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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연(4)
동호상단의 대객청으로 성왕보가 환호성을 받으며 들어섰다.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이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쳤다.
우린 뒤쪽에 앉아 있었다. 유명하고 큰 상단들은 앞쪽에 자리를 내주었고, 태성상단처럼 신생 상단들은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대부분의 상인들에게 아직 태성상단은 낯선 이름이었다.
그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태성 상단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지. 그래서 규모만 잔뜩 키운 채 실질적으로는 적자를 보고 있는 곳보다 훨씬 내실이 있는 상단이란 사실을. 그때 천마가 내게 물었다.
[답답하게 얼굴에 뒤집어쓴 것은 뭐냐?]
나는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성왕보에게 접근할 작정인데, 벽리단의 신분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어디 천마가 인피면구인 줄 몰라서 물었겠는가? 괜히 심심하니 시비를 걸고 싶어서일 것이다.
[사내놈이 이딴 것은 왜 쓰나?]
[보호구다.]
[보호구?]
내 가족을 지킬 보호구다.
혼자 몸이라면 평생 쓸 일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아직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다. 나는 악인들을 믿지 않는다. 궁지에 몰리면 반드시 왜 자신이 악인이라 불리는지를 증명해 보일 것이다.
[알지 않나? 이자들이 설쳐대면 어떻게 될지.]
[내가 볼 때 이자들, 네 가족들까지 건들 만큼 치사한 자들은 아니야.]
[후후.]
[왜 그렇게 웃지?]
[당신을 환생시켜주었다고 너무 후한 점수를 주는군. 아니라면 사람을 쉽게 믿는 어수룩한 유형이라거나.]
[이 자식이! 그래서가 아니다. 놈들은 그렇게 자잘한 악인이 아니란 말이다.]
[과연 그럴까?]
[너는 사람을 전혀 믿지 않는 유형이군. 우리 입장이 바뀐 것 같지 않나? 무림맹주란 놈은 사람을 믿지 않고, 천마는 사람을 믿고.]
[아마 상대했던 적의 수준 때문이겠지?]
잠시 무슨 말인가 생각하던 천마가 뒤늦게 자신을 욕하는 말임을 깨닫고 버럭 소리쳤다.
[이 자식이!]
[악인들은 다 자잘하다.]
[뭐?]
[대범한 악인? 큰 악인? 그딴 것이 어디에 있나? 악에 빠져드는 순간, 그냥 자잘한 인간이 되는 거다. 변명하고 합리화하고. 그래봤자 손바닥으로 달을 가리는 짓이지.]
[정파꼰대 같으니라고!]
그래서 악인들로부터 가족들을, 그리고 지켜내야 할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꼰대가 되어줄 수 있다.
다행히 천마의 또 다른 잔소리가 이어지기 전에 성왕보가 단상에 올랐다.
“오늘 이곳 황강에서 우리 상인들의 큰 축제가 열렸소이다.”
상인들이 환호를 지으며 박수를 쳤다.
상계 전반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마친 후, 성왕보가 조심스럽게 주위를 환기시켰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한 가지 중요한 발표를 할까 합니다.”
이 발표에 대해 그 어떤 소문조차 나지 않았기에 다들 웅성거리며 성왕보를 주시했다.
“중원에 혈천신교가 부활한 사실을 모두 알고 계실 겁니다.”
혈천신교가 언급되자 장내가 일시에 조용해졌다. 갑자기 마교를 언급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시다시피 강호인들과 우리 상인들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공생관계입니다.”
모두들 수긍하는 사실이었다. 아주 작은 상단이라도 반드시 강호인들과 관계가 얽히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강호가 위기에 빠지면 곧잘 우리 상인들도 큰 피해를 보기 마련이지요. 따라서 본 회주는 여러분들에게 제안하는 바입니다. 마교를 상대할 항마상인연합(降魔商人聯合), 즉 항마상련을 만들 생각입니다.”
“항마상련?”
장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 나온 것이다.
다시 성왕보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힘을 모아서 마교를 물리칩시다!”
하지만 이번에는 앞서 그가 등장할 때와 같은 환호성은 나오지 않았다. 장내에 있던 상인들 모두가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무림조직을 만들어 지원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그것도 마교를 상대하는 조직이었다. 돈이 수도 없이 들어갈 것이다.
그렇다고 각 개인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마교를 멸하는 데 기여했다는 자부심으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만약 마교가 참여한 상인이나 상단에 보복이라도 가한다면?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는 그 모든 손해와 위험을 감수하려는 이는 없었다.
