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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쟁패(1)
튼튼한 말에 혁낭들이 실리고 있었다.
혁낭에 든 것은 내게 줄 전표였다. 이들의 자금동원력은 실로 대단했다.
미리 준비를 해둔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우리가 악수를 한 지 채 반시진이 지나지 않아 삼천오백만 냥이 든 혁낭들이 내 앞에 모습을 보였다. 더 놀라운 것은 전액 추적이 불가능한 소액전표라는 점이었다.
나는 성왕보와 나란히 서서 말에 돈이 실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내가 죽여야 할 노인이 은신하고 있는 동굴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놀랍게도 동굴 역시 무림맹 본단이 있는 이곳 호북에 있었다.
“조심하게. 그는 정말 강한 사람이니까.”
“잘 알고 있소.”
“그를 이길 자신이 있나?”
대법이 있던 날 노인을 보았을 때, 나와 동수라고 판단했다. 이기고 지는 것은 그야말로 종잇장 한 장 차이일 것이다.
“나를 선택한 당신의 판단력이 옳았길 바랄 뿐이오.”
“자네만 믿겠네.”
“한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소.”
“묻게.”
“당신은 왜 이들과 손을 잡았소? 원래도 당신은 충분히 부자였을 것 같은데?”
“맞네. 아주 부자였지.”
그가 이끄는 대륙상단은 역사가 아주 오래된 곳이었다. 성왕보는 그곳의 후계자였으니, 굳이 이들과 손을 잡지 않았어도 평생 돈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 부모 대부터 이들과 손을 잡은 것이오?”
“아니네. 그들과 손을 잡은 것은 바로 나네.”
“왜 그랬소?”
“글쎄, 왜 그랬을까?”
잠시 뒷짐을 진 채 지난날을 떠올리던 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호인에 비유를 해 볼 수 있겠지. 자네가 어딘가 비동에 갔다고 치세. 그곳에서 제목이 적혀 있지 않은 오래된 비급을 발견했어. 한데 자네는 새 무공을 익히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무공의 고수야. 그럼 그 비급을 열어보지 않을 것인가?”
“아니오. 열어봤을 것이오.”
고수냐 하수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의 근원적 호기심과 관계된 문제였다. 무엇인지는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네. 비급을 열어보았고, 나보다 더 강한 무공이 적힌 비급을 발견한 것이지.”
다시 말해 그들의 유혹과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고, 지금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 세상에는 한번 실수로 그칠 유혹이 있는가 하면, 한번 발을 디디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유혹도 있는 법이다.
언제나 악마의 유혹은 달콤하다. 물론 달콤함의 대가는 혹독하게 치러야 하겠지만.
“후회하시오?”
“후회하지 않네.”
망설이지 않는 대답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내 손에 죽어야 하는 첫 번째 이유일지 모른다. 마땅히 후회해야 할 일을 후회하지 않는 삶.
그사이 말에 짐이 다 실렸다.
“자, 보다시피 약속한 돈은 주겠네. 하지만 우리에게도 어떤 확신이 있어야겠네.”
“무슨 확신 말이오?”
“돈만 받고 자네가 일처리를 못하면 어쩌나? 그래서 이걸 준비했네.”
그가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서 내밀었다.
내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열어보게.”
다음 순간.
화르르르륵.
상자가 통째로 내 손바닥 위에서 불타올랐다.
난 그것을 열어보지 않고 삼매진화(三昧眞火)로 태워버린 것이다.
성왕보가 깜짝 놀라 나와 불타고 있는 내 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손 위에서 활활 불이 나고 있었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장난이라도 다시 한 번 이런 개수작을 부리면 그 자리에서 죽소.”
“알, 알겠네.”
삼매진화를 일으킨 것만으로도, 손에서 불이 타올라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것도 실로 대단한 신위였다.
게다가 나는 안에 든 것을 확인하지 않고 태워버렸다. 물론 내게 해로운 것이겠지만, 무엇인지 확인하고 태울 수도 있었다.
앞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도 비급을 열어본다고 했지만, 이렇게 마음을 먹으면 열어보지 않을 수 있다는 내 의지를 표한 것이다.
물론 지금 성왕보는 내 박력에 눌려 그 깊은 속뜻까지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내가 입으로 바람을 훅 불자 불이 꺼지면서 손바닥 위에 타고 남은 것들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했다. 내 호신강기의 위력이었다.
