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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236화 (235/293)

236화. 고뇌 ― 괜찮아요 (2)

매유검을 만난 이후 삼 일 동안 긴 고통에 시달리고 있던 천무진의 몸 상태는 꽤나 빠르게 나아졌다.

그 이유에는 삼 일이라는 시간 동안 뒤엉켰던 생각들이 어느 정도 정리된 덕분도 있었지만, 역시나 가장 큰 건 백아린의 존재였다.

옆에 있어 주는 다른 누군가가 있자 어둠 속에서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천무진의 상태는 호전되어 갔다.

방 창문을 막아 뒀던 것들도 모두 떼어 냈고, 이제는 화를 못 이겨 물건을 부수는 일도 없어졌다.

겉보기만 보자면 예전과 하나 달라진 것 없는 모습.

하지만…….

그건 겉모습의 이야기였다.

내면의 그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십천야의 일원으로 천무진이 해야만 하는 그 일.

그것을 위해 천무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부인 천운백을 만나 필요한 걸 얻어 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우습게도 지금 천무진이 가장 피하고 싶은 일 또한 천운백을 만나는 것이었다.

천운백을 만난다면 결국 자신은 원래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게 될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천무진은 천운백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원래의 정해진 목적을 수행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 천무진의 상태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천무진이 간단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했을 때였다.

“일어났어요?”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백아린의 목소리에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들어와도 괜찮아.”

승낙이 떨어지자 문이 열렸고, 그 건너에서 백아린이 웃는 얼굴로 자리하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며 그녀가 물었다.

“오늘은 좀 어때요?”

“어제보다도 더 낫네. 이젠 많이 나아졌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방 안의 물건들을 때려 부수고 혼자서 괴로운 듯 자리하고 있던 천무진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고도 괜찮다며 자신이 옆에 있어 주겠다는 말만 남겼던 백아린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 며칠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는 천무진에게 그날 일에 대해 단 하나도 묻지 않았다.

나아졌다는 천무진의 말에 백아린이 만족스러운 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다행이네요. 어서 나아야 그때 가려고 한 곳도 데려가 줄 거 아니에요.”

“아…….”

백아린의 말에 문뜩 약속을 떠올린 천무진이 픽 하고 웃었다.

적화신루의 일로 갑작스럽게 떠나야만 했기에 저녁 외출 약속을 다음으로 미뤘었다. 돌아오면 바로 그날의 약속을 지키자고 이야기했었지만 천무진의 상황이 좋지 못했던 탓에 여태까지 조용히 기다린 그녀였다.

백아린이 말했다.

“설마 먼저 다녀온 건 아니죠?”

“그럴 리가. 당신하고 같이 가야 되니 아껴 두라면서.”

“제가 한 말 기억하고 있었어요?”

“물론이지. 그런데 좀 걱정이네. 그렇게 기대할 정도는 아닌데…….”

천무진이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지 말끝을 흐릴 때였다.

백아린이 걱정 말라는 듯 답했다.

“사실 장소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그곳에 당신만 있으면요. 전 그거면 돼요.”

“…….”

진심이 가득한 그 말에 천무진은 일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밀려드는 감정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예전이었다면 지금의 이런 말에 마냥 고맙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미안해.’

언젠가 그녀를 배신하게 될지도 모르는 지금.

그런 상황에서 이 같은 배려를 받고 있다는 것 자체가 천무진에겐 면목이 없는 상황이었다.

몇 마디를 주고받는 와중에 백아린은 자연스레 옆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고, 그렇게 잠시 두 사람이 평범한 대화를 이어 나갈 때였다.

열린 방 문을 통해 한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손으로 가볍게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니, 아침 식사 때문에 데리러 가신 분까지 여기서 농땡이를 부리시면 어쩝니까?”

“뭐 얼마나 됐다고 그래.”

백아린이 한천을 향해 왜 괜한 유난이냐는 듯 퉁명스레 말할 때였다. 그가 기가 막힌다는 듯 이마를 감싸 쥐며 답했다.

“얼마나 되긴요. 대장이 간 지 이 각은 훌쩍 넘었거든요?”

“……그래?”

한천의 말에 백아린은 슬쩍 바깥을 확인하더니 이내 어색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천무진과 대화하는 데 빠져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모양이다. 그것도 모르고 오히려 한천에게 큰소리를 쳐 댔으니 면목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괜스레 천무진에게 말을 돌렸다.

