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마지막 선택
대룡상단은 발칵 뒤집혔다.
당연하게 승리를 쟁취할 줄 알았던 용살단이었다. 용살단주 이중산이 누구던가? 이제 곧 화경에 접어들 것이라는 게 확실시되는 고수였다. 그는 오래전에 초절정을 돌파했으며, 화경의 벽을 두드린 지 10년이 되었다.
용살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명문세가의 자제들이 어린 나이부터 무공을 익힌다는 것에 착안하여 그들 또한 어린 인재들을 양성해 왔었다. 그들에게 투자한 금자만 해도 대룡상단이라는 거대 상단으로서도 부담되는 수준이었다.
그들이 용살단을 공을 들여 키운 이유?
무림이라는 세상에서는 돈만 많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돈으로 무력을 살 수 있다지만 진정한 힘은 돈으로 살 수 없었다. 억만금을 주어도 소림사의 방장이나 화산의 장문인을 움직일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그들은 돈을 주지 않고도 움직일 ‘절대고수’가 필요했다.
만뇌문은 그 시작이었다. 겁도 없이 대룡상단에 선전포고 한 만뇌문을 교육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이제 슬슬 용살단의 존재를 무림에 각인하고자 한 것도 있었다.
대룡상단에 그러한 고수 집단이 있다는 소문이 중원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면, 대룡상단은 그 힘을 사용하지 않고도 많은 이익을 취할 수 있다. 절대고수 한 명의 존재는 그가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절대고수 한 명만 존재해도 그 어떤 문파도 대룡상단에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일단 대룡상단과 대척점에 서려면 그의 존재를 항상 상기해야 했다. 여러 사업체를 운영하고 온갖 이해관계에 얽혀 있는 대룡상단에겐 용살단의 존재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상단을 뒷받침해 줄 무적의 방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용살단이 전멸했다.
콰아앙!
대룡상단주 가금후의 얼굴은 터져 나갈 듯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손에는 집무실의 집기들을 부수고 던지느라 생긴 작은 상처들로 가득했으며, 이미 그의 집무실 안은 폭풍이라도 몰아친 듯 난장판이 되었다. 그 누구도 가금후를 말릴 수가 없었다.
“이게 말이 되느냐! 말이 되느냔 말이다!”
용살단은 대룡상단이 긴 세월과 돈을 바쳐 만든 무력 조직이었다.
용살단의 화룡대와 금룡대는 전멸하지 않았다. 아직 두 개의 대대가 남아 있었으니 괜찮지 않느냐고 가금후에게 말한다면, 평생 들어 보지도 못한 욕이 귀에 박히게 되리라.
용살단의 본체는 누가 뭐라 해도 용살단주 이중산이었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그래도 용살단은 다시 키울 수 있다. 하지만 이중산은 벌써 죽어 버렸다. 황극린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죽였다고 한다.
“이 악귀 같은 놈! 천하의 버러지 같은 노오오옴! 정파의 탈을 쓰고 사파와 같이 행동해? 내 무림맹에 따져 물을 것이다! 대정회의 모든 무인을 이끌고 만뇌문을 처단할 것이다아아아!”
어찌 보면 처절하기도 한 대룡상단주의 외침.
그의 분노는 한 시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약간 진정될 수 있었다.
“진우선!”
“예! 상단주님!”
진우선 장로가 사색이 된 얼굴로 방에 들어왔다.
사실 만뇌문의 혈금유나 옥보단을 발견하여 처음 인수 계획을 세운 사람이 바로 그였다.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 상단주의 명에 복종해야 한다.
“네게 마지막 임무를 주겠다.”
“예, 무엇이든…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당연한 소리는 하지 마라.”
“죄, 죄송합니다…….”
“무림맹으로 향해라. 아무리 문파 간의 전쟁이라 해도 환영신창과 같은 고수가 죽었다. 이건 정파 무림에 더없는 손실이다. 아직 사흑련이 건재하고 혈마교가 호시탐탐 무림을 노리고 있을진대… 황극린 그 간악한 놈이 이중산 대협을 죽였다.”
“예……! 무림맹에서 놈의 평가를 처참하게 무너뜨리도록 하겠습니다.”
눈을 가늘게 뜬 대룡상단주가 말한다.
“실패는 용납하지 않는다. 너 혼자만의 목숨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야.”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돈을 가진 자들의 잔혹함이 어느 정도인지 진우선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진우선의 가족들을 볼모로 협박하고 있었다. 사실 진우선도 각종 사업체를 인수하며 저런 협박을 해 왔었지만, 자신보다 높은 자리에 앉은 존재가 저리 말하니 몹시 두려웠다. 그렇다고 과거 자신이 해 왔던 협박이 후회되지는 않았다.
단지,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황극린, 네놈 때문에 내 인생이 박살 나게 생겼다.’
진우선은 무림맹으로 향해 황극린이 열심히 쌓아 올린 협객이라는 명성을 박살 내 버릴 것이다. 동려대협? 권룡? 놈에게 그런 별호는 어울리지 않는다. 만뇌문이 사파의 문파라는 인식이 박히도록 만들 것이다.
