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3 (13/40)

Chapter 3

아론이 깨어난 지 하루 뒤,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곧장 드워프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들은 공작가에서도 몇 명밖에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머무는 중이었다.

“아론 님! 깨어나셨군요!”

“안색이 좋아 보이진 않는군.”

뷰란트와 카슈가 아론을 반겨주었다. 제일 막내인 드워프는 쭈뼛쭈뼛 아론에게 인사하였다.

그들은 모두 목걸이를 착용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의태한 상태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예 움직일 수 없었거든.”

“저런. 몸 관리 잘하게.”

아론은 그들에게 이곳의 생활은 어떤지 물었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것 말고는 나쁘지 않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갈 수 있다면 떠나고 싶구먼.”

“하긴. 불편한 점이 많겠지.”

“그것도 그렇지만, 자네 얼굴도 봤으니까. 이제 이곳에 볼일은 없지.”

카슈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아! 자네에게 보답하는 것을 깜빡했구만.”

“그럼,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얼마든지! 너는 내 동생들의 은인이니 말이야.”

카슈는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했다.

“날 그린데란트에 데려가 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이내 아론의 요구를 듣게 되자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너를…… 그린데란트에?”

카슈가 다시 묻자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그 물음은 드워프로서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린데란트는 드워프들의 작은 왕국이 있는 곳. 그리고 인간들은 범접할 수 없는 곳이었다.

아론은 지금 그런 곳에 데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건…….”

아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태까지 아론에 대한 평가는 이제 정신을 좀 차렸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가 이룩한 능력이나 업적에 비하면 걸맞지 않은 평가였다.

이번에 아론이 해낸 일은 아이젠이 비밀리에 꾸몄던 계획을 알아차리고, 그들의 재보를 빼앗았으며, 특임대의 수장 격인 인물을 죽인 것이었다.

이 정도 성과는 아론에 대한 망나니 이미지가 벗겨지는 것은 물론이오, 가문 내에서의 입지도 훨씬 올라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론은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세력들의 추적을 피해 모습을 바꿔 활동했었다.

만약 자신의 정체가 들통나면 아이젠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에드먼스 가문 내에서 암약하는 세력도 아론에게 갖은 훼방을 놓을 게 눈에 선했다.

그러나, 아론은 이번 일로 느끼게 되었다. 모습을 바꾸고 활동하더라도 그게 언젠가는 들통이 날 것 같았다.

자신이 성장하고 일의 스케일을 키워나간다면 계속해서 그들의 추적을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특히, 에드먼스에서 아이젠과 내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지금. 아무리 자신이 가명을 쓰고 모습을 의태 해도 내통자가 건넨 정보로 충분히 자신을 특정할 수 있었다.

‘더 성장하기 위해선, 나를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아론이 떠올린 곳이 바로 그린데란트였다. 거기는 허락되지 않는 인간이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아론은 그 점들을 그들에게 말로 설명해 주었다.

“그렇구만…….”

카슈는 그의 말을 다 듣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답은 내릴 수 없다. 그린데란트에는 나 말고도 많은 드워프들이 살고 있으니까.”

카슈가 그렇게 말하자 뷰란트가 옆에서 슬픈 눈으로 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난 네가 동생들을 구해준 은혜를 잊지 않는다. 두 팔 걷고 나서서 다른 드워프들을 설득해 보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아론은 카슈가 얼마나 어려운 결정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드워프들이 인간과 멀어진 지 수 백 년. 그들은 어떠한 인간도 그린데란트 산맥에 들여보내지 않았었다.

그러나 카슈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론은 자신의 동생을 구해준 인간이니까. 그를 위해 안전한 장소를 제공해주고 싶었다.

“그럼 오늘 당장 떠나도록 하지. 이곳에도 오래 머물렀으니 말이야.”

“호위는 필요 없나?”

아론이 물어보았지만 카슈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긍지 높은 드워프 워리어라고. 동생 둘 정도는 내 손으로 지킬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바꿔서 갈 테니 안심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똑똑.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그 정체는 라엘이었다.

“아론 님. 공작님이 부르십니다.”

“알겠어. 바로 갈게.”

아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드워프들을 바라보았다.

“바로 떠날 건가?”

“그렇다. 다행히도 자네의 시녀가 준비를 모두 마쳐줬다고 하더군.”

“배웅하지 못해서 미안하네.”

“아니다. 다음에 자네가 원하는 대답을 들고서 찾아서 오지.”

아론은 라엘에게 그들의 안내를 맡기고는 공작의 서재로 향했다.

***

아론은 카이만에게 인사를 하고는 바로 본제에 들어갔다. 그는 꼭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아버지. 포드 공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맹약을 어긴 대가로 당분간 마나를 봉인 당한 채 구금되어 있다.”

공작의 무미건조한 그 말에 아론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대체 공작가와 무슨 사정이 있길래 그런 일을 당하신 거지?’

아론은 화가 났다. 특히, 이번 일이 자신을 구하느라 일어난 것이기에 포드에게 더욱 미안한 감정이 일었다.

“대체……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와 공작가 사이의 사연은 깊다. 아직 네게는 알려줄 수 없다.”

“설마, 서열을 더 올리라는 말입니까?”

“그래. 알고 싶다면 더 위로 올라오도록 해라. 넌 아직 5위에 불과하니 말이다.”

아론은 이를 악물었다.

‘이것조차도 빌어먹을 서열 때문에 이야기를 듣지 못하다니.’

하지만 그는 공작에게 반박할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강했고 젠슨을 이겼더라면 포드가 올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포드 공으로부터 네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요점만 말해줘서 생략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직접 너한테 들어보고 싶구나.”

공작의 요구에 아론은 헤카롯에서 있었던 일부터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드워프를 구했던 것과 제블린 길드를 습격한 것 등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아마 아이젠이 이렇게 물밑에서 움직이는 이유는 칠검의 복제에 속도를 올리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잠깐만. 칠검의 복제라고?”

포드가 그 부분에 대해 설명을 요구했다.

‘공작은 모르셨나?’

아론은 그 점이 의아했지만, 물음에 답해주었다.

“예. 그때 연회에서 대련했던 왕자가 들고 있는 검이 복제품이었습니다.”

아론의 대답을 들은 공작은 생각에 잠겼다.

바르트한이 비무에서 보여준 검이 바루나 소드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복제품일 줄이야.

자신의 눈을 속일 정도의 정교함이라니. 아이젠이 만든 복제품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걸 알아차리다니. 대단한 녀석이군.’

공작은 아론이 이걸 알아 오지 못했더라면 후에 큰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론의 이번 보고는 마음에 들었다.

