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215화 (215/316)

215화 가벼움

수라혈검대(修羅血劍隊).

혈마교의 주 전투 부대 중 하나였으며, 인간을 죽이는 게 밥 먹는 것보다 쉬울 거라는 소문이 자자한 살인귀들이다. 그들의 악명은 과거 정사대전에서 처음 알려졌었다.

하지만 지금 수라혈검대원들의 면면을 보면 그 악명처럼 그리 무서운 외관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얼굴들과 몸은 평범하다. 적당히 백성들이 걸치는 옷을 입고 있으니 오히려 평범해도 너무 평범했다.

이것이 수라혈검대의 장점 중 하나였다.

그들은 전투가 시작될 때 살인귀가 된다. 하지만 그 전에는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하는 백성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대주님.”

영웅건을 두른 수라혈검대의 부대주가 대주에게 다가간다.

대주는 의외로 전혀 근육이 없는 것처럼 삐쩍 말랐다. 부대주는 알고 있었다. 저리 말라 보였어도 그의 힘은 웬만한 장사보다 훨씬 세다는 것을 말이다.

아무튼, 부대주의 얼굴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은천문주와 연락이 끊겼습니다. 은천문주는 살아남았겠지만… 그래도 이제부턴 은천문의 정보를 거의 활용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

혈마교는 계획이 있었다.

특히 정파의 분쟁을 바라는 혈마교로서는 확실하게 시행될 것 같은 작전을 수립했다.

다짜고짜 천화련을 공격하게 된다면 혈마교는 중원 전체와 싸워야 한다. 과거 혈교와 마교는 그게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 알고 있었다. 물론, 혈마교가 키운 마인(魔人)들의 힘은 막강하다. 그리고 세월을 들여 키운 중원의 끄나풀들도 많았다.

그렇다고 해도 중원 전체와 정면으로 맞붙는 건 미련한 짓이다.

특히 피의 혈족이라 불리는 이들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열하다고 할지라도 이기적인 방식으로 싸워야 했다.

이번 작전은 꽤 공을 들였다.

소림사의 행동을 예측하고, 그들에게 알맞은 정보를 쥐여 준다.

계획대로 되었다면 만뇌문과 소림사의 전쟁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쟁은 더욱 커져 용성과 무림맹으로 확대되었으리라.

손 안 대고 코를 푼다.

과거의 마교였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치졸한 방식이다. 그들은 강자존을 숭배하였다. 어떤 적을 만나든 간에 타협 없이 모조리 쓸고 지나갔었다. 그렇기에 마교는 중원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했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여기서 상부의 명령을 기다린다.”

수라혈검대는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명이 내려온다면 목숨을 바쳐 임무를 완수할 것이다. 당장은 계획이 실패하여 상부도 고민이 많을 것이다. 수라혈검대는 그들의 명령만 따르면 그만이다.

‘아마 전음석을 회수하라는 명이 내려오겠지.’

전음석.

그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특정 임무를 수행하며 실시간으로 명령을 하달받을 수 있었다.

수라혈검대의 전력은 막강하다.

하지만 정면으로 만뇌문에게서 그걸 뺏지는 못하리라. 그렇지만 정면으로 이기지 못하더라도 상대를 협박할 방법은 많았다.

뇌불과 황극린을 제외하고는 수라혈검대가 손쉽게 잡을 수 있는 상대들뿐이었다.

수라혈검대주 적괴수(赤拐手) 공노지는 만무지회의 결승을 관람했다. 백온후의 재능이 뛰어나긴 하지만, 아직 후기지수일 뿐이었다.

기회는 언젠간 온다.

만뇌문이 막강한 진법으로 보호받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나, 인간이라면 언젠간 땅을 밟기 마련이었고, 그 순간을 언제든 황극린과 뇌불이라는 괴물들이 지켜 줄 수 없었다.

아직 수라혈검대에게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지만, 공노지는 그런 명이 내려올 것이라 예상했다. 피의 혈족이라면 당연히 그런 길을 선택할 것이다.

공노지가 마음속의 혈검(血劍)을 다스리고 있을 때.

“대주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대원 한 명이 굳은 얼굴로 달려왔다.

경공이 얼마나 은밀한지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뭐지?”

“정보 수집을 하던 5조와 완전히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5조? 그들이 남긴 표식은 없었나?”

혈마교의 전투부대들은 각자의 표식이 있었다. 특히 긴급 상황에서 누군가를 쫓거나 도주해야 할 때, 평범한 이들은 보고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표식을 남기곤 한다.

“전혀 없었습니다.”

공노지가 심각한 얼굴로 일어섰다.

수라혈검대원들의 실력은 그가 잘 알고 있었다. 소리 소문 없이 잠적해야만 하는 상황이 무엇일까?

