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조약
폐회식은 사흘 뒤.
결승에 진출했던 백온후와 단목기가 회복할 시간은 주어야 했다. 성수신의가 직접 진료할 것이니 사흘 정도면 회복할 수 있으리라.
황극린이 귀빈석에 앉은 소림의 방장 천선대사를 바라본다.
그는 강하다. 직접 싸워 본 황극린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자존심을 버리고 사과한 것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지만, 그것으로 끝낼 수는 없었다. 황극린이 해월대사에게 요구했던 것 중 세 가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첫째로 반야신공과 혼원장공.
둘째로 대환단.
셋째로 불가침조약.
황극린과 뇌불이 천선대사에게 다가간다.
당장 그의 눈동자에선 적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소림사는 줄곧 만뇌문을 의심해 왔다. 이번 일로 모든 의심이 사라진 것일까? 가능성은 반반이다. 하지만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남아 있다면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불가침조약을 맺으려는 이유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미타불, 당시 무당산에서도 결례를 범했습니다. 그에 대해서도 사죄드리겠습니다.”
황극린과 천선대사는 회담이 열렸던 무당산 아래서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에 두 사람은 전투를 벌였었다. 황극린의 승리로 끝이 났었지만, 방장은 당시에 비장의 수를 꺼내지 않았었다.
그건 황극린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아닙니다. 이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가시지요. 객잔을 빌려 놓았습니다.”
“객잔… 입니까?”
천선대사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잠시 귀빈석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시주분들도 계시니 객잔으로 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따르겠습니다.”
귀빈석에 앉은 모두가 황극린과 뇌불을 바라본다.
사실 황극린은 그들을 초대하지 않았다. 알아서 찾아온 것이다. 쉽게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불가침조약을 서로 맺고 약속을 지킬 것이라 믿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공증을 서는 이들의 배분이 높을수록 좋았고, 많을수록 좋았다. 저들은 불가침조약의 공증인이 될 수 있으리라.
미리 구자광을 시켜 말을 해 두었지만, 황극린이 귀빈석을 바라보며 공지한다.
“귀빈분들을 모시겠습니다.”
가장 먼저 황극린에게 다가온 것은 진주언가의 가주 언유명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언가의 가주 언유명입니다. 백온후라는 아이의 실력이 정말 출중하더군요!”
“뭐, 보통 수준이지.”
뇌불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은 모양이었다.
그런 뇌불을 보며 언유명이 말을 잇는다.
“언제 한번 언가의 아이들과도 친선 비무를 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우리 언가에도 뛰어난 인재가 많아 만뇌문의 제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건 극린이랑 이야기해 보거라.”
“하하, 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아버지이자 진주언가의 태상가주 언치골은 황실이 만든 용성의 성주가 되었다. 뇌불은 현재 용성의 부성주의 지위에 올라 있었다. 언유명은 자연스럽게 뇌불에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왜인지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가 황극린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그건 그렇고…….”
- 이곳에 온 모두가 만무지회를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언유명이 걱정스럽게 말한다.
현재 용성과 무림맹은 몇 차례 회담을 가졌다. 뇌불은 사정상 참석하지 못했지만, 무림맹이 강호에서 해 왔던 업무 일부를 용성에서 양도받으려 했다고 한다. 당연히 무림맹에선 중원 내에서의 권한이 축소되는 것을 방지코자 거부했다.
- 예, 알고 있습니다.
- 그럼 다행이군요. 혹여나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언유명은 자연스럽게 황극린과 인사를 나누고 뒤로 물러섰다.
필요 이상으로 친한 척을 하거나 하는 성향이 아니어서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황극린과 귀빈들은 예약해 놓은 객잔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수많은 고수의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 * *
소림과 만뇌문은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넘어 다른 이들의 손을 이용하는 것도 금지하는 조약이다. 만약 그것이 발각될 시에는 100년간 봉문이라는 제약을 걸었다.
화염신황을 필두로 이곳에는 수많은 명망 높은 고수들이 즐비하다.
무당파의 원로원주, 공동파의 장문인, 사천당문의 가주 등등.
그들이 공증을 섰기에 이 조약은 꽤 오랫동안 유지될 것이다. 소림사에서 받을 것을 모두 받고 나면 만뇌문은 굳이 소림사와 엮일 필요가 없다.