“아침 먹으러 가요.”

“그러지.”

말과 함께 두 사람이 한천이 대기하고 있던 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섰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젓던 한천의 표정이 일순 진지하게 변했다.

‘분명 뭐가 있긴 한 것 같은데…….’

백아린이 서둘러 제지한 탓에 방 내부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부서지는 소리가 흘러나온 곳이 천무진의 방인 건 분명했다.

이해를 할 수 없었던 일.

그런데 막상 두 사람이 그것에 대해 일체 말도 않고 함구하고 있으니 한천으로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방도가 없었다.

내심 두 사람에 대한 걱정도 들었지만…… 지금으로선 그냥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었다.

한천은 이내 살짝 굳혔던 표정을 풀었다.

천무진이나 백아린.

두 사람 모두 훌륭한 성인들이다. 자신에게 감춘 것이 어떠한 일이 됐든 간에 결국 저 두 사람이 함께 고민하는 일이라면 훌륭한 답을 내릴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괜히 더 밝은 표정으로 달려간 한천이 굳이 천무진과 백아린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자, 두 분만 즐겁게 대화 나누지 마시고 저도 좀 끼워 주시죠.”

그런 그의 행동에 두 사람 다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한천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 나갔다.

“단엽 그 녀석은 잘하고 있을까요?”

“뭐 문제 될 게 있나. 어차피 대홍련의 후계자였고, 현재 련주 또한 그를 강력하게 밀어줄 생각인가 본데 자잘한 군소리들이야 결국 시간문제일 테고.”

백아린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고 천무진 또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내 천무진이 한천을 향해 말했다.

“왜? 단엽이 없으니 허전한가 보지?”

“술친구가 없으니 영 심심하긴 하네요. 그 자식이 벌써부터 이렇게 보고 싶다니, 원.”

한천은 속내를 숨기지 않고 답했다.

몇 번이고 기루에 가고 싶었지만, 딱히 같이 술을 마셔 줄 이가 없었기에 한천으로서는 입맛만 다시며 지내는 중이었다.

한천이 덧붙여 말했다.

“제가 이렇게까지 술이 당긴다고 노래를 불러 댔는데 나중에 두 분이서만 나가서 마시시면, 그건 반칙입니다? 꼭 저도 데리고 나가십쇼.”

“……그래야지.”

순간 멈칫한 천무진이 어렵게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그 찰나의 머뭇거림을 알아차린 한천이 눈을 부라리며 중얼거렸다.

“어라? 이거 수상한데.”

“수상하긴 뭐가 수상해!”

옆에서 괜스레 편을 들어 주는 백아린의 모습에 한천의 눈초리가 더욱 의심스럽게 변했다.

투덕거리며 식당으로 향한 세 사람은 이내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세 사람이 식사를 마칠 무렵.

적화신루 쪽에서 급히 날아든 연락 하나.

그 연락의 주인공은…… 천운백이었다.

* * *

약속 장소로 향하는 천무진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최대한 늦게 연락이 오기를 바랐다.

그런데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기 무섭게 천운백에게서 연락이 오고야 만 것이다. 마교에 나타나서 단 한 번의 만남 이후 오랫동안 모습을 감춰 왔던 그다.

만나고자 했던 때는 그리도 연락이 없더니 그 반대의 상황이 되자 오히려 이토록 빠르게 약속이 잡혀 버렸다.

목적지가 점점 가까워져 올수록 천무진의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백아린이나 한천이 있었다면 이상하다는 걸 단번에 느낄 정도였다.

이 각이면 충분히 갈 거리를 무려 반 시진이 넘는 긴 시간을 들여 도착한 천무진은 이내 자신의 앞에 있는 건물을 확인했다.

그의 눈앞에는 이 층으로 된 기루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그때.

“녀석아, 거기서 뭐 하는 게냐. 왔으면 어서 올라오지 않고.”

익숙한 목소리에 천무진은 고개를 들어 위쪽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천운백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천무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사부.”

“그래 이놈아. 사부 여기 있다. 어서 올라오래도.”

재차 내뱉는 그의 말에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바로 가죠.”

말과 함께 천무진은 기루 안으로 들어섰다. 마교 외성에 위치한 이 기루는 변두리에 자리를 잡은 탓에 손님이 많이 오가는 곳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시간 또한 워낙 일렀기에 기루 내부는 한적했다.

