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주운과 하기
약속한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하기는 전장을 둘러보았다.
딱히 전투라고 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일방적인 학살 내지는 만찬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수십 마리의 흄들이 전장을 날아다니며 마음껏 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족히 사백에 이르는 대단위 부대이긴 했지만 하기의 친위대와 조우했다는 것이 불행이었다.
하기는 몇 마리의 흄들에 둘러싸여 전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연기는 마치 그림이나 무생물처럼 고정된 채 작은 뭉클거림조차 없었다. 인간으로 치자면 마치 표정 없는 얼굴 같다고나 할까?
그의 고요함과 대조적으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흄들은 당장이라도 전장에 뛰어들고 싶어 안달이 난 듯 격정적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집채만 하게 부풀어 올랐다가 회오리치며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자아냈다. 덕분에 그들에 둘러싸여 있는 하기의 존재가 오히려 왜소해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당장 전장에 뛰어들어 마구 식탐을 과시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왜소해 보이는 존재, 하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있어 하기라는 존재는 본능을 넘어선 공포였고, 영혼에 각인된 굴종의 대상이었다.
태초에는 그들 하나하나가 하기와 함께 이 땅의 혼돈을 지배하던 절대자들이었으며, 함께 레이스를 펼치던 경쟁자들이었다.
그중 살아남은 백오십여 마리의 흄 중 가장 강대한 넷이 바로 이 네 마리의 짐승들이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소멸하여 하기의 일부가 되었거나 이들의 일부가 되었다. 이 짐승들은 주체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하기에 대한 복종의 맹세를 영혼에 새긴 덕에 그와 함께 영원불멸의 존재로 이 땅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하기에 대한 복종은, 본능은 물론 스스로의 의지조차 뛰어넘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하기와 네 마리의 짐승, 사십 마리의 친위대, 그 외 수 억에 이르는 하등한 마물들의 서열 관계는 수백 년간 변화 없이 지켜져 왔다.
그러나 최근 이 땅에 많은 변화가 발생했다.
그 시초는 퓨콤뜨리아리트의 방문이었다. 그는 마계 군주 벨제뷰트의 대사로서 당당히 이 땅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기를 풀풀 풍기며 고압적인 자세로 하기를 내려다보며 퓨콤뜨리아리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로부터 이 땅은 마계의 절대 군주이며, 만 마의 주인이시며, 서열 1위의 마왕이신 벨제뷰트 님의 영지로 복속될 것이다. 그 이름 아래 무릎 꿇어 찬양할지니, 내 그대와 그대의 종속들이 벨제뷰트 님의 영광스러운 노예로서 굳건하고도 당당하게 이 땅에 설 수 있음을 선언하노라. 또한 나 퓨콤뜨리아리트는 그분의 영광스런 대사로서 그대들 위에 군림하여 이 땅이 마계의 전초 기지로서 강건함을 가질 때까지…….”
외우기도 힘든 이름을 가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사실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또 주의 깊게 듣기에는 그 설교가 너무나도 장황했다. 어느 순간부터 하기의 신경은 오직 자신과 자신의 종속들 그리고 퓨콤뜨리아리트의 전력 비교에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론은 ‘이긴다’였다. 결론이 내려진 순간부터 퓨콤뜨리아리트는 태초 이래로 맛보지 못한 가장 먹음직스러운 마기 덩어리로 전락해 버렸다.
그 결론에 따라 하기는 다시 생각했다.
이 땅은 마계와는 계(界)를 달리하는 독립 지역이다. 그런데 어디라고 덩그러니 혼자 나타나 이 땅의 지배자를 핍박한단 말인가? 스스로 존재한 이후로 주신 아디조차 두려워해 본 적 없는 이 하기에게 노예가 되어라? 수백 년간 피로써 이 땅을 일구는 동안 손 한번 거든 적이 없는 벨제뷰트가 감히 말 한마디로 이 땅을 가져가겠다?
이건 힘의 우열 이전에 이 땅에 속한 자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아, 물론 힘의 우열에 대한 계산이 서고 나서의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전력에 대한 분석을 마친 하기는 비로소 분노했다.
전 친위대를 몰아, 네 마리의 짐승을 한 번에 투입해 퓨콤뜨리아리트를 응징했다. 유사 이래 있어 본 적도 없는 대규모 합공이었고, 거기에 하기 자신마저 가세하자 퓨콤뜨리아리트라는 놈은 버티지 못하고 도주를 택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도주는 성공했다.
