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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235화 (234/293)

235화. 고뇌 ― 괜찮아요 (1)

천무진은 칩거했다.

봉인되었던 기억을 되찾은 후부터 천무진은 그 어떠한 것도 할 수 없었다.

십천야를 찾아내고, 그들을 막기 위해 모든 걸 걸었던 그다. 그런데 자신이 그 십천야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태까지 했던 그 모든 게 의미가 없었을뿐더러, 앞으로 할 일은 오히려 지금껏 해 왔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어야 했다.

천무진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엽은 대홍련의 련주가 되기 위해 떠났고, 백아린과 한천은 적화신루의 일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랬기에 혼자 나섰다가 매유검과 그런 식으로 조우하게 된 것 아닌가.

자연스레 천무진은 모든 일에서 손을 놓고 마교 내 거처인 귀림원에 자리한 채 점점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떠오른 기억들.

그리고 그로 인해 저절로 어릴 때의 모든 게 생각났다. 고아로 떠돌아다니던 때부터, 그들에게 끌려가 갖가지 생체 실험을 당했던 것들까지.

거기다가 어르신에게 선택을 받게 되면서 그보다 더욱 심한 지옥으로 끌려가 겪었던 일들도 생각났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지금처럼 혼자였고, 그 누구도 없었다.

무공 또한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맨몸으로 그들이 행하는 모든 걸 감내해야만 했다. 천운백을 속여서 제자로 들어가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니, 당연히 무공은 가르쳐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난 후 천무진은 기억을 봉인당했다.

상대는 천운백.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제아무리 천무진이 영특하게 군다고 해도 천운백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릴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 이후의 기억 중에 특별한 건 없었다.

천운백의 눈에 들 수 있도록 거의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았고, 길거리에 버려져 있었으니까.

그렇게 천운백의 눈에 들어 천룡성에 들어갔고 결국 십천야의 주인인 천지광이 원하던 대로 그의 제자가 되는 것에도 성공했다.

천운백은 좋은 사람이었다.

기억은 잃었지만 오랜 시간 상처 입고 고통을 받은 천무진은 자연스레 난폭해져 있었다. 상처 입은 맹수처럼 날뛰던 천무진이 다시금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던 건…… 모두 천운백 덕분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천무진의 옆에 있었고, 그의 상처를 함께 껴안았다.

그 덕분에 천무진은 변해 갈 수 있었다.

기본적인 성향 때문에 살가운 제자까지는 되지 못했지만 천운백이라는 인물을 진정으로 존경했고, 그는 아무도 없던 천무진에게 유일한 가족이 되어 줬다.

저번 생에서 조종을 당하던 와중에도 천운백의 사망 소식에 눈물을 흘릴 정도였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만큼 소중했던 사람.

그런데…….

천무진은 그런 그를 배신해야 했고, 또 놀랍게도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며 스스로에게 되뇌는 자신이 이곳에 있었다.

마치 몸 안에 있는 두 개의 인격이 격하게 싸우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아쉽게도 매번 그 싸움의 승자는 오래전 만들어진 바로 그 조그마한 아이였다.

머리가 깨어질 것만 같은 두통.

그 두통 때문에 천무진은 틈만 나면 잠을 잤다. 그렇지 않고서는 버텨 내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점점 마음은 황폐해져 갔고, 이 모든 건 천지광이 오래전부터 준비해 둔 계획대로였다.

오늘도 무려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잠으로 버텨 내던 천무진이 지독한 악몽에 결국 눈을 뜨고야 말았다.

“으읏!”

벌떡 몸을 일으켜 세운 천무진이 손으로 이마를 눌렀다. 잠에서 깨기 무섭게 찾아오는 두통이 계속해서 머리를 짓눌렀다.

그 고통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천무진은 곧장 탁자 위에 자리하고 있는 화병을 손으로 밀어젖혔다.

쨍그랑!

탁자 위에 있던 화병이 곧장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고, 그 소리를 들은 직후에야 천무진은 자신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바닥에는 엉망으로 깨어져 있는 화병 조각과, 마찬가지로 나뒹굴고 있는 꽃이 보였다.

어지럽게 떨어져 있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천무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혼란스러웠다.