“중요한 정보로군. 알려줘서 고맙다. 그 대가로 네가 원하는 것을 뭐든지 주겠다. 말해 보아라.”

그 말을 들은 아론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뭐든지…… 라고?’

아론은 공작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뭐든지라는 말 앞에는 ‘분수에 맞는 것이면’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만약 자기가 이룬 성과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 가차 없는 공작의 힐난이 쏟아질 것이었다.

그렇다고 보잘것없는 것을 요구해 버리면 배포가 작다고 자신에 관한 관심을 끌 수도 있었다.

즉, 적정한 수준의 보상을 요구하라는 말이었다.

물론 아론은 공작의 서재에 들어오기 전부터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그러면 잠시 집을 나가도 되겠습니까? 그 기간은…… 확실히 답을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론은 공작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공작가를 떠나는 것은 자기가 원한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여태까지 아론이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임무와 연관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그리고 아카데미를 졸업한 지금은 엄연한 에드먼스 가문의 정식 마법사였다. 그에게도 종종 가문이 맡은 일이 임무로 부여될 것이었다.

더욱이, 아론은 후계자 후보 중 하나였다. 그런 사람이 출가를 하겠다니.

“……뭐라고?”

공작은 아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론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거였다.

이번 일로 성장의 필요를 뼈저리게 느꼈었다. 포드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목숨도 부지하지 못했다는 걸 스스로가 잘 알았다.

그렇기에 아론은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아이젠이나 에드먼스 내부에서의 간섭도 받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론 덕분에 아이젠의 계략을 알게 되었으므로 이 정도 요구는 합당하다는 판단이었다.

“어째서냐?”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성장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공작가를 떠나겠다? 성장을 위해서라면 여기가 더 나을 텐데?”

공작의 그 말에 아론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힘만 있었더라면 가문 같은 거 상관 안 하고 언제든 떠났을 거다.’

하지만 마음으로만 생각할 뿐,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앞으로 아론은 공작과 가문으로부터 얻어내야 할 게 많았으니 말이다.

‘굳이 공작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겠지.’

아론은 공작에게 미리 생각해 둔 말을 꺼냈다.

“힘을 길러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는 형제들을 모두 이기고 가문을 집어삼킬 겁니다.”

그의 당돌한 답변에 공작은 만족한 듯 웃어 보였다.

“그래서, 공작가를 떠나면 어디로 갈 생각인 거냐? 왕국 내에서는 에드먼스 가문보다 안전한 곳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그린데란트 산맥입니다.”

“허.”

카이만은 짧게 탄식했다. 이것 또 예상치 못한 답변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공작도 이전에 마법 무구를 만들기 위해 드워프와 교류를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특유의 인간을 배척하는 분위기 때문에 성공하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정작 아론은 그런 것을 넘어서 직접 그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니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가능은 한가?”

“예. 아마 높은 확률로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갈 수만 있다면 최고의 장소를 구한 셈이군.”

공작은 한편으로 신기해하기까지 했다. 자신도 못 했던 일을 어떻게 이 녀석이 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역시 내 상상 이상이군.’

카이만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론을 바라보았다.

“알겠다. 네가 원한 것이니 그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너의 의무는 면해주도록 하마.”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너무 길어서는 안 된다. 너는 엄연히 공작가의 후계자 후보이니 말이다.”

“물론입니다.”

“만약 돌아왔을 때, 그에 맞는 성장이 없다면…… 알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말은 잘하는군.”

휙.

공작은 아론을 향해 정체 모를 무언가를 던졌다. 아론은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 확인했다.

“열쇠…… 입니까?”

“출가하는 자식에게 주는 아비의 선물이다. 공작가의 비전 서고를 출입할 수 있는 열쇠지.”

“비전 서고라고요?”

아론은 깜짝 놀랐다.

그곳은 공작가에 대대로 내려져 오는 비전 마법서들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 * *

현재 에드먼스 가문은 왕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대륙에서도 견줄 대상이 없을 정도로 정점에 선 세력이었다.

에드먼스의 힘은 곧 메도우드 왕국의 힘이었고, 이들과 대립할 수 있는 곳은 아이젠 왕국 정도는 되어야 가능했다.

그러나 역사의 태동기부터 에드먼스 가문이 우위를 점했던 것은 아니었다.

먼 옛날에는 잦은 전쟁으로 여러 가문들이 난립했었고, 각 가문은 자기들이 자랑하는 비전 마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전쟁에서 패하거나 내부 권력 다툼으로 쇠락하였고, 그 비전서의 대부분은 에드먼스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그곳을 에드먼스 가문의 비전 서고라고 불렀다.

아론도 그 존재를 어렴풋하게 들어봤을 뿐이었다.

‘가주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라고 알고 있는데…….’

공작은 지금 그런 장소의 출입 권한을 아론에게 허락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즉, 그곳에 보관하고 있는 비전 마법을 열람할 권한을 주겠다는 의미였다.

‘그 권한을 나에게?’

아론은 이해 가지 않았다.

자신에게 공작가를 떠날 기회를 주는 것도 모자라 비전 마법마저도 주겠다니.

‘지금까지 첫째랑 둘째만 그 기회를 받았다고 들었다.’

실력으로 자신보다 앞에 있는 셋째와 막내를 건너뛰고 바로 아론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꽤나 파격적이었다.

‘대체 무슨 의도로?’

아론은 머리를 팽팽 돌리기 시작했다. 과연 공작이 어떤 의중을 품고 자신에게 이런 기회를 준 것인지 궁금했다.

‘공작은 기분파가 아니다. 허투루 나에게 비전 서고에 대한 출입을 허락했을 리 없어.’

아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상당히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구나.”

공작은 흥미롭다는 듯이 아론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선물이라서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아버지께서 하시는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말해 보아라.”

“비전 마법을 배우게 되면 결과적으로 제 힘이 늘어나게 되겠지요. 아버지께서는 그런 저를 이용해서 내통자의 움직임을 살피시려고 그러시는 거 아닙니까?”

아론의 추측은 정답에 가까웠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힘의 균형을 어그러뜨리면 필시 나머지 사람들도 분주하게 움직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내통자가 꼬리 밟힐 일을 하면 찾아내겠다는 뜻이었다.

“잘 알고 있구나.”

공작은 만족했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 아론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괜찮은 보상이었다.

공작이 내통자를 찾아 싹을 잘라 버린다면 그것만큼 좋은 게 없었다. 그만큼 아론도 안전해지니 말이다.

그리고 비전 서고에 기록되어 있는 마법들은 모두 굉장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걸 배울 수 있으면 자신의 실력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공작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래도 선물이니까. 아론은 정중히 감사를 표했다.