진우선이 무림맹으로 떠나갔다.
그리고 대룡상단주 또한 서신을 적어 나간다. 그는 대룡상단을 운영하며 수많은 문파와 연을 맺어 왔다. 거기다 대정회도 있었다. 그들이 힘을 합친다면… 아무리 용살단을 전멸한 만뇌문이라 해도 순식간에 끝장낼 수 있으리라.
‘두고 보아라. 네놈이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가는 것을 내가 직접 지켜볼 것이다.’
하지만 왜인지 대룡상단주 가금후의 눈가는 촉촉했다.
이미 대룡상단은 복구할 수 없는 수준의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용살단주 이중산의 죽음은 대룡상단주의 원대한 계획 중 하나가 처참하게 무너지는 결과를 낳았다.
* * *
‘역시 답신이 없군.’
황극린은 대룡상단에 서신을 보냈다.
요지는 이러했다. 처음 그들에게 서신을 보냈을 땐, 금자 100만 냥에 상단주의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상황이 뒤바뀌었다. 오히려 막대한 손해를 입은 것은 대룡상단주였지만… 여기서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건 만뇌문이었다.
사과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금자를 100만 냥에서 300만 냥으로 올렸다.
그리고 대룡상단의 약재 유통망까지 요구했다. 혈금유나 옥보단을 판매하려면 대룡상단처럼 중원 규모의 유통망이 필요했다. 바닥부터 올라가려면 돈도 돈이었지만 시간과 인력을 투자해야 했다. 그 정도면 만뇌문의 명성을 추락시킨 데 대해 얻는 보상으로는 적당할 듯했다.
그는 정말로 여기서 끝내려고 했다.
하지만 답신이 오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나 보군.’
최대의 이익을 생각하는 상인이라지만, 용살단이 전멸했으니 당연히 한발 물러서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대룡상단 규모의 상단을 운영하는 상단주라면 뒤로 물러설 때를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뭐, 사실 아니면 아닌 대로 좋았다.
만약 대룡상단이 여기서 더 만뇌문을 공격한다? 그럼 만뇌문도 똑같이 하면 그만이었다. 다음에 요구할 보상의 액수만 더 커질 뿐이었다.
“자아아, 보아라. 이번에는 아무리 너라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
오늘도 그 시간이 돌아왔다.
진법을 확인하는 시간. 황극린은 진을 통과하는 경험이 꽤 수련이 된다고 생각했다. 저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진 내부를 발전시켰으며, 이런 수련 하나하나가 환영신창과의 싸움에서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환영신창을 어찌 보면 쉽게 이긴 것처럼 보였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가 창에 막대한 내공을 담아 터트렸을 때 창날이 실제로 피부에 닿진 않았지만, 창끝에서 터져 나온 내력은 황극린에게 닿았다. 아직 그의 감각이 완벽한 것은 아니라는 방증이었다.
사실 이런 황극린의 생각은 대부분 무인이 기함할 것이긴 했다.
완숙에 접어든 초절정 고수의 절초를 피해 내며, 솔직히 말해 황극린의 몸에는 작은 피멍만 들었을 뿐이다. 그마저도 사실 혈금유를 바르니 금방 사라졌다. 배부른 고민이라 할 수 있겠지만 황극린은 이번 환영신창과의 싸움에서 하나를 배웠다.
더 발전할 수 있다.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모른다면 발전할 수 없었다. 그는 이번에 자신에게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을 채울 방도가 눈앞에 있었다.
흑사회가 사용하던 배교의 절진은 제갈창해와 제갈소희로 인해 많이 발전했다.
만뇌문을 지켜 주는 진법은 황극린의 감각을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수련시켜 주는 하나의 도구처럼 사용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를 거예요.”
제갈창해나 제갈소희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초감각을 가진 황극린을 막아 내는 진법을 만들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법을 연구했다. 그들의 실력은 단연 중원에서도 돋보였지만, 황극린의 앞에서는 계속 무너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를 한 번이라도 막아야 했다.
이번에는 온갖 기관진식을 설치하여 황극린의 감각으로도 쉬이 피해 낼 수 없을 수준의 미친 함정들을 진법 내부에 설치해 놓았다. 거기다 진기가 잘 흐르지 못하게 하고, 감각을 통제하는 안개도 전체적으로 흩뿌려 놓았다.
“그럼 다녀오겠소.”
황극린이 미소를 머금은 채 진법 안으로 들어간다.
제갈소희와 제갈창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마주친다.
“방금 다녀오겠다고 한 거지?”
“네.”
“허 참, 우리 진법을 통과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군!”
“그러게 말이에요. 이번에는 분명… 황 공자님이라도 통과하지 못할 거예요.”
두 사람은 기대와 긴장이 섞인 눈동자로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반 시진 정도가 흘렀을까?
두 사람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온다.
“음, 이번엔 확실히 매서웠소. 기관진식들의 연계가 좋더군.”
“…….”
“…….”
“다음에도 기대하겠소.”
“…….”
“…….”