‘대체 이게 무슨…….’

스스로의 의지로 벌인 일이 아니었다.

갑자기 화가 치밀었고, 자신도 모르게 눈앞에 보이던 화병을 손으로 쓸어 버린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천무진은 더더욱 두려움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점점 괴물이 되어 가는 것 같았기에.

천무진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대로 침상 위에 주저앉았다.

아직 해가 진 시간도 아니었건만, 방 내부는 깜깜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기를 바랐기에 사람을 시켜 창문을 꽉꽉 막아 버린 탓이다.

천무진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홀로 고개를 숙였다.

자조 섞인 미소를 지은 채로 그가 중얼거렸다.

“난…… 누구지?”

과연 자신은 누구일까?

천무진일까? 아니면…… 십삼 호인가?

아주 조금씩 그의 주변으로 어둠이 밀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적화신루의 일로 자리를 비웠던 백아린은 눈에 보이는 귀림원의 건물을 발견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슬쩍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삼 일이나 자리를 비운 탓에 그동안 천무진과 떨어져 있어야만 했던 그녀다.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사실 천무진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막 시작한 연애.

인생의 첫 연애였고, 스스로가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좋아도, 너무 좋아서 천무진이 없는 찰나는 영원처럼 느껴질 정도로 길었다.

사실 원래의 일정대로였다면 내일 오전에나 도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천무진이 너무나 보고 싶어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고, 그 덕분에 해가 진 밤이긴 했지만 그래도 날을 넘기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자그마한 표정 변화를 귀신같이 눈치챈 한천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낭군님 보실 생각에 그리도 좋으십니까?”

낭군이라는 말에 백아린의 얼굴에 큰 당황스러움이 맺혔다. 그녀가 당황한 듯 더듬거렸다.

“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에 한천의 표정이 더 장난스럽게 변했다. 그 어떠한 일에도 당황하지 않던 그녀 아닌가.

그런 백아린이 낭군이라는 말에 이토록 당황해서 더듬거리는 걸 보니 절로 장난기가 맴돌았다.

“어라? 얼굴까지 빨개지셨는데요? 이거 이러다가 조만간 정말로 혼인이라도…….”

“……부총관.”

의미심장한 목소리와 함께 자신의 등 뒤에 매달려 있는 대검을 향해 손을 가져다 대는 백아린의 모습에 한천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지, 진정하시죠. 대장! 방금 말은 취소입니다, 취소. 하하!”

서둘러 거리를 벌리기까지 하는 한천의 모습에 등 뒤로 향했던 손을 내린 그녀가 골치 아프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체 단엽은 언제 돌아오는 거야? 그 녀석이라도 있어야 부총관의 저 시끄러운 입이 좀 떠들 곳을 찾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 대장은 다른 분이 생기셔서 저랑 놀아 주기도 힘드실 텐데 말이죠.”

그새를 못 참고 다시금 치고 들어오는 한천의 모습에 백아린이 이를 갈며 말했다.

“역시 몸이 편하니까 그 입이 문제네. 한동안 좀 편하게 지냈으니 이제 좀 바빠져 봐야겠지? 마침 큰 일거리 하나 들어왔는데, 그건 부총관이 맡도록 해.”

백아린의 그 말에 한천은 스스로의 입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속으로 후회를 내뱉었다.

‘아이고, 하여튼 이놈의 주둥이가 문제라니까.’

가뜩이나 긴 여정에 피곤해 죽겠는데 백아린이 이토록 큰 일거리라 호언장담할 정도라면 그것이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몇 날 며칠은 죽어라 고생할 것이 분명한 상황.

한천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기 대장, 이번 말도 취소할 테니까 방금 그 일거리 이야기도 좀…….”

그때였다.

쿠웅!

그리 크지 않은 소리. 그렇지만 백아린과 한천은 뛰어난 고수였고, 그 충격음은 둘의 귀를 피해 가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 소리가 난 장소.

그곳이 자신들의 거처인 귀림원이었으니까.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두 사람.

백아린과 한천이 다급히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내달렸다. 순식간에 귀림원 안으로 들어선 상황에서 백아린은 가장 먼저 천무진이 기거하는 방을 향해 움직였다.

