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결승
단목기.
단목세가의 셋째 공자이며, 과거까진 장남인 단목청의 위세에 눌려 드러나지 않던 인물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가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수련만을 거듭해 왔다. 자기 자신을 관조(觀照)하는 방식의 수련으로 단목기는 성장해 왔다.
단목기는 소가주 자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단목세가의 장남인 단목청도 그렇기에 단목기를 견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부터 단목세가 내부 세력의 다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한 만무지회. 용봉지회에 참가해 본 경험이 없던 단목기는 중원의 후기지수들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결과는 대단했다.
단목기는 처음 비무장에 오르고, 처음 마주하는 관중들의 응원하는 함성을 들었을 때 전율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짜릿한 것인지 깨달았다. 또한, 비슷한 나이대의 무인들이 익힌 무공도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 명상하고 수련하는 방식보다 여러 무인과 마주하며 비무하는 게 도움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단목기는 예선을 거쳐 본선 결승까지 올랐다. 개중엔 각 지역에서 유명한 문파 출신인 문도들도 있었다. 소림의 제자나 만뇌문의 제자가 특히 강했다.
그들에게 승리하며 단목기는 성장했다.
그리고 만무지회의 결승에 올랐다.
귀빈석에선 천하칠대고수 중 선두를 달린다는 화산의 장문인 화염신황을 비롯하여 수많은 문파와 가문의 수장들이 비무장을 지켜보고 있다.
이 비무에서 승리한다면 단목세가 내에서 단목기의 평판이 장남을 추월할 가능성도 존재했다. 물론, 단목기는 가문을 승계하는 것보다 이렇게 경쟁자들과 손속을 나눠 보는 게 좋았다. 싸울 때마다 성장하는 게 즐거웠다. 미쳐 버릴 것같이 짜릿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백 소협!”
종이 울리기 전, 단목기는 백온후를 바라보며 예를 다해 인사했다. 무림인치고 몸은 왜소했지만, 그의 실력이 진짜라는 걸 알고 있다. 그의 비무를 보면서 몇 번이나 감탄했으며 배운 것도 많았다.
백온후도 단목기의 예를 다한 인사에 활짝 웃으며 답한다.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우리 최선을 다해 봐요!”
사실 비무장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소림사 방장이 난데없이 나타나서 사과하더니, 귀빈석에는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든 고수들이 즐비하다. 관중들은 귀빈석을 바라보아야 할지 비무장을 구경해야 할지 혼동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 백온후와 단목기는 그런 관중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귀빈이 많으면?
백온후는 그들보다 뇌불과 황극린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단목기는 눈앞의 백온후가 더 중요했다.
만약 결승에 오른 두 후기지수가 귀빈들을 신경 쓰느라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면… 아마 관중은 결승에 흥미가 팍 식었으리라. 두 사람의 강렬한 의지가 관중 한 명 한 명에게까지 전달된다.
“제1회 만무지회의 결승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종이 울렸다.
승리를 향한 열망이 담긴 눈동자.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 * *
호각지세.
백온후는 만뇌문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천재라 할 수 있었다. 묘연골을 타고났으며, 성수신의가 만든 전용 약재로 과거의 병을 모두 털어 냈다. 그리고 웬만한 문파의 문도들은 꿈도 꾸지 못할 수준의 영약도 몇 번 취했다.
하지만 그런 백온후라도 언제나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중원은 넓다.
초고수라 불리는 사부들이 매번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는 이유였다.
중원에는 언제나 강자들이 득실거렸다.
단목기 또한 자신만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세상을 깊이 바라보고 그 자신마저 관조하며 성장하는 무인이었다. 그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백온후의 비무를 지켜보았다. 그는 탁월한 감각으로 상대방의 공세를 기만하듯 피해 내고, 틈을 파고들어 승리를 쟁취한다.
검으로 따지자면 유검(柔劍)이다.
그렇기에 단목기는 허투루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하나하나의 검격에 최선을 다했으며, 백온후가 주먹을 뻗을 수 있는 거리를 내어 주지 않으려 했다.
대지에 굳건하게 뿌리내린 거목처럼 단목기는 묵직하게 백온후에 맞서 싸웠다.
쉬이익!
‘앗!’
고양이와 같은 백온후의 감각이 척수를 통해 전신으로 전달되었다. 검기가 실린 횡 베기. 단순한 베기처럼 보였지만, 단목기는 백온후의 움직임을 꿰뚫고 있었다. 백온후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분석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간발의 차이로 피하여 백온후의 옷깃이 잘려 나간다.
관중석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온후야!”
“으악! 깜짝이야! 베인 줄 알았잖아!”
백온후를 응원하는 이들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깝다! 저걸 피하다니!”
“조금만 더 힘내라! 단목기!”
단목기를 응원하는 이들은 아쉬워한다.
결승전답게 두 사람의 실력은 호각이었다.
‘이 사람도 정말 강하구나.’
백온후는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단목기는 사형 비청하를 꺾은 무인다웠다.
‘단목 소협은 아직 본실력을 모두 내보이지 않았어.’
단목기가 익힌 단목세가의 검법은 환검(幻劍)이었다.