“지금 바로 가도록 하지. 나는 내일부터 일이 있어서 공작가에 없을 예정이거든.”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섰다. 아론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비전 서고는 공작만이 아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여기다.”

어느 허름한 창고 안에는 또 다른 문이 하나 있었다.

아마 저 너머에 비전 서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론은 그 문에서 어떤 특별함도 느끼지 못했었다.

“비전 서고의 규칙을 설명하겠다. 안에서 한 권의 책만 가지고 나올 수 있다. 그 책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은 단 한 시간뿐이다.”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권만 가져올 수 있다는 제한은 합리적이었다. 다만 책을 고르는 데 한 시간만 준다는 것은 어떨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귀중한 기회일 테니 너도 허투루 날리고 싶진 않겠지.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도록 해라.”

공작은 아론의 물음을 기다렸다.

첫째랑 둘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었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공작은 어느 책을 골랐는지.

제한된 시간 안에 단 한 권의 책만 가지고 나올 수 있다 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공작 자신도 그의 아버지에게 비슷한 질문을 했었다.

“아버지는 책을 고르시고 그 마법을 배우신 뒤에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아론의 말에 공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질문이 나올 줄은 예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다른 녀석들과는 사고방식이 다르군.’

공작은 아론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나는 후회했었다. 그때는 서고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만을 찾으려고 했지. 하지만 정작 배우고 나니, 그 선택이 틀렸더군.”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때는 바보처럼 강력한 마법만 배우면 다 되는 건 줄 알았지. 나한테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말이야.”

아론은 왜 공작이 서두에 후회라는 말을 했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네 욕심을 좇지 말고, 정말로 너한테 필요한 거를 고르도록 하는 게 좋을 거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명심하겠습니다.”

공작은 아론의 말을 듣고 나서 마법으로 자신의 검지를 살짝 베어 피가 나오게 했다.

쿠구구-

그의 피가 묻자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 너머에는 새하얀 빛만 나오고 있어서 내부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기억해라. 한 시간이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바깥으로 소환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아론은 비전 서고로 들어갔다.

***

아론이 문을 통과할 때 잠깐 시야가 점멸했었다.

그는 눈을 떠서 비전 서고를 확인했다.

‘넓구나.’

물리적으로 문 너머에는 이런 공간이 있을 수 없었다.

‘다른 곳에 있는 공간이었군.’

아론은 서둘러 움직였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한 시간뿐.

‘느긋하게 둘러볼 시간은 없겠어.’

만약 책을 하나하나 다 빼서 확인한다면 하루를 줘도 부족할 정도였다.

혹시나 싶어 마법을 써 봤지만 발현이 되지 않았다. 책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법이 금지된 구역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론에게는 탐색 시간을 단축시켜 줄 도구가 있었다.

‘나한테는 상태창이 있으니까. 훨씬 빠르게 서고를 탐색할 수 있을 거야.’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제일 가까운 책장부터 훑기 시작했다.

책을 집중해서 바라보자 상태창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트레가 가문의 비전서 I」

· 번개를 다루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스트레가 가문의 비전이 담긴 마법서.

· 이 책을 이해하면 마법 ‘콜링 썬더’를 배울 수 있으며 전격계 마법의 숙련도가 올라간다.

· 6서클 이상의 성취가 있어야 원활한 습득이 가능하다.

「엔필드 가문의 비전서 V」

· 하늘과 별의 운행을 관찰하는 엔필드 가의 비전 마법 그 다섯 번째.

· 이 책을 이해하면 마법 ‘스텔라 카르타’를 배울 수 있다.

· 7서클 이상의 성취가 있어야 원활한 습득이 가능하다.

「클라우드 오르트의 기록」

· 고대의 현자 중 한 명인 클라우드 오르트가 사용한 마법 중 하나가 기록된 책.

· 이 책을 이해하면 마법 ‘엘리멘탈 버스트’를 배울 수 있다.

· 6서클 이상의 성취가 있어야 원활한 습득이 가능하다.

그것들을 본 아론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모두 다 탐이 나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서클 제한이 걸린 게 많네.’

대부분의 마법서들이 최소 6서클 혹은 7서클 이상의 성취를 요구했다.

또, 마법들 중에는 치명적인 대가를 필요로 하는 것들도 존재했었다.

‘상태창이 있으니 편하네.’

중요한 정보는 콕 집어서 알려주기 때문이었다.

만약 조금만 훑어보고 책을 골랐는데, 서클 제한 때문에 사용할 수 없거나 말도 안 되는 대가를 요구하는 책이었다면 곤란했을 것이다.

애써 비전 서고에 출입해서 책 하나를 가져 왔는데, 그건 꽝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공작이 그런 말을 했던 건가.’

아론은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한테 정말로 필요한 마법이란 무엇인가.’

아론은 떠오른 책들의 상태창을 살펴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자신과 가장 많이 대립하게 될 상대가 누구인가.

‘내가 칠검 중 두 개를 가지게 되었으니, 아이젠이겠지.’

가문 내에는 내통자가 있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아론이 철저히 하더라도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다만 그 시간이 좀 더 늦길 바라는 것이 아론의 마음이었다.

‘확실히 젠슨은 강했어.’

만약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서 그를 상대해야 했더라면 아론은 이길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젠슨 말고도 강한 아이젠의 기사는 여럿 존재할 것이다.

그들과 싸워서 이기려면 근접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생각해보니 되게 어불성설 같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기사와 마법사가 근접전을 치른다면 기사가 유리한 게 당연했다. 그래도 아론은 그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마법이 없을까 열심히 찾아보았다.

‘……없나?’

하지만 아론은 자신의 필요에 맞는 마법서를 찾지 못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약 5분 정도의 시간이 남았을 때. 아론은 마지막 책장에 도달했다.

‘여기에도 내가 원하는 것이 없다면…….’

차선책을 골라야 했다.

‘육체를 강화하는 마법이라도 골라야겠어.’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신중하게 마지막 책장을 살펴보았다.

‘이것도 아니야. 이건 필요 없어…… 앗.’

아론은 어느 책 앞에서 멈추었다.

「레이븐 가의 비전서」

· 시간을 조작하고 싶다는 초대 당주 레이븐 아스터의 염원이 담긴 책.

· 이 책을 이해하면 마법 ‘시간 가속’을 배울 수 있다.

· 4서클 이상의 성취가 있어야 원활한 습득이 가능하다.

‘이거다!’

아론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법을 사용하면 신체를 가속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기사가 내게 접근하더라도 그것보다 더 빨리 도망치거나 마법을 쓸 수 있으면 그만이지.’

아론은 이 마법의 용도가 여러 개 떠올랐다.