통탄하고 땅을 칠 만큼 애석한 일이었다. 그러나 퓨콤뜨리아리트가 마계로 이동되는 순간 하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와 그의 종속들은 마계로 들어갈 수도, 이 땅을 벗어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할까. 그저 이 땅의 좁음을 한할 수밖에.
그러던 차에 이번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마기 덩어리 둘과 수만의 하등한 마물들이 이 땅을 침범했다. 감히 경계를 넘어 하기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지난번 수다를 떨어 대던 뱀파이어 놈과 견주어도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마기 덩어리가 둘이나 되었고, 또한 하급 마물들로는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마물의 군대가 경계를 넘어온 것이다. 저열한 것들!
이번에도 하기는 힘의 우열을 계산했다. 치열하게 계산을 마친 하기는 지난번과 달리 인내하기로 결심한다.
상대를 존중할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눌 줄도 모르는 예의 없고 편협한 자들을 일일이 상대할 가치가 있을까?
그래서 하기는 철저히 몸을 감추며 소모전을 펼쳤다. 수적으로는 절대적인 우세였기에 가능한 작전이었다. 수억의 하등한 마물들로 진을 빼 놓고 기습적인 게릴라전으로 침략자들을 응징했다.
현명하고 이성적인 하기였기에 가능한 고도의 전술이었다. 거기에 더해 하기를 비롯한 흄들이 갖는 위대한 혈인 능력이 빛을 발했다.
힘의 손실 없이 상대를 흡수하는 능력!
이 능력은 숲의 존재들로 하여금 당당히 일족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며, 진성 마족들조차 이 땅의 존재들을 변방의 하등한 존재라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마계의 군주들조차 온전하게 발현할 수 없는 능력이자 이 땅의 진정한 힘인 능력, 이 위대한 능력은 장차 열 갈래 마계 군주 계보를 열한 갈래의 계보로 확장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절대자 하기에 의해서 말이다.
하지만 송곳은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법.
때가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결국 마계의 군주들이 마계의 문을 주목하게 된 이유가 그것이기도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 전쟁인 것이다.
그러나 아스르부테 따위를 파견한 것은 분명한 실책이다. 군주 워리놈은 하기의 영지를 과소평가했다. 아스르부테가 마계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강자라는 것은 인정해 주겠지만,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다니? 절대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조심하고 있지만, 조금만 더 힘을 모은다면 충분히 흡수해 버릴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우코르바흐.
아스르부테가 워리놈의 기형 군단을 지휘하고 있다면, 우코르바흐는 외인 부대의 대표로 아스르부테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자였다. 그는 딱히 군대라 할 것도 없는 작은 집단을 지휘하고 있었지만 아스르부테보다 더 위험한 존재였다.
그래서 흡수하는 순서는 아스르부테가 먼저였고, 그 다음이 우코르바흐로 예정해 두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풍부한 마기를 품은 마물들을 하나씩 흡수함으로써 흄들은 강화되었다. 전쟁의 양상은 벌써 균형을 이뤄 가고 있으며, 오래지 않아 무도한 침략자들은 모조리 응징될 것이다. 그 다음 새로운 침략자들을 기다릴 것이다. 하나씩, 하나씩 먹어 갈 것이다. 힘은 시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니까!
어느새 전장은 대부분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아스르부테나 우코르바흐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어둠의 기사들에 의해 제법 강대한 힘이 느껴지는 몇몇 마족들이 산 채로 하기 앞으로 끌려왔다.
잔뜩 움츠려든 마기의 떨림이 느껴졌다.
하기의 앞에 서자 마족들은 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그대로 마비되어 버렸다. 하기는 느긋하게 몇을 골라 자신의 안으로 끌어들였다. 뭉클거리는 연기가 몇 차례 요동치는 사이 마인들의 기운이 소리 없이 소멸돼 버렸다.
한차례 흡수가 끝나자 하기는 나머지를 네 마리 짐승들에게 나눠 주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뿌연 태양이 회색 햇무리를 그리며 중앙까지 솟아 있었다. 지금부터 날아간다면 두어 시간이면 약속 장소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 ☆ ☆
마계에 문 북쪽 변두리에는 거대한 잿빛 얼음덩어리가 있다. 한여름이라 해도 녹지 않는 만년빙이다. 크기로 보아서는 산이라 표현해야겠지만, 맨 아래 기단(基壇)에서부터 흙이나 암반 등 산을 구성하는 그 어떤 물질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산이라는 표현도 적절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그냥 얼음덩어리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크다.