텅 비어 있는 일 층을 지난 천무진이 곧장 이 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계단을 따라 이 층에 올라선 그가 곧장 천운백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방 안에는 천무진을 기다리며 시켜 두었던 음식들로 가득했다.

안으로 들어선 천무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천운백과 마주했다.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얼굴.

저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다시금 마음이 요동쳤다.

가장 소중했던 사람.

그리고…… 자신이 배신해야만 하는 사람.

잠시 그곳에 선 채로 천운백을 바라보던 그가 이내 어렵사리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곧바로 천운백의 맞은편으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흡사 이 불편한 마음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천무진이 앉자마자 탁자 위에 가득 차 있는 음식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뭐 이리도 많이 시키셨습니까?”

“네가 좋아하던 것들로 하나 두 개 시키다 보니 이리도 가득 차 버렸구나. 하지만 뭐가 문제더냐. 아직 한참 먹을 나이 아니냐. 좀 많긴 하다만 둘이서 먹는 데 못 할 것도 없지. 너도 어서 먹을 준비를 하려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젓가락을 들어 올리는 천운백의 모습에 천무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전 이미 아침 먹었는데…….”

“어허, 그래서 이 사부와는 식사하지 못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말과 함께 자신을 향해 젓가락을 들이미는 천운백의 모습에 천무진은 결국 못 이기는 척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음식을 입에 넣으며 천무진이 투덜거렸다.

“그리고 한창 먹을 나이는 오래전에 지났습니다, 사부님. 벌써 제 나이가 몇인데요.”

“허허, 그거야 네 생각인 게지. 네가 아무리 큰다 한들 내 눈에는 그대로인데?”

말과 함께 웃어 보이는 천운백의 모습에 천무진은 죄책감이 밀려들었는지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오히려 음식에만 열중한 채로 바삐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을 식사에 열중하던 때였다.

음식을 먹고 있는 천무진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천운백이 이내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싸늘한 바람을 느끼고는 입을 열었다.

“날씨가 참으로 춥구나. 이제는 겨울만 되면 뼈가 시릴 지경이야.”

“……그런 영감님 같은 말씀을 하기에는 아직 너무 정정해 보이시는군요.”

떡 벌어진 어깨와 힘 있는 눈동자.

나이는 많았지만 누가 봐도 천운백은 건장하기 그지없었다.

허나 그런 천무진의 말에 천운백이 발끈하며 곧바로 받아쳤다.

“어허! 네 녀석이 내 나이가 되어 봐야 알지.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얼마나 삭신이 쑤시는지, 원.”

재차 죽는소리를 해 대는 천운백의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듯 천무진은 별다른 대꾸 없이 다시금 젓가락질을 해 댔다.

그때 천운백이 차가운 바람에 뭔가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마 이맘때쯤이었지?”

“뭐가 말입니까?”

되묻는 천무진을 향해 천운백이 곧장 답했다.

“우리 둘이 처음 만났던 때 말이다.”

“…….”

천무진은 입을 닫은 채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천운백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생각해 보니 천운백이 죽어 가는 천무진을 데리고 갔던 건 무척이나 추운 겨울이었다.

찬바람을 느끼며 천운백이 말을 이었다.

“그때도 무척이나 날이 추웠지. 이곳이야 워낙 날씨가 따뜻하니 지금 이 무렵에도 버틸 만하지만, 우리가 만났던 그곳은 길거리에서 자다간 딱 얼어 죽기 십상일 정도였던 게 기억나는구나.”

벌써 이십여 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을 정도로 먼 과거의 일이다.

긴 시간이 지났지만, 천운백은 천무진을 만났던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추운 겨울,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져 있는 그 조그마한 아이를 품에 안았던 날.

그날의 이야기가 나오자 천무진은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다. 천무진은 계속 고개를 숙인 채로 괜히 퉁명스레 말을 꺼냈다.

“갑자기 그날 일은 왜 꺼내십니까? 저는 잘 기억도 안 나는…….”

그 순간.

“무진아.”

자신을 부르는 사부 천운백의 나지막한 목소리.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토록 자신을 부르는 상황에서 계속 모르는 척 외면할 순 없었다. 천무진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고, 맞은편에는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천운백이 있었다.

천무진은 자신을 바라보는 천운백의 시선을 애써 피하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네, 사부님.”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때.

천운백의 입이 열렸다.

“……기억을 찾았구나.”

투욱!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천무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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