그는 그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때마침 시간이 다 되어 서고의 바깥으로 소환되었다.

“무엇을 골랐지?”

밖에서 기다리던 공작이 아론을 보며 물었다.

“레이븐 가의 비전서입니다.”

공작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비전서는 공작이 아론에게 맞겠다고 생각했던 선택지들 중에서 최고의 것 중 하나였다.

거기다가 제약도 따로 없었고 서클의 제한도 낮았으니 바로 실전에 쓰는 것도 가능했다.

‘특히 가속 마법은 전투에서 활용법이 무궁무진하지.’

공작은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다.

“괜찮은 선택이군. 그래도 내 조언이 도움이 된 모양이야.”

“아버지 덕분에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그 마법에 적응하는 것은 꽤 힘들 것이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아론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언제 떠날 것이냐?”

“드워프들이 오늘 출발했습니다. 그린데란트에 허락을 구하러요. 승낙이 떨어진다면 바로 떠날 것입니다.”

“그렇군.”

“그 전까진 이 비전 마법서를 체득하는 데 시간을 쏟을 생각입니다.”

공작은 아론이 기대되었다.

과연 그린데란트 산맥에서 귀환할 때는 얼마나 강해질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과연, 녀석이 말했던 것처럼 제 형제들을 이길 수 있을는지.’

물론 아론의 몸이 어디까지 버텨줄지는 걱정이 되었다. 이전에 칠성초를 줬긴 했다. 하지만 공작은 그게 병을 치료해 줄지에 대해서는 회의감이 들었다.

‘하지만 노력하는 모습은 보기 좋군.’

공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꽤 장기간 공작가를 떠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미리 인사 하마. 잘 다녀오거라.”

“예.”

아론은 공작의 말에 속으로 놀라워했다.

그는 웬만해선 이런 말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꽤 마음에 드신 모양이야.’

아론은 공작과 헤어져서 개인 수련실로 돌아갔다.

산맥으로 떠난 드워프로부터 연락이 있을 때까지, 아론은 오늘 고른 비전 마법서를 탐독할 계획이었다.

* * *

아론은 레이븐 가의 비전서를 선택한 이후로 그 책을 탐독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는 집중해서 공부했지만, 책장이 넘어가는 진도가 빠르지 않았다.

‘이 부분은 왜 이렇게 쓴 거야?’

아론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저명한 마법서를 읽을 때도 종종 그랬다. 책의 구절 중에서 모호한 표현을 써서 이해하기 어렵게 한 부분도 있었고, 비약도 많았다.

‘마법을 잘하는 것과 잘 가르치는 건 다른 영역이 확실하군.’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다. 아론은 머리를 끙끙 싸매면서 계속 책을 읽어 나갔다.

‘으으…… 조언을 좀 얻어 볼까.’

결국, 아론은 켄트를 불렀다.

“켄트. 너는 이 구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그는 자기 기준에서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부분을 물었다.

비전 마법의 유출과 관련해서 문제는 없었다. 어차피 책 전체를 읽지 않는 한 레이븐 가의 비전서를 이해하긴 어려웠다.

“조금 난해하네요. 저자는 왜 그렇게 썼던 걸까요.”

아론의 질문을 들은 켄트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켄트도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었다.

‘이 부분은 어려운 게 확실해.’

켄트는 아론과 같이 에드먼스 아카데미를 졸업한 수재였다. 그런 그도 설명에 난색을 표할 정도이니 책 자체가 어렵게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같이 고민해줘서 고마워. 나중에 모르는 거 생기면 또 불러도 되지?”

“언제든지 불러만 주십시오.”

켄트는 아론에게 인사하고는 그의 개인실을 떠났다.

그는 다시 비전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계속해서 읽으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될락 말락 했다.

다행히도 아론의 지능은 높은 편에 속했다. 그래서 몇 번만 읽어도 구절은 외울 수 있었다.

“신체의 시간을 제어해 고유한 속도를 올린다…… 올린다…….”

아론은 이해 가지 않는 구절을 계속해서 외우면서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책을 붙들고 씨름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아론은 각고의 노력 끝에 책 내용의 대부분을 익힐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과정이다.’

다른 마법서들과 다르게, 비전서는 정수를 흡수하는 과정이 필수였다.

비전 마법서들은 거진 대부분이 마법을 발현하는데 복잡한 술식을 요구했다.

그래서 책을 한번 읽었다고 해서 마법을 바로 사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정수를 흡수하게 되면 그 술식의 많은 부분을 생략할 수 있었다.

물론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한 방법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아론이 이를 악물고 이 책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거였다.

아론은 책에 손을 가져다 대고 마나를 불어 넣었다. 그러자 책도 그에 반응해 공명하기 시작했다.

책에 적혀 있던 수많은 정보들이 아론에게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기에 아론은 참고 버텼다.

이윽고 비전 마법서의 모든 내용이 아론에게 흘러들어왔다.

‘이게 시간 가속의 능력인가?’

책만 읽었을 때는 두루뭉술하게 느껴졌는데, 정수를 흡수하니 이제 그의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마법의 효과가 그려지고 있었다.

‘이 정도 위력이라면…… 웬만한 기사들과 호각으로 싸울 수 있겠어.’

아론은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는 머릿속에서 마법을 시뮬레이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사용해보고 싶은 열의가 끓어 올랐다.

‘한번 얼마나 빨라지는지 시험해볼까?’

아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방의 끝에 서서 거리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저기 문 앞까지 달린다면 얼마나 빠르게 도달할 수 있을까?’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평소의 속도로 전력 질주를 한다면 4초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절반으로 줄일 수 있으면 좋겠네.’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술식으로 시간 가속 마법을 시전했다. 그런 뒤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타다닥!

쿵!

1초가량 지났을까. 아론은 발을 떼자마자 멈출 수 없었고, 곧장 문에 몸이 전력으로 부딪히고 말았다.

“악!”

얼마나 세게 부딪혔는지 아론은 아파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를 수밖에 없었다. 그 광경을 누군가 봤더라면 어이가 없어서 웃었을 게 분명했다.

그는 통증이 가시고 나서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아이고. 마법 배우려다 사람 먼저 잡겠네.’

아론은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걸 느꼈다. 이론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과 실전에서의 사용은 별개의 분야였다.

‘처음이라 그런가…… 얼마나 마법을 발현시켜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네.’

아무래도 실제로 써먹을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았다.

‘일주일간 열심히 이론만 체득했다고 바로 완벽하게 쓰길 바라는 것도 요행이긴 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을 계속하는 계속하는 거였다.

***

그렇게 또 일주일이 흘렀다.

