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읽는 한의사 96화
“자자, 각자 받은 종이 잘 보시고.”
안 사장은 해인동 시장 골목의 한 식당에서 자신과 뜻을 함께할 만한 상인들을 모아 놓고 준비한 자료를 나눠줬다.
“내일 방송국에서 인터뷰 하러 온다니까 그때까지 잘 보시고, 인터뷰 잘합시다.”
“근데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거예요?”
안 사장이 준비한 인터뷰 내용을 확인한 상인들은 별로 내키지 않는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손님들은 지나다니면서 한마디씩 하는 데 일만 키우는 거 아닌지 모르겄네.”
상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철물점 박 사장이 싫은 티를 완강히 내었다.
“일을 키워야 시청에서도 아, 해인동 상인들은 쉽게 보면 안 되겠구나. 하지요. 우리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으니 이렇게 된 거 아니에요.”
안 사장은 싫은 내색을 보이는 사람들의 종이를 다시 뺏어갔다.
“싫은 사람들은 내일 방송국에서 와도 그냥 장사나 해요. 괜히 나와서 문화재 지정에 별생각 없다. 되면 좋고, 안 돼도 좋고 이런 식으로 말하지 말고.”
안 사장은 박상철에게 들은 대로 방송국에 제보를 해서 내일 인터뷰만 잘하면 일이 쉽게 풀리겠구나 싶었는데 상인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기분이 상했다.
“인터뷰 내용 파악 잘하고, 내일 각자 인터뷰 잘해요. 어차피 무슨 말 했는지는 방송으로 다 확인되니까.”
안 사장의 말에 상인들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나는 내가 방송 탈 줄 몰랐는데, 내일 말 잘하려나 모르겠네.”
“당신이 말 잘할 수 있겠어? 못하겠으면 내가 하고.”
소고깃집 내외는 서로 인터뷰를 하겠다며 티격태격하는 모습이었다.
종이를 받아 든 미숙은 고민만 깊어졌다.
분명 남편인 윤 사장은 일을 이렇게 키우는 것을 반대할 텐데 정육점 안 사장은 일을 키우고 있었다.
“왜 한숨만 내쉬고 있어. 자기도 별로 할 생각 없어?”
안 사장은 할 생각 없음 인터뷰 용지를 다시 내놓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네. 저는 이렇게까지는 못하겠네요. 상인회에서도 일을 해결하려고 시청이랑 계속 조율 중이라던데.”
“상인회에서 일을 제대로 못 하니까 내가 나서는 거지. 생각 없음 말어.”
안 사장은 미숙의 손에 들린 종이를 훽 하니 뺏어갔다.
* * *
다음 날.
해인동 시장 골목.
아침부터 카메라를 대동한 방송국 차량이 해인동 시장 골목 앞에 떡하니 자리 잡았다.
동네 사람들은 그러잖아도 요즘 시장 골목과 명의 한의원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는데 무슨 일인가 하며 궁금한지, 걸을 때 목을 쭉 빼고 카메라가 있는 곳을 쳐다봤다.
“자그마치 이 자리에서 20년을 장사했습니다. 그리고 허름한 가게에서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더우면 더운 대로 열악하게 장사를 해도 버텼고요. 요 앞 길건너 1, 2지구만 해도 번듯한 아파트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데 해인동 시장건물도 얼른 새 단장을 해야 대형할인마트라든가, 백화점 마트에 손님들을 안 뺏기거든요.”
안 사장은 목소리를 높여 인터뷰를 했다.
평소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고, 명의 한의원의 역사만 대단한 듯이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서운했던 감정을 인터뷰에서 모두 쏟아냈다.
“문화재, 보기에는 좋죠. 근데 내 가게까지 문화재 보호 구역에 묶여 언제까지 피해를 볼 수는 없잖아요? 저희의 동의는 없이 문화재 지정 추진을 하는 시청에도 불만이 많고, 20년 얼굴 맞대고 지내던 명의 한의원에도 서운한 감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그렇죠. 사장님 마음 백번 이해합니다.”