‘반응할 새도 없이 제압당했거나, 표식을 남길 여유조차 없이 도주해야 했거나.’

둘 다 문제였다.

현 정파 무림의 고수들이 중강현에 꽤 많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마기(魔氣)를 구별할 능력이 없었다. 특히 수라혈검대가 익힌 무공은 특별하여 전혀 마기가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다. 수색을 나선 5조원들이 작정하고 무공을 펼치지 않고서야 말이다.

“중강현을 이탈한다.”

대주 공노지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했으며, 바로 결단을 내렸다.

현장에서 뛰는 전투대는 선 조치 후 보고다. 만약 그들에게 전음석이 있었다면 달라졌겠지만, 혈마교에서도 그건 한 쌍뿐이었고, 심지어 소통할 수 있는 한쪽 전음석은 강탈당했다.

“존명.”

명령이 떨어지자 수라혈검대원들이 빠르게 채비를 갖춘다. 모든 물품을 챙길 수 없으니 가벼운 것 위주로 행낭에 담았다.

“어딜 가려는 건가.”

“……!”

지하에 울리는 무심한 목소리.

수라혈검대원들의 몸이 굳는다.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하나뿐인 출구를 바라보자 누군가 팔짱을 낀 채로 서 있었다.

“황극린.”

수라혈검대원들은 모두 황극린의 얼굴을 익혀 놓았었다.

“흑주.”

- 끼이!

황극린의 어깨 위에서 날개 달린 거미가 모습을 드러낸다.

- 모두 진원진기(眞元眞氣)를 끌어내 싸워라.

진원진기.

그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품은 ‘내공’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괴력을 낸다거나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달린다거나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혈마교나 몇몇 문파에선 진원진기를 자의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연구했다.

진원진기와 하단전 내공을 조합하면 평소보다 삼 할 이상의 실력을 낼 수 있다. 정말 타고난 이들은 근 두 배까지 강해지기도 한다.

대부분 진원진기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사용한다.

패배가 확실하게 판단됐을 때, 하단전의 내력을 끌어낼 수 없을 때 말이다.

하나, 대주는 바로 판단했다.

한 명이라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대원들 모두를 희생해야 했다. 그 한 명은 당연히 수라혈검대주 공노지였다.

황극린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명령이 내려오자마자 수라혈검대원들의 기세가 달라졌다.

“한 번의 싸움에 모두 죽음을 택했군.”

진원진기 격발.

흑살문에서도 그걸 연구한 적이 있었지만, 결국 포기했다. 수지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행 한 번에 공들여 키운 살수가 무조건 죽는다. 차라리 천운이 따라 살아서 복귀하는 게 오히려 확률이 좋았다. 그걸 자의적으로 펼치도록 훈련시킬 바에야 은형술을 더 익히는 게 좋았다.

“상관없지.”

황극린이 말을 내뱉은 순간 전투가 시작됐다.

그런데 싸우는 건 황극린이 아니었다.

그는 입구만 지키고 있을 뿐.

“커억!”

“으으으윽!”

웬만한 고통엔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 수라혈검대의 대원들이었다. 하나,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 끼이이잇!

흑주가 입가에서 독무(毒霧)를 쏟아 낸다.

황극린은 흑주의 독에 완전한 면역이 되었지만, 대원들은 다르다. 흑주에게 다가가다가 중독되어 쓰러진다. 진원진기를 썼다고 독을 완전히 방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거기다 흑주의 독은 만독문의 후계자조차 경악할 정도로 치명적인 극독이었다.

- 싸워라! 틈을 만들어라!

공노지는 혼자만 살려 했다.

그게 혈마교를 위해서 이로운 판단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귀중한 전력이 있다면, 그는 언제든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크억!”

“끄르르르륵!”

공노지의 얼굴이 굳는다.

‘이건… 대체…….’

황극린도 아니고, 그 옆에 있는 거미에게 제압당하는 수라혈검대라니?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어느 순간 독무의 위험성을 깨달은 수라혈검대원들이 뒤로 물러섰지만.

이미 늦었다.

이제는 진짜 괴물이 움직인다.

등불 몇 개만이 지하 공동을 비추고 있는 곳에서 환한 뇌전의 꽃이 피어올랐다.

* * *

“허허, 이건…….”

소림의 천선대사.

그는 뇌불에게 부탁했다. 해월대사가 겪은 진법이 대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땡중, 말했지 않느냐.”

한때는 자기도 땡중이었으면서 거들먹거리는 뇌불. 해월대사를 제외한 사대금강이 언짢은 시선을 보냈지만, 뇌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군요, 구유섭신귀혼진(九幽攝身鬼魂陣)이 아닙니다.”