소리가 난 방향도 그쪽이었고, 가장 걱정되는 것 또한 천무진의 안위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다급히 천무진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괜찮……!”

말을 내뱉던 백아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방 내부는 엉망이었다. 흡사 도둑이 든 것처럼 모든 것이 어질러져 있었고, 많은 것들이 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리고 그 엉망이 된 모든 것들의 위에…… 천무진이 있었다.

외부인의 목소리에 천무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입구를 바라봤다. 백아린을 발견한 그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백아린?”

자신을 향한 힘없는 천무진의 목소리.

그의 모습은 삼 일 전 헤어졌던 그때와 뭔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많이 지쳐 보였고, 핼쑥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백아린은 무엇인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그때 뒤편으로 한천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아린은 그가 안쪽의 상황을 보지 못하도록 서둘러 소리쳤다.

“부총관!”

“예?”

한천이 멈칫하는 순간 백아린이 급히 명령을 내렸다.

“여기는 괜찮으니까 주변을 한 번 확인해 줘.”

“하지만 소리가 난 곳은 분명 천 공자님의…….”

“됐으니까 빨리! 아까 말했던 큰 일거리 맡긴다는 말 취소할 테니까 다른 곳 확인해 달라고.”

오랜 시간 그녀의 옆을 지켜 왔던 그가 백아린의 표정과 목소리를 보고 뭔가가 벌어졌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리 만무했다.

다급해 보이는 얼굴과 목소리.

그 모습에 내심 걱정이 들었지만…… 한천은 오히려 모르는 척 장난스럽게 답했다.

“오, 정말입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주변을 샅샅이 뒤져 보고 오죠.”

“……부탁할게.”

“걱정 마시죠, 대장.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할 테니까.”

한천의 그 말에 백아린이 고맙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한천 덕분에 백아린은 주변의 경계를 모두 그에게 맡긴 채로 방 안에 들어섰다.

그녀는 곧장 방문을 걸어 잠갔다.

동시에 방 안은 다시금 짙은 어둠이 밀려들었다.

방 안의 창문들이 모두 틀어 막혀 있다는 사실을 백아린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백아린이 안으로 들어서자 천무진이 침상에 걸터앉았다.

내면에 있는 두 개의 생각이 맞부딪치며 다시금 방 안에 있던 걸 손으로 때려 부쉈던 천무진이다.

그렇지만 백아린의 목소리에 이내 정신이 돌아왔고, 자신이 직접 만들어 버린 방 꼴을 보며 깊은 자괴감에 젖어 들었다.

천무진에게 다가온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백아린의 질문에 천무진은 움찔했다.

그녀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자신을 향한 마음이 담겨져 있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를 그녀에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그렇지만 그런 자신의 또 다른 정신을 몸이 지배한다.

입이 열리지 않았고,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천무진이 얼굴을 감싸 안은 채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할 말이 너무 많은데,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은데……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하겠어.”

말과 함께 천무진은 천천히 고개를 떨궜다.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해 줄 수 없는 상황이, 그리고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도 싫었다.

이 모든 것에 깊은 좌절감을 느끼고 있던 바로 그때.

스윽.

뻗어진 손이 부드럽게 천무진의 머리를 감쌌다. 그 손의 주인인 백아린이 얼굴을 감싸 안은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천무진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백아린은 이내 상체를 살짝 굽혀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댄 채로 속삭였다.

“괜찮아요.”

그 한마디에 천무진이 움찔했다.

괜찮다니?

이 상황을 보고도 괜찮다는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순간 백아린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제가 옆에 있을 테니까.”

말과 함께 백아린의 한쪽 손이 천무진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녀의 위로에 천무진은 절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위로가 오히려 마음속에 커다란 파문을 일게 만들었다.

괜찮다며 등을 어루만져 주는 백아린의 손길에 어지럽던 머리가 이상할 정도로 평온해졌다.

이제야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이나마 뚫리고, 숨이 쉬어지는 느낌이었다.

자리에 앉은 채로 백아린의 품에 안겨 있던 천무진이 이내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하고 싶은 말이 참으로 많은데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말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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