아론은 그 기간 동안 비전서에서 배운 시간 가속 마법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 결과, 이제는 어느 정도 실수를 줄이는 수준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

그러나 아론은 여전히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몸을 최대한 낮추어 신체의 무게 중심을 아래로 가게 했다.

이 자세는 라엘의 도움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녀가 마투술을 단련하면서 어느 책을 읽고 익힌 자세라고 했었다.

확실히 체술을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자세라 그런지 중심 잡기에 용이했다.

‘한 번 더.’

아론은 심기일전하기로 했다.

아론은 시간 가속을 시전하기 위해 체내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런 뒤, 가상의 적이 다가온다는 것을 상정하고 뒤로 도망치는 연습을 했다.

파밧!

아론이 일순 사라졌다. 이내 십 미터 뒤에서 그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타악!

그는 오른발을 세게 내디디면서 겨우 자세를 잡을 수 있었다. 그 반동으로 잠깐 휘청거렸지만, 이번에는 넘어지지 않았다.

‘거리도 오차 범위 이내야.’

이 정도로 속도를 낼 수 있다면 기사들과 근접전을 벌여도 허를 찌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론은 다시 시간 가속 마법을 사용해 이번에는 원래 자리로 이동했다.

파밧!

하지만 도착했을 때 발을 제대로 디디지 못해서 아론은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으윽.”

그는 넘어진 부위를 부여잡으며 일어섰다.

아직 이 마법을 안정적으로 쓸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단순히 빨리 이동하는 거로 끝나는 게 아니라, 움직인 직후에 다른 마법을 쓸 수 있어야 의미가 있었다.

이론을 완전히 익히고 일주일 만에 여기까지 도달한 것은 객관적으로 보면 놀라운 성취였다.

하지만 아론은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그린데란트 산맥으로 떠나기 전에 이 마법을 완숙 상태로 만들어 놓고 싶었다.

‘또다시 젠슨과 같은 상대를 만났을 때,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아직 넘어진 통증이 가시지 않았지만, 아론은 계속해서 마법을 연습했다.

***

또, 일주일이 지났다.

여전히 그린데란트로 향한 드워프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그래서 아론은 시간 가속 마법의 연습에 전념했다.

파밧!

휘익!

이제 그는 움직인 직후에 곧바로 마법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안정성을 확보한 상태였다.

똑똑.

그때, 아론의 개인 훈련장의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라엘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이웨카로부터 정보가 도착했습니다.”

아론은 꾸준히 이웨카 길드와 거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정보력은 최고였다. 아론이 요구하는 것들을 무리 없이 구해다 주었기 때문이었다.

오죽했으면 아론은 이 길드를 자기 휘하에 두면 어떨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걸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가진 돈이 부족했으므로 아론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라엘은 종이를 아론에게 건네주고는 다시 이곳을 나갔다.

그는 앉아서 말없이 그것을 읽어 나갔다.

시작은 근황 보고부터였다.

제블린의 본부를 습격하고 난 뒤로부터 아이젠은 특별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비록 아이젠은 임무를 주는 식으로 일을 처리했지만, 제블린과의 연결고리가 드러나면 낭패라고 판단해 조용히 기다리는 것 같았다.

‘하긴. 외부적으로 보면 슬럼가라고 해도 거기가 초토화되었으니 이목이 집중되고 있겠지.’

그리고 아론은 가문 내에 내통자가 있다고 확신했기에 다른 형제들도 조사해 달라고 이웨카에 부탁했었다.

하지만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다고만 나와 있었다.

‘아무래도 포탈을 빼돌렸다는 게 들통났으니 몸을 사리고 있는 거겠지.’

아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이 움직이기 적기라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가능하지가 않아.’

아직 드워프 형제들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어쩌면 나머지 드워프들을 설득하느라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상황을 알 수가 없으니 원.’

아론은 주머니에서 투명한 구슬 하나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이건 카슈가 떠나기 전에 준 물건이었다. 만약 설득에 성공한다면 이 구슬로 신호를 준다고 했었다.

아직 구슬에서 별다른 변화가 보이지 않았으니, 신호는 오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빨리 소식을 알게 되면 좋으련만.’

아론은 입맛을 다시며 구슬을 다시 넣으려고 했다.

우우웅!

‘어?’

그때, 구슬이 떨리며 안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게 신호를 보냈다는 건가?’

아론은 손에 마나를 머금고 구슬을 건드렸다. 그러자 창이 하나 떠올랐다.

‘이건…… 이들이 있는 위치인가?’

그의 눈에 보인 건 지도였다. 마치 지구에서 보았던 차량의 네비게이션과 같았다.

아론은 그 장소를 알고 있었다.

‘여기는 근처에 있는 숲이잖아.’

위치를 확인한 아론은 구슬을 집어넣었다.

드디어 집을 떠날 때가 되었다.

떠날 때 필요한 것들은 드워프들을 보내고 나서 준비를 마쳐 두었으므로, 아론은 라엘과 켄트에게 신호가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 * *

아론은 라엘과 켄트를 대동하고 구슬이 가리키는 위치로 이동했다.

그곳은 에드먼스 영지 내의 인적이 드문 숲이었다. 땅의 질도 별로고 몬스터도 나오지 않다 보니 나무를 캐는 사람 말고는 찾지 않는 곳이었다.

‘분명 여기가 맞는데…….’

아론은 구슬이 띄워준 지도에 맞게 찾아왔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 근처인가 싶어 움직이려고 할 때, 마나 반응이 느껴지며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람…… 은 아니고, 드워프군.’

그들은 모두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 수는 총 15명이었다.

아론은 그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뷰란트 형제들은 없었다.

아론이 그 점을 이상하게 여겨서 물어보려고 했다. 그 타이밍에 드워프 한 명이 아론에게 다가갔다.

그는 갈색의 머리에 수염 역시 똑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거기다가 다른 드워프들보다 훨씬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다.

‘실력은 6서클쯤 되려나.’

아론이 그에 대한 판단을 끝냈을 때, 드워프는 아론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마법의 수호자인 에드먼스 가문의 아론 님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저는 강철 부족의 드워프 워리어인 바칸입니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쪽이 격식을 차려 인사하니 아론도 그에 맞춰 응대해 주었다.

어차피 작위란 것도 인간들 사이에서나 통하는 것이었기에 아론은 존대하는 걸 개의치 않았다.

“제가 이번에 아론 님을 모시는 호위단의 단장 역할을 맡았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론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상황이 잘 이해 가지 않았다.

뷰란트 형제를 보냈는데 왜 이들이 온 것인지 설명이 필요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는 뷰란트 형제와 면식이 있을 뿐입니다.”

