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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읽는 한의사-94화 (94/150)

환자를 읽는 한의사 94화

이간난 환자의 진료 순서에 환자와 보호자뿐 아니라 조금 전 재마에게 명함을 건넸던 박 PD가 함께 진료실로 들어오자 재마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원장님,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아까 인사드렸던 투데이 아침쇼 PD입니다.”

박 PD는 자신을 다시 기억해 달라는 듯, 인사부터 했다.

인터뷰를 거부하고 돌아갔을 줄 알았던 그가 아직까지 한의원에 있고 환자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을 생각을 하니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재마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진료 순서가…….”

“다른 게 아니라…… 제가 대기실에서 잠깐 대기하는 동안에 저희 방송에 딱 맞는 분을 섭외해서요.”

“섭외요?”

조금 전까지 명의 한의원과 해인동 골목 주민들의 갈등을 취재하겠다며 소개를 했던 박 PD가 태세를 전환해 이간난 환자와 그 보호자인 태천을 취재하겠다는 이유로 진료실로 들어온 것이었다.

“네. 하하. 저희 일이 일상생활에서 스토리가 될 만한 것을 찾는 것이다 보니 딱 알맞는 분이 눈에 들어오면 섭외부터 합니다. 딱 적합한 분을 대기실에서 만났고요.”

“허허. 내가 뭐 섭외대상이 될랑가 모르겠네여. 일단 이 양반이 하자니까 하는 거예여.”

태천은 자신이 방송에 타기 적합한 스토리의 주인공이라는 말에 민망해 머리를 긁적였다.

한평생 김천에만 지내 온 태천에게는 방송국에서 자신과 노모를 취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경상도 김천에서부터 서울 명의를 찾아오는 효자와 노모의 이야기! 저는 취재할 만한 소재라고 생각해서 제안을 드렸는데, 원장님이 조금만 협조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재마는 자신에게 촬영 섭외가 들어 온 것도 아니고, 먼 김천에서 서울로 올라온 태천과 노모를 찍겠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보호자인 태천의 얼굴은 기대감에 상기되어 있었다.

“저희 환자분께서 부담스럽지 않고 출연에 응하신다면 저야 괜찮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박 PD는 재마의 섭외가 불발된 상황에서 그의 진료실에 입성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명의 한의원에 대한 취재는 잠시 미뤄둬도, 효자 아들의 취재를 몇 차례 하며 재마와 얼굴을 먼저 트는 것이 긍정적인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럼, 평소에 진료하시는 대로 자연스럽게 해주시면 됩니다. 저는 없다고 생각하시고.”

박 PD는 일단 먼 타지에서 어머니의 진료를 온 태천과 노모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스케치를 따기 위해 휴대전화 카메라로 진료 과정을 찍을 예정이었다.

“원장님, 괜히 저희 때문에 수고스러우신 거 아닐랑가 모르겄네요.”

“괜찮습니다. 어르신, 그동안 건강 괜찮으셨어요?”

재마는 진료 의자에 앉는 간난을 바라보며 지난번 진료를 보고 간 후,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다.

간난은 대답 대신 고개를 그저 끄덕일 뿐이었다.

“그럼 진료 보겠습니다.”

박 PD는 자신을 의식하지 말라고 했지만, 평소 자신의 환자를 보는 능력으로 진료를 하는 재마는 그가 없다고 완전히 배제하고 진료를 볼 수는 없었다.

평소 같았다면 그저 동공을 읽는 것만으로도 진료가 가능하겠지만, 오늘은 진맥부터 잡고 환자의 눈을 읽었다.

간난의 상태는 지난번 재마를 찾아왔을 때보다 눈에 띄게 변해 있었다.

기력이 쇠해 전체적으로 어두운 섬광이 차지하고 있던 그녀의 팔다리의 좋지 않은 기운들이 많이 빠져 있었고, 뇌와 뇌에서부터 뻗어 나온 신경들을 막고 있어 혈류들이 정체되면서 생겼던 검은 섬광들이 사라진 상태였다.

