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남창으로 모이다
황씨 가문.
이곳은 소년 황극린이 노예처럼 지냈던 가문이었다. 과거엔 강서성에서 세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규모로 상가를 운영하며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 재력을 과시했다. 재력을 얻은 후에는 무력까지 손에 넣으려 했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악운이 겹치고 또 겹쳐서 지금은 과거의 명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수백 명이 넘어가던 식솔은 현재 삼분지 일이 채 되지 않았으며, 임금을 받지 못한 식솔들이 기물을 훔쳐 달아나는 경우도 가끔 있을 정도다. 물론,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고 했던가? 가주와 직계들이 굶어 죽는 수준까지 추락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과거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황씨 가문에 한 사내가 찾아왔다.
“황씨 가문에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왔소.”
“지금 당장은 대금을 지불할 수 없으니, 나중에 다시 오시라는 가주님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문지기는 심드렁하게 외운 문장을 나열할 뿐이었다.
상가의 자금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못하니 거래처에 대금을 지불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중요한 곳부터 자금을 메워야 했다.
문지기는 사내가 빚을 받으러 온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내는 오히려 문지기에게 금자 한 냥을 내밀었다.
“가주를 만나게 해 주시오. 후회하지 않을 것이오.”
“크음……! 원래 이러면 안 되는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도 돈을 받았으니, 말은 전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사내가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문지기가 금방 돌아왔다.
“문주님께서 물어볼 것이 있거든 돈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내하시오.”
“아, 예.”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건만 평범한 인상의 사내는 수락했다. 대체 뭘 물어보려는 것인지 궁금증이 일었지만, 굳이 자신의 업무가 아닌 일에 머리를 쓰고 싶지 않았다. 문지기가 사내를 인도하여 가주가 기거하는 전각으로 안내했다.
과거엔 시종들만 백 명에 달했지만, 지금은 그 수가 적어져 장원 곳곳에 먼지가 쌓여 있었다.
사내가 안으로 들어간다.
과거에 잘 먹고 잘 잤던 대부호 금황상가의 상가주 황천옹이 홀쭉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눈빛은 전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독기로 가득했다.
“내 이 말은 전하지 않았소. 내게 뭘 물어보려거든 금자 백 냥을 내야 할 것이오.”
그냥 꺼지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사내는 미소를 지은 채 황천옹의 앞에 앉았다.
“돈을 내겠다는 것이오?”
“대답에 따라선, 더 줄 수도 있소.”
“대체 뭘 물어보려고?”
평범한 인상의 사내가 작게 미소 짓는다. 황천옹은 오랜 상인의 직감으로 그의 미소가 철저히 만들어진 미소라는 걸 깨달았다. 저런 미소를 짓는 자들은 위험하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소매 속의 단검을 쥔다.
“황극린.”
“뭐… 라……?”
황천옹이 탁상을 쾅 친다.
그도 이제는 알게 되었다. 황씨 가문이 몰락으로 갔던 이유. 황극린이 개파한 문파에 있는 광견살검이라는 놈 때문에 빌어먹을 악운이 시작됐다.
결국, 황극린 탓이라는 거다.
쿵.
사내가 금자가 잔뜩 든 행낭을 탁상에 올린다. 황천옹의 귀가 쫑긋한다.
‘적어도 70냥.’
황극린이라는 이름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눈앞의 돈을 포기하긴 쉽지 않았다. 거기다가 자세히 생각해 보니 굳이 왜 황씨 가문에 찾아와서 황극린에 대하여 질문하는 건지 예상할 수 있다. 최소한 좋은 의도는 아니다.
“뭐가 궁금하시오?”
상인이라 그런지 눈치가 빨랐다.
여차하면 무력행사도 생각했던 사내가 눈웃음을 짓는다.
“황극린에 대한 모든 것.”
* * *
황극린이 만뇌문에 돌아온 지 한 달이 되었다.