인터뷰를 나온 작가며, PD 하물며 카메라맨까지 안 사장의 마음을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구. 이제야 내 말을 이해해 주는 분들이 계시네. 그동안 얼마나 억울했는데…….”
“마음고생 많으셨겠어요. 당연히 화나죠. 내 생사, 내 가게가 걸린 일인데. 누가 개발되어 새 상가 들어가는 걸 미뤄가면서 앞집 잘나가는 것만 지켜보겠어요. 사장님 마음 백번 이해합니다.”
담당 PD는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맨에게 인터뷰 영상이 잘 담겼는지, 눈짓으로 확인한 PD는 이상 없다는 사인을 받자, 다음 가게로 옮길 준비를 했다.
“오늘 인터뷰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가 감사하죠. 근데 방송은 언제 나와요?”
안 사장은 다시 한번 손거울을 보며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했다.
인생 첫 방송인데 이왕이면 예쁘게 보이고 싶어, 어제 파마도 다시 한 안 사장이었다.
“방송은 다음 주 월요일에 잡혀 있습니다.”
“그렇게 오래 걸려요? 이왕이면 얼른 방송 탔으면 좋겠는데…….”
명의 한의원이 언제 문화재 지정이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 사장은 한시라도 급히 방송이 송출됐으면 좋겠다는 반응이었다.
“저희 편집팀 스케줄도 있고, 이런 사회문제 같은 내용은 보통 월요일에 보도합니다.”
“그렇구나. 아무튼 PD 선생님, 남은 인터뷰 잘 부탁드리고 편집도 잘, 아주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제 얼굴도 좀 뽀샤시 하게…….”
안 사장은 해인동 시장 골목의 상황을 잘 전달해 달라면서 PD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PD와 작가는 누가 봐도 어제 미용실을 다녀온 듯한 뽀글 머리에 얼굴도 뽀샤시 하게 잘해달라고 부탁을 안 사장을 바라보며 얼떨떨한 미소를 지었다.
“네. 그럼 다음은 어디로 가면…….”
“저쪽, 이 골목 끝으로 가면 소고기 구이집 있어요. 거기에서 아마 사장 내외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요, 뭘. 선생님들이 앞으로 수고해 주셔야지.”
안 사장은 정육점 밖까지 나와서 방송국 스탭들을 배웅했다.
손까지 흔들며 PD와 작가, 카메라맨이 소고기 구이집을 잘 찾아가는지 확인한 후에야 안 사장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근데 PD님.”
“응? 왜.”
“그런데 시장 골목이랑 지금 문제 있는 한의원이 너튜브에서 핫한 한의원이던데…….”
“그래?”
작가는 오늘 촬영을 오기 전 명의 한의원에 대해 조사하다가 너튜브에서 핫한 채널 중 하나인 ‘환자를 읽는 한의사’ 채널이라는 걸 알았다.
“이거 방송 나가면 한바탕 난리 날 것 같긴해요.”
“한의원에는 연락해 봤어?”
“네. 몇 번 인터뷰 요청 전화했는데 다 거절했어요. 그리고 작가 동기한테 물어보니 타 방송국에서도 인터뷰 요청 몇 번 했었는데 문화재 지정 문제에 대한 인터뷰는 안 하기로 했대요.”
“왜?”
“뭐, 시장 골목이랑 불필요한 오해를 방지하는 차원이라나?”
“뭐? 오해 방지?”
“네. 한쪽에서는 일 벌이려고 제보하고, 한쪽에서는 대응을 안 하겠다고 하고.”
“우리 쪽에서 인터뷰하고 방송 나갈 거란 이야기도 했어?”
PD는 무대응을 하겠다는 명의 한의원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안경을 고쳐 쓰며 되물었다.
“네. 물론 했죠. 그래도 안 한대요.”
“허, 무슨 깡이야.”
“한쪽 인터뷰만으로도 괜찮을까요?”
“괜찮으려면 어쩔 수 없지. 악마의 편집이라도 하는 수밖에.”
PD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명의 한의원 쪽을 바라봤다.
이미 정육점 사장에게서 악마의 편집을 하려면 충분한 그림이 적당히 나왔다.
안 사장이 소개한 점포 몇 군데만 돌면 그림이 꽤 그럴싸하게 나올 것 같았다.