하지만 오늘 비무에서는 백온후의 약점을 공략하기 위해서 묵직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상황에 맞게 전투 성향을 바꾸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백온후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벌써 일각이나 지났다.
수백 번의 공방을 나눴지만 서로 제대로 된 일격을 교환하지 못했다. 검과 권의 싸움은 대개 이러하다. 검은 권에게 거리를 내어 주지 않으려 악을 쓰고, 권은 검에게 다가가려 애쓴다.
‘조금만 더,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해.’
백온후의 눈이 번뜩인다.
뇌정신공의 기운이 그의 세맥에서 빠르게 회전한다. 반응속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만약 단목기가 백온후의 경로를 읽고 검을 휘두르더라도, 그것마저 피해 낼 정도로.
상대의 기세가 변했다는 걸 직감한 탓일까?
단목기의 눈빛도 돌변했다.
‘승부수를 던질 생각이로군.’
단목기가 검을 꽉 쥔다.
‘백 소협이 접근하려는 순간… 검기(劍氣)의 길이를 늘인다.’
단순히 검면과 검날에 검기를 두르는 것은 일정 수준에 이른 고수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검기의 길이를 늘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검을 쥐고 가만히 있으면 모를까, 길어진 검기를 휘두르면 내공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 검기 자체가 깨어진다.
“하압!”
백온후가 상체를 낮추고 달려간다.
단목기는 하단으로 검을 내지른다. 당장이라도 백온후의 머리통이 꿰뚫릴 것 같았기에, 관중석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오, 온후야!”
언제나 그랬듯 백온후는 간발의 차이로 찌르기를 피해 냈다.
관중이 안도의 숨을 토해 내려는 순간이었다.
“아니야! 위험!”
“함정이다!”
단목기의 눈이 번뜩인다. 찌르기는 환(幻)의 첫 단계. 피해 냈다고 생각하는 순간, 경로를 바꾼다. 아니, 찌르는 것부터가 다음 경로를 준비하는 전초 과정이었다.
이제껏 보법을 잘 펼치지 않던 단목기가 현란한 보법으로 뒤로 물러선다. 검의 반경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백온후는 다시 단목기의 검격 아래 놓여 있었다. 조금만 옆으로 휘둘러도 목에 닿을 듯 가까웠다.
팔십일식유성환상검(八十一式流星幻像劍).
환영삼변(幻影三變).
세 번의 변화.
그중 두 번째 변화가 단목기의 손에서 펼쳤다.
예기 가득한 검과 퍼렇게 응축된 검기가 미친 속도로 움직인다. 묵직하게 움직였던 것과 다르게 극한의 쾌검이다. 백온후가 피해 낼 수 없는 거리에서 빠르게 휘둘러진 검격. 단목기는 어깨와 등 근육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씨익.
그 순간이었다.
‘눈동자가…….’
집중력이 극한에 달한 순간, 단목기는 보았다. 백온후의 눈동자가 자신을 노리는 검을 보고, 단목기의 다리 위치를 확인한 후 시선을 마주하는 것을 말이다. 일부러 저렇게 눈동자를 움직이려 해도 힘들 것이다.
‘설마 이걸 피해 내고 더 가까이 오려는 건가!’
단목기는 감탄했다.
뒤로 물러서는 게 상책이었다. 그런데 백온후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이제껏 만무지회에선 이렇게 저돌적으로 달려들진 않았었다.
쉬익!
놀랍게도 백온후는 길어진 검기까지 계산한 듯이 목을 꺾어 단목기의 가로 베기를 피해 냈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단목기는 손목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가로로 베였던 검. 그것을 억지로 멈춘다. 백온후의 몸 바로 위에서 멈추어 버린 검을 수직으로 꺾는다.
“삼변!”
세 번째 변화.
힘이라는 건 한번 기세를 타면 멈추기가 여간 쉽지 않다. 환검을 제대로 펼치려면 앞으로 나아가던 힘을 멈추어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관절과 근육에 무리가 가는 것은 당연하다.
까드득!
손목의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팔꿈치나 어깨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단목기는 이 순간을 위해 환영삼변을 펼쳐 왔다. 고통은 없다. 그의 오른팔에 내공이 깃들었다. 두 번째 변화보다 많은 내공이 그의 팔을 보호하듯 움직였다.
응축된 내력이 검으로 모인다.
두 번째 변화에서는 반 치 수준이었던 검기의 길이가 한 치 정도로 쑥 늘어났다.
조금만 아래로 휘둘러도 백온후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리라. 귀빈석에 앉은 기인인사들이 눈을 빛냈다. 과연 백온후가 단목기의 세 번째 변화를 피해 낼 수 있을까? 두 번에 걸쳐 그의 공세를 피해 냈다. 감각만으로는 마지막 검격을 피해 낼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늘어난 검기와 백온후의 목이 거의 닿으려 한다.
‘허어! 정말 아슬아슬하게 싸우는구나!’
특히 심판을 보는 청성의 장로 정검대협은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반 치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검을 피해 내는 백온후나 그 거리에서 변화를 만들어 내 공격을 이어 나가는 단목기나 대단한 강심장이다.
