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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쟁패(2)
어둠 속, 저 멀리 동굴이 보인다.
나는 천천히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따로 생각한 작전은 없었다. 나의 무력으로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나는 나 정도의 실력을 지닌 고수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어떤 마음으로 적을 대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이곳에 그를 지켜주는 자잘한 무인들은 없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있다면 아주 강력하고 제대로 된 한둘이 있을 것이다.
동굴로 다가가는 내 움직임은 발걸음소리는 물론이고 그 어떤 기척도 나지 않았다.
이윽고 동굴 앞에 서서 내부의 기척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노인이라면 내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법도 한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면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없겠지.
수라명왕검을 뽑아들고 천천히 동굴로 걸어 들어갔다.
동굴 안은 더럽고 습했는데 금방이라도 독충이 기어오를 것 같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동굴의 막다른 곳까지 걸어갔다. 벽은 막혀 있었고 이리저리 만져 봐도 벽을 여는 특별한 장치는 없었다. 아마 어딘가에 내공을 주입해야 열 수 있는 문인 듯 보였다.
나는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동시에 수라명왕검에 내력을 주입했다.
우우웅.
수라명왕검에서 검강이 뿜어져 나왔다.
검강으로 문을 잘라내 버릴 작정이었다. 뭐가 폭발할 수도 있었고, 암기가 날아들 수도 있었다. 그냥 강행돌파해버릴 작정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스르릉.
문이 저절로 열렸다. 안에서 문을 열어준 것이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생소하고 기괴했다. 한마디로 괴물의 뱃속에 들어온 것 같았는데 천장에는 물주머니 같은 것들이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그것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바닥은 울퉁불퉁했는데 자세히 보니 사람의 두개골이었고 벽에 그려진 이상한 도형들에는 강렬한 원색이 칠해져 있었다.
나는 숱한 곳을 돌아다녀 봤지만 이렇게 기괴하고 신비로운 장소는 처음이었다.
그곳에 눈썹이 없는 사내가 서 있었다.
“너는 누군가?”
“이 집에 사는 사람입니다.”
“네 주인은 어디에 있느냐?”
“어르신은 떠났습니다.”
“언제?”
“그건 가르쳐드릴 수 없습니다.”
“하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지. 너는 왜 남았지?”
“이곳이 제집이니까요.”
나는 알 수 있었다. 노인이 내가 올 것을 예상하고 먼저 떠나가 버렸다는 것을.
나를 피해 달아나 버릴 줄이야.
정말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당신은 살아서 이곳을 나갈 수 없습니다.”
어느새 내가 들어왔던 문은 닫혀 있었다.
“저 문을 강제로 부수면 이 산이 무너질 겁니다.”
내가 피식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한 번도 강제로 열어본 적이 없겠지? 이 산은 아직 멀쩡하니까.”
“그렇습니다.”
“정말 저 문을 만든 사람이 그런 엄청난 장치를 해뒀을까?”
사내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산이 무너질 정도의 기관은 아무도 만들지 않으니까. 만약 누군가 이곳을 침입하려고만 해도, 이 산이 무너지면 안에 있는 모두가 죽게 될 텐데? 대체 누가 그런 기관을 만들 것이며 만들게 허락할 것인가?”
“혹시 당신은 기관연구가입니까?”
“그렇지는 않다. 다만 수많은 기관을 경험해봤을 뿐이다.”
특히 문과 관련해서 여러 기관들을 경험해보았다. 무림맹주를 지키기 위한 문들이 여럿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사내는 단호했다.
“전 어르신의 말씀을 믿습…….”
쉬이이이잉.
꽝!
문이 박살 나며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수라명왕검이 뒤를 향해 내질러져 있었다. 사초식 탈혼겁이 발휘된 것이다. 문이 박살 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산이 무너지기는커녕 그 흔한 암기조차 발출되지 않았다.
사내가 놀란 얼굴로 부서진 문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당신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기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라도 네가 어르신이라 부르는 그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니까.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 그자가 너를 대하는 방식임을 짐작했으니까.”
동요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사내는 동요하지 않았다. 분명 감정이 있는 사내였는데, 철저히 감정을 조절하는 훈련을 받은 것이다.
내가 돌아서서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너 따위를 상대하러 온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날을 기다려왔습니다.”
