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새로운 별호
이번 전쟁에서 만뇌문이 얻은 것보다 대룡상단이 잃은 것이 훨씬 많았다.
그들은 최고의 전력 중 하나인 용살단을 잃었으며, 신물 중 하나인 금화종과 금자 200만 냥을 만뇌문에게 갖다 바쳤다. 거기다 구축해 놓은 약재 판매 유통망까지 만뇌문에게 홀라당 뺏겨 버렸으니, 제아무리 대룡상단이 오랜 세월 쌓아 놓은 자산이 많다고 할지라도 상단의 순위에서 밀리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원 5대 상단 중 하나로 이름을 떨치던 대룡상단.
그들의 찬란했던 명성은 빠르게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압도적인 자금력과 용살단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행하던 사업체의 인수가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사업을 키워 왔던 원천이 바로 인수였다. 아직 규모가 커지지 않은 상단이나 상회를 만뇌문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협박하여 인수하곤 했는데, 이제는 내부에서부터 잡음이 흘러나왔다.
인수하려는 사업체가 또 만뇌문처럼 발악한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
이번에도 대정회가 나서 줄 것 같으냐?
용살단이 없으니 이제는 사려야 할 때이다.
모두가 사업체의 인수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았다. 상단주마저도 인수 검토 서류를 볼 때마다 몸을 움찔하곤 했다. 회담장에서 보여 줬던 황극린의 살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제대로 인수가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기랄.’
거기다 더 큰 문제는…….
백금련(白金聯)이나 남경상단(南京商團)과 같은 대룡상단의 오랜 경쟁자들이 치고 올라왔다는 점이다. 그들은 대룡상단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파악하고 틈을 치고 들어왔다. 애초에 황극린이 아니더라도 인수전에 뛰어들 여력이 없었다. 가지고 있는 걸 지키기에도 버거운 상태였다.
그렇게 대룡상단은 아득바득 만뇌문에 막대한 규모의 배상금을 물어 주고 아주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초창기 대룡상단이 중원에 뿌리를 내렸을 때가 이러했지 않을까? 대룡상단주는 자신이 초대 상단주가 되었다는 마음으로 최대한 악을 쓰고 버티고 있었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진 않았다.
그렇게 대룡상단주가 악을 쓰고 버티고 있을 때.
대룡상단주에게 서신 하나가 도착했다.
- 작업 완료.
대룡상단주가 참으로 오랜만에 미소를 머금었다.
서신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황극린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갔다는 것이다.
‘네놈은 대협이 아니라 수라일 뿐이다.’
대룡상단주가 보아 왔던 황극린은 결코 의협심이 넘치는 협객은 아니었다. 동려대협이라는 별호도 누군가의 착각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그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별호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무인들에겐 별호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수라공자(修羅公子).
고명한 작명가에게 거금 금자 백 냥을 주고 만든 별호였다. 황극린은 믿을 수 없게도 아직 어린 청년일 뿐이다. 하지만 그에게 대협이라는 별호는 어울리지 않기에 ‘수라’라는 딱 맞는 단어를 선정했다.
이제 무림의 모두가 황극린을 대협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정파의 무인이 수라라 불리고 있으니 그는 과거처럼 무조건 찬양받지는 못하리라.
‘난 네게 직접 복수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별호로 인해 네가 몰락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볼 것이다.’
대룡상단주는 잘 알고 있었다.
강호 무림에선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이에게 견제가 시작된다. 상단이 아니라 진짜 문파들이 황극린을 주목할 것이다. 대룡상단은 솔직히 말해서 그가 망하기를 비는 수밖에 없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했던가?
대룡상단주는 그를 지켜볼 것이다. 10년 동안 ‘수라공자’가 어떻게 몰락해 가는지 지켜볼 것이다.
“상단주님! 급보입니다! 백금련에서 던지기를 시작했습니다!”
던지기란 다른 상단의 공격을 나타내는 은어였다.
그나마 작게 맺혀 있던 대룡상단주의 미소가 산산이 부서졌다. 지금은 대룡상단을 지켜야 할 때였다. 물론, 그게 잘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 * *
같은 시각.
구자광이 잠깐 외출해서 돌아왔는데, 그의 표정이 볼만했다. 누구 하나라도 걸리면 조져 버리겠다는 의지가 가득해서 감히 만뇌문의 문도들은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던 구자광이 잠깐 멈춰 선다.