“책임을 따지려면 동경을 보시오. 그 안에 선택을 잘못한 책임자가 보일 테니까.”
말에 올라탄 후 그를 바라보았다.
“장난은 한 번으로 족하니 미행 따윈 붙이지 마시오.”
“알겠네.”
나는 말을 박차 그곳을 떠났다. 성왕보는 감히 미행을 붙이지 못했다.
* * *
“삼천오백만 냥을 벌어오셨다고요?”
공수찬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옆에 서 있던 광두의 입은 더 크게 벌어졌다.
“자, 가져가시오.”
잠시 멍하게 서 있던 공수찬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아마 내가 그를 만난 이후 가장 통쾌하고 크게 웃는 순간이었다.
공수찬이 내 옆에 서 있던 갈사량에게 말했다.
“들으셨습니까? 한나절 만에 삼천오백만 냥을 벌어 오셔서, 어디 옷가지 던져주듯 가져가라고 하시는 말씀을요?”
“하하, 들었네.”
“그리고 아무리 믿는 사람이라도 삼천오백만 냥을 이렇게 쉽게 내줄 수 있는 겁니까?”
“자네를 곁에 두시고, 영원히 못 떠나게 하려나 보네.”
“그런 것 같습니다.”
공수찬이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광두에게 말했다.
“난 너도 내 곁에서 안 보내고 싶다. 공총관을 호위하도록.”
“네.”
광두가 얼빠진 얼굴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삼천오백만이라니, 삼천오백만이라니, 삼천오백만…….”
공수찬이 그를 부축했다.
“광무인, 말에 타시겠소?”
“저, 너무 떨려서 토할 것 같아요.”
“저를 잡으시고.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총관님.”
주객이 전도된 그 모습을 보며 나와 갈사량이 함께 웃었다.
두 사람이 떠나자 우린 함께 후원을 걸었다.
“저 돈이면 우리의 전력은 단숨에 몇 배가 될 것입니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일을 마치면 다시 삼천오백만 냥을 받게 될 것이오.”
“네? 그럼 저 액수가 선금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맙소사.”
갈사량은 경악했다. 무림맹을 운영하면서 워낙 큰돈을 만지던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칠천만 냥이란 거액은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체 그자들?”
“암중에서 활약하며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돈을 끌어모았던 것 같소.”
정상적으로 돈을 모았다면 분노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암중의 상계를 장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속이고 죽였겠는가?
“마지막 한 놈까지 남김없이 없애버릴 것이오.”
“그러셔야죠.”
“돈은 종총관과 의논해서 활용해 주시오. 영약을 구입해서 백단주와 광두, 그리고 중요 수하들부터 내공을 키워주시오.”
“네, 알겠습니다. 우선은 흑표대와 태성검대부터 집중 투자해서 그 규모를 키우고, 정예화시키겠습니다.”
“그래주시오.”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하게 해본 우리다. 여러 부대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중심이 되는 정예조직이다.
후원을 한 바퀴 돌아 처음 자리로 돌아왔을 때, 내가 끝으로 말했다.
“판단하건대 성왕보는 저들의 하수인에 불과하오. 이번 일을 완수해서 암흑대상이란 자에게 접근하겠소.”
* * *
노인은 절벽에 홀로 서서 초저녁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노인이 돌아서자 천소선이 걸어오고 있었다.
“소선아, 왜 나왔느냐?”
노인이 재빨리 천소선에게 다가갔다.
“전 괜찮습니다. 너무 누워만 있으니 답답해서요.”
“괜찮으냐?”
“네. 차라리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 몸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절벽에 나란히 섰다.
“오늘따라 달이 밝네요.”
“그렇구나.”
두 사람은 잠시 달을 올려다보며 이곳 절벽에서만 맛볼 수 있는 정취에 빠져들었다.
“소선아.”
“네, 할아버지.”
“나를 원망하느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나왔다.
“네.”
노인이 피식 웃었다. 천소선이 따라서 피식 웃었다.
“왜 웃으셨습니까?”
“너는 왜 웃었느냐?”
“그런 중요한 일을 이제야 물어본다 싶어서 웃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왜 웃으셨습니까?”
“네가 솔직히 말해줘서 웃었다.”
천소선이 말했다.
“할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만큼 원망하지 않습니다.”
노인은 오랜 세월을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달리고 있었다.
그것을 위해 자신에게 직접 여러 시험을 했고, 그것으로 모자라 아들까지 시험에 동원했다. 혈육만이 가능한 시험이었던 것이다.