그 규모만으로도 중부 대륙과의 경계에 위치한 드로이크산에 비견해도 그다지 위축되지 않을 정도다. 마계의 문이 존재하지 않았던 오백 년 이전에 불리던 명칭은 아룰라 천정이다.
고대로부터 아룰라 천정은 대륙의 지붕이라고도 불렸는데, 실질적인 대륙의 끝이라도 보아도 무리가 없었다. 그 어떤 사람도 이 천정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워낙에 얼어붙은 땅 끝에 위치했기에 마계의 문이 형성되기 전에도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던 곳이었는데, 더하여 마계의 문까지 자리 잡고 보니 그야말로 잊힌 땅이 돼 버리고 만 것이다.
그 산 중턱에 인간의 형상을 한 어떤 물체가 부유(浮遊)하고 있었다. 낡고 허름한 회색 로브를 뒤집어 쓴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 주운이었다.
주운은 민둥민둥한 얼음덩어리를 밟을 필요도 없이 평온한 모습으로 정상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대륙의 천정을 가로지르는 강력한 기류에 편승한 손톱만 한 크기의 얼음 알갱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주운의 신형을 때려댔지만 주운의 비행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주운에게는 얼음 알갱이는커녕 메테오가 떨어진대도 뚫는다고 보장할 수 없는 강력한 실드가 둘러져 있기 때문이다. 주운이 아룰라 천정의 정상을 밟는 데 들인 시간은 불과 반시간이었다. 일반인이었다면 규모나 높이로 따졌을 때, 빙산이 아니라 하더라도 오르는 데 족히 열흘은 잡아야 했으리라. 물론 오를 수 있다면 말이다.
텔레포트라는 더 편한 방법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산의 지형과 일기가 워낙 변화막측하여 위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운은 정상에 오르고도 여전히 상념에 젖어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정상의 바람은 집채라도 날려 버릴 것처럼 거센 기류에 쌓여 요동치고 있었다. 능선과는 격이 다른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주운의 작은 신형을 어쩌지는 못했다.
☆ ☆ ☆
보통의 구름보다 두 배 이상 높이 떠 있던 먹구름이 아룰라 천정의 정상 위로 몰려들었다. 평범한 먹구름이라면 정상은커녕 중턱에나 닿아 꺼덕거리고 있어야 하건만 몰려든, 먹구름은 정상으로부터도 까마득히 높은 상공에 떠서 주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옅은 대기 탓에 평지보다 강력한 햇살을 뿌리던 정상이 순식간에 어둠에 물들었다.
그제야 하늘을 올려다본 주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왔으면 내려올 일이지!”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귓가에 대고 소리쳐도 들릴까 말까 한 요란한 칼바람, 그 속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그런 중얼거림이었다.
하지만 화답이라도 하듯 하늘 위에서 웅웅거리는 소음이 칼바람을 뚫고 주운의 귓가를 울려댔다.
“시끄럽네!”
여전히 낮은 중얼거림이었지만 그에 반응하듯, 몰려든 먹구름이 정상을 향해 내리꽂혔다. 스산하게 퍼져 있던 먹구름이 정상에 닿을 즈음에는 엄청난 밀도로 모여들었다. 먹구름이 떠 있던 상공에서 보았다면 작은 점으로 보였겠지만, 실상 주운의 시각에서는 뭉클거리는 연기 덩어리들이 봉우리를 가득 메운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연기는 주운의 실드에 가로막혀 그의 반경 일 미터 이내로는 접근하지 못했다.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에 둘러싸이자 주운의 눈매가 아까보다 더 찌푸려 들었다.
“한 번에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 말에 암흑 속에서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퍼졌다. 진한 울림을 내포한 웃음소리였다.
“그으냥 요오식 해앵위라아고 해에 두지.”
여전히 하울링이 많이 담긴 소리였지만 주의를 기울여 들으면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말과 함께 뭉클거리는 연기가 거세게 회오리치며 한 지역으로 모여들었다. 순간적으로 밀집한 연기 덩어리가 다시 한 점에서 휘돌더니 점차 검은색 실루엣을 형성하다가, 그 색까지 흐려지며 인간의 형체를 갖춰 갔다.
완전한 변이가 끝나자 거기에 벌거벗은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백옥같이 빛나는 피부, 잘 발달한 잔 근육과 훤칠한 키, 뚜렷한 이목구비에 훌륭한 물건까지, 어디 한 군데 빠지지 않는 미남의 모습이었다.