장로 황극린의 방 앞이었다. 그의 앞에서 분노한 얼굴을 절대 보여 줄 수 없었다. 호흡을 하며 심신을 안정시킨 구자광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장로님, 구자광입니다.”
“들어와.”
황극린은 어느 순간부터 구자광에게 말을 놓았다. 당연히 구자광은 그 편이 더 편하고 좋았다. 마치 장로님과 더 친밀해진 것 같지 않은가? 그가 어리다는 건 구자광에게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았다.
그의 편안한 목소리를 듣자 그나마 마음이 차츰 진정된다.
“무슨 일이지?”
황극린이 손에 들고 있던 찬란한 금빛의 종을 내려놓는다.
그는 최근 대룡상단에게 받아 낸 금화종을 가지고 실험을 해 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수많은 식물의 화분이 진열되어 있었으며, 거리를 벌리기도 하고 가까이하기도 하면서 종을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공을 조화하면 어떻게 변하는지도 확인해 보고 있다.
“제가 중강현에 갔다가 어떤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슨 소식?”
“그게, 듣자 하니 강호에서 장로님을 지칭하는 새로운 별호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 미친놈들이 감히… 감히……!”
말을 이어 나갈수록 구자광은 점차 광견살검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미친개처럼 으르렁거리듯 과격해진 숨소리. 그때, 기묘한 종소리가 울린다.
띠잉…….
“아……? 음……?”
종소리를 들은 구자광이 고개를 갸웃한다. 왜인지 분노에 가득 찼던 마음이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의아한 듯 눈동자를 굴리면서 황극린이 손에 든 종을 바라본다. 마치 신기한 것을 바라보는 강아지처럼 말이다.
“별호가 뭐지?”
“아, 그게 말입니다. 크음… 화내시지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서든 별호를 바꾸겠습니다.”
“그러니까 별호가 뭔데?”
“그게… 수라공자… 입니다.”
“수라공자?”
황극린은 당연히 화를 내지 않았다. 애초에 별호는 계속 바뀌는 것이다. 거기다 무림인들이 자신을 어떻게 부르는지 딱히 관심이 없었다.
“정파의 초고수에게 수라라는 별호를 붙이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버러지 같은 놈들! 장로님이 너무 강하시니까 질투해서 그런 별호를 만든 것 같습니다! 아니면 혹시 대룡상단 그 떨거지 놈들이……!”
띠잉…….
다시 한번 종이 울리자 광견살검이 명견살검으로 변해 간다. 그 표정의 변화가 참으로 볼만했다. 황극린은 금화종의 효능 중 하나를 발견한 것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괜찮군.”
“…네?”
“나쁘지 않아. 난 어차피 대협이 될 생각은 없었거든.”
“아……?”
어떻게 불리는가.
그것은 행동을 제약하기도 한다.
만약 ‘대협’이라 불리는 자들이 잔혹한 손속을 보여 준다면 무림에선 어떻게 생각할까? 평소 보여 주지 않았던 모습이기에 난리가 날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를 위선자라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번 협객의 길에 들어선 이들은 타인의 시선과 기대가 무서워서 억지로 선행을 베푸는 이들도 있었다. 부모의 과한 기대감에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자식들의 마음도 비슷한 부류이리라.
아무튼, 황극린은 동려대협이라는 별호를 딱히 신경 쓰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평판이라는 게 어떤 힘을 가지는지는 알고 있었다.
동려대협이 갑자기 사람을 죽이고 잔혹한 손속을 보여 주면 지탄받는다.
하지만 수라라 불리는 이가 그런 행동을 취한다면?
“이제 만뇌문을 함부로 건드리는 자들이 크게 줄어들 거다.”
광견살검도 똑같았다.
별호만 보아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지 않은가? 천하백대고수라는 명성도 있었지만, 중원에 강한 무인들은 차고 넘친다. 정파 무림에서 광견살검이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그가 했던 광기 어린 행동으로 만들어진 별호 덕도 있었다.
“그, 그것도 그렇겠군요……! 역시 장로님의 혜안에 탄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황극린의 방에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감히 장로님의 앞에서 그따위 별호를 언급하는 놈들의 목을 쳐 버리리라 다짐했던 구자광이었다. 하지만 황극린의 말에 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장로님이 말씀하시는 게 틀릴 리가 없지 않은가?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구자광이 입을 연다.
“저도 새로운 별호를 얻기 위해서 열심히 뛰겠습니다. 장로님의 뜻을 이어받아서 모두가 겁을 내고 감히 도전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별호를 만들어서…….”