아론이 묻자 더 난처한 상황이 벌어졌다. 갑자기 바칸이 한쪽 무릎을 꿇는 게 아닌가.

“아론 님 덕분에 부족 전체가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들을 대표해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아니, 나는 뷰란트랑 카슈가 왜 안 왔냐고 물은 건데…….’

그는 이렇게 나오는 바칸이 이해되지 않았다.

“갑자기 그러시면 당황스럽습니다.”

“아론 님께서 구해주신 카슈와 뷰란트, 벨파는 저희 강철 부족장의 아들입니다,”

그 말을 들은 아론은 놀랐다.

‘그들이 부족장의 아들이라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뷰란트고 카슈고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간과 드워프의 교류가 끊긴 지금, 드워프들의 왕이 누구고 부족장이 누군지에 대한 정보는 대륙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론은 더 자세한 설명을 바칸에게 요구했다.

‘……그렇게 된 거였군.’

드워프들이 그린데란트 산맥에서 몬스터들을 밀어내고 세운 왕국이 바로 페리움 왕국이었다.

이들은 네 부족의 연합 국가였는데, 그중에서 강력한 세력이 강철 부족이었다.

‘그러면 그 세 명은 왕족의 아들이나 다름없었네.’

그렇다면 당연히 궁금한 점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드워프들 입장에서는 고귀한 신분인 그들이 왜 집을 나와 인간계에서 활동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바칸은 그 점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세 명이 나온 건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당연히 인간들이 가득한 대륙으로 나가는 걸 부족장이 허락할 리 없었고, 그들은 가출을 감행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부족장은 아들 세 명이 사라졌으니 황당할 뿐이었다, 경황이 없던 와중에 그들이 다시 돌아온 거였다.

그들 형제는 아론이라는 인간이 자신들을 구해줬다고 하면서 그린데란트에 입성을 요구하니, 부족장은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왜 카슈가 내 요구에 당당한 표정을 지었는지 이제 알 수 있게 됐네.’

그리고 그들의 이번 결정이 얼마나 무거운 건지도 잘 알게 되었다.

한번 대륙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들어간 것이니 또 나오기는 힘들 게 분명했다.

‘그 둘의 목숨을 구해준 대가를 이렇게 받게 되는군.’

아그니 소드를 새롭게 바꾸는 건 그들이 사는 곳에 가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언제 출발할 수 있습니까?”

“당장에라도 가능합니다.”

아론은 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다. 이쪽도 준비를 마친 지 오래니 짐만 챙겨서 이동하면 그만이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면 하루 정도 거리에 저희만 아는 장소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준비한 걸 타고 이틀이면 그린데란트로 가는 게 가능합니다.”

“이틀…… 이요?”

아론은 놀라서 되물었다.

거기까지 가는데 못해도 2주는 걸릴 거라고 예상하였다.

그런데 고작 이틀이라니.

어떤 방법인지는 가늠이 되지 않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걸 보니 가능은 한가보다.

아론은 당장 오늘 짐을 챙겨 출발하기로 했다.

***

아론이 켄트에게 그린데란트로 같이 갈 수 있겠냐고 묻자, 그는 화색을 띠며 반겼다.

그의 얼굴은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기대되는가?”

“물론이죠.”

마법사는 부류들은 기본적으로 탐구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다가갈 수 없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다.

드워프도 그중에 하나였다. 그들은 인간과의 접촉을 오래전부터 피해왔었기 때문이었다.

드워프를 보는 거로도 모자라 그들이 사는 나라에 갈 기회를 얻는 건 천운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카슈나 뷰란트 같은 드워프들을 직접 본 적이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실제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궁금했거든요.”

켄트는 그렇게 말하며 싱글벙글했다.

“아론 님 덕분에 살면서 드워프의 나라도 가보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뭘 그 정도 가지고.”

아론은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그 역시 켄트를 부하마냥 잘 부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편, 라엘은 별다른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전속 시녀로서 아론을 따라가는 게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챙길 것을 챙겨 다시 바칸이 알려준 곳으로 향했다.

거기에 도착하니 그들이 반겨주었다. 그들은 작은 상단과 그것을 호위하는 용병으로 위장한 상태였다.

“어서 오십시오.”

“이쪽은 제 시녀인 라엘이고, 여기는 같이 다니는 마법사 켄트입니다.”

아론은 두 사람을 소개해준 뒤 마차에 올라탔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하루 정도 계속해서 마차로 이동할 겁니다.”

바칸도 마차에 오르면서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알려주었다.

“출발하지!”

그가 말하자 일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론 님께 드릴 게 있습니다.”

마차가 움직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바칸은 상자를 하나 열어서 그 안에 든 것을 아론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저희 부족장님께서 아들을 구해주신 답례로 드리는 선물입니다.”

아래에는 둥근 받침대가 있었고, 그걸 들 수 있게 손잡이가 있었다.

‘드워프가 만든 거라 그런지 고급스러워 보이네.’

만드는 데 들어간 소재도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그리고 곳곳에 박혀 있는 마정석은 순도 높은 마나를 자랑하고 있었다.

“대가를 바라고 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받은 것을 물렸다. 예의상 한 번은 거절하는 거였다.

“아, 안 됩니다! 받아 주십시오!”

그러자 바칸은 허둥지둥 고개를 숙이며 아론에게 부탁했다.

“안 받으시겠다면, 제 목을 치시고 거절하셨으면 합니다!”

바칸의 섬뜩한 말에 아론은 혀를 내둘렀다.

‘얘네들은 원래 이런가?’

아론이 그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드워프는 은혜를 받았으면 절대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해야 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론은 그렇게 말하며 바칸이 주는 것을 받았다. 어차피 거절할 마음은 없었으니 말이다.

‘이게 대체 뭘까?’

그는 선물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 쓰임새가 전혀 가늠되지 않았다.

「고순도의 부화기」

상태창을 띄워보았지만 이름만 뜰 뿐이지, 설명은 적혀 있지 않았다.

결국 아론은 바칸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주신 선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이런 건 처음 봐서.”

“그것은 정령의 잠재력을 깨워주는 아티팩트입니다. 부족장님께서 직접 고르신 것이지요.”

정령의 잠재력을 깨워주는 것?

아론은 그게 잘 이해 가지 않았기에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드워프는 이런 아티팩트를 이용해 자신의 정령을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기구는 드워프만 쓰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아론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거기 받침대에 정령을 올려놓고 이걸 작동시키면 됩니다. 그러면 수일 내로 성장한 정령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바칸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론 님께서 받으신 건 원래라면 다음 부족장이 될 사람에게만 주는 겁니다. 하지만, 아론 님께서 태초의 정령과 계약하셨다고 하길래 부족장님도 고심 끝에 결정하셨다고 합니다.”