“많이 바쁜가 보군?”
주운의 말에 전라의 남자가 콧방귀를 끼며 대꾸했다.
“그동안 참을 만큼 참아 주었으니까.”
아까와 달리 청아(淸雅)할 정도로 명료한 목소리다.
“자네에게 인내심이 있는지는 몰랐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마법사.”
흉포하게 빛나는 하기의 눈을 바라보며 주운은 입맛을 다셨다.
과연 이자의 영혼이 그토록 순수했던 그 영혼이었나 싶었다. 하긴, 순수하다고 말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이자의 영혼은 태생 자체가 사악한 것이니까.
그렇다면 주운 자신은? 역시 사악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나 자신이나 형태만 다를 뿐 천기(天機)에 어긋난 존재라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천 년을 살아온 두 영혼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는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누가 더 사악한지, 누가 더 비정상적인지, 누가 더 천기에 어긋나는 형태로 살아왔는지는 비교할 필요가 없다. 정상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는 결국 동일하다.
“나를 너무 적대시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군. 전에 말했듯이 우리의 영혼은 쌍둥이의 그것과 유사한 관계라네.”
“그 말을 믿으라고? 흥!”
“사실이래도.”
“비열한 마법으로 생을 연장하는 주제에 누구와 비교하려 드는 거지?”
“비열하다? 글쎄…… 난 마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네. 자네 역시 마찬가지고. 아니, 이제는 아니던가? 현재의 자네라는 존재가 나를 무척 혼란스럽게 하는군.”
“미친!”
“자네는 지금의 모습 이전에도 나와 같이 영생을 누리던 존재라네. 기억하려는 노력이라도 해 보시지?”
하기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얼토당토않은 소리 집어치우고, 그에 대해서나 논의해 보도록 하지.”
“큭큭, 인정하려 들지 않는군. 어쨌든 오늘 모인 이유가 그것이니 이야기해 보기로 할까?”
오늘은 자신들에 대해 논하는 자리가 아니니 만날 때마다 매번 반복하는 이야기는 이만 접기로 했다.
“그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냈나? 마법사!”
단도직입적인 질문, 하기답다.
“아니, 알지 못했다.”
“그럼 왜 만나자고 했지? 그걸 알아내기로 했던 것 아닌가? 그대가 알아본다고 해서 난 지켜보기만 했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기 바란다.”
“성급하군, 들어 보게. 곁에 두고 일 년을 지켜보았지. 하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라고 생각할 만한 어떠한 증거도 찾지 못했지.”
하기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주운이 마저 말하길 기다렸다.
“반대로 인간이 아니라는 확신도 갖게 되었네.”
이 무슨 궤변인가? 인간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니? 하기가 막 화를 내려는 참에 마음을 가라앉히라는 듯이 손을 두어 번 내리누르는 제스처를 보고 잠시 참기로 했다.
주운이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육체는 인간임이 확실하네. 단, 육체의 활동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네. 첫 번째, 이곳의 마기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아는 사실일 테고. 그러니까 바깥세상이나 이곳이나 그에게는 똑같은 곳이지. 중요한 건 두 번짼데, 그는 특이한 방법으로 우주의 근원을 빨아들이네. 빨아들인 근원을 쌓아 두는 장소도 특이하지. 알다시피 우리 같은 마법사는 심장에 띠 모양의 서클을 형성해 에너지를 갈무리하지. 에너지, 즉 마나를 회전시키기에 최적의 형태지.
반면 전사들은 심장 주위로 마나를 응집해 놓기만 한다네. 일종의 마나 막이라고 해야 할까? 서로 운용하는 방식이 다르니 형태도 달라지는 것이지.”
“나를 상대로 강의를 할 셈이냐? 시답잖은 얘기는 집어 치우시지!”
“진정하게나. 이제부터 내가 관찰한 바를 말하려던 참일세. 특이하게도 그는 하복부에 근원을 모아 놓지. 마나의 형태로 다듬어진 것이 아니라 근원 에너지 자체를 쌓아 놓네. 아주 원시적인 형태지. 비효율적인 형태임에는 틀림없지만 진짜 중요한 사실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하기의 반응을 관찰하듯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가 쌓아 놓은 근원의 총량이 나나 자네를 월등히 넘어선다는 것이네.”