자칫 늦었다가는 뇌에서 뻗어 나온 신경들이 막혀 큰 사달이 날 뻔했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점차 해결되고 있었다.

“환자분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네요. 제가 걱정했던 신경 부분도 원활히 제 기능을 하고 있고요.”

“아이고, 이게 다 원장님 덕분이죠.”

재마가 별다른 질문도 없이 진맥 하나로 환자의 몸을 스캔하듯 훑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박 PD만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지난번 썼던 약재들 그대로 한 번 더 드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큰 욕심을 내서 강한 약재를 쓰는 것이 고령의 환자분에게는 좋지 않습니다.”

“네네. 그럼요. 저희 엄니가 원장님이 주신 약 드시고, 설사 한번 없이 드셔서 그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태천은 머리를 조아리며 지난번 약재가 간난의 속을 한 번도 뒤집지 않고, 그녀가 온전히 흡수를 시켰다는 것에 감사하다며 인사를 했다.

“처치실로 옮겨서 뜸, 침 치료 하실 게요.”

“네.”

태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하자, 박 PD는 궁금한 것이 생긴 듯 손을 들었다.

원래 이렇게 취재를 나왔을 때는 질문도 삼가하고 환자하고 진료를 보는 의사의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그냥 지나갈 수 없는 모양이었다.

“진료는 끝이신 겁니까? 원장님?”

“네.”

“아니, 환자분은 자신의 몸 상태며, 약을 드시고 난 후 경과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도 안 하셨는데요?”

약을 먹고 몸소 느낀 환자가 의사에게 몸 상태가 어떤지 피드백을 주고받아야 이번 진료에 적당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 생각을 했던 박 PD는 자신이 틀렸냐는 듯 물었다.

“아이고. PD 양반, 아직 눈치 못 채셨나 보네.”

“네?”

“우리 엄니, 말은 들어도 대답을 못 하십니다.”

“네?”

박 PD는 조금 전까지 고개만 끄덕이고 희미하게 웃을 뿐 단 한 번도 대답을 성케 하지 못한 이간난을 바라보았다.

“김천서 여까지 올라오는 이유가 다 있지 않겄습니까. 우리 엄니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진료를 봐주시니까 오는 거지요.”

“그래도 환자 상태가 어떤지, 약을 먹고 어떤 상태인지 이야기를 해주셔야 원장님도 그에 따른 처방을 내려주시지 않습니까?”

“우리 엄니가 말을 한마디도 안 해도 아까 듣지 않으셨습니까, 약을 드시고 지금 상태가 어떤지 진맥 짚으시고 상태에 대해 말해주시니까.”

“아니…… 그래도…….”

“PD 양반, 원장님 우리 아니어도 환자도 많고, 우리 엄니도 처치실 가서 뜸 치료 더 받으셔야 한다니까 나가서 이야기합시다.”

태천은 재마의 진료 과정을 보고 의아함을 품어 계속해서 질문만 늘어놓을 기세인 박 PD의 손을 잡아끌며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원장님은 진료허시게 두고, 얼릉 나랑 이야기해여. 내가 섭외대상 아니에여?”

박 PD 앞에서 애써 표준어를 구사하려던 태천은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선생님, 멀리서 진료 보러 오셨는데 궁금하신 것도 더 있으실 거고…….”

“아이고, 우리는 이재마 원장님이 봐주신 진료면 충분헙니다.”

“진짜요?”

“엄니도 만족하시고…….”

태천은 처시실 안쪽으로 들어간 노모 쪽을 바라봤다.

“아무리 용한 의원이라 해서 모시고 가도 말 한마디 못 허시는 어머니 상태를 이렇게 상세하게 들어본 적이 없어여. 그야말로 엄니 몸을 훤히 보는 것 같이 상태를 봐주시니 거리가 멀다 해도 안 올 수 있습니까.”

자식된 도리로 몸이 성치 않은 어머니를 위해 먼 곳을 오늘 것이 큰 문제가 아니란 것처럼 말하는 태천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심임을 느낀 박 PD였다.

“그럼 우리 이야기가 방송으로 만들어지는 거예요?”