황극린은 마치 가볍게 산보라도 하고 온 듯이 말하고 떠나간다.
제갈창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한다.
“사실 내가 진법에 재능이 없었던 건가……?”
“…….”
제갈소희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잠시 의기소침해진 두 사람이었지만, 서서히 눈가에 승부욕이 깃들기 시작한다.
“될 때까지 한다. 이번에는 목(木)의 기운을 활용해 보자.”
“좋아요. 여기서 포기할 순 없죠. 감각을 차단할 수 있는 방도를 연구해 보는 것도 좋겠어요.”
사실 만뇌문의 입구는 이미 무림맹의 비동보다 더 뛰어난 진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 * *
강호 무림은 더없이 냉혹한 곳이다.
대룡상단이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뒤, 안면이라도 트기 위해서 찾아왔던 사람들의 수가 대폭 줄었다. 거기다 대정회의 반응도 영 시원찮았다. 이미 대룡상단과의 의리를 지키고자 제자들을 파견한 문파가 많았고, 당분간 움직일 수 없는 부상을 입었다.
거기다 이번에도 만뇌문에 제자들을 보내면 분명히 죽을 것이었다.
환영신창 이중산도 죽임을 당한 마당에 대정회의 소속이라고 황극린이 자비를 베풀까? 당연히 그런 낙관적인 생각으로 대룡상단의 도움을 바라는 손길에 팔을 뻗는 문파는 거의 없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만뇌문과의 전투를 피했다.
물론, 만뇌문에 무조건 좋은 상황은 아니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것 아니오? 용살단원 전부를 죽인 건 너무한 처사요!”
“이중산 대협이 베어 버린 마두만 해도 수백이 넘어가오! 그가 중원에 헌신한 공을 생각해서라도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면 안 되오!”
그들은 만뇌문과의 전투는 피했지만, 그래도 대룡상단의 막대한 재산은 아직 건재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대룡상단을 위해 무림맹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황극린의 손속이 잔혹하여 정파라는 게 의심된다로 시작하여 이중산의 업적을 나열하며 그가 그렇게 덧없이 저물어 갈 무인이 아니었다는 걸 강조했다. 당연히 대룡상단이 먼저 만뇌문의 약방주를 영입하기 위해 벌였던 일은 전혀 언급하지 않으며 말이다.
무림맹에서도 황극린의 손속이 과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무림맹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간 것인지는 이미 모두 파악한 상태였다. 선전포고 한 것은 만뇌문이었지만 싸움의 씨앗을 심은 건 대룡상단이다.
무림맹에선 대룡상단과 만뇌문에 대한 중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대정회가 최대한 정치를 하고 있었지만, 황극린의 실력이 화경 수준이라는 게 알려지고 난 다음에는 무림맹도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은 정의를 위해 존재하는 집단은 아니다.
사실 최초 무림맹이라는 연합을 결성한 이유는 사악한 마두들을 막아 내기 위함이 맞았지만, 지금은 거대해진 정파 세력의 내부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무엇이 정파에 이익인지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대정회와 그와 대척점에 선 세력들이 무림맹에서 갑론을박을 내세우고 있을 때.
대룡상단의 상단주는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
‘남궁세가 이 미친 것들은 왜 자꾸 만뇌문의 편을 드는 거지?’
황극린의 평은 상당히 안 좋아지긴 했다. 용살단원 전체를 죽인 것이 발목을 잡았다. 이중산이 죽은 건 전투 중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용살단원은 황극린이 자비를 베풀면 죽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상황이 대룡상단으로 넘어가려 할 때, 그들이 등장했다.
창천뇌검.
천하칠대고수 중 하나인 그가 직접 무림맹에 나타나서 만뇌문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 만약 누군가가 남궁세가를 건드리려 했다면, 난 직접 나서서 그들의 문파를 멸문했을 것이오.
- 만뇌문의 황 장로가 이미 경고를 했다 들었소.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무인들을 파견한 건 대룡상단이오.
천하칠대고수가 직접 정치판에 나타나자 당연히 황극린을 몰아가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물론 알게 모르게 황극린이 자비를 베풀 줄 모르는 살귀라는 소문을 퍼트리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다.
‘이젠 어쩔 수 없다.’
대룡상단주 가금후가 찾은 장소는 바로…….
“만뇌문의 황극린을 죽여 주시오.”
“황극린이라…….”
노파 한 명이 의문 모를 미소를 지었다.
흑살문의 지부에 방문한 가금후는 대룡전장의 전표를 내밀었다. 자그마치 30만 냥짜리 전표였다.
보통 흑살문의 의뢰 비용을 알고 있었던 가금후였기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여겼다.
하지만 노파는 전표를 보더니 한숨을 내쉰다.
“부족하오.”
“십만 냥은 금자로…….”
노파가 고개를 저으며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었다.
“백만? 미친 것이오? 후기지수 하나를 죽이는 데 백만 냥을 요구하다니, 흑살문의 의뢰비를 내 익히 잘 알고 있는데……!”
가금후의 역정에도 노파는 의문 모를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