이제껏 황극린은 무언가에 쫓기듯 중원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물론, 목적이 있는 행동이었지만 어느 정도 피로가 쌓였던 듯하다. 육체적인 피로보다도 정신적인 피로라 할 수 있었다.
‘편안하군.’
황극린은 만뇌문에 있으며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과거의 황극린, 그러니까 207호라 불렸던 그에게도 돌아갈 곳은 있긴 했다. 그곳이 목숨을 볼모로 삼아, 다른 사람을 죽이라 명령하는 살수 집단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흑살문과 만뇌문.
당연히 비교가 불가능하다.
흑살문은 강제로 들어가게 된 곳이었으며, 언젠간 꼭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다.
하지만 만뇌문은 다르다.
계속 머물고 싶었으며, 더 발전시키고 싶은 그만의 보금자리였다.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그의 바람. 만뇌문을 키워 나가면 그렇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장로님, 오늘은 이걸 수련했는데요……! 한번 봐주실 수 있나요?”
“그래.”
백온후는 하루에 한 번 황극린에게 점검을 받는다.
백건악이나 비청하가 함부로 황극린의 앞에서 무공을 펼치기 두려워하는 것과 다르다. 그들이 황극린 앞에서 무공을 펼치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하나였다. 황극린이 실망할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하지만 백온후는 그런 게 없었다.
원체 성격이 밝아 황극린의 앞에서 무공을 펼치는 것에도 주저함이 없다. 그래서인지 세 사람 중에서는 발전이 가장 빨랐다.
“네 장기는 은밀함이다. 크게 움직이며 강한 일격을 날리는 것도 좋지만…….”
황극린이 백온후의 틈을 파고들어 손가락을 쑤욱 찌른다.
“억!”
옆구리를 찔린 백온후가 펄쩍 뛴다.
“이렇게 손가락만 찔러도 많이 아플 것이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도 상대를 압박할 수 있다.”
“아…….”
“만약 내 손가락에 뇌전이 담겨 있었으면 어땠을 것 같나? 뇌정신공(雷霆神功)을 더 갈고닦아 보도록.”
“네엣!”
만뇌문도들을 위해 뇌불이 새로이 창안한 뇌정신공. 거기에 유령의 무영심결(無影心訣)의 심득을 스며들게 하고, 각자의 특성에 맞게 조금씩 변형을 주었다. 혈풍뇌전신공처럼 중단전을 다루는 수준의 무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성한다면 혈풍뇌전신공 못지않은 절세의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백온후는 묘연골을 타고났다.
유령(幽靈)과 똑같은 체질이라 했던가? 백온후는 적절한 나이에 무공을 익혔으며, 무림에서 손에 꼽히는 절세무공을 익히고 있다. 미래가 촉망된다. 발전 속도도 매우 빠르다. 그는 언젠가 만뇌문의 기둥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백건악이나 비청하 그리고 제갈수도 마찬가지겠지.’
그걸 생각하니 가슴이 은은히 뛴다.
기대가 된다고 할까? 얼른 그들의 성장을 눈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빨리 지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이중적인 마음도 있었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닷!”
“그래, 고생해라.”
“옙!”
백온후가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뛰어간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유령의 무공이 떠오른다. 유령을 생각하니 뇌불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 네가 잘 아는지 모르겠지만, 무림엔 강자가 너무 많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성격인 뇌불의 말치고는 너무 겸손했다.
그는 진중한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었다.
- 첫째로 유령이 있으며, 천화련의 점잖은 척하는 여우 놈이 있지. 그리고 북해의 그 미친 마녀도 무시할 수 없어.
뇌불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 소림의 방장도 강하다. 사실 구파일련의 장문인들은 모두 고금제일의 후보가 될 수 있다. 그 약아빠진 놈들은 진짜 실력을 드러내지 않거든. 모르긴 몰라도 한 명을 골로 보낼 비장의 수를 하나씩 숨겨 뒀을 것이다. 육대세가 가주 놈들도 마찬가지겠지. 또, 사파로 넓혀 보면 더 많아지겠지.
