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95화
“어휴. 동네가 흉흉해서… 사과 한 바구니에 얼마예요?”
“어서 오세요. 사과 한 바구니 드릴까요? 한 바구니에 5천 원이에요.”
미숙은 과일가게를 들어서며 혀끝을 차내는 손님의 혼잣말을 들었지만, 들은 체할 수 없었다.
문화재 지정 중인 명의 한의원과 대립하는 현수막이 내걸린 지 일주일.
그동안 해인동 시장 골목을 지나며 동네 주민들도, 다른 동네 주민들도 마주친 상인들에게 무슨 일이냐며 한 마디씩 묻고는 했다.
상인들은 그럴 때마다 최선을 다해 설명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순탄치 않았다.
“아이고. 아무리 그래도 동네에 좋은 일인데…… 개발이 밀려봐야 얼마나 밀리겠어요.”
“5대씩이나 이어 온 한옥 한의원이면 문화재 지정할 만도 하지, 그게 배 아파서 그래요?”
“동네 분위기까지 축 처지게 현수막은 왜 걸었어요?”
일주일이 지난 상인들은 더 이상 설명도 지친 듯,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사과 한 바구니를 사고 과일가게를 나서는 손님도 사과 봉지를 건네받고 과일가게 문을 나서면서 또 한마디를 했다.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시지들. 한동네에서 너무들 하시네.”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
이번에도 미숙은 못 들은 체했다.
“어서 오…….”
“장사 잘돼가?
“오늘도 한산하네요.”
정육점 안 사장이 과일가게에 들렀다.
“근데 정말 사장님도 몰라요? 현수막이요.”
“난들 알아. 진짜 모른다니까. 윤 사장도 몇 번씩 와서 물어보고. 그냥 주인 없으니까 상인회에서 내리라고 해.”
안 사장은 자신이 내건 현수막도 아닌데 몇 번씩 자신이 의심 받는 것이 귀찮은 눈치였다.
“현정 아빠도 그러고 싶은데 누가 걸었는지 확실치 않아서 상인회에서도 철거하기 힘든가 봐요.”
“에이. 그러니까 문화재 지정이라는 게 우리뿐 아니라 맘에 안 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라니까.”
안 사장은 괜히 자신들에게 화살이 오는 것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명의 한의원 분위기는 어때?”
명의 한의원과 마주하고 있는 과일가게이니, 미숙은 무슨 눈치라도 챘냐는 듯 물었다.
“어떻긴요. 저분들은 한결같으시죠. 가끔 와서 과일 사가시면서도 티도 안 내시고, 수고하시라고 볼 때마다 인사해 주시고.”
사실 미숙은 명의 한의원 직원들을 마주할 때마다 민망하고 불편했지만, 명의 한의원의 직원들은 짠 듯이 아무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아니, 불편할 만도 한데, 뻔뻔하다고 해야 하나…….”
“뻔뻔한 건 아니죠. 괜히 우리가 꼬투리 잡은 것 같고 그런 거지.”
“꼬투리는. 우리는 생존권이 걸렸는데, 지난번 박 이사 말 못 들었어?”
자신들의 편이 되어 준다고 했던 박상철을 떠올렸다.
“아, 박 이사한테 연락이나 해볼까?”
“박 이사요?”
“지난번 소고기 샀던 박 이사 말이야.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었는데, 잊고 있었네.”
안 사장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손을 흔들며 과일가게를 나섰다.
미숙은 박 이사라는 사람이 영 신뢰가 가지 않았는 데 안 사장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 * *
“후, 이걸 내가 해냈어야 되는 건데.”
사무실에 앉아 모니터 속 인터넷 기사를 보고 있던 박상철은 모니터 속에서 환히 웃고 있는 상도를 바라봤다.
자신보다 동생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여러모로 뛰어났던 동생이었다.
