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32화 (32/316)

성장과 만찬

경험이라는 건 매우 중요하다.

현재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과거의 경험을 밑바탕 삼아 행동할 수 있게 도와준다. 황극린은 흑살문에서의 교육생 시절을 기억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순간순간이었지만, 지나고 보면 그 고통이 위기에서 목숨을 구해줬다는 걸 뼈에 사무치게 느끼고 있다.

수련은 확실히 고되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은 없다. 무공을 익히는 게 즐겁다곤 하지만 매 순간 그럴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이런 수련이 언젠간 몇 배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기에 수련에 열중했다.

수련의 강도는 점차 높아졌다.

팔찌와 발찌로 무게를 늘려 돌산을 타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 선택할 때가 된 것 같았다.

황극린은 살수 출신이다.

분명 살수는 강호에서 살수는 공포의 대명사다. 난데없이 등장해서 심장에 칼을 훅 찔러버리는 살수. 하지만 살수들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전면전에 매우 약하다는 약점이 말이다.

보통의 무인들은 정면에서 싸우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살수들은 뒤를 노려 빈틈을 찌르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에 살수들은 암습이나 은신 등에 특화되었기에 같은 경지라고 하더라도 확실히 부족하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권(拳).”

황극린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과거의 기억을 모두 떠올려서 자신이 가진 장기가 무엇인지 떠올렸다. 온갖 병장기를 손쉽게 다루는 능력. 분명히 좋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특화된 병기가 없었다는 말도 된다. 그것은 단점이다.

혈풍뇌전신공을 익히면서 느끼는 건데, 무(武)라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망망대해에서 모든 것을 취하려고 하다간 길을 헤매기에 십상이다. 선택과 집중. 황극린은 과거의 경험을 밑바탕 삼아 선택했다.

권법을 익히기로 말이다.

권을 선택하기로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혈풍뇌전신공이 병기에 기를 흘려보내는 방식이 아닌, 권법에 최적화되었다는 점이었다.

혈풍뇌전신공.

심장과 단전에 흐르는 거대한 기운을 내부에서 순환시켜 한 점에 방출한다. 뇌전신공이라는 이름처럼 이것은 내부에 뇌전을 품는 무공이다. 결국, 뇌전을 다루기 위해서는 강인한 육체를 가지는 게 필수였으며, 혈풍뇌전신공에 대성하게 된다면 도검불침(刀劍不侵)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육신을 얻게 된다.

그때가 되면 검이나 도보다 더 강한 일격을 주먹으로 내지를 수 있게 된다.

물론, 그건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

아직 혈풍뇌전신공의 경지가 3성에 머물러 있다. 대성하기까진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허나, 황극린은 바로 코앞의 미래만 내다보는 것이 아니다.

무공은 장기전이다. 궁극적으로 가장 강해질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황극린은 살수 출신이긴 하지만 무(武)의 길을 한 번 밟아보았다.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파악하고 있으니 어디로 가야 더 완전한 길에 도달할 수 있을지 알고 있었다.

‘주먹에 뇌전을 담을 수 있게 하려면 끊임없이 담금질해야 한다.’

주먹을 단련하는데 가장 적절한 방법이 무엇이냐고?

그건 딱히 고민할 거리도 되지 못했다. 혈풍뇌전신공은 소림사의 절학 대반야금강공을 기초로 한다. 대반야금강공은 궁극적으로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을 추구한다. 이미 역사가 깊은 수련법이 존재하는데, 굳이 황극린만의 방식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소림의 무공은 기억하시오?”

최근들어 뇌불은 말수가 많이 적어졌다.

황극린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것도 있었지만, 왜인지 눈을 감고 명상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과거에 그의 눈빛엔 광기만이 일렁거렸다면, 지금은 현묘한 빛이 드문드문 비추고 있다.

물론, 황극린이 앞에 서면 주인이 밥 주는 걸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변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큼큼! 드디어 내 도움이 필요한 것이냐!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최근 들어 기억이 꽤 돌아오고 있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대반야금강공은 기억하시오?”

“응? 혈풍뇌전신공의 원류를 공부하겠다는 것이냐?”

“그렇소.”

“허허허···.”

황극린은 정말 소년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몇 번 있었다.

뇌불은 과거 제자라곤 할 수 없겠지만, 싹수가 보이는 이들에게 무공을 알려준 적이 있다. 대부분 뇌불이 가르쳐준 것만 익히는 데 급급했다. 마치 뇌불의 무공이 진리라는 듯이 생각하고 행동했다.

물론, 그들의 생각도 틀린 것은 아니다.