“조금 아쉽군. 놈들에게 당한 걸 생각하면 제대로 족쳐 놨어야 하는데……. 뭐, 솔직히 지금 와서는 기억도 잘 안 나니깐, 클클!”
뇌불은 소림사와의 악연을 잊기로 했다.
따지고 들자면 뇌불도 소림사에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뇌불과 천선대사는 따로 자리를 가져 이야기를 나누더니 과거의 일을 잊기로 했단다. 불가침조약까지 맺었으니 이제 굳이 적대할 필요는 없었다.
불가침조약서를 작성한 후.
“만뇌문이 강호에서 인정받는 것을 보니 참으로 기뻤습니다. 앞으로 서로 교류하며 우애를 나누었으면 좋겠군요.”
아미파 장문인 여여신니(如如神尼).
그녀는 왜인지 기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아미파와 소림사도 무공 비급으로 신경전을 벌였던 적이 있었다. 당시 아미파는 소림의 위세에 밀려 소림에게 제대로 된 사과도 받아 내지 못했었다.
그녀는 그 콧대 높은 소림사의 위세를 흔들었기에 만뇌문이 마음에 들었다.
배교와 관련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녀는 과거에도 뇌불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진짜 뇌불의 성격을 알다 보니 그가 사특한 마인들과 어울릴 성격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또한, 황극린의 행보를 보면 먼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전혀 위험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도 말이다.
아미파를 필두로 제갈세가, 사천당문, 진주언가 등은 만뇌문에 호의를 표했다.
다른 꿍꿍이가 있어 만무지회에 찾아온 것은 아니다.
단지 조만간 무림의 기둥이 될 만뇌문의 문주와 황극린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거기다 소림사의 방장이 사과하기 위해 움직였다고 하니 좋은 구경거리 아니던가?
“손을 한번 맞잡아도 되겠소이까? 이건 서역에선 악수라고 부르더이다.”
공동파의 장문인은 조금 특별하게 황극린과 인사했었다.
서역 어딘가에서 나누는 인사법이라며 황극린과 손을 맞잡았다. 기묘한 기운. 청명하면서도 고매한 영기(靈氣)가 황극린의 손으로 전해진다. 황극린은 초감각으로 그것이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라 알아차렸다.
악수라는 걸 끝낸 공동파의 장문인 옥운진인(玉雲眞人).
“마기(魔氣)를 확인하신 겁니까?”
황극린이 묻자 신선과도 같은 모습을 한 옥운진인이 당황한다.
“실로 대단한 감각이외다. 워낙 무림에서 많은 이야기가 나돌기에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소이다. 미리 말하지 못한 점 사죄하리다.”
“그래서 어땠습니까?”
“마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소이다. 오히려…….”
옥운진인이 깊은 눈동자로 황극린을 응시한다.
그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황 장로께선 선인(仙人)의 자질이 있소이다. 자연의 축복을 받은 듯하더이다. 내 한평생 그런 자질을 가진 사람은 딱 한 명밖에 만나 보지 못하였소이다.”
자연의 축복이라.
이건 무엇을 뜻하는 걸까? 뇌전의 기운을 단전에 완벽하게 담아 냈기에 저리 말하는 걸까? 아니면 옥운진인은 무언가 다른 것을 느낀 걸까? 그걸 알 방법은 하나였다.
“그 한 명이 누굽니까?”
“뒤에 있구려. 흘흘. 창공의 염화(炎火)가 황 장로와 대화하고 싶은 모양이니 빈도는 물러나겠소이다.”
뒤를 돌아본다.
그곳에는 화산파의 장문인 화염신황이 서 있었다.
화염신황의 눈동자는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왜인지 그 속에서 불꽃이 일렁이는 듯하다.
“길에 접어들었군.”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은 화염신황.
“자네는 세상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지?”
무림엔 배분이라는 게 있다.
화산파의 장문인. 배분으로 따지면 황극린에게 반말하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배분에 신경 쓰지 않는다. 상대의 행동의 따라 황극린의 태도도 달라질 뿐.
“왜 그런 것을 묻는 것이오?”
화염신황은 황극린이 말을 놓았음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네. 힘이 있음에도 책임지지 않았던 이들은 모두 혈겁을 일으켰지. 저 혈마교의 교도들이 대표적이 예지. 자네는 책임질 것이 있는가?”
“있소.”
“만뇌문인가?”
“그렇소.”