직접 겪은 것과 글로만 보는 것은 다르다.

천선대사는 진법을 둘러본 후 결론을 내렸다. 비슷하지만 이건 구유섭신귀혼진과는 다르다.

구유섭신귀혼진은 인간의 혼을 갉아먹는 진법.

하지만 만뇌문에 설치된 진법은 그렇지 않았다.

“해월이 무엇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나도 너희를 용서했으니 너희도 다시는 만뇌문을 건들면 안 된다. 만약 또 수작을 부리다간 너희는 다 죽는다.”

서슬 퍼런 협박에 천선대사가 작게 미소 지었다.

“예.”

용서라.

그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뇌불이 저런 단어를 입에 올린다. 믿을 수 없는 변화였다. 번뇌를 끊어 내고자 수행해 왔던 천선대사. 그는 최근 마음의 평정을 얻었다.

소림의 자존심.

그것 때문에 아미파에게도 사과하지 못하였다.

하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비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 만약 만뇌문에 사과하지 않고 이곳에 당도했다면, 이곳을 배교의 진이라 단정 지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사용료를 내면 생각해 보지.”

“예, 충분하게 지불하겠습니다.”

“클클, 좋다.”

뇌불은 비동에서 나왔을 때, 언젠간 소림사를 멸문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였지만, 소림을 향한 적의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나, 지금은 소림이 밉지 않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너무 먼 과거의 일이라 생각됐고, 또 최근에 그들은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았던가?

‘나도 참 많이 변했군.’

묘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은 천선대사와 뇌불.

“큼큼, 아무튼! 확실히 해월 저놈은 참회동에 들어가는 거지?”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진 뇌불이 말하자 해월대사가 입을 연다.

“예, 제 부족함을 깨달았으니… 더 수행해야겠지요.”

“그래.”

그것으로 됐다.

천선대사와 사대금강이 진법을 둘러본다. 이곳에서 깨달음 하나라도 얻을 수 있다면 소림사에겐 남는 장사였다. 여기서 얻은 깨달음을 제자들에게도 전파할 수 있었으니까. 만뇌문에 내어 준 것이 많았지만, 아깝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언제부터 소림이 물욕에 사로잡혔던가?

‘가볍구나.’

천선대사는 방장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견딜 수 없는 압박감에 시달려야 했었다.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막상 버리고 나니 왜 그런 것에 집착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기묘한 법력이 방장의 주위에 맴도는 것을 본 뇌불이 눈에 이채를 발한다.

저것이 반야신공의 기운일 것이 분명하다.

그들에게 반야신공의 사본을 받았으니 뇌불 또한 그만의 방식으로 더 발전할 수 있으리라.

“음? 그건 뭐냐?”

뇌불이 시선을 돌리니 황극린이 비쩍 마른 장년인 하나를 어깨에 둘러메고 있었다.

잠깐 나갔다 돌아오겠다더니 뭘 들고 온 거야?

“수라혈검대의 대주요.”

“……?”

사대금강뿐 아니라 방장인 천선대사마저도 깜짝 놀란다.

“수라혈검대라면… 혈마교의 전투부대 아닙니까?”

“맞습니다.”

황극린이 어떻게 놈들을 찾았는지 예상한 뇌불이 혀를 내둘렀다. 물론, 소림사의 고승들 앞에서 그걸 떠벌리진 않았다.

대신,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인질이냐?”

“그렇소.”

두 사람의 대화에 천선대사가 당황하며 묻는다.

“인질이라니요?”

“왜? 인질을 잡았다고 뭐 또 무림맹에서 우리가 나쁜 짓을 했다고 고자질하게? 어엉?”

“아닙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혈마교는 수라혈검대의 대주를 인질로 잡아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하나가 아니면 될 것이오.”

황극린의 말에 천선대사가 고개를 갸웃하고, 뇌불의 입꼬리가 깊어졌다.

“어이, 땡중. 처음 고검문이 혈마교라는 걸 밝혀 낸 게 누군지 알고 있느냐?”

“그건 청성파…….”

말을 하던 천선대사가 황극린이 데려온 수라혈검대주를 바라본다.

그러다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헛웃음을 흘린다.

“그랬던 것이군요.”

“그래, 네놈들은 혈마교의 간자를 찾아낸 우리한테 누명을 씌우려 했었지. 반성해야 하지 않겠느냐?”

“예, 다시 한번 죄송…….”

“말뿐인 사과는 되었다.”

“그럼 제가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뇌불이 미소를 머금는다.

“어차피 진법 때문에 조금 더 머물 생각 아니냐?”

“그렇습니다.”

“너희, 우리랑 일 좀 하자.”

가성비 좋은 힘 센 일꾼이 다섯이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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