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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144화 (144/316)

144화 굴복

흑살문은 의뢰를 가려서 받는다.

그리고 그나마 합리적인 방식으로 금액을 책정한다. 사실 어찌 보면 저렴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인간의 목숨을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겠지만, 살수 문파를 운영하는 이상 그들은 목숨값을 적정 수준으로 산정한다.

가장 명확한 기준이 되는 것은 표적 본인의 무력이었다.

표적의 무공이 강해질수록 의뢰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특히 화경의 고수를 죽여 달라는 의뢰는 대를 이어 온 명문가가 파산할 수준의 금액이나 그에 상응하는 신물(神物)을 요구한다.

다음으로 그들이 따지는 건 당연하게도 표적의 배경이었다.

일류에 미치지도 못한 무인을 죽여 달라는 의뢰는 얼마를 요구할까? 애초에 그 정도 수준이라면 흑살문에 잘 찾아오지도 않겠지만, 대부분 본신의 무력이 약하다면 그의 주위에 거대 세력이 있음을 뜻한다.

표적을 보호하는 건 사람일 수도 있으며, 기관진식일 수도 있다.

혹은 그가 죽는다면 ‘복수’를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가령 천하칠대고수가 애지중지하는 가족을 죽였다고 치자. 그들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천하칠대고수의 분노를 오롯이 감당해야 했기에 그들의 가족을 죽여 달라는 의뢰는 막대한 금액을 요구한다.

현재 흑살문은 황극린이 화경의 경지에 발을 디뎠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거기다 그의 뒤에는 의문의 세력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흑살문조차 파악하지 못한 세력이다. 물론, 제아무리 중원 최고의 살수 집단이라 해도 중원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겠지만… 아무리 흑살문이 황극린의 뒤를 캐내려 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위험을 뜻했다.

황극린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존재다. 물론, 흑살문주 암혼마제(暗混魔帝)가 허락한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솔직히 암혼마제는 황극린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천재’ 하나가 등장했다고 생각했을 뿐. 그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면 화경급에 이른 고수의 의뢰는 대부분 거절한다.

그렇기에 흑살문은 천만 냥을 불렀다.

사실 흑살문이 돈을 모으기 위해 살수 집단을 운영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돈은 부수적인 부분일 뿐이다. 하지만 액수가 금자 천만 냥이라면 달라진다. 그 정도면 암혼마제의 허락이 떨어질 것이다.

문제는…….

“백만? 지금 백만이라고 했소?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대룡상단주 가금후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30만 냥에 흑살문이 의뢰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찾아오지는 않았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언제든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었으니까. 그가 역정을 내는 척 연기하는 이유는… 당연히 가격을 깎기 위함이었다.

“50만 냥! 내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고 왔소. 황극린의 무예가 꽤 출중하긴 하지만… 흑살문은 그런 고수도 죽이지 않소? 흑살문이 사파에서 제일이라는 건 내 이미 알고 있소.”

그러면서도 흑살문을 치켜세워 준다.

노파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아무래도 잘못 이해한 모양이었다.

“백만이 아니오.”

“으음?”

가금후의 얼굴이 믿을 수 없단 듯이 굳는다.

백만까지는 어찌어찌 가용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그래도 최대한 70만 냥 정도로 깎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천만?”

“그렇소.”

“황극린이 무슨 천하칠대고수라도 된다는 말이오!”

가금후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천하칠대고수는 흑살문이 액수를 측정하는 모든 부분에서 최상의 등급을 부여받았다. 화경에 이른 무공도 무공이지만, 그의 곁에는 수준 높은 무인들이 즐비하다.

흑살문이 천하칠대고수급의 의뢰를 받은 건 단 2번뿐이다.

당연히 돈으로 의뢰를 맡긴 사람은 없었다. 모두 흑살문이 원하는 무언가를 제시했기에 받아들였을 뿐이다.

“죽은 이중산은 화경에 근접한 고수였소. 상처도 거의 입지 않고 그를 죽였으니 황극린이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게 이치에 맞지 않겠소?”

“아무리 그래도 천만이라니! 이건 정말……!”

“대룡상단은 흑살문의 오랜 고객분들 중 한 분이지요.”

대룡상단주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노파를 바라본다.

“그렇소.”

“개인적으로 조언하자면… 단념하는 게 좋소.”

“단념? 뭘 단념하라는 말이오?”

“황극린에 대한 복수.”

“…….”