황극린이 그의 말을 끊는다.
구자광은 무림에서 오래 생존해 왔던 만큼 그리 무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왜인지 저대로 뒀다가는 큰 사고가 생길 것 같았다.
“괜찮다. 별호는 나 하나로 충분해. 너는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아, 예!”
부정당했음에도 구자광은 전혀 분노하지 않았다. 그냥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고 여길 뿐이었다.
그런 구자광에게 황극린이 금화종을 건넨다.
“받아라.”
“이, 이건…….”
“제자들을 가르칠 때 활용해 보아라. 과거와 달리 어떤 변화가 있는지도 확인해 보고 보고하도록 해.”
임무!
그것도 장로님이 직접 내려 주신 임무였다! 구자광의 머릿속에 수라공자니 뭐니 새로운 별호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따위는 깨끗이 사라졌다. 이제 그는 금화종의 성능을 최대한 확인하고 분석하여 장로님께 보고해야 한다.
“예! 장로님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철저히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그 어떤 역경과 고난이 있더라도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마치 전장에 나서는 장군처럼 늠름하게 말하는 구자광.
“믿고 있겠다.”
부르르!
구자광은 한차례 몸을 떨더니 황극린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지금부터 바로 움직여야 한다. 제자들을 소집하여 오랜만에 한바탕 굴려야 한다.
“매일 훈련 후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편히 쉬십시오!”
구자광이 떠나간 후.
황극린이 화분에 심긴 식물들을 바라본다.
확실히 금화종은 신물이라 불릴 정도로 효능이 대단했다. 음(音)에 담긴 힘이라고 할까? 사실 과거엔 음공을 활용하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금화종을 다루다 보니 새로운 것에 눈을 뜬 기분이다. 단순히 강기를 줄창 뽑아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음이라…….’
화경의 벽을 넘었다.
단순하게 정리하면 내력을 환(環)의 형으로 변환할 수 있게 됐다는 거다. 하지만 거기에서 황극린은 발전이 막힌 상태였다. 단순히 영약을 취해 육신을 발전시키는 것도 방법 중 하나였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깨달음이 필요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수준으로는 흑살문주 암혼마제에게 필패였다.
하지만 급해질 필요는 없다.
그는 이제까지 해 왔던 대로 성장하면 된다.
황극린이 가부좌를 튼 채 금화종을 다루면서 깨달았던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누군가가 황극린을 찾아왔다.
“황 공자님.”
제갈소희였다.
오늘은 진법을 시험해 보는 날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오?”
“아, 진법을 수정하는데 누군가 황 공자님을 찾아왔습니다.”
“날 찾아왔단 말이오?”
의아했다.
만뇌문의 위치는 아직 무림에 드러나지 않았다. 물론, 대룡상단과의 전쟁이 끝난 후 몇몇 문도들이 진법을 통과하여 중강현에 다녀오긴 했으니 언젠간 만뇌문의 위치가 청성산으로 특정될 가능성은 있었지만… 많이 일렀다.
설마 소림사인가?
소림은 무공의 반환을 요구했다. 뇌불의 혈풍뇌전신공이 소림사의 대반야금강공을 기초로 하였으니 소림의 무공이라는 의미였다. 아미파를 이용하여 소림의 발을 묶어 뒀지만 언제까지고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소림사?”
“아뇨, 소림은 아니었어요. 황 공자님과 인연이 있는 사람인 듯하여 죽이지 않았답니다.”
죽인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제갈소희였다.
그녀의 언행은 확실히 제갈세가에서 볼 때와는 다르다.
“이름이 교특범이라고 했어요.”
“교특범?”
“네, 과거 흑사회에 납치되었는데 황 공자님이 구해 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찾아왔다고 했어요.”
곰곰이 기억의 폭포를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 절강성 항주에서 황극린은 포목점으로 위장한 흑사회의 지부를 박살 낸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납치되었던 모든 백성을 구출해 주었다. 물론, 그들을 책임지고 보살펴 주진 않았었지만 말이다.
‘교특범…….’
기억이 난다.
흑사회의 감옥에 갇혔던 백성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받았던 이들을 자신이 이끌겠다고 했던 사내였다. 눈빛만 보아도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접객실로 데려와 주시오.”
“네, 그럴게요.”
제갈소희가 떠나갔다.
교특범에게 물어볼 게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어떻게 만뇌문의 입구를 찾아왔냐는 점이다.
그리고 당시 교특범이 거두었던 백성들이 어떻게 됐는지도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