다른 드워프들이 쓰는 부화기와 달리 여기에 들어간 재료는 특상품이라고 하였다.

그 사실에 아론은 손에 든 선물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걸 나에게?’

드워프가 만든 부화기였다. 성능이 좋지 않을 리 없었으니 아론은 당장 이걸 써보고 싶었다.

퐁!

아론이 쿠브를 불러냈다. 녀석은 주위를 빙빙 돌다가 부화기를 발견하고는 받침대 위로 이동했다.

“오오…… 이것이 태초의 정령.”

바칸은 신성한 것을 마주한 것마냥 눈을 빛내며 쿠브를 보았다.

“네게 주는 선물이다. 마음에 드니?”

아론이 쿠브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쿠브는 박혀 있는 마정석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안에 있는 건 고순도의 정제된 마정석입니다. 정령들이 거기에 끌려 하는 건 당연한 거지요.”

바칸이 그것을 설명해 주었다.

“이걸 작동시키려면 정령을 올려 두고 마나를 불어 넣으면 됩니까?”

“예. 한번 해보시지요.”

아론은 쿠브를 바라보았다. 쿠브가 얌전히 받침대 위에 있었기 때문에 과정이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론이 부화기에 마나를 불어 넣자 마정석에서 빛이 흘러나와 쿠브를 감쌌다. 그는 빛을 받자 눈이 스르륵 감기더니 잠을 자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얼마나 있어야 합니까?”

“시간은 예측하기 힘듭니다. 이 부화기는 특상품이고, 대상이 태초의 정령인지라…… 그래도 며칠 내로 깨어날 겁니다.”

아론은 바칸의 설명을 듣고는 부화기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과연 쿠브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어떤 변화가 생길지 기대되었다.

***

다음 날 새벽, 아론이 탄 마차는 어느 비밀스러운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론은 마차에서 내린 뒤, 놀란 눈으로 앞에 있는 것을 보았다.

‘……비행선?’

그가 머릿속에 떠올린 문자 그대로의 것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 * *

비행선은 20세기 초반에 지구에서 만들어졌던 것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비단 아론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라엘과 켄트는 이 세계에서는 그 모양새를 처음 보았기에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걸 타고 그린데란트까지 이동할 겁니다.”

바칸은 자신들의 보물을 소개하는 듯이 자랑스럽게 얘기하였다.

“하늘을 나는 기구입니다. 페리움에서도 단 한 대밖에 없는 것이지요.”

“하늘을…… 난다고요?”

바칸의 설명에 켄트는 감탄을 하며 비행선을 바라보았다.

이 기구는 드워프가 지닌 모든 기술을 동원해서 만들어 낸 역작이었다.

‘단 한 대 존재하는 거를 우리에게 타게 해준다고?’

아론은 속으로 생각했다.

드워프들이 자신을 믿고 대우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론 일행은 드워프를 따라 비행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사람을 꽉 채운다면 100명 정도 들어갈 수준의 넓이였다. 푹신한 의자와 침대가 비치되어 있는 편의성도 엿보였다.

그것을 본 아론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지구 출신인 그에게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개념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 세계에도 이런 것을 만들어 내는 드워프들의 기술력이 경이로울 뿐이었다.

아론은 드워프에 대해서 평했던 어느 책의 구절이 떠올랐다.

그들의 기술은 인간과 비교해서 아득히 앞서 있기에, 만약 드워프의 수가 많았거나 탐욕스러웠다면 대륙은 그들에게 지배되었을 거라는 서술이 있었다.

당시 읽었을 때에는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기술을 마주하게 되니까 심히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바칸을 비롯한 나머지 드워프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비행선을 시동할 준비를 하였다.

비행선의 정중앙에 박혀 있는 마정석에서 마나가 흘러나오며 기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부우우-

이내 안정화되더니 천천히 공중으로 부상했다.

“이 큰 게 정말 떠오르네!”

켄트는 감탄하며 바깥을 보았다. 라엘도 역시 말이 없다뿐이지 신기해하는 것이 얼굴에 보였다.

‘마치 비행기를 처음 타는 아이들을 보는 거 같군.’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비행선의 내부를 살폈다.

과연 원리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동력은 중앙에 있는 거대한 마정석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눈으로 슥 보아도 질이 좋아 보였다.

‘대륙에서는 저 정도 마정석을 보기 힘들지.’

이 크기의 순수한 마정석을 발굴했다는 기록은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저 정도로 만들려면 무수한 마정석을 녹여서 새로 합성해야 가능할 것 같았다.

그린데란트 산맥에는 철이나 미스릴 같은 광물뿐만이 아니라 마정석도 많이 채굴되니 원석이든 합성이든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그리고, 인간이 마정석을 이용해 이렇게 정교하게 가공하는 건 힘들어 보였다.

‘드워프의 기술이랑 사람의 것은 비교하기 어렵지.’

그렇게 생각하니 궁금증이 생겼다. 드워프들의 마도공학은 과연 어디까지 발전했을지 알고 싶었다.

‘이들의 기술을 잘만 이용하면 삶의 질을 한층 더 올릴 수 있을 거 같은데…….’

지구인의 관점에서 본 중세 시대의 생활은 불편한 게 많았다.

어쩌면 드워프의 기술로 현대 생활을 엇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비행선이 안정적인 흐름을 탔는지 더 이상 기체가 흔들리지 않고 편안하게 날기 시작했다.

바칸은 기체 조작을 마무리하고 아론 일행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켄트가 질문 공세를 시작했다.

“바칸 님. 이건 어떻게 날 수 있는 건가요?”

그는 인간의 질문이 귀찮을 법하건만 이해할 수 있도록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바칸은 켄트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난 뒤,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렇게 큰 물체면 이륙하거나 착륙할 때, 사람들이 보고 놀라지 않을까요?”

아론은 그 점이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이 크기의 비행선이 하늘을 날아다니면 목격담이 하나 정도는 들려올 텐데 전혀 없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동 중일 때는 인비저블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비행선의 존재를 모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모종의 마법이 걸려 있는 데도 아론이 눈치채치 못할 정도이니, 드워프의 마도공학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모습을 바꿔주는 목걸이 아티팩트도 그랬었지.’

뷰란트로 변장한 좀도둑을 잡았을 때도 그랬다. 아론이 타고 난 마나 친화력으로 세심하게 보았는데도 마나 흐름을 거의 느끼지 못했었다.

당시에는 운에 가까운 위화감의 도움이 있었기에 의태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걸 타고 페리움 왕국까지 가는 겁니까?”

아론의 물음에 바칸은 고개를 저었다.