황극린은 흑살문이 내부적으로 중원 무림의 순위를 매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순위 같은 것에 환호하고 집착하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크게 관심은 없었지만, 뇌불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 그래도 하나를 꼽으라면 난 유령이다. 마지막 기억은 지금도 떠오르지 않지만… 난 그놈한테 당한 게 분명해. 그래서 내가 비동에 들어갔을 거다.
황극린은 납득했다.
뇌불에게 답을 얻으려 했다기보다는, 그의 생각을 알고 싶었기에 질문했던 것이다.
그런데 뇌불의 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 그리고 이 몸이 하나 조언을 해 주자면 말이야……. 고금제일… 그래, 분명히 혼자서 중원 무림을 오시하는 그런 고수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고수가 존재한다 해도 혼자서 중원과 맞서 싸울 순 없다.
뇌불이 수련을 이어 나가던 문도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 저 아이들은 너와 함께 싸워 줄 것이다.
- 그리고 한 명 더 있지 않소?
- 크, 크으으음!
황극린의 대답에 뇌불이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워하며 후다닥 지붕에서 내려가면서 대화가 마무리됐던 기억이 있다.
뇌불은 나름 현실적인 조언을 해 주려 했던 것일 테다. 고금제일에 관심을 가지니 황극린이 혼자 모든 걸 헤쳐 나가려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만뇌문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황극린이 그걸 모르지 않았다.
애초에 중원 전체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황극린은 몸소 체험해 본 적이 있었다. 무림공적에 올라 추격대에 포위당하는 경험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만뇌문과 나는 함께 간다.’
물론, 황극린도 수련을 게을리할 생각은 없었다.
그도 성장하고 문도들도 함께 성장하면 그만이었다.
황극린이 문도들이 수련하는 곳을 잠깐 들렀다.
‘실전 경험도 쌓게 해 줘야 할 텐데 말이지.’
딱 한 번 실전을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흑사회의 살수들이 만뇌문에 쳐들어온 적이 있었으니까. 물론, 그들은 모두 뇌불에게 죽었을 뿐이다. 당시의 문도들은 살수가 왔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어느 정도 수준에 맞는 무인들과 싸워 볼 경험이 있어야 한다.
문도들끼리의 비무도 좋은 수련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잠시 고민하던 황극린의 앞에 누군가 다가온다.
“황 장로님! 하후세가의 가주님과 하후세가의 무인들이 찾아왔습니다!”
시종 하나가 헐레벌떡 외쳤다.
하후세가? 딱히 인연이 없는 문파다. 아니, 과거에 한번 스친 적은 있었다. 강서성에서 펼쳐진 1차 예선에도 세 명이나 진출했었다. 하지만 3차 이후엔 그들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아마 탈락했으리라.
“무슨 일로?”
“그게, 황 장로님과 긴히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고 하셨습니다!”
“객방으로 모셔 주게.”
“예! 장로님!”
시종이 떠나가고, 황극린은 객방으로 향한다.
실전 기회를 쌓을 기회가 빨리 찾아온 것인지도 몰랐다.
* * *
“내 이리 황 공자를 찾아온 이유는 별것 아니오. 같은 강서성에 적을 둔 정파인으로서 직접 얼굴을 보고 싶어서 찾아왔소이다. 실례가 된 것은 아니겠지요?”
“예, 아닙니다.”
정갈한 방 안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다.
하후세가의 가주 하후충은 황극린의 그런 모습과 차를 담은 집기 그리고 객방의 정돈됨을 보며 만뇌문을 판단하고 있었다.
‘괜찮군. 괜찮아.’