매번 시험을 봤다 하면 시에서 손에 꼽히는 등수를 받아 오던 상도는 어릴 때부터 조부나 한의사인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자연스럽게 한의사가 된 상도는 아버지의 한의원을 물려받았고, 공부에 특출나지 않았던 상도는 한의원 내부 일 전반을 맡아 했지만 사업적 수완도 뛰어났던 동생 상도는 한의원을 이제 기업만큼 몸을 불려놓았다.
매번 동생보다 조금 더 나은 사업을, 조금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 했던 노력은 눈에 띄지 않았다.
박재섭에게 처음 접촉을 시작했던 것도 상도가 아니었고, 상철이었지만 상철이 실패한 것을 상도는 해결한 것이었다.
그때, 상철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해인 정육점.
“아이고. 사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박 이사님, 안녕하세요.
“지난번 간담회는 잘 마치셨고요?”
이미 보고를 받아 간담회가 상철이 심어 놓은 사람들 때문에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아무것도 모른 척 안 사장에게 물었다.
-말도 마세요. 그날 투자자들이 보낸 사람인지,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어요.
안 사장도 박상철이 보낸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는 모양이었다.
“당연한 결과지요. 한쪽이 희생을 해야 얻어지는 결과인데 그게 쉬운가요. 제가 뭐랬습니까. 상인회뿐 아니라 분명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랬죠?”
-그리고 동네에 웬 반대 한다는 현수막이 난리인데…….
“반대 의사를 표하는 사람들이 강하게 나가고 있군요.”
-그렇긴 한데 손님들 눈치도 보이고 어떻게 빨리 해결할 방법은 없나요?
안 사장은 투자에 눈이 밝고 개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말을 하던 상철에게 자문을 구하려고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특별한 방법이…… 사실 쉽지는 않죠.”
-방법이 있기는 있나요?
“일을 키우는 겁니다. 시에서도 더 이상 문화재 지정을 진행할 엄두가 안 나게요.”
-일을 키워요?
“시청 앞만 가도 시위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모두 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죠. 해인동 상인분들도 목소리를 내셔야 합니다.”
-저희야 생업이 있는 사람들인데 시간을 빼서 시위를 하기가…….
“그럼 다른 방법도 있죠. 예를 들어 방송이라던지, 신문 기사라던지.”
박상철은 야비한 웃음을 지으며 안 사장에게 팁이라도 주겠다는 듯 전화 통화를 했다.
상철이 바라던 대로 이번에는 진짜, 원하는 결과를 제 손으로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정 실장님이 그러는 데 아까 방송국에서 온 PD 인터뷰 거절했다며?”
마감을 하고 나자, 강산이 기회를 놓친 건 아닌지 불안한 얼굴로 재마를 바라봤다.
“지금 결정된 것도 없이 밖에 문화재 지정 반대 현수막이 걸려 있는 데 섣부른 인터뷰는 안 돼. 서로 오해만 키울 뿐이야.”
“그만큼 서울 시민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거지.”
“관심 받겠다고 시장 상인분들의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 시에서도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부분 강구하고 있다니까 기다려 보자고.”
“진짜 실패를 경험해 보지 못해서 그런가, 네가 간절함이 없구나.”
강산은 온 기회를 걷어찼다는 듯, 혀끝을 내찼다.
“근데 그 박 PD인가 하는 사람이 우리 환자 섭외했다며?”
“김천에서 올라오시는 환자분이랑 환자 보호자인데 눈에 띄었나 봐.”
“와. 김천에서 올라오시면 방송 타실 만하네. 그럼 그분들 방송 나올 때 명의 한의원은 안 나오냐?”
“두 분 내용인데 왜 한의원이 방송에 나와?”
재마는 생각지도 못한 일을 강산이 이야기하자 의아한 얼굴이었다.
“서울까지 오는 김천의 효자. 스토리를 만들려면 명의 한의원이 빠질 수 없지. 너, 인터뷰는 안 했어도 환자 방송에 방송 협조는 확실히 해라. 그래야 한의원 홍보도 더 되지.”
재마는 관심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너 면허 시험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여기는 웬일이야?”