가금후가 인상을 찌푸린다.

“주제넘은 발언인 것은 알고 있소?”

“알다마다. 그래서 개인적이라고 사족을 붙였지 않소?”

가금후는 분노를 가라앉힌다.

“왜 그런 조언을 한 것이오?”

“우리도 고객 중 하나를 잃기는 싫으니 말이오.”

“흑살문에선 황극린을 높게 평가하나 보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소?”

황극린이 보냈던 쓰레기 같은 평화협정 제안서를 떠올리니 당장이라도 무엇이든 부숴 버리고 싶었지만, 흑살문에서 저런 조언을 한 걸 허투루 듣진 않았다.

‘정말 그놈에겐 뭔가 있는 건가……?’

흑살문은 의뢰를 받을 생각이 없다.

가금후는 깨끗이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황극린의 제안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생각은 없긴 했지만, 흑살문이 저리 조언한 만큼 고민은 해 보아야 했다.

“아,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비요둔(秘妖屯)이나 밀은영(密隱營)은 찾아가지 마시오.”

가금후는 대답도 하지 않고 떠나갔다.

노파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허허로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 *

대룡상단은 연일 간부 회의가 열렸다.

당연히 만뇌문과의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가 주된 내용이었다. 이중산이 죽고 흑살문에게까지 거절당한 그들은 선택할 패가 없었다. 항복하거나 전 재산을 끌어모아 싸우거나 둘 중 하나다.

사실 이미 결말은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만뇌문은 당최 어딨는지 찾을 수도 없었으며, 황극린은 화경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200년의 역사를 가진 대룡상단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것보다는… 돈을 주고 전쟁을 끝내는 게 맞다.

치욕적이었다.

중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던 대룡상단이 중소문파인 만뇌문에 당하는 게 말이 되는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하지만 상인들은 셈에 능하다. 이대로 전쟁을 이어 가는 게 훨씬 손해가 컸다.

하루에 세 차례 이상이나 열렸던 간부 회의에선 결국 황극린이 제시한 평화협정 제안에 동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렇게 대룡상단주와 황극린이 처음으로 만나게 됐다.

만뇌문에서는 황극린 혼자 나타났으며 대룡상단에서는 수십 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무림맹의 무인들이 중재자로 나섰다.

“같은 정파인끼리 싸워서 되겠소? 대룡상단주께서 큰 결단을 내려 주셨소이다.”

무림맹 사천지부장 당철기.

사천당문 출신인 그는 최대한 좋게 상황을 풀어 가라는 맹의 명을 받고 행동하고 있었다.

“자자, 황 장로.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오.”

황극린과 대룡상단주 가금후가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았다.

가금후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소.”

“알고 있소.”

가금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회담장에서 화를 내는 것처럼 미련한 행동은 없다. 최대한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

“대룡상단이 만뇌문과의 평화협정을 받아들인 건 무림맹의 설득이 있어서였소. 사천지부장께서도 말씀하셨듯 같은 정파끼리 피를 흘리며 싸워서 뭐가 남는 게 있겠소이까? 그러니 이번 협정으로 과거의 연은…….”

가금후가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이어 나간다.

“깨끗이 묻어 두기로 합시다.”

당장이라도 면전에 욕을 퍼붓고 싶었다.

하지만 참는다. 그래야 한다. 대룡상단의 미래를 위해서다.

“알겠소.”

“그리고 협정을 체결하기 전에.”

대룡상단주가 슬픈 눈동자로 말한다.

“이중산 대협을 죽인 것에 대해 사과할 생각은 없소?”

여러 계산이 깔려 있다.

황극린이 사과한다면 이를 빌미로 협정 제안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다.

만약 사과하지 않는다면?

‘네놈의 그 잘난 동려대협이라는 별호가 땅에 묻혀 버리는 거지.’

대룡상단주의 시선에 황극린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난 경고했소. 다시 한번 만뇌문을 공격하려 한다면 모두 죽인다고 말이오.”

“황 장로의 무공 실력이 출중하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소. 당시의 전투를 지켜본 이들이 모두 말하더군. 황 장로께선 여유가 있었다고 말이오. 이중산 대협은 그렇다고 칩시다. 하나… 가정을 이룬 용살단원들까지 모두 몰살한 건…….”

황극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눈이 보이지 않아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만뇌문은 내 가족이오.”

“…….”

“가족을 건드리면 그 이상으로 갚아 줄 것이오. 당연히 사과할 생각은 없소.”