젊은 시절 여러 시험에 이용되었지만 아들은 괜찮았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한 것은 손자인 천소선이었다. 천소선이 여자로 바뀌어버리는 병을 가진 채 태어난 것이었다. 변신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났다.
좋지 않으냐고?
어른이 되어서 겪었다면 어떤 점에서는 흥미롭고 재미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이 일을 겪은 천소선은 극심한 성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야 했고, 힘든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다행히 지금은 변신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어려서의 상처 역시 많이 극복한 상태였다.
“왜냐? 왜 나에 대한 원망이 줄었느냐?”
“할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노인의 눈동자가 감격을 감추지 못하고 살짝 떨렸다. 천소선이 솔직한 심정을 말해줘서 너무 고마웠다. 그래, 말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법이지.
그때였다. 눈썹 없는 사내가 와서 보고했다.
“성총관이 왔습니다.”
“이 밤에?”
평소에 없던 일이었다.
천소선이 사내와 함께 동굴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곳으로 성왕보가 모습을 드러냈다.
“왔나?”
“네, 잘 지내셨습니까? 어르신.”
“덕분에 잘 지냈네.”
성왕보가 노인의 옆으로 걸어왔다. 몇 마디 안부인사가 오간 후 성왕보가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이번에 오백만 냥을 지원할 것이라고 결정 났습니다.”
“그런가? 용케 받아냈군.”
“귀신들의 실패는 저쪽의 실수이니까요.”
“저쪽?”
저쪽이란 말에 대한 설명 대신 성왕보가 엉뚱한 말을 했다.
“제 꿈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는 중입니다.”
다시 말해 배신할 마음이 있다는 암시였다.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려던 바로 그때, 성왕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 가지 여쭐 질문이 있습니다.”
“해보게.”
“앞으로 어쩔 생각이십니까?”
노인이 살짝 표정을 찌푸렸다.
“벌써 잊었나?”
예전에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노인이 말했다. 올바른 대답은 올바른 질문에서 나온다고.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그래서 성왕보는 두 번이나 올바른 질문을 가져오겠다고 말했었던 것이다. 성왕보가 그 일을 잊었을 리 없는데?
성왕보가 노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애초에 올바른 대답이 없는 질문도 있는 법이지요.”
순간 노인의 미간이 꿈틀했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물음이 올바른 대답이 없는 질문이라면?
반면 성왕보의 태도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노인은 그가 산을 내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 * *
나는 홀로 싸움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차피 노인이 있는 동굴의 위치를 안 이상 시간 끌지 않을 생각이었다.
만년한철로 만든 팔보호대를 점검했고 권투갑을 착용했다. 팔보호대에 꽂혀 있는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비수는 물론이고 던지기용 비수들도 따로 챙겼고, 내상과 외상에 대비한 약들도 챙겼다.
지난번 신비여인의 지풍으로 손상을 입긴 했지만 심장을 보호하는 흑랑대주의 호심갑도 착용했다.
[어, 이건 어디서 많이 보던 것이구나.]
[당신네 흑랑대주가 차던 거지.]
[그렇구나! 대체 어디서 구한 것이지?]
[흑시에 갔는데 있더군.]
[얼마에 샀지? 오십만 냥? 백만 냥?]
[만 냥이다.]
[거짓말 마라!]
[만 냥이다. 내가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한 적이 있던가?]
사실임을 깨달은 천마는 충격을 받았는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흑랑대주는 천마가 상당히 신뢰하던 수하라고 들었다. 아마 그래서 충격이 더 큰 모양이다.
[우린 잊혀진 사람들이군.]
[거창하게 해석하지 마. 고유의 늑대 표시가 지워졌기 때문이니까. 파는 이들이 흑랑대주의 호심갑인지 모르고 있었을 뿐이야.]
[아, 그런가?]
[적어도 아직까진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은 사양한다!]
[물론 나쁜 기억들이지만.]
[흥!]
천마의 기분이 좋아졌음을 느꼈다. 요 근래 너무 몰아붙이기만 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채찍질만 할 게 아니라 가끔은 당근도 줘야지.
[자, 그럼 싸우러 가볼까?]
[그래, 가자!]
한껏 들뜬 천마와 함께 문을 열고 나갔다.
오늘따라 달이 밝고 컸다. 배후세력의 수장노인은 내일 뜨는 달은 보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