“면허 시험 관심도 없다니까. 괜히 집에서 눈치 보이니까 접수는 했다만. 나는 ‘환자를 읽는 한의사’ 너튜브에 뼈를 묻을 거다.”
“정말 너 진짜.”
강산이 방황할 때 너튜브 채널을 개설하며 그에게 책임자 역할을 맡겼지만, 면허 시험이 다가오며 편집 직원들을 두고 잠시 손을 떼라고 제안을 했던 재마였다.
물론 강산이 채널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을 준 만큼 끝까지 함께하면 좋겠지만, 그가 한의사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그의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냥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이왕이면 함께 6년간 수련을 했던 강산도 면허 시험에 붙어서 한의사의 길을 걸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 재마였다.
너튜브 채널 운영을 그가 맡는 것은 강산이 시험 결과에 따라 다시 결정해도 되는 일이었다.
“경현 씨가 물어볼 거 있다고 해서 왔어. 채널이 내가 없으면 안 돌아가잖냐.”
재마는 새로 뽑은 채널 직원인 경현이 질문할 것이 있다는 말에 옳다구나 한의원에 온 것이었다.
“이번 주부터는 내가 봉사팀에 다시 합류할 테니까 신경 쓸 생각일랑 말고.”
한참 시골 요양원 봉사에 참여를 못 했던 재마도 강산이 자리를 비운 만큼 다시 요양원 봉사팀에 참여를 할 생각이었다.
명의 한의원의 일도 많고, 문화재 지정도 확정이 되지 않았지만, 재마의 마음 한구석에는 시골 요양원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아, 이번에 나도 가려고 했는데, 이번에 홍천이란 말이야. 김 여사가 기다릴 텐데.”
“꿈속 요양원은 면허 붙고 가시죠.”
강산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듯, 울상을 지었다.
꿈속 요양원에 자신을 오매불망 아들을 기다리듯 자신을 기다리는 김 여사를 떠올리니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재마도 꿈속 요양원의 어르신을 생각하면 강산이 함께하는 것이 맞았지만, 그의 시험을 위해 신경 끄라는 듯 강산을 향해 냉정하게 말했다.
이번에도 시험에 낙방한다면 강산의 부모님 얼굴을 볼 낯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손이 모자를 텐데.”
“아냐. 이번에 정우가 지수랑 그 친구들 데리고 함께 가기로 했어.”
“지수?”
“응. 중고등학교 때 필수 봉사 시간 채워야 하잖아. 봉사할 겸 데려가기로 했나 봐.”
“처음에 한의원 근처도 오기 싫다던 애가 정우랑 친해졌나 보네.”
강산이 정우와 친해진 것 같다는 지수는 양반은 되지 못하는지 한의원 문을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그래. 지수. 어서 와.”
“친구가 농구 하다가 삐끗해서요.”
지수는 자신이 부축해서 함께 온 친구를 바라보며, 오늘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친구 때문에 왔다고 이야기를 했다.
“야, 지수야. 너 진료 시간 끝났는데도 계속 오는 거야?”
명의 한의원의 진료 마감은 7시.
7시가 훌쩍 지나 정 실장과 물리치료를 맡은 효주. 조무사 미정도 없으니 정상 진료는 아니었다.
진료 시간은 이미 끝났는데 아무렇지 않게 친구를 데려오는 지수를 보며 강산이 당황스럽다는 듯 물었다.
“정우 쌤이 친구 다치면 언제든지 데려오랬거든요.”
지수의 당당한 대답에 강산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애들 상대로 영업하네, 정우.”
처음에 환자 구경도 못 하겠다며 괴로워하던 정우가 뜻밖의 블루오션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학교 마치고 병원 시간 맞추기 쉽지 않으니까 그렇지. 봐줄 의사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원장인 재마도 정우의 진료 시간 외 진료에 별다른 반대 의사가 없다는 듯 웃으며 강산의 어깨를 꽉 쥐었다.
환자가 한의원을 제 발로 찾아왔는데, 진료를 안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원장님 뜻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
강산은 자신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