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82화 (282/316)

282화 배후

“크큭, 크크크! 크하하하하!”

갑자기 쓰러져 있던 제갈서운이 광소를 터트렸다. 실성이라도 한 건가?

황극린은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그러자 제갈서운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난 이러한 결말을 맞이할 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후회는 없다. 불공정한 세상에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게 무엇이 잘못인가?”

제갈서운이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열변을 토해 낸다.

“난 세상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러니 이깟 시련 따위는 아무렇지 않지. 네가 아무리 날 겁박한다고 해도 내게서 어떠한 것도 알아낼 수 없으리라.”

결연하게 외치는 제갈서운.

황극린의 귀에는 왜 제발 살려 달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들리는가. 저렇게 말만 번지르르한 놈들 중에서 정상은 없었다. 구린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세상의 비밀이라.”

회생비록과 마경이라는 걸 접한 후에는 여러 생각을 했다. 대가 없는 힘은 없다는 걸 가장 잘 알려 주는 게 바로 회생비록이다. 또한, 마경에서 보았던 여러 가지 현상을 접하며 과도한 힘에 대한 세상의 경고를 느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오만하구나. 진리를 탐구하여 세상의 뜻이 무엇인지…….”

“너는 가족이 있나?”

“……?”

뜬금없이 가족 이야기는 왜 꺼낸단 말인가?

세상의 진리에 대하여 황극린은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제갈세가 출신이자 무림맹의 총군사가 어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 무공’을 익히게 되었는지 예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걸 묻는 이유가 뭐지?”

“최근 기이한 경험을 많이 했다. 솔직히 궁금하긴 했다. 왜 저런 것이 나타났을까. 하필이면 지금 말이다.”

“크크크, 네놈은 북경에 있었다고 했나. 궁금하겠지. 미치도록 궁금하겠지. 무를 탐구하는 무인이라면 세상의 진리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싶겠는가?”

“딱히.”

“뭐?”

사실 그런 궁금증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황극린은 세상에서 가장 기이한 경험을 한 장본인이다. 분명히 그는 죽었다. 남궁운혜에게 심장이 꿰뚫려서 말이다. 그러나 그 궁금증이 황극린을 움직이게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궁금하긴 하지만 그걸 알아내기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북경의 마경을 보고 처음 머릿속에 떠올랐던 건 내 가족의 안위였다.”

가족들의 안위라는 말에 황보휘가 흠칫 몸을 떨었다.

“왜 땅이 있고, 하늘이 있으며, 물은 왜 흐르는가. 그런 것을 고민하면 시간을 보내기에 좋겠지.”

“시간을 보내기가 좋아? 진리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틀려먹었다!”

“아니. 내게 중요한 건 만뇌문 식솔들의 안위뿐이다.”

“…….”

황극린은 분명히 무언가를 알고 있다. 어쩌면 제갈서운이 알지 못하는 것까지도 말이다. 그의 무위라면 분명히 그가 보지 못한 것을 보았을 테니까. 그런 황극린이 진리를 탐구하는 건 시간을 떼우는 일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니 화가 났다.

“네놈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지금 왜 정사대전이 일어났는지! 왜 천화련주가 죽은 것인지! 북경에 나타난 마경? 그게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테니!”

황극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크크크, 알고 싶으냐? 알고 싶으면 나와 함께 가자. 네놈이 원하는 걸 이루어 주마. 너와 내가 함께라면 이 세상을 새롭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황실? 무림? 그런 것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황극린이 쪼그려 앉아 정면으로 제갈서운과 마주한다.

그의 시선을 마주한 제갈서운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린다.

“네가 말하는 진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너는 이유를 알고 있는 듯하군.”

“알고 싶으면…….”

“하나 궁금하긴 하군, 진리를 깨우친 척하는 너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그게 무슨?”

황극린이 미소를 머금었다.

“진리는 몰라도 인간의 신체 구조는 잘 알고 있다.”

“너!”

무언가를 깨달은 제갈서운이 소리치려 했지만, 더 이상 말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제갈서운은 눈만 끔뻑끔뻑 뜬 채로 그를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끄르륵! 끄으으윽!”

서서히 뇌를 침식하는 고통에 제갈서운이 눈을 까뒤집는다. 옆에서 지켜보던 황보휘가 턱을 발발 떨어 댔다.

‘저, 저런 고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황보휘는 자신이 용황신가라는 전설적인 가문의 핏줄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자신감이 생겼다. 언젠간 그 또한 황극린의 무위를 따라잡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그의 생각은 달라졌다.