뇌불은 명실공히 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무인 중 하나였으며, 그의 깨달음은 온전히 물려받을 수만 있다면 무림에서 큰소리 떵떵 치면서 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황극린은 처음부터 달랐다.

혈풍뇌전신공을 창안한 뇌불이 있는데도, 홀로 무공을 독파했으며 뇌불에게 거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 모든 수련은 스스로 계획하고 실천했다. 그런 황극린이 이제는 대반야금강공에 관해 물어보고 있었다.

‘뭐가 되었든 대성할 놈이로다.’

뇌불은 솔직히 그에게 알려준 것은 없었지만, 황극린의 성장을 보며 기특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긍정적인 마음가짐 때문인지 몸도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으니··· 알려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대반야금강공은 금(金)과 토(土)의 힘을 육신에 받아들이는 무공이다. 금강불괴지신. 그 어떤 것도 해를 끼칠 수 없는 부처의 부동심을 담아내기 위한 육체를 만드는 것이 목표지. 내게 무공을 알려주었던 땡중 놈은 대반야금강공은 무공이라기보다 일종의 수련법이라고 말했었다.”

“수련법 말이오?”

“그렇다. 소림사의 땡중놈들은 번뇌에 흔들리지 않는 정신과 육신을 모두 원했지. 그리고 정신은 육체가 먼저 가면 따라온다고 생각한 부류가 있다. 대반야금강공은 그런 기초적인 생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대반야금강공에 관해서는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을 익힌 소림의 고승들은 도검불침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단단한 피부와 뼈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물론, 생명의 피육이니 만큼 도검보다 단단하진 않겠지만··· 그만큼 튼튼하다는 말이었다.

“구결은 모두 기억나시오?”

“당연한 것 아니더냐!”

“조금씩 회복이 되고 있긴 하군.”

황극린의 말에 뇌불이 찔끔한다.

“설마 아직도 날 죽이려는 생각은 아니···.”

“당신이 무림에서 어떻게 불렸는지를 상기해보시오.”

“그건···.”

기억이라는 게 참 묘하다.

당시에는 당연히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에겐 그만한 힘이 있었다. 약자는 당하는 게 자연의 섭리 아니던가? 어찌 보면 그는 소림에서 억압받던 것을 무림에서 풀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후회된다고 할까?

과거의 뇌불이었다면 후회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비동에 갇힌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 없지만, 그 시간이 뇌불을 바뀌게 만들었다. 결정적으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뼈를 깎는 수련을 이어가는 황극린을 보면서 느끼는 것도 있었다.

“아무튼, 네가 원한다면 알려주마. 그리 약조했으니까.”

황극린이 남창으로 떠났을 때.

뇌불은 선언했다. 황극린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겠노라고. 굶주림과 외로움에 외친 선언이긴 했지만, 아직 유효하다. 원래 강호에서 대마두로 취급될 때도 뇌불은 스스로 내뱉은 말은 지켰다. 너무 과격했기에 문제였지만 말이다.

“대반야금강공의 구결을 읊어주마.”

* * *

대반야금강공의 수련법은 소림 칠십이예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일지금강법(一指金剛法).

손끝으로 단단한 물체를 가격하여 손가락의 힘을 기르는 수련법이다. 뇌전의 성질은 하나의 점에 집중된다는 것이다. 아직 내력이 부족한 황극린이니 주먹 자체에 뇌전을 품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손가락을 위주로 단련했다.

그 외에도 뜨거운 모래나 철 구슬을 손으로 가격하는 철사장(鐵砂掌)이나 손바닥 자체로 평평하면서 단단한 물체를 가격하는 추산장(推山功) 같은 수련법도 있었다.

황극린은 육신 전체를 단련했지만, 특히 손을 위주로 단련했다.

“······.”

수련을 마친 황극린이 손바닥을 펼쳐 바라본다. 기다란 손가락엔 흉터가 가득했다. 하지만 왜인지 굳은살은 찾아볼 수 없었다. 본래 이런 수련을 하면 굳은살이 생겨나야 하지 않던가?

“심장 아니··· 중단전의 힘인가.”

황극린이 심장에 왼손을 얹었다.

심장에 스며든 자연의 기운은 내공처럼 다룰 수는 없었지만, 의도적으로 어느 한쪽으로 흘려보낼 수 있었다. 심장은 생명의 원천이다. 자꾸만 손에 상처가 생기니 수련을 시작하면 심장의 기운이 손으로 몰리기 시작한다.

황극린의 손은 평범하지 않았다.

보통의 피부보다 훨씬 질기고, 탄력적이다. 물론, 도검불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지만··· 이젠 뇌전의 기운을 담을 수준은 되었다. 황극린이 생각한 목표치에 이미 도달한 것이다. 내공의 절대적인 양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육신의 성장은 황극린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목표치는 달성했지만···.’