스슷! 슷! 스스스슷!
이상한 소리에 뒤로 돌아섰다.
사방의 도형에서 형형색색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기운이 사내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으아아아아악!”
긴 비명이 끝났을 때,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강렬한 원색이었던 도형은 이제 아무것도 칠해져 있지 않았다.
대신 사내의 눈동자가 여러 색깔로 바뀌었다.
무시무시한 상황이었음에도 나는 침착했다.
“나였다면 결코 내 수하를 홀로 이곳에 남겨두고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런 목적으로는 더욱이.”
휘이이익!
사내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이미 인간이라 할 수 없었다. 동굴 벽의 기운을 흡수한 그는 한 마리의 마수가 되어 있었다.
정말 빨랐다. 속도도 힘도 엄청났다.
촤아아악!
그의 주무기는 양손이었다. 강철도 찢어발길 위력으로 양손을 휘둘렀다.
까앙! 깡!
내 검이 그의 손에 부딪히자 쇳소리가 났다. 무기가 된 양손은 어느새 강철보다 단단해져 있었다.
촤아아악! 촤앙! 촤아악!
무공을 익혔다기보다 이런 움직임을 펼치기 위해 탄생한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동작은 완벽했고 위력은 극강이었다.
꽝! 꽈르릉! 꽈앙!
그의 손이 스치는 곳은 모두 가루가 되었다.
싸움의 감각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노련한 고수처럼 아주 영리했다.
순식간에 이십여 수가 지났고, 그제야 내가 기회를 잡았다.
쉬이익.
수라명왕검이 사내의 가슴을 꿰뚫으려던 바로 그 순간.
팟.
다음 순간, 사내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은신술!
직접 눈으로 보고도 놀랄만한 대단한 은신술이었다. 천소선이 사용했던 은신술과는 달랐지만, 거의 그 정도 실력을 보여주었다.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동굴 내부에 매달려 있던 둥근 구체들이 흔들리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내 집중력을 방해하려는 것이다.
동굴의 도움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쑤욱. 촤라라락.
뭔가가 바닥에서 올라와 내 발목을 휘감는다 싶을 그때.
쇄애애애액!
왼쪽 허공에서 엄청난 위력의 강기가 쏟아져 나왔다.
발을 휘감은 것은 바닥에 깔린 해골의 눈에서 튀어나온 넝쿨이었다. 물론 보통 넝쿨이 아니라 천잠사처럼 단단한 넝쿨이었다.
몸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꽝!
수라명왕검이 만들어낸 강기와 날아든 강기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주위가 휩쓸렸다.
꽝! 꽈앙!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연속해서 강기가 날아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단칼에 넝쿨을 잘라낸 나는, 강기가 날아들었던 허공에 검을 찔러 넣고 있었다.
쉬이익! 파앗!
허공에서 피가 튀었다.
하지만 사내는 전혀 움직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다음 순간, 허공에 매달려 있던 기괴한 공모양의 그것이 툭 끊어지며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내가 살짝 피하자 그것은 바닥에 떨어져 터졌다.
펑!
안에서 독연이 뿜어져 나왔다.
만독불침인 나조차도 속이 매스꺼워지는 지독한 극독이었다. 보통의 고수였다면 이 독연을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절명했을 것이다. 그만큼 강력한 극독이었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사내의 쌍수가 날아들었다.
촤아아앙!
몸을 비틀어 회전하며 그 기세로 그대로 사내의 턱을 무릎으로 강타했다.
퍽!
뒤로 밀려나는 그를 뒤따라 연이어 주먹을 날렸다.
퍽! 퍼억! 퍽!
사내가 뒤로 날아가 처박혔다. 하지만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은 듯 벌떡 일어났다.
두 눈을 부릅뜬 사내는 내가 넝쿨을 단번에 잘라내고 독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것에 큰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놀라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들어간 내 공격에도 어떻게 저리 멀쩡할 수 있지?
사내 역시 어떤 시험의 결과물이다. 놈들이 자신들의 힘을 키우기 위해 이런 식으로 마구잡이로 마수들을 만들어 내다가는 언제 크게 한번 사고를 치고 말 것 같았다.
어쨌든 이대로라면 내 내공이 먼저 고갈될 상황이었다.
[잘한다. 저런 놈 하나 상대 못 하고.]