황극린은 무언가 달랐다.

‘귀, 귀신…….’

어두컴컴한 내부에서 붉은 광채를 내뿜는 눈동자.

단어가 떠올랐다.

혈귀(血鬼).

그보다 더 어울리는 단어는 없으리라.

* * *

‘제법 버티긴 하는군.’

처음엔 정보를 털어놓지 않을 것 같았다. 고문에도 제갈서운은 잘 참아 냈다. 그러나 고문이라는 건 육체적인 고통만 주는 게 아니다. 심리적으로도 상대를 압박해야 했다. 제갈서운이 가장 심리적으로 취약한 부분을 건드렸다.

“결국, 여길 잘라 낸 이유가 강해지기 위해서였군.”

“그 방법밖에 없었나?”

“구질구질하군.”

결국, 제갈서운은 조금씩 정보를 토해 냈다.

“이놈! 천화련주도 죽었다! 네놈이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그는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그라는 게 누구지?”

“그건…….”

“결국, 너처럼 빙궁의 무공을 익히려고 그런 짓까지 했을 놈 아닌가?”

“아니다! 그는……!”

결국, 제갈서운은 그의 뒤에 누가 있는지 털어놓게 되었다.

“유령?”

유령이란 개념과도 같은 존재였다. 살수들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 그러한 살수를 유령이라 칭한다. 그러나 천화련에서도 유령이라 불리는 놈이 있었다.

“그래, 천화련주를 죽인 건 유령이다.”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천화련주의 수하를 자처하던 이가 배신했다면, 천화련주도 불의의 일격을 허용했을 수도 있다. 거기다 그곳에선 사대마제의 흔적 또한 발견됐다지 않은가?

“유령이라는 놈이 배후인가?”

“세상은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각자가 모두 배후가 될 수도 있지.”

“그중 하나가 너라는 말이로군.”

“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무림맹, 사흑련 그리고 황실. 세상은 넓다. 그런 틀에 박혀 살아가는 인간들이 불쌍했을 뿐이다. 그런 틀을 부숴야 한다. 그건 너도 동감할 텐데.”

황극린은 무림맹이 압박을 가해 오자 바로 용성으로 뒷배를 옮겼다.

그에게는 정파의 무인들이 가진 고정관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관점에서 제갈서운과 황극린은 비슷하다.

‘제갈서운이 어떤 인간인지 알 것 같군.’

뭐, 나름의 사정이 있다.

그렇다고 이해가 간다는 말은 아니다. 황극린은 넝마가 되어 버린 제갈서운을 바라보며 나지막히 말했다.

“유령은 원래 배교의 사람인가?”

“……!”

표정으로 드러났다.

그걸 네가 어찌 아냐는 표정. 제갈서운은 분명 황극린에게 정보를 털어놓는 듯했지만, 모든 것을 알려 주진 않았다. 그가 살기 위해서는 황극린의 궁금증을 자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극린은 바로 핵심을 찔러 버렸다.

‘배교라.’

제갈서운이 아직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했지만, 상관없었다. 이제는 심리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그를 자극해도 더 얻어 낼 것은 없어 보인다. 정보를 얻을 더 확실한 길이 보였다.

‘유령이 만약 배교의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의 직위일까?’

간단하다.

그 정도라면 배교주라 칭할 만하다.

‘배교는 마경을 연구하고 관리한다. 그리고 교주가 천화련의 유령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면, 흑살문의 의뢰가 무서워서 피하려고 했던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천화련주는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제갈서운의 말에 의하면 유령에게 죽었다고 한다.

‘간단하군.’

배교를 족치면 된다.

그렇다면 배교주가 누구인지도,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으리라. 황극린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뇌불은 자금성에서 죽었을 것이다. 대가는 확실하게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황극린이 슬쩍 황보휘를 바라본다.

자만 넘치던 표정은 사라져 있었다. 그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황극린을 바라본다. 이제야 격차를 실감한 걸까.

“맹주를 죽인 건, 정말 빙궁주인가?”

“더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나와 함께하면 된다!”

황극린은 제갈서운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읽어 냈다. 황제를 시해한 것은 흑살문이라 소문이 났었지만, 사실과 달랐다. 맹주 또한 다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번만큼은 빙궁주의 소행이 맞는 모양이었다.

간단한 원칙 하나를 세웠다.

배교를 족친다.

빙궁주를 만난다.