“산맥 초입 부근에 비행선 보관소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내려서 올라갈 예정입니다.”

“산맥에는 몬스터가 있지 않습니까? 그냥 타고 가는 게 안전할 거 같은데.”

“비행형 몬스터도 꽤 있어서 말이지요. 공중에서 전투하다간 위험할 수 있으니 오히려 내려서 올라가는 게 안전합니다.”

그의 대답에 아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비행선을 타고 산맥 초입까지 갈 수 있다면 시간 단축이 많이 되었다.

단 이틀이면 산맥까지 갈 수 있다니. 포탈을 제외하면 가장 빠른 운송 수단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을 산맥의 몬스터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저희들이 파견된 거니까요.”

“물론 믿습니다. 드워프 워리어들의 용맹함은 둘째가라 하면 서러울 정도니까요.”

바칸의 근거 있는 호언장담에 아론은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

이틀 뒤, 아론 일행이 탄 비행선은 무사히 산맥 초입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비행선을 보관하는 곳은 눈에 띄지 않는 지하에 있었다.

‘이 정도면 얼핏 둘러봐선 찾기 힘들겠어.’

주변을 둘러본 아론의 소감이었다.

“이제부터 그린데란트 산맥을 등반할 겁니다.”

바칸은 비행선을 무사히 정박시킨 뒤에 아론에게 말했다.

“혹시 다른 길은 없습니까?”

“이 지하에 저희 왕국까지 이어져 있는 통로가 있긴 하지만…….”

“그럼 거길 이용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걸 사용하면 안 되는 상황인 건가. 아론은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통로 크기가 드워프 정도만 지나다닐 수 있는 높이입니다. 그리고 마법도 봉인되어 있어서…… 기어가신다면야 가능은 하겠지만요.”

“마법이 안 된다면 거기는 목걸이로 의태 해서 지나가는 것도 불가능하겠군요.”

“그렇습니다.”

바칸의 설명을 들은 아론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뷰란트 형제도 이 통로를 타고 나온 거겠네.’

이제야 그들이 안전하게 그린데란트 산맥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 이해가 갔다.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산맥에서 호위를 위해 저희가 있는 거니까요.”

바칸은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했다.

드르르륵-

나머지 드워프들이 마차를 끌고 나왔다.

아론이 비행선을 타기 전에 탑승했던 것과는 생김새가 달랐다. 보통 마차는 목재로 만들 텐데, 이건 대부분이 철제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걸 타고 갈 겁니다.”

“말은 어딨습니까?”

“이 차는 말없이도 다닙니다.”

‘말이 끌지 않는다면 사실상 이건 자동차가 아닐까?’

아론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더 이상 마차가 아니라 차로 부르는 게 맞지 않을까 싶었다.

***

아론 일행이 탄 차는 빠른 속도로 그린데란트 산맥을 질주하고 있었다.

소문과 달리 몬스터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설령 보이더라도 그냥 치고 달려 나갔다.

도로의 상태는 울퉁불퉁했고 경사져 있었기에 차가 덜컹거릴 법도 하건만, 네 바퀴가 쉴 새 없이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충격을 최소화하고 있었다.

‘역시, 기술의 드워프……!’

아론은 말 없는 마차를 타면서 감탄했다.

바칸이 말하기를, 귀빈용 마차이기에 신경을 써서 만든 거라고 했었다.

“이렇게 빨리 가실 필요가 있습니까?”

켄트가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는 이 지역이 처음인지라 산맥도 구경하면서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최대한 밤이 되기 전에 도착해야 하거든요. 밤에는 몬스터들이 더 많아지고 흉포해져서 위험합니다.”

바칸의 설명에 아론도 공감했다.

야간에는 시야 확보가 어렵다. 게다가 정보도 제대로 없는 곳이 그린데란트 산맥이었다. 과연 얼마나 많은 몬스터가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어……! 아론 님!”

그때였다.

바칸이 마차의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거기는 부화기가 있는 곳이었다.

쿠브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슬슬 반응이 올 시간인가?’

바칸이 말하길 정확히는 몰라도 며칠은 걸릴 거라고 했었다.

화아악-

이윽고 부화기 안에서 빛이 터져 나와 쿠브의 모습을 가렸다.

잠시 후.

“쿠…… 브?”

아론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쿠브의 생김새가 달라졌다.

원래는 작은 돌 모양의 정령이었는데, 이제는 몸이 구분되었고 팔과 다리가 생겨나 있었다. 거기다가 크기도 이전보다 커진 것 같았다.

“안녕! 아론!”

쿠브는 그의 모습을 보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 아이가 인사를…….”

라엘과 켄트도 신기해서 쿠브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제는 간단한 말은 육성으로 할 수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고작 내 이름을 부르는 것도 힘들어했었는데 말이야.’

아론은 쿠브가 장족의 발전을 했다고 여겼다.

“태초의 정령을 본 것도 기적인데, 진화를 하는 장면까지 보게 되다니…….”

바칸은 감격한 모양인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이 아이는 이전까지는 에너지체에 가까운 정령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급 정령이라고 부를 수 있겠군요.”

아론도 쿠브가 한층 더 성장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말로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쿠브와 정신적인 연결이 강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나! 여기, 마음에 들어!”

쿠브는 마차 밖의 풍경을 보더니 소리쳤다. 녀석은 이내 팔을 벌리고는 빙그르르 돌며 자신의 기쁨을 표현했다.

‘여기는 질 좋은 광석들이 많으니, 대지의 정령인 쿠브가 좋아할 만도 하지.’

아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녀석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보았다.

“잠깐!”

그때, 쿠브는 갑자기 외치며 오른손을 들었다. 순간 아론은 자신의 눈빛이 잘못되었나 생각했다.

“왜, 왜 그래?”

“멈춰!”

아론은 쿠브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멈추라는 건 차 말고 더 있겠는가.

바칸도 그 말을 알아듣고 드워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끼이익-

마차가 멈추자 쿠브가 차를 통과해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일까요?”

“글쎄요…… 태초의 정령이 상당히 다급해 보이던데.”

아론도, 바칸도 영문을 몰라서 마차에 내렸다.

쿠브는 땅에 머리를 바싹 가져다 대고 있었다. 그는 땅의 진동을 느끼는 중이었다.

아론도 정신적 교감이 강화된 지금, 그 느낌을 같이 알 수 있었다.

“땅에서 진동이?”

다른 이들은 느끼지 못할 정도의 크기였다. 하지만 저 멀리서 거대한 진동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아론은 느꼈다.

잠시 후.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 진동, 몬스터입니다!”

“……전투 준비!”

아론이 외치자 바칸이 드워프들에게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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