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25화 (125/316)

125화 또 다른 재능

“내일 비무를 한다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단단히 준비해.”

“준비는 뭔 준비야. 전부 애송이들이던데.”

하후세가의 무인들이 농을 주고받는다. 사실 만뇌문의 무인들이라 해서 조금 긴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 만뇌문도들을 직접 보았다. 근육은 찾아볼 수 없고, 호리호리한 체형. 거기다 더 큰 문제는 10대 중반의 소년도 있다는 점이었다. 하후세가의 무인들이 보기에 그들은 애송이나 다름없었다.

“그러고 보니 제갈수? 그 사람도 있다던데.”

“야, 그 소문 못 들었냐? 소가주 경쟁에서 일찍부터 밀려나서 뒷방에서 책만 읽던 양반 아니냐.”

“제갈수가?”

“그래.”

제갈수는 알게 모르게 중원에서 은근히 유명했다.

그는 확실히 황극린을 만나기 전까지는 놀고먹기만 하며 가문의 망나니 취급을 받던 공자였다. 물론, 제갈세가 출신이라는 점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근데 살살하지 말라고 했다던가?”

“황 공자님의 생각으로는 문도들 정신머리가 썩어 빠졌으니 그러는 것 아니겠어?”

“하기야, 자기 실력에 비하면 문도들은 얼마나 하찮아 보일까. 크크. 나 같아도 제대로 박살 내 달라고 말하겠다.”

그들은 만뇌문의 문도들을 비아냥대며 자존감을 높이고 있었다.

사실 처음엔 만뇌문에 온다고 했을 때 긴장했었지만, 하후세가와 비교하면 만뇌문은 동네 무관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넓은 장원에 비해 식솔의 수는 현저히 적으며, 문도라고 하는 이들은 아직 어릴 뿐이다.

황극린이 제아무리 무림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고 해도, 모든 것을 다 가질 순 없었다.

“그래도 우리 하후세가랑 연이 닿을 수도 있으니 제대로 해 줘야지. 그러니까 다들 준비 철저히 해. 힘의 격차가 무엇인지 알려 주는 것, 그게 바로 황 공자가 원하는 거야.”

“예이,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하후세가의 무인들이 자만하는 건 아니다.

이건 대부분 무인이라면 보일 반응일 뿐이다. 만뇌문이 대단한 게 아니라 황극린이 중원을 놀라게 할 재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설마 만뇌문도들도 그러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만뇌문이 구파일련도 아니고 육대세가도 아닌데, 단기간에 고수를 키워 낼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했다.

하후세가의 무인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내일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지도 못하고 말이다.

* * *

비무 당일.

황극린과 광견살검이 비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후세가의 가주 하후충이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한다.

“좋은 아침이외다.”

“예, 좋은 아침입니다.”

“구 대협? 오랜만에 뵙소.”

“오랜만이오.”

광견살검과 하후충은 과거 인연이 있었다. 어떤 무인들처럼 광견살검에게 당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오다가다 한번씩 마주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문주께서는……?”

“저기 오시고 있군.”

마른 체형의 노인이 천천히 걸어온다.

하후충이 유심히 노인의 얼굴을 살펴본다. 그래도 일문의 문주이니만큼 과거 무림에서 명성을 떨쳤을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만뇌문의 문주가 누군지는 무림에 전혀 공개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하후충도 뇌불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당연했다. 그는 지금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으니까.

“반갑습니다, 문주님. 저는 하후세가의 가주 하후충입니다.”

“오냐.”

“으음……?”

황극린은 뇌불에게 예의는 기대하지 않았었다. 인피면구를 쓴 것도 뇌불에겐 상당한 도전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껏 자기 자신을 여실히 드러내며 살아왔던 그가 자신을 숨기고 있었으니까. 인피면구를 쓴 것도 만뇌문을 위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보다 한참 어린 후배에게 예를 차릴 뇌불이 아니긴 했다.

“문주님의 성격이 괴팍하셔서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하하,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뇌불의 귀가 쫑긋한다.

평소였다면 한마디 할 법도 하건만, 그래도 하후세가는 강서성에서 규모가 큰 가문이다. 하후세가의 출신들은 무림맹에도 많이 나가 있었다. 굳이 그들 앞에서 분란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광견살검은 뇌불이 가만히 있으니 안도의 한숨을 흘려 냈다.

그리고 빠르게 화제를 전환한다.

“비무는 승자전으로 할 생각이오.”

승자전이라는 말에 하후충이 고개를 갸웃한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한 것 아닌가? 그렇게 되면 하후세가 무인 한 명이 만뇌문도 전체를 쓸어버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렇게 패배하면 자신감을 회복하기 힘들지 않겠소?”

“크크, 하후세가가 말이오?”

“응?”

하후충이 고개를 갸웃한다.

광견살검의 성격이 고약할 건 이미 예상하고 왔다. 그렇기에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광견살검은 만뇌문도들이 이긴다고 생각하는군. 설마 광견살검이 문도들을 가르친 건가?’