[말만 하지 말고 네가 나와서 싸워보든지.]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싫다. 이 징그러운 것들은 대체 다 뭐냐?]
[내 말이.]
무심코 내 시선이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린 것들을 바라보았다.
앗!
그때 내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것들 중 일부가 회색빛이 된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고마워! 당신 덕분에 놈의 약점을 알아냈다.]
[뭐? 뭔데? 뭔데?]
[하하. 보면 안다!]
[나 때문이야, 내 덕분이라고!]
다시 한 번 사내와 뒤엉켜 싸웠다.
촤아앙! 촤앙!
퍽! 퍽! 퍽!
뒤로 주르륵 밀려난 사내는 앞서처럼 전혀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 듯,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보았다. 매달려 있던 또 다른 것들 중 하나가 축 늘어져서 죽는 모습을.
내 짐작은 확실했다.
저것들이 이자의 충격을 대신 흡수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검을 내질렀다. 그와 함께 추혼수라검술 제 사초식 탈혼겁이 발휘되었다.
슈우우우우욱!
촤아악 촤악! 촤악! 촤아악!
하나의 검기는 열여섯으로 분열되었고 그것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던 것들을 모조리 잘라냈다.
펑! 펑! 퍼엉! 펑! 퍼엉!
매달려 있던 것들이 터지면서 온갖 종류의 독연이 장내에 가득 퍼졌다.
“안 돼!”
사내가 고함을 질렀지만 이미 자신을 보호하던 그것들은 모두 잘려나간 후였다.
그것이 사라진 이상 승패는 쉽게 났다.
사내는 채 다섯 수도 버티지 못하고 내 검을 허용했다.
쉬이이익!
푸욱!
수라명왕검이 그의 가슴을 꿰뚫는 순간 나는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내의 표정을. 그는 죽음마저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철저히 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떤 이유를 가져다 붙이더라도 네 주인은 용서받을 수 없다.”
내 분노에도 사내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독연을 헤치고 천천히 동굴을 걸어 나왔다.
[내가 알려준 거다.]
[당신이 알려준 것은 이곳이 징그럽다는 것이었지. 일곱 살짜리 꼬마도 알 수 있는 내용이지. 하지만 역시…… 당신 덕분이었다.]
[암, 이게 바로 고수의 역할이지.]
[하하하.]
* * *
웅성대는 저잣거리, 쌀과 식재료를 파는 작은 미곡상 지하에 밀실이 있었다.
그곳에 있는 두 사람은 바로 노인과 천소선이었다. 공을 들여 만든 이곳 안가는 아주 은밀했으며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수하의 보고를 받은 노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예상대로 공격을 받았다. 양은 죽었고, 동굴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놈이 기습해올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천소선의 물음에 노인이 대답했다.
“성왕보가 알려줬다.”
“성총관이요? 그가 배신한 것이 아닙니까?”
“배신자지.”
천소선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시에 그는 장사꾼이 아니더냐? 내가 이겼을 경우를 생각해서 자신이 배신했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줬다.”
자신을 찾아와서 했던 말이 그것이었다. 애초에 올바른 대답이 없는 질문도 있지 않느냐는.
평소와 다른 행동에서 노인은 알 수 있었다. 성왕보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고 암흑대상에게 붙었다는 것을. 또한 조만간 자신을 죽이러 올 것이라는 것을.
“왜 그런 것입니까?”
“만약을 대비한 것이지. 만약 내가 죽는다면 그뿐이지만, 혹시 살아남았을 때를 대비한 것이다. 내게 자신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려줬으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간청했겠지.”
“빌어먹을 장사꾼 같으니라고!”
천소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성총관 그놈은 제 손으로 반드시 없애겠습니다.”
“어차피 그자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 없애려면 암흑대상 그자를 없애야지.”
“네. 감히 우릴 배신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습니다.”
“소선아.”
“네.”
“그자들의 힘은 막강하다. 그들은 오랜 세월 부를 쌓아오면서 동시에 엄청난 무력도 쌓았을 것이다.”
“그렇게 강한 자들이었다면 애초에 할아버지와 손을 잡지 않았겠죠.”
그러자 노인이 고개를 내저으며 차분히 말했다.
“그들은 결코 나보다 힘이 약해서 나를 포섭한 것이 아니다.”
천소선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