모두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앞쪽에 앉은 큰 상단의 주인들은 더욱 그러했다. 몇몇 친분 있는 이들은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냐며 인상을 찌푸리기까지 했다.
공수찬이 내게 나직이 물었다.
“대체 무슨 수작일까요?”
오직 나만이 그의 진짜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한 이유를.
“그는 나를 찾고 있소.”
“네?”
깜짝 놀란 공수찬에게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내 짐작이 맞다면, 성왕보의 의도를 곧 알게 될 것이다.
성왕보는 장내의 분위기를 모른 척했다.
“항마상련에 참가하실 분들은 잠시 남아 주시오. 밖에 술과 요리가 준비되어 있으니 나머지 분들은 나가서 연회를 즐겨 주시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수찬도 함께 일어났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자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안 가십니까?”
“나는 남겠소.”
그제야 공수찬은 이 상황을 정확히 이해했다.
“말씀하신 정면돌파군요.”
“운 좋게도 그와 나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부합되었소. 먼저 돌아가서 기다리시오.”
“네, 조심하십시오.”
상인들이 객청을 나가기 시작했다. 공수찬도 그들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앞쪽의 큰 상단의 주인들 역시 냉정하게 밖으로 나갔다. 성왕보와 친분이 깊었지만 돈과 관련해서 일절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았다.
성왕보 역시 그들에게 별다른 섭섭함을 표하지 않았다.
그들까지 나가자 뒤이어 다른 이들도 모두 나갔다. 이런 분위기에 남는다면 상단의 모든 것을 다 털릴 것이라는 위기감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고 이제 객청에 남은 사람은 그와 나뿐이었다.
단상에 선 성왕보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이곳에 남아 그들 도울 상단들이 몇 개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김없이 다 나갔다는 말은, 충성스러운 이들에게는 미리 다 나가라고 언질을 주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내가 정면승부를 건 것처럼 그도 내게 정면승부를 해온 것이다.
성왕보가 나를 향해 걸어오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정말 똑똑한 사람이고 승부를 아는 자였다. 하긴 그랬으니 이 배후세력과 손을 잡았을 것이다.
“하하, 대의를 아는 사람이 있었네그려.”
“마교는 없애버려야 하지 않겠소?”
“훌륭한 젊은이로군.”
“물론 마교를 지원하는 자들도 없애버려야겠지요.”
“마교를 지원하는?”
“밝은 세상에서 번 돈을 어두운 곳에 쓰는 자들이 혹시라도 있다면 말이오.”
자신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성왕보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였다.
“설마 이 강호에 그런 잔악무도한 자가 있겠는가?”
“모를 일이지요. 온갖 것들이 설쳐대는 강호니까요. 심지어 해서는 안 될 대법까지 하는 것들도 있다고 들었소.”
이 정도 말했으면 나에 대한 확인으로 충분할 것이다.
“성격이 시원시원하군. 그럼 사설은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갈까?”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술 있소?”
* * *
동호상단의 밀실에 술상이 차려졌다.
그 자리에 나와 성왕보가 마주앉았다. 그가 따라주는 술을 거침없이 마셨다.
“독이라도 들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당신들이 그리 자잘한 악인은 아니잖소?”
“하하, 높게 생각해주니 고맙군.”
[악인들은 다 자잘하다면서!]
[물론이지.]
[한데 왜?]
[당신 말을 존중해 주는 거잖아?]
[망할. 말이나 못 하면.]
술이 몇 순배 돌자 성왕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나?”
상대가 이렇게 나온다면 나 역시 그에 맞춰줘야겠지.
“알 만큼은 충분히 알고 있소.”
“반면 우리는 자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군.”
“알아봤자 보잘것없소.”
“그 보잘것없는 자네에게 이쪽은 너무 많은 것을 잃었네.”
“그럼 당신들도 보잘것없나 보군.”
성왕보가 웃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대화는 속전속결, 본론을 향해 내달렸다.
“제안 하나 할까?”
“해보시오.”
“자네를 사고 싶네.”
나는 그의 제안에 깜짝 놀랐다. 어떤 협상을 해올지 궁금했는데 설마 이런 제안을 해올 줄은 몰랐다.
동시에 나는 알 수 있었다. 이들과 그 노인 사이가 분열되었음을. 그 노인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나를 끌어들일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나를 끌어들일 생각을 하다니? 정말 돈이라면 뭐든 다 된다고 믿는 놈들이구나!
“나는 비싼 몸인데.”