그 과정에서 황극린은 진상을 완벽히 파악할 수 있으리라. 무엇을 우선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 * *

“제기랄! 정말 죽은 건가!”

심장이 멈추었다.

그렇다면 죽는 게 당연하다. 그렇지만 만독문의 문주 독수마제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천화련주가 보여 준 가공할 무위. 그것은 천하제일, 아니 고금제일을 논할 수준이었다. 고작해야 심장이 꿰뚫렸다고 죽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독수마제는 목숨을 걸고 그를 업고 도망쳤다.

죽었다고 알려진 천화련주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였다.

‘기련노괴, 그 영감이 그런 한 수를 남겨 뒀을 줄이야.’

독수마제가 쟁쟁한 고수들을 뚫고 도망칠 수 있었던 건, 천화련주의 무공도 무공이었지만, 기련노괴가 마지막에 펼친 경이로운 무공의 덕분도 있다.

‘세상은 넓다.’

독수마제는 그 말을 문도들에게 매번 주지시켰다. 그의 딸이자 만독문의 소문주가 된 두야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수없이 내뱉은 말을 지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은 넓다. 강한 놈들은 수없이 많다. 그런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더 강해져야 한다.

천화련주는 그 정점에 선 존재였다.

“제기랄! 정말 죽은 건 아니지? 대체 그놈들은 뭐길래 네 심장을 그리 노렸던 것이냐! 네 심장에 뭐가 있길래!”

그들은 모두 천화련주의 심장을 노렸다.

그것이 천하의 영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독수마제가 참지 못하고 그의 가슴팍을 움켜쥐려는 순간이었다.

“그만.”

“……!”

천하의 독수마제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옆에는 어느샌가 검은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네놈…….”

아무런 표정도 없는 사내.

그것이 참으로 기이했다.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아 조용히 따라왔건만, 아는 게 없는 모양이로군.”

“뭐?”

“살려 주마, 네놈은 가치가 있는 인간이니.”

“살려 준다고?”

이해할 수 없다.

저놈은 대체 무엇을 노리는 건가? 왜 모두가 천화련주의 심장을 노렸는가?

“왜지?”

“왜 살려 주는지 묻는 건가?”

“아니. 그걸 묻는 게 아니다.”

“왜 천화련주를 그토록 노리는가, 그걸 묻는 건가.”

“그렇다.”

사내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아니, 표정이 떠오르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자유를 찾기 위해서지.”

“자유라고?”

사내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떠올랐다.

“이젠 더 참을 수가 없다.”

탐욕.

정확히는 갈증.

천화련에서 이영(二影)이라 불렸던 존재가 다가온다. 독수마제가 그와 맞서 싸우려 한다. 천화련주의 심장이 뭔지 모르겠지만, 저놈에게 그걸 먹이면 안 될 것 같았다.

독수마제 또한 기련노괴처럼 마지막 한 수를 남겨 두었다.

최소한의 시간을 번다. 도망치는 건 사대마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독수마제가 그림자의 앞을 막아 세웠을 때.

이미 그림자는 그를 넘어 천화련주의 시신 앞에 섰다. 그리고 어둠이 그의 심장을 다시 한번 꿰뚫었다.

“이놈!”

그 순간이었다.

“세월을 넘어 또다시 잘못된 길을 걷게 되었구나.”

“……!”

독수마제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천화련주는 분명히 죽었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지?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그곳에는 천화련주가 있었다. 그의 심장에 난 구멍으로 그림자가 조금씩 빨려 들어가고 있다.

“네놈, 어떻게……?”

이영이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천화련주는 분명 죽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날 방법은 없다. 아무리 천화련주라도 그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는 말은, 설마?

“귀식대법?”

독수마제의 의문에도 천화련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귀식대법은 심장이 멈춘 것처럼 은폐하여 죽은 척을 하는 무공이다. 심장이 꿰뚫려도 살아날 수 있는 무공은 아니다. 무언가 다른 무공을 펼쳤으리라. 독수마제는 알지 못하는 무공을 말이다.

“네놈의 힘은 거둬들여야겠구나.”

“당할 것 같으냐.”

수천, 수만 개의 검은 칼날이 이영의 몸에서 폭사된다. 독수마제는 황급히 호신강기를 두르고 뒤로 도망친다. 하지만 천화련주는 물러서지 않았다.

“유령의 후예여, 경계를 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천화련주의 얼굴에 혐오와 탐욕이라는 상반된 두 감정이 떠올랐다.

적어도 독수마제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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