“천하제일문을 만드는 게 자네의 길인가?”
“그건 아니오.”
만뇌문도들이 강해지는 건 즐거운 일이다.
제자가 성장하면 사부는 행복을 느낀다. 물론, 문파가 커지는 건 좋았지만 그게 목표는 아니었다.
“길에 들어선 자라면 자네의 후광에 홀릴 것이라네. 웬만한 각오로는 그들의 욕구를 감당할 수 없겠지. 그러니 확고하고 절대적인 목표를 가지도록 하게.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을 터이니.”
뜬금없는 소리만 내뱉고 떠나려는 화염신황이다.
황극린이 묻는다.
“당신도 길이라는 것에 들어섰소?”
“그렇다네.”
화염신황은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신형을 돌렸다.
그가 떠나자 무당파의 원로원주 무운자(無雲子)가 다가왔다. 화염신황만큼의 압도적인 기백은 아니었지만, 그 또한 존재감이 상당했다. 그는 공동파의 장문인처럼 눈에는 현기(玄機)가 일렁였지만, 공동과는 분위기가 약간 달랐다. 같은 도가(道家) 계열의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분파가 갈리는 것이다.
“화산의 장문인께서 무슨 이야기를 그리 심각하게 했소이까? 흘흘.”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화염신황은 황극린과 이야기를 나눌 때, 기막을 펼쳐 다른 이들이 소리를 듣지 못하게 했다. 전음을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그 정도 수준에 이른 고수는 기막을 펼치는 것도 크게 무리가 없었으니까.
“빈도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만무지회를 관람하고 축하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 아니외다.”
진주언가의 가주 언유명이 말했었다.
모두가 긍정적인 목적으로 방문한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예, 이해합니다.”
그의 목적을 알 것 같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이다. 용성에서 나와 무림맹으로 돌아오길 바라외다. 황 장로가 혈마교를 처리하려 무림맹에 손을 뻗었다고 알고 있소이다.”
불가능했다.
용성에서 나간다면 황실과 척을 진다. 이도 저도 아닌 처지에 놓일 것이다.
“불가능하오. 그리고 무림맹에 손을 뻗은 건 아니오. 소림에게 말한 것이지.”
“허허허, 소림이 곧 무림의 태산북두가 아니외까?”
무운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그리고 황실은 혈마교까지 끌어들일 생각을 하고 있소이다. 황 장로는 억지로 혈마교와 연을 맺어야 할 수도 있는데, 그걸 원하는 것이외까?”
황실의 용성.
황극린은 그들의 결말을 잘 알고 있었다. 황극린이 무림맹에 추격당하여 죽어 가고 있을 당시에 무림에서도 여러 사건이 터졌다.
유명했던 사건을 꼽자면…….
혈마교의 중원 침공 시작.
녹림 총채주 제갈창해의 반란.
천음마녀(天音魔女) 제갈소희와 북해빙궁의 교류.
마지막으로 용성의 몰락.
물론, 용성이 완전히 망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황실의 의도와는 달리 차츰차츰 무너져 내리고 있었을 뿐. 제갈소희와 북해빙궁이 교류했던 사건도 중원에는 알려지지 않았었다. 황극린이 임무를 수행하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을 뿐.
황극린은 미래를 알고 있었다.
물론, 그 미래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작은 변수 하나로 거대한 변화가 나타난다. 황극린은 현재를 살아가며 그가 알았던 미래가 펼쳐지지 않는다는 걸 몇 번이나 목격했다.
그러니까.
“황실은 혈마교와 손을 잡지 못할 겁니다.”
“황실이 가진 욕심은 심연과도 같소이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욕심에 만뇌문은 도구가 될 뿐이외다. 무림맹 또한 썩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황실보다는 나을 것이외다. 무당이 힘이 되어 만뇌문이 무림맹에 속할 수 있도록 하겠소이다.”
무운자의 표정은 더없이 진중했다.
단순히 무림맹의 전력을 늘리기 위해 이렇게 황극린을 설득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멀리서 같은 용성 소속인 언유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황극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황실이 혈마교와 손을 잡는다면 원로원주님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지요.”
썩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만간 혈마교와 황실이 정식으로 접촉할 것이다.
이미 은밀히 만남을 가진 것도 확인했다.
만뇌문은 다시 무림맹의 슬하로 돌아와서 무림의 평화를 지키게 될 것이다.
무운자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