주운이 예상한 것보다 하기는 더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젊은 남자의 모습이 한순간에 흐트러지며 검은 연기로 화해 확산과 압축을 반복했다. 산 정상을 집어삼킬 듯 확장되었다가 단번에 사람의 크기로 압축되기를 여러 번, 최종적으로는 연기의 형태로 정상을 한 바퀴 휘돈 후 인간의 모습으로 고형화되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주운이 손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의 모습은 종전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젊은 여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싸 주고 싶은 청순한 미녀의 모습이었다. 큰 키에 비해 조금 마른 몸매, 살짝 작아 보이는 가슴과 호리호리한 허리, 성장을 마치지 못한 소녀의 그것처럼 아직 우거지지 않은 수풀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하기에게 속한 누군가의 영혼일 것이다.
그런 여인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그대보다 강하다고? 손대기에 이미 늦었단 말이야? 그렇게 되도록 지켜보기만 했다고? 애초에 망설이지 말고 제거했어야 했던 걸까? 지금이라도 힘을 합치면 제거할 수 있지 않을까?”
하기는 평소 자신의 생존을 위협할 만한 존재에 대해서 강렬한 적개심을 보여 왔다. 자신이 관망하는 사이 그가 자신을 위협할 만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에 대해 후회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둔 주운에 대한 원망이 묻어났다.
흉험한 내용과 무관하게 듣기만 해도 녹아들 것 같은 가녀린 미성. 목소리 역시 소녀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니, 아니. 언제 나보다 강하다고 했나?”
“근원의 크기가 그대를 월등히 넘어섰다지 않았어?”
“말 그대로 근원일세. 근원은 권능이 아닐세.”
“무슨 소리지? 알아듣게 말을 해, 마법사!”
“근원은 근원일 뿐, 사용하기 좋도록 가공된 에너지가 아니지. 원한다면 손가락 하나로도 지워 버릴 수 있네.”
처음 왔을 때보다 두 배 정도 강해졌으니 내심 손가락 두 개는 써야 하는 게 아닐까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하기는 그제야 안심한 표정으로 주운의 의견을 물었다.
“그렇다면 당장 지워 버릴까?”
청순한 여인의 입에서 나올 법한 내용은 아니었다. 주운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자네나 나나 잘 알고 있지 않나?”
영혼의 크기 자체가 다른 존재. 주운이나 하기는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혼의 눈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조노량에게 갖는 느낌은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지만 함부로 손대서도 안 될 존재.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무게로 느끼는 것이었다.
“정체를 알아야 대응을 할 것 아니야?”
그런 그들조차도 조노량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있어서도 안 될 존재지만 멸해서도 안 될 존재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지.”
“또 뭐지?”
“그의 검에 천사와 마왕이 봉인되어 있다는 사실은 말한 적 있지? 곧 깨어날 것 같아서 내가 단단히 봉해 놓았다는 것도.”
“그랬어.”
하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처음엔 몰랐는데, 생각해 보니 누군가 그에게 붙여 놓았다는 결론이 내려지더군. 본인도 모르게 말이네.”
하기가 새초롬한 눈을 해서 주운을 응시했다.
“누군가? 천사와 마왕을 부릴 수 있는 정도의 존재 말이지?”
이 정도 말했으면 영리한 하기가 알아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우리 외에도 초월적인 누군가가 그를 주시하고 있다는 말일세. 만일! 멸해야 할 존재였다면 벌써 멸했겠지.”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라지만 결국 멸해서도 안 되는 존재라는 거지. 그 누군가는 그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걸까?”
“아마 알지 않겠나?”
“흥! 내가 모르는 사실을 누군가는 안다니, 좋은 기분은 아니야.”
“흘흘, 그런가? 그런데 감시였을까, 보호였을까?”
“보호가 아닐까?”
“보호치고는 너무 어정쩡하다는 느낌일세.”
“하긴, 봉인되어서야 보호고 자시고 할 수도 없으니깐. 그럼 감시일까?”
“무엇을 위한?”
“내가 어떻게 알겠어? 괴물 마법사도 모르는데!”
살짝 비껴서며 삐진 듯한 몸짓을 해 보인다. 아름다운 외모에 썩 어울리는 몸짓이지만, 하기의 본질을 알고 있는 주운 입장에서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외모에 따라 성격까지 변한다. 아니, 외모에 따라 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가 잡아먹은 수많은 영혼들의 진실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그 자체로 진실이었다.
“허허, 괴물이라니? 자네와 난 동류라 하지 않았던가?”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고 자리를 파했다. 하기와 내린 결론은 초월적인 누군가가 내린 결론과 같았고, 애초의 방침과도 다르지 않았다.
‘지켜보기만 할 뿐, 관여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