황극린은 최근 용봉지회에서 우승한 것도 모자라 청해성에서도 활약을 펼쳤으며, 절강성에서도 동려대협이라는 별호로 명성을 떨쳤다. 현재 중원에서 가장 주목받는 후기지수를 꼽으라면 단연 황극린이다.
하후세가에선 처음에 만뇌문을 견제했지만, 지금은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그들에게 접근했다.
‘아직 나이가 젊어. 꿈도 크겠지. 만뇌문은 자금 규모가 넉넉한 편이지만… 문파의 규모로는 중소문파도 되지 못할 수준이다.’
황극린.
새로이 강호의 혼인 시장에 나온 최상급의 매물! 남자든 여자든 무림에서는 홀로 살아가는 경우가 잘 없다. 명문가의 후기지수들은 어릴 때부터 가문이 정해 준 혼약자와 혼인한다. 가문과 문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용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극린은 분명히 명성을 떨치고 있었지만, 아직은 미숙한 점이 있으리라.
그걸 채워 줄 수 있는 게 하후세가였다.
물론, 황극린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지금 당장은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들을 데려오진 않았지만… 곧 우연을 가장하여 만나게 할 생각이었다.
‘이런 대어는 먼저 채 가는 것이 임자지, 암.’
아직 식객들이 없는 것을 보고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른다.
보통 명성을 떨치게 되는 문파엔 온갖 날파리들이 꼬인다. 먼저 황극린을 선점해야 한다.
“하후세가와 만뇌문의 거리도 가까우니 서로 자주 왕래했으면 좋겠소. 듣자 하니 만뇌문에서 약재 사업도 벌이고 있다던데, 우리 가문의 유통권을 조금 떼어 줄 수도 있소이다. 아, 너무 경계하실 필요는 없소. 이윤을 취하려는 게 아니라 이제 막 강호에 발을 디딘 만뇌문을 돕고 싶어서 그런 것이니 말이오! 하하하!”
그런 하후충의 말에 황극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약재 사업도 조금씩 확장해 나가는 편이 좋으리라. 특히 옥보단의 인기가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고 한다. 처음엔 제조법을 팔까도 생각했지만, 만뇌문을 개파한 이상 일정한 수입원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있었다.
“참, 그리고 궁금한 것이 있는데 말이오. 만뇌문의 문주님은 대체 어떤 분…….”
조금 민감한 질문.
뇌불은 최대한 대외적으로 나서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황극린이 선수를 친다.
“같이 오신 수하분들은 무공을 얼마나 익히셨습니까?”
“응? 나와 함께 온 아이들이야… 최소한 10년 이상은 무공을 익혔소. 20년 넘게 무공을 익힌 자들도 있지.”
황극린이 그것참 잘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친선비무를 신청할 수 있겠습니까?”
“친선비무? 황 공자가 직접 하후가의 무인들과 싸우고 싶다는 말이오?”
하후충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의외의 부탁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황극린의 대답은 하후충의 예상을 넘어섰다.
“본문의 문도들에게 친선비무의 기회를 주고 싶어서 말입니다.”
만뇌문의 문도?
듣기로는 고작해야 둘셋이라 했다. 광견살검을 빼놓고는 이제 막 무공을 익히는 초출이라고 했나?
하후충은 미소를 머금었다.
황극린이 저러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문도들의 비무 경험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강서성 남창은 성도치고는 제대로 된 문파의 수가 몹시 적었다.
‘좋아. 이번 기회로 황 공자와 연을 쌓을 수 있겠어.’
친선비무?
이제 막 무공을 배운 이들과 투닥거리 몇 번 해 주면 그만이다. 그러면 황극린에게 빚을 지울 수 있게 된다.
“하하하하! 당연하오. 내 수하들에겐 살살하라고 일러 둘 터이니…….”
“아뇨.”
“응……?”
“살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살살할 필요는 없다고?
자신감이 넘치는 건가, 아니면…….
‘문도들에게 패배의 경험을 심어 주려고……?’
확실히 패배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