그것은 금방 사실로 드러났다.

“장로님, 교관님! 인사드립니다!”

네 명의 후기지수들이 황극린과 구자광에게 인사한다.

그리고 하후충과 하후세가의 무인들에게도 예를 표하며 인사했다. 그래도 예의 교육은 확실히 받은 모양이다.

“그래, 그래. 반갑구나. 다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했으면 좋겠구나.”

“예, 감사합니다!”

“처음은 백온후다. 준비하고 있어라.”

“네, 네엣!”

가장 어린 백온후가 잔뜩 긴장하여 어깨를 움츠렸다. 그것을 본 하후충이 안쓰러운 시선을 보낸다.

‘무공도 잘 모르는 아이 같구나.’

눈에 패기가 없었다.

만뇌문엔 역시나 인재가 없다. 백건악이라 불리는 무인은 꽤 눈빛이 살아 있긴 했지만, 그래도 하후세가의 무인들과 비교하면 풋내기일 뿐이다.

“그럼 슬슬 시작합시다.”

황극린의 말에 하후충도 고개를 끄덕인다.

만뇌문도들을 일일이 신경 쓸 여력은 없다. 황극린의 비위만 맞춰 주면 그만이다.

“륭아, 네가 첫 번째다.”

“예.”

하후세가의 무인 중에서 가장 어렸지만, 20대 후반이었다.

사실 그도 후기지수라 말할 수 있었지만, 가주의 호위대에 참가하며 많은 실전 경험을 쌓았다. 도적 떼를 소탕하기도 하고, 다른 문파의 문도들과의 친선비무도 열 차례가 넘게 경험했다.

여러모로 백온후와는 비교가 안 되는 인재였다.

* * *

‘어떡하지… 지면 안 되는데…….’

백온후가 긴장한다.

연무장에서 마주한 하후세가의 무인은 딱 봐도 강해 보였다. 과거 백씨 형제를 괴롭혔던 용비문도들이 생각이 날 정도다. 아니, 그들보다 훨씬 체격도 좋았고 유연해 보였다. 저 두꺼운 목을 보면 장사 체질임을 알 수 있다.

그에 반해 백온후는 아직 다 자라지도 않았다.

고작해야 하후륭의 가슴팍에 닿을 정도다. 기세로는 이미 압도당했다.

“아이야, 너무 걱정하지 마라. 다치지 않게 해 주마.”

그는 어제 만뇌문도들을 비아냥거리기도 했었지만, 그래도 앞에서 백온후를 놀리거나 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저리 발발 떨고 있는 아이를 겁주는 건 양심상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살살 달래 줄 뿐이다.

‘후우, 대체 이런 어린애를 왜 처음으로 내보낸 거지?’

슬쩍 황극린이 있는 방향을 바라본다.

그는 중원이 인정하는 고수다. 용봉지회에서 우승했으니 당연하다. 어쩌면 문도들도 자신이 해낸 것처럼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천재는 범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니까.

‘너희도 고생깨나 하겠구나.’

하후세가에도 그런 이들이 존재한다.

그래도 가주는 융통성이 있어서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시작!”

심판을 보게 된 광견살검이 비무의 시작을 알렸다.

‘이거 진검을 사용하기도 미안하군. 차라리 검을 뽑지 않고…….’

하후륭은 딴에는 백온후를 배려하고자 겁집에서 검을 뽑지 않았다. 그리고 안심시켜 주듯 미소를 머금은 채, 아주 천천히 백온후에게 다가간다.

“온후라고 했니? 자, 마음껏 공격하렴. 그래도 비무이니 네가 배운 것을 내게 다 쏟아부으면 된단다.”

“저, 정말요?”

백온후가 잔뜩 겁먹은 고양이처럼 웅크린 상태로 고개를 살짝 쳐들었다.

“그래, 그래.”

“가, 감사해요오오…….”

“후우우.”

이런 아이와 싸워야 한다는 자괴감에 하후륭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잠시 기다리니 낮은 자세로 백온후가 다가온다.

‘저 사람은 용비문도가 아니야. 나도 강해졌어. 교관님도, 장로님도, 문주님도 칭찬해 줬어.’

사실 이런 비무가 처음인 백온후로선 긴장하는 게 당연했다.

특히 형이 용비문도에게 맞는 것을 보고 충격에 빠진 경험이 있었기에 더욱 무서웠다. 하후세가의 무인은 용비문도들보다 더 무서운 외형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먼저 거리를 잰다. 상대의 거리를 가늠한다. 내가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상대는 닿지 못하게 해야 해. 나는 그렇게 싸워야 해.’

조금씩.

백온후의 기세가 달라졌다.

‘응? 뭔가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것 같은데…….’