“알고 있네. 얼마면 자넬 팔 텐가?”
“팔 생각이 없는 사람을 들쑤실 요량이면, 가격은 그쪽에서 제시해야지.”
잠시 숨을 고르며 긴장감을 고조시킨 후, 성왕보가 힘차게 말했다.
“삼천만 냥.”
삼천만 냥.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수대가 흥청망청 낭비해도 다 쓰지 못할 돈.
“자네가 허락하면 선금으로 천오백만 냥을, 우리 부탁을 들어주면 나머지 천오백만 냥을 마저 주지.”
“어떤 부탁이오?”
“한 사람을 죽이는 일이네.”
과연. 내 예상은 정확했다.
“자네도 목표가 누군지 알 것이라 생각하네. 이후의 일은 새로 계약하세.”
다시 말해 그를 죽이는 데 삼천만 냥을 주고, 나중에 다시 자신들을 도우면 새롭게 돈을 더 주겠다는 뜻이다.
이놈들의 돈지랄을 받아들일 것이냐고?
물론이다.
자존심? 대의?
이놈들에게는 과분한 것들이다. 저들이 철저히 남들을 이용해 먹은 것처럼,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다룰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어차피 죽일 노인이었다. 그런데 돈을 받으면서 죽인다면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것이다. 게다가 이번 일을 통해 암흑대상과 그 수뇌부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성왕보가 미소를 지었다. 설마 삼천만 냥을 거절할 수는 없겠지란 득의만면한 얼굴을 바라보며 내가 과감히 말했다.
“일억 냥.”
내 말에 성왕보가 깜짝 놀랐다. 이내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 지나치군.”
“최소로 책정한 것인데.”
“최소라고?”
“만약 그자를 죽이지 못하면 당신들은 돈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잃게 될 거요. 한마디로 모든 것을 잃게 되겠지.”
“자넨 알고 있나? 일억 냥이 얼마나 큰돈인지? 세상을 뒤바꿀 수도 있는 돈이네. 꿈에서도 볼 수 없는 돈이네.”
“좋소. 그 세상을 뒤바꿀 큰돈을 당신에게 주면, 당신은 그 사람을 죽일 수 있소?”
성왕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물론 일억 냥으로 고용할 수 있는 모든 고수를 사서, 그를 죽이러 보내는 방법이 있다.
수백, 수천 명을 보낼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런다고 그를 죽일 수 있을까?
첫 번째 공격이 실패하면 그는 자신을 죽이러 올 것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암흑상계의 모두가 위험했다. 암흑대상에게 어떤 비장의 한 수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노인을 상대할 고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불가(不可)!”
“그래, 당신은 못 죽이겠지.”
“못 죽인다는 뜻이 아니라, 못 주겠다는 뜻이네.”
“그럼 협상은 여기까지군.”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자고로 협상 자리에서만큼은 엉덩이 가벼운 놈이 이긴다.
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뒤에서 성왕보가 말했다.
“사천만 냥!”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좋네. 오천만 냥 주지.”
내가 멈추지 않고 문 앞까지 걸어갔다.
“육천만.”
손잡이를 잡으려던 손이 멈췄다. 내가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칠천만. 선수금으로 삼천오백만 냥, 그 노인을 해치우고 나면 나머지 돈을 주시오.”
대답이 들리지 않자 내가 문을 열었다.
그때 성왕보가 말했다.
“좋네. 그렇게 하지.”
이 미친 새끼들. 정말 내게 줄 칠천만 냥이 있단 말이지?
종사희가 말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 조직이 존재해왔다고. 다시 말해 백여 년, 혹은 수백 년에 걸쳐 암중에서 돈을 긁어모았던 것이다. 수억 냥, 어쩌면 수십억 냥을 모아두었을지도 모른다.
싹 다 빼앗아주마. 그리고 사리사욕을 위해 상계를 어지럽힌 죗값을 반드시 받게 해주마.
[싹 다 뺏어. 그리고 깡그리 없애버려.]
천마와 내가 처음으로 의견일치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천천히 돌아섰다.
성왕보가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돈 때문에 싸워온 것 같지는 않았는데? 내가 잘못 봤나보군.”
그가 나를 떠보며 쿡 찔러왔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설마 정파 꼰대처럼 협의를 지키려고 싸웠겠소? 싹 밀고 내가 다 먹으려고 싸웠지.”
[옳지, 그래야지. 잘한다!]
성왕보가 악수를 청하며 씩 웃었다.
“역시 돈이 좋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