강해져 봤자 얼마나 빠르게 강해지겠나. 천화련주도 죽었으니 사파의 종자들이 더 날뛸 것이 분명하다.
그때, 누군가 묻는다.
“정말 천화련주께서 작고하신 게 맞습니까?”
“그분의 검이 발견됐습니다.”
“련주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은 게 아닙니까?”
제갈서운이 그에게 답한다.
“비천각이 확인한 정보입니다.”
비천각은 무림맹이 운용하는 비밀 첩보 부대였다. 제갈서운이 저리 확신하듯 말하니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대체 누가 천화련주를 해한 것입니까?”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다.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천화련주. 그를 해한 무인이 과연 누구란 말인가?
“혈마교주 혈황마제.”
“……!”
“천화련주의 검이 발견된 장소에서 혈황마제가 무공을 펼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그곳엔 흑살문주 암혼마제와 북해빙궁주 빙천마제의 것으로 추측되는 기운이 남아 있었다고 하더군요.”
“감히…….”
적막이 감돈다. 천화련주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세 절대자가 합공을 했다면 패배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무림맹은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특한 마두들에게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맹주님의 말씀처럼 용황신가의 무인들로 먼 훗날을 대비해야 합니다.”
제갈서운의 말이 정답이었다.
천화련주의 죽음은 충격적이었지만, 무림맹의 힘은 역사상 최고라 불릴 정도로 강대하다.
“맹주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맹주령.
위기일 때, 맹주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천화련주의 죽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맹주였지만, 충격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는 자리였다.
“천화련의 후계자를 맹으로 소환하겠습니다. 그리고 각 문파의 장로들께서는 용황신가의 핏줄을 타고난 황보휘와 황일문의 무공 수련을 봐주셨으면 합니다. 또, 북경으로 향한 무림 동포들을 무림맹으로 다시 불러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예, 맹주님.”
맹주의 명령에 무림맹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종일 수련을 하고, 성장한다.
한때,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황씨 가문의 장남 황보휘. 그는 새로운 기회를 찾았다. 무림맹이 그를 찾았다. 황씨 가문이 사실 용황신가라는 엄청난 무가(武家)였다고 했다.
수련을 마치고 나오니 선망의 눈빛으로 보는 무림인들과 그에게 한 번이라도 눈도장을 찍기 위해 어슬렁거리는 여협들이 있었다. 과거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던 높으신 존재들이었다.
‘황극린, 네놈이 무림에서 명성을 떨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황보휘는 배우면서 느끼고 있다.
자신의 재능이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천우기공을 익힐수록 육신이 빠르게 성장한다. 무당파의 속가제자 따위는 익힐 수 없었던 최상승의 무공이다. 황극린이 뇌불의 혈풍뇌전신공을 익혔다고 했던가?
‘네놈이 몇 년 만에 천하칠대고수의 반열에 오른 것처럼, 나 또한 그 자리에 오를 것이다.’
황보휘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모두 무시했다. 언젠간 그 또한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존재가 될 것이다. 지금 저들의 관심에 혹한다면 그는 황극린처럼 될 수 없다.
가증스러운 놈.
가문이 키워 준 은혜도 모르는 놈.
용황신가의 핏줄을 타고나서 혼자만 앞서 나갔던 놈.
언젠간 그에게 복수할 것이다.
그보다 더 강해지고 말 것이다.
돌아가는 황보휘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무림맹의 총군사 제갈서운이었다. 그는 호감이 듬뿍 담긴 얼굴을 하고 있다. 아무리 언젠가 천하제일의 고수가 될 황보휘라고 해도, 총군사는 무시할 수 없었다.
“총군사님을 뵙습니다!”
“허허, 오늘도 열심히 수련하고 온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사특한 마두들을 처치하려면 한시도 휴식을 취할 수가 없지요. 돌아가서도 수련할 예정입니다.”
“황 소협께 선물해 주고 싶은 게 있는데… 잠깐 시간을 내 주시겠습니까?”
선물?
황보휘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언제 주나 했다.’
무림맹에선 용황신가에게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때까지 영약을 주진 않았다. 제갈서운이 황보휘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예, 총군사께서 말씀하시는데 당연히 시간을 내야지요.”
* * *
황극린은 턱을 쓰다듬었다.
천화련주의 죽음은 그에게도 황당한 충격을 선사했다. 혼자 전선을 떠돌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런데 죽었다니? 뭐, 사대마제들에게 합공이라도 당한 걸까? 그가 그곳에 가서 합공을 당할 수도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걸까?
여러모로 의아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혼자 정보를 모아 보기로 했다. 알고 보면 천화련주가 죽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죽었다고 해도, 그의 죽음을 대체 누가 중원에 알린 것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무림맹에서도 천화련주의 시신을 발견하진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도 중원인들은 죽음을 확신하고 있군.’
그 배후에는 비천각이라는 무림맹의 비밀 정보 부대 비천각이 있다고 했다.
황극린은 소식을 듣자마자 무림맹으로 향했다. 그는 정체를 밝히지 않고 무림맹에 숨어들어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용황신가에 대한 정보까지 수집할 수 있었다.
‘용황신가? 내가 그런 가문의 핏줄이라고?’
확실히 황극린은 전생이나 지금이나 재능이 뛰어난 편이었다. 솔직히 황당했다. 그런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가문이 왜 강서성에서 상가나 운영하고 있었던 건가? 천화련주가 황씨 가문의 사람들을 불러들였다고 했다.
‘무림맹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이곳에 그가 알고 싶은 정보는 없었다.
최소한 천화련주의 검이 발견됐다는 객잔으로 가서 흔적을 찾아보아야 했다. 아니면 북해빙궁에 찾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빙궁주는 황극린에게 호감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황극린이 흑주와 함께 무림맹을 떠나가려 할 때였다.
‘황보휘.’
오랜만에 보는 그는 꽤 늙어 있었다.
황보휘는 학자풍의 의복을 갖춰 입은 노인과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황극린은 황보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옆에 선 노인을 가만히 바라보던 황극린의 눈썹이 꿈틀였다.
‘저놈은 뭐지?’
미묘하게 코를 자극하는 냄새.
무림맹에서도 꽤 높은 놈 같은데… 얼핏 본 얼굴인 것 같기도 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황극린은 인피면구를 쓴 채 맹의 내원을 거니는 무인에게 묻는다.
“황보휘 옆에서 걸어가는 노익장은 누구십니까?”
상대가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대꾸했다.
“험험, 형씨는 황 소협은 알면서 총군사님을 모른단 말이오?”
총군사 제갈서운.
그러고 보니 과거 무림맹에 왔을 때, 잠깐 스쳐 가듯 본 적이 있었다.
‘총군사라는 놈이 왜 북해의 냄새를 풍기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