만뇌문도들이 들었다면 펑펑 눈물을 흘릴 말이었다. 황극린은 살수였지만 사람을 죽이는 걸 즐기는 성향은 아니다. 단지, 무림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고 있을 뿐이다. 만뇌문을 건드리면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른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을 뿐이었다.

“정말 냉정하시구려.”

“…….”

“뭐, 황 장로의 생각은 잘 알겠소.”

언젠가 그 발언은 황극린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다. 대룡상단은 당장은 치욕을 감내하겠지만, 미래를 위해 평화협정을 체결하려 했다.

“나도 협상을 체결하기 전에 할 말이 있소.”

“말씀하시오.”

“조건을 바꾸어야겠소.”

“사과를 요구했다고 그렇게 감정적인……!”

“당신이 살수 집단과 접촉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뭐라! 무슨 말도 안 되는……!”

“금자 오백만이오.”

“미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대룡상단주가 욕설을 내뱉는다. 중재자로 온 무림맹 사천지부장도 혀를 내두른다. 말이 오백만이지, 아무리 대룡상단이라 하더라도 그 큰 금액을 덜컥 내어 줄 수는 없었다.

“굳이 금자로 주지 않아도 되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살수에 대한 이야기를 더 자세히 하길 바라시오?”

대체 뭘 알고 저러는 걸까? 대룡상단주는 찔리는 게 있어서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자고로 상인은 유리한 자리에서 협상해야 했지만, 오늘의 회담은 대룡상단에게 너무도 불리했다. 이중산이 죽은 시점부터 이미 판은 뒤집혔다고 봐야 한다.

“금화종(金華鐘).”

“……!”

이 미친놈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대룡상단주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다.

“대룡상단이 그걸 가지고 있는 걸 알고 있소.”

종소리로 인간에게 안정을 가져다준다는 신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단순히 인간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는 능력만 있는 게 아니다. 금화종의 진짜 능력은 식물이나 가축을 기를 때 그 효과가 배가된다고 했다.

금화종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자란 식물과 가축들은 듣지 않고 자란 것보다 훨씬 건강하게 자란다고 한다. 대룡상단은 약재를 유통하면서 금화종을 이용한 홍보를 많이 한다. 같은 약재를 팔더라도 금화종의 종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면 가치가 달라진다.

사실 금화종을 쓰는지 안 쓰는지는 백성들은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금화종은 대룡상단이 가진 보물 중에서도 가장 진귀한 물건이었다. 황극린이 그것을 요구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걸 내놓는다면 갚아야 할 돈을 조금 줄여 드리겠소.”

누가 보면 대룡상단이 만뇌문에 빚을 진 줄 알 것이다. 당장이라도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며 소리치고 싶었다. 애초에 회담장에서 황극린을 말로 휘두르려 계획하고 왔다.

하지만 대룡상단주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마치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듯한 기묘한 기운이 어느 순간부터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입을 열 수도 없었고,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어떠시오?”

반협박.

아니, 그냥 협박이었다. 대룡상단은 이 상황이 황극린이 벌인 짓임을 알아챘다. 동려대협이니 하는 것은 죄다 거짓말이다. 이놈의 방식은…….

‘사파 같은 놈…….’

순간 흑살문이 황극린을 제거하는 데 천만 냥을 부른 것을 떠올린다. 황극린의 무공 실력은 확실히 대단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흑살문이 황극린을 인정할까? 아니다. 흑살문이 어떤 놈들인데? 그들이 중원에서 쌓아 올린 전설과도 같은 무용담은 대부분이 진짜였다.

‘설마 흑살문이 황극린의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그의 뒤에 다른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살짝 올라간 황극린의 입꼬리가 몹시 냉혹하면서도 잔인한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대룡상단주의 등에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 여기서 거절한다면 나야 좋소만.

순간 대룡상단주의 뇌리에 황극린의 전음이 스쳐 간다.

거절하면 여기서 또 요구 조건이 늘어날 것이 뻔하다. 그때가 되면 금화종을 포함하여 대룡상단의 또 다른 자산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평소였다면 이런 협박에 당하지 않았을 대룡상단주였다.

하지만…….

정신을 뒤흔드는 살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몸을 짓누르던 기운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대룡상단주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조, 조, 좋소…….”

황극린은 이렇게 상황이 흘러갈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준비해 온 서류를 탁상 위에 척척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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