아직 떠날 때는 아니다.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망망대해를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에 지레 겁먹고 주저앉는 무인도 있다. 하지만 황극린은 즐거웠다.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목표치는 바꾸면 되니까.’

그가 비동을 떠나기로 계획한 날까지 한 달이 남았다.

여기서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까? 혈풍뇌전신공의 4성 경지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황극린은 미소지었다.

어차피 도달해야 할 경지였다. 예상보다 빠르다고 멈춰있을 시간은 없었다.

탁!

황극린은 다시금 단단한 석벽에 주먹을 내지른다.

동시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 * *

지지직! 지직!

자글자글 익어가는 돼지고기와 소고기. 육즙이 뚝뚝 떨어져 불길에 닿아 증발하는 소리는 그야말로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다. 뇌불은 침을 질질 흘리며 잘 익어가는 고기를 바라보고 있다.

슥슥.

황극린제 양념장은 어떤 고기에나 잘 맞았다.

본래 간편히 육포에 바르려고 개발한 것이었지만, 고기에 바르고 구워도 그 맛이 일품이었다.

웬일로 황극린이 고기를 다 구워주는가?

처음엔 의문이었지만, 구워지는 고기를 보고 있으니 그런 잡생각은 모두 날아간다. 당장이라도 고기를 입에 넣고 싶었다. 갓 구워진 노릇노릇한 고기를 입안에 가득 품고 오물오물 씹고 싶다!

“다, 다 되지 않았느냐?”

“조금 더 익혀야 하오.”

“지금은?”

“방금 말했지 않소.”

그렇게 구워지는 고기.

평평한 돌덩이 위에 고기가 하나씩 얹어진다.

“어, 얼른! 나도!”

“······.”

익은 고기를 대충 자르고, 뇌불에게 시선을 옮긴 황극린.

그가 조용히 말한다.

“직접 오시오.”

“얼른 한 입만 다오! 얼··· 응?”

“몸을 움직일 수 있지 않소?”

뇌불의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간다.

황극린의 눈치를 살핀다.

“그걸 어떻게···?”

“괜찮으니 오시오.”

황극린이 다시 고기를 굽기 시작하자, 뇌불이 고민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지금 움직이는 것도 상당한 고통을 유발하고 있다. 근육이 비명을 질렀으며,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심장이 벌렁벌렁 뛴다. 하지만 아예 움직일 수 없었던 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알고도 날 죽이지 않은 거냐?”

뇌불은 일부러 감각이 돌아온 것을 숨겼다.

옆에서 지켜본 황극린은 옳고 그름이 명확했다. 아무리 오랜 기간 같이 지냈더라도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면 칼을 겨눌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불필요한 마찰은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황극린에게 숨기고 있던 것이다.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소?”

“······!”

뇌불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몸이 정상이 아니라고 해도 그는 천하제일을 논하던 고수였다. 무공의 고수는 육체의 힘도 있겠지만, 가득히 쌓인 단전의 내공 또한 중요하다. 작정하고 싸웠다면 뇌불과 황극린 중 누가 승리할까?

“그건···.”

피식.

황극린이 입꼬리를 올린다.

“아마 내가 이길 것이오. 최근 5성의 경지에 올랐거든.”

“뭐, 뭣이라고!”

벌써 5성에 도달했단 말인가?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뇌불이 옆에서 가끔 조언을 해주기도 했지만, 황극린은 대부분 시간을 스스로 수련했다. 사부도 없이 혼자 수련했는데 5성에 경지에 올라? 일 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이놈은 진또배기 천재다.’

물론, 뇌불이 모르는 것이 있긴 하다.

황극린은 혈풍뇌전신공 뿐 아니라 유령의 무영심결도 익혔다. 그리고 이미 20년 이상 무공을 익혔던 경험이 있었다. 이미 도달한 경지에 다시 올라서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오히려 쉬웠다.

황극린에게 남겨진 숙제는 과거에 올랐던 경지에 도달하는 순간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가장 큰 문제다.

뭐, 굳이 황극린은 그것을 뇌불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허, 허허허··· 그런데도 날 내버려 뒀구나.”

“받은 게 많으니까.”

“허···.”

무뚝뚝함의 극치였건만, 뇌불은 감동이었다.

매번 죽이니 마니 하던 황극린이 저리 말해주니 참으로 이상하다.

“······.”

하지만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뇌불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황극린이 갑자기 이리 고기를 구워주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이젠 움직여도 된다고 하는 이유는?

‘가려는 게로구나.’

비동에서의 마지막 만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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