“무대응에는 대응을 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지.”
PD는 피식 웃으며 다음 인터뷰 장소로 들어섰다.
PD와 작가가 한참을 밖에서 이야기하다가 소고기 구이집으로 잘 들어가는 걸 확인한 안 사장은 만족스러운 듯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뽀글뽀글 잘 말린 머리를 매만지며 거울을 보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이제 박 이사의 말대로 방송만 잘 탄다면 해인동 시장 골목의 억울한 사정을 전국적으로 퍼뜨릴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보다 자신들보다 공감해 주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 시청에서도 잠자코 있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럼 이제, 장사 준비를 해볼까나.”
오래간만에 기분이 좋은 안 사장은 콧노래를 부르며 목장갑을 끼고 냉동창고로 들어갔다.
요즘 매출이 줄었지만 기분도 좋은 김에 고기 손질을 한껏 해볼 생각이었다.
“어디 보자아. 어디부터 손을 봐야 하나…….”
20년을 정육점을 하며, 웬만한 장정만큼이나 힘을 쓰던 안 사장은 예전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아직 무거운 고깃덩어리도 번쩍번쩍 들고는 했다.
“여기 있네. 오늘은 이것부터 손질해야겠다.”
돼지 한 마리를 들여와 반 마리씩 소분해 놨던 걸 발견한 안 사장은 평소와 다름없이 어깨에 번쩍 들어 올리려 할 때였다.
“으악. 윽!”
평소에 어깨가 좋지 못했던 안 사장은 꾸준히 명의 한의원을 찾았지만, 요즘 분위기도 좋지 않고 마음이 불편해 한의원에 가서 진료를 받은 지 꽤 된 상황이었다.
어깨 쪽부터 저릿한 것 같아 잠시 올렸던 고깃덩어리를 내려놓으려 할 때 허리 쪽이 날카롭게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억.”
정말 억 소리만 내고 나서는 신음도 내기 힘들 정도로 온몸이 마비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아. 하. 내…… 내…… 허리.”
허리만 아플 뿐 아니라 발목까지 힘이 쭉 빠져 쓰러진 안 사장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꼼짝을 하지 못했다.
“으…… 으…….”
안 사장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 덜덜 떨기 시작했다.
아무리 장갑을 두 개씩 끼고 오리털 점퍼를 껴입고 냉동창고에 들어왔다고 하더라도 잠시 들어왔다가 필요한 고기를 들고 나가지 않고 한참을 차가운 냉골에 누워 있는 것은 또 다른 상황이었다.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점퍼 주머니 안쪽을 뒤졌지만 양쪽 주머니 안쪽 모두 휴대전화가 없었다.
잠깐 들어올 생각에 휴대전화는 계산대에 올려둔 것이 생각났다.
“어…… 어떡해…….”
안 사장은 이대로 냉동창고에서 얼어 죽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움직여 보려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마음처럼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손힘으로 기어나가 보려 했지만, 꽁꽁 언 바닥을 손힘으로만 밀고 나가기 또한 쉽지 않았다.
“이…… 이게 뭔 일이야…….”
얼어 죽기 일보 직전인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었지만, 이미 그녀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흘러내린 눈물은 얼굴에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형님, 형님. 어디 갔어?”
어제 안 사장의 머리를 곱게 파마를 시켜준 미용실 정 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 여기야. 여기…….”
안 사장은 있는 힘껏 소리를 내 밖에 찾아온 정 여사를 부를 생각이었지만, 이미 추워서 힘이 다 빠져 버렸는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네. 조금 전에 인터뷰한 것 같은데 다음 집까지 따라간 건가.”
정육점을 둘러보던 정 여사가 보이지 않는 안 사장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나설 때였다. 밖에서 정 여사가 아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안 사장님 안 계세요? 아, 우리 한의원에서 점심에 소고깃국 좀 끓여 먹으려고 고기 사러 왔는데.”
안 사장과 친한 티를 팍팍 내던 한의원의 강산의 목소리였다.
안 사장은 자신이 이곳에 있는걸 강산에게 알리기라도 한다면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