“네. 제가 오늘 기본적인 취재는 했으니까, 프로그램 작가랑 상의해서 연락 드리고 김천까지 한번 가겠습니다.”

“김천까지요?”

“네.”

“하이고. 먼데…….”

“멀어도 저희 일이니까요.”

박 PD는 전국 방방곡곡을 옮겨 다니는 것이 제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명의 한의원을 찾아와 원하던 인터뷰는 얻지 못했지만, 뜻밖에 새로운 소재를 찾아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명의 한의원을 오기 전에는 해인동과 명의 한의원과의 관계에 대해 호기심이 갔다면 이제는 이재마 원장에 대한 호기심이 커져 있었다.

* * *

“대표님, 이쪽입니다. 이쪽 카메라 보시고 포즈 한번 취해주시죠.”

박상도를 향해 기자는 자신 쪽 카메라를 봐달라며 외쳤다.

이번에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된 ‘병합경훈’을 손에 쥔 박상도는 자신을 부른 기자 쪽을 향해 몸을 틀어 ‘병합경훈’과 자신이 잘 보이도록 포즈를 취했다.

“대표님, 이쪽도 봐주시죠!”

여기저기에서 박상도를 부르며 플래시를 터뜨렸다.

“이번에 ‘병합경훈’을 대중에 공개하시고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는데요.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다가 공개를 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사실 저희 집안 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고조부이신 박시원 선생님의 ‘병합경훈’이 과연 대중에 공개되는 것이 옳은 일일지요. 사실 진품 여부에 관련된 상반된 의견도 있었지만, 저희는 몇 번의 전문가의 진품 평가를 받고 의견이 다른 집안 구성원들과 수차례의 회의 끝에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이로써 4대째 한의사라는 직업을 이어 오고 있는 정한 한방병원의 가치가 진실로 판명되었는데요.”

“하하. 언제는 저희 한방병원이 진실되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기자의 질문에 박상도는 미소를 지으며 너털웃음을 지었지만, 그 뒤에서 지켜보는 정 실장은 진행자를 향해 눈치를 줬다.

적당히 질문을 끊으라는 뜻이었다.

“질문은 여기까지 받겠습니다. 오늘 참석해 주신 기자님들께…….”

“질문이 더 있습니다!”

“질문이요!”

“요즘 5대째 이어오는 해인동에 명의 한의원이 뜨고 있습니다. 정한 한방병원의 시초가 되는 곳에 대해 대표님이 직접 말씀해 주시죠!”

“대표님의 아버님이신 박정한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질문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진행자의 말에 기자들은 손을 들고 남은 질문을 하기 위해 소리를 쳤지만, 진행자는 질문을 받지 않았고 박상도도 자리에서 일어나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갔다.

“대표님, 기자들이 질문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어쩌죠?”

“적당히 질문지 받아서 서면으로 대답하겠다고 해. 그리고 정한 한방병원의 시초? 그 부분도 적당히 아버지 사진이 있는 한의원 사진으로 대체해.”

“내용은 어떻게…….”

“뭘 물어. 정 실장이 적당히 스토리를 만들어야지.”

박상도는 조금 전 기자회견장에서의 태도와는 다르게 기분이 상한 티를 내었다.

“공개하기 싫다는 물건 억지로 뺏어다가 대중에 공개해, 기자회견 해. 적당히들을 알아야지. 무엇이든 하나를 내어주면 적당히를 모른다니까.”

박시원 선생의 정통후손인 박재섭을 몇 년간 설득하고, 큰돈을 들여 ‘병합경훈’을 손에 얻자마자 공개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정한 한방병원의 진실을 파내기 위해 질문을 쏟아내는 기자들의 태도에 박상도는 기분이 상한 것이었다.

더구나 명의 한의원인지 뭔지의 인지도가 점점 높아지며 몇 대째 이어오는 비슷한 스토리로 유명세를 탄 정한 한방병원과 비교가 되고 있었다.

진작에 형인 상철과 홍보팀장을 맡긴 박연아에게 해결을 하도록 지시했지만 눈에 띌 만한 결과를 내지 못했다.

상도는 무엇인가 해결책을 강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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