혹시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여 정검대협은 당장 튀어 나갈 준비를 마쳤다.
단목기의 검기가 백온후의 맥을 크게 베어 내기 전에 달려 나간다. 만뇌문에서 지급한 혈금유를 바로 바를 수 있게 준비했다.
‘제길, 닿았다!’
정검대협이 빠르게 달려 나간다.
만뇌문이 개최한 비무대회에서 누구 하나가 죽으면 되겠는가? 그래서는 안 된다. 심판의 존재 이유였다.
- 괜찮소.
그때, 누군가의 전음이 들려왔다.
정검대협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뒤를 돌아보니 황극린이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괜찮다고?’
정검대협이 황급히 백온후를 바라본다.
분명 단목기의 검이 그의 목에 닿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백온후는 마치 거미처럼 두 발과 두 팔로 땅을 지탱하며 더 자세를 낮추었다. 사람이 어찌 저리도 유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백온후의 눈동자가 온갖 방향으로 요동치며 단목기의 움직임을 읽었다.
네 발로로 기어가듯 앞으로 돌진한 백온후.
끝까지 잡아당긴 활시위를 튕기듯 탄력적으로 상체를 일으킨다. 정검대협마저도 그 속도에 경악했다.
‘어떻게!’
청성의 장로조차 놀랐을진대 단목기는 어떨까?
그는 황급히 검을 회수하여 백온후를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이미 거리를 내주었다. 백온후는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뇌정신공의 기운이 담긴 권격. 그것이 단목기의 허리를 강타했다.
퍽!
다음은 옆구리.
퍽!
마지막으로 턱.
“큭!”
뇌가 크게 흔들린다. 어지러웠고, 속에 있는 것을 게워 내고 싶었다. 하지만 단목기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아 냈다. 그는 검을 놓아 버렸다. 검으로는 이 거리에서 싸울 수 없다. 그 또한 주먹으로 백온후와 맞서려고 한다.
하지만 극한에 이른 백온후의 감각에 이미 균형 감각을 잃은 단목기의 주먹이 닿을 리가 없었다.
쿡! 퍽! 퍽! 쿡!
백온후는 무아지경에 빠진 듯이 주먹을 휘둘렀다. 단목기는 반탄지기를 끌어 올려 그의 주먹을 막고 피해 냈지만… 결과는 정해진 듯했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도 버티고 있는 단목기의 정신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수십 차례의 공방.
아니, 일방적인 백온후의 권격 세례가 지나가고, 단목기가 휘청이며 겨우 그의 거리에서 벗어났다. 입과 코에서 검붉은 피를 흘려 대고 있었다.
백온후조차 깜짝 놀란 눈으로 단목기를 바라본다.
보통 비무에서 온후의 권격을 두어 번 맞으면 모두 포기했다. 하지만 단목기는 그러지 않았다.
‘멋있다.’
분명 승리를 확신한 백온후였다.
그런데도 왜 눈앞의 상대에게서 빛이 나는 것처럼 보일까. 언젠가 다시 싸울 수 있게 된다면… 단목기는 어떤 검로로 백온후를 막아 세우려 할까? 궁금했다. 보고 싶었다.
그때.
“제가… 제가 졌습니다.”
단목기가 비틀거리는 와중에 포권지례를 했다. 참으로 위태로워 보인다.
백온후도 깜짝 놀라 그의 예를 마주했다.
“다음번엔… 꼭…….”
말을 다 내뱉지 못한 단목기가 쓰러진다.
백온후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달려갔다. 얼른 치료해 주지 않는다면 후에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격렬하면서도 피를 말렸던 비무.
관중은 백온후가 단목기에게 달려가는 순간, 거대한 환호성을 터트렸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
승자와 패자가 결정됐지만, 관중에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좋은 승부를 펼친 두 사람에게 환호해 주는 것. 관중은 본능적으로 그러한 길을 택했다.
한편, 가장 높은 곳에서 비무를 바라보던 두 사람.
뇌불이 말한다.
“온후에게 좋은 인연이 생긴 듯하구나. 클클.”
뇌불이 과거를 추억하듯 말한다.
그에게도 적수이자 친우였던 이가 있었다. 황극린이 미소로 그의 말에 답했다.
“그런 것 같구려.”
만무지회를 통해 만뇌문의 힘을 전 무림에 각인했다. 이제 만뇌문을 황극린만 있는 문파라고 말하는 이는 없으리라.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만뇌문 내에서 수련만 하던 문도들이 세상을 경험했다는 점이다. 결승에 오른 백온후뿐 아니라 백건악과 비청하 그리고 제갈수 또한 저마다 많은 경험을 쌓았고, 인연을 만들었다.
황극린은 문도들이 그들만의 길을 걸어가길 원했다.
그들이 자신에게 은혜를 갚고자 노력하는 건 알았지만, 평생 그렇게 살게 하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만무지회를 개최한 것이다,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도록.
황극린과 뇌불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자 귀빈석에서 흥미로운 눈으로 비무장을 바라보고 있던 기인인사들의 시선이 황극린에게 집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