그걸 신기하게 본 하후륭. 하지만 그렇다고 긴장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는 10년 동안 무공을 배워 왔다. 정확한 시간을 따지면 20년에 가깝다. 내공심법을 갖추고, 무공을 익힌 시간이 10년이라는 것이다. 소년이 살아온 시간보다 오래 무공을 익혀 왔으니 당연히 긴장할 필요는 없다.

“자, 마음껏 와라! 네 모든 것을 펼쳐 보여… 컥?”

뭐였지?

방금 움직임?

묵직하고, 찌릿한 고통이 옆구리에 전해진다.

‘대체 언제 여기까지……?’

경악했다.

작은 체구의 소년은 마치 산짐승처럼 유연한 움직임으로 거리를 좁혀 냈다. 그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하후륭이 반응해 낼 수 없는 속도로 주먹을 내질렀다.

“이, 이놈!”

깜짝 놀란 하후륭이 본능적으로 검집째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것을 본 백온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쉬이익-!

고개만 숙여 그것을 피하고는 다시금 주먹을 내지른다.

푹!

“켁!”

푹! 푹! 푹!

백온후는 의아함과 황당함이 섞인 눈빛으로 주먹을 휘두를 뿐이다. 당연히 검과 권격의 거리는 다르다. 검이 제대로 위력을 내려면 거리를 벌려야 한다.

‘어, 얼른 도망쳐야……!’

그렇게 생각하며 보법을 펼쳤지만, 저 미친 꼬마는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하후륭을 추적해 왔다. 그러고는 틈을 비집고 주먹을 찔러 넣었다. 주먹에 맞을 때마다 장기가 바늘에 콕콕 찔리는 듯하다.

“으아아아악!”

분노한 하후륭이 검을 뽑는다. 닿기만 해도 살점이 갈라질 예리함. 그것을 보자 백온후의 눈빛이 변화한다. 이제까진 긴가민가하며 적당히 주먹을 내질렀다면… 이제는 조금 달랐다.

탓, 탓.

몸을 양분하듯 쇄도하는 예리한 철검. 백온후는 마치 날짐승의 그것처럼 철검에서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보통 검을 보면 지레 겁먹고 도망가는 것과는 다르다.

쉬익!

백온후가 마지막 순간까지 철검을 살펴본 후, 공격을 피해 냈다.

그리고.

“커럭……!”

작은 주먹에 턱을 얻어맞은 하후륭. 그는 주먹질 한 방에 기절하고 말았다.

비무장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엥? 내가 이겼어……?”

자신이 어떻게 이겼는지 어이없어하는 소년.

그것을 보고 있는 하후세가의 가주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이런 꼴불견을 보았나!’

어린아이를 대하듯 비무에 임하다가 추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하후세가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륭이를 데려와라.”

“예, 가주님.”

겨우 화를 가라앉힌다.

아직 비무는 끝나지 않았다.

“하후철, 네 차례다.”

“예.”

백온후의 다음 상대는 하후륭보다 경험이 많은 호위대의 하후철이었다. 이번에는 백온후를 무시하는 시선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긴장하는 모습이다. 자신도 하후륭처럼 패배할 수도 있다는 걱정과 가주의 분노를 가라앉혀야 한다는 압박이 느껴진다.

그것을 본 황극린이 미소를 짓는다.

‘역시 좋은 발판이 되겠어.’

하후세가의 가주 호위대는 만뇌문도들의 발판일 뿐이었다.

* * *

소림사.

용봉지회가 끝난 후, 바로 폐관에 들어갔던 천덕이 드디어 폐관동을 나섰다. 용봉지회 때보다 훨씬 안정된 기운이 그의 몸에 일렁거리고 있었다. 다음번에는 ‘그 뇌전’에 당하지 않겠다는 집념이 그를 더욱 완벽한 육신으로 거듭나게 했다.

물론, 문제는…….

‘황 소협은 더 강해졌을 테지.’

그렇게 생각한 천덕이 사부님께 인사를 올리고자, 걸음을 재촉했다.

“천덕이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너라.”

천덕의 사부인 해월대사.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의 눈에는 총기가 가득했다. 지금도 천덕은 감히 사부님의 뒤꿈치라도 따라갔다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사부는 위대한 고승이었다.

그런데 왜인지 오늘 사부님의 분위기가 달랐다.

평소 화를 잘 내시지 않는 사부님이었지만, 천덕이 거짓말을 하면 매를 드실 때도 있었다. 물론, 최근에는 매를 맞은 기억이 없었지만… 사부님의 눈빛을 보자마자 종아리를 걷어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뭘 잘못했나?’

천덕은 고개를 숙이고, 사부님의 말씀을 기다렸다.

해월대사가 묻는다.

“나한전에서 이야기를 들었단다. 너와 결승에서 싸웠던 아이 말이다.”

천덕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사부가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고 말이다. 천덕은 황극린에게 비밀로 하겠다고 약조했었다. 그것은 무인의 약조였다. 하지만 사부가 묻는다면 거짓을 고할 수도 없었다. 계륵이었다.

“뇌전을 다루는 무공을 익혔다고?”

천덕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