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롤의 실종
봄 같지도 않은 봄이 물러가고 슬슬 더위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곳에 온 지 어느덧 일 년 반을 넘긴 것이다.
조노량은 공터에서 제각기 훈련에 열중하는 기대원들을 응시했다. 숨을 몰아쉬고 땀을 쏟아 내며 자신을 한계 상황까지 몰아붙이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이전처럼 활기에 찬 모습이 아니었다.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벌써 한 달이나 지난 일이지만 그날의 사건이 아직까지 모두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휴식 중에도 가벼운 농담 한 마디 던지는 이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조노량은 자신의 훈련 방식을 고집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너무 위험해졌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전체를 조망하면서 경고를 주거나 위험한 수들을 자제시키는 것이 가능했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아무리 훈련 중이라 하더라도 이놈저놈 동시에 흥분하게 되면 도무지 통제가 불가능했다.
흥분 상태에서 갑자기 출수(出手)되는 살수들은 자신이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적시에 쫓아가 막아 낼 수가 없다. 훈련장을 누비다가 날아오는 눈먼 공격들을 피해 내는 것조차 온 신경을 다해야 할 판이니, 더 이상 연환(連環) 훈련을 지휘할 자신이 없어져 버렸다.
샤마노프, 차츠라와 함께 본대를 추적하던 이 개월여 간의 성장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일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쌓인 내공도 만만치 않았다. 수용소 시절에 비한다면 곱절? 최소로 잡아도 일 갑자 이상이다. 크로아지크 시절의 자신이라면 못해도 능히 셋은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한층 높아진 검의 경지에 더하여 내공의 묘리를 깨닫고 난 후로 파마장이라 이름 붙인 장법과 암경의 위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대비하지 못한다면 누구든 한 방으로 끝이다.
이전의 롤이나 쥬시아누스, 예니에프라면 간단히 잡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글쎄……, 뭔가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상식적으로 몸에 해로운 기운을 자주 접하게 되면 병이 들기 마련이다. 그 해로운 기운으로 인해 몸이 상하는 것이 아니라 변이된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우선 기대원 모두 체력적인 면에서 월등해졌다. 어지간해서 지치지도 않는다. 힘도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원래 힘이 강했던 쥬시아누스의 경우는 한 아름의 나무를 부둥켜안고 단번에 꺾어 보이기도 했다.
더 놀라운 점은 거의 마물 수준에 이르는 회복력이다. 부상을 입어도 상처가 눈에 띄게 복구된다. 굳이 제우스의 치료를 받지 않더라도 몇 시간이면 딱지가 앉고 하루 정도면 상흔 정도만 남긴 채 회복되었다.
가디언이라 했던가? 처음 고골리나 클라흐를 만났을 때 인간보다는 마물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 바라보는 일행들의 모습도 고골리나 클라흐에 못지않았다. 마계의 문에 떨어진 지 불과 일 년 반 만이었다.
샤마노프나 크리들처럼 외형적인 변화를 보이는 자도 있었지만 일부는 변화를 안으로 감추고 있기도 했다. 그에 따라 이전의 강함이 현재의 강함이 아니었고, 이전의 능력이 현재의 능력이 아니었다.
단적인 예로 S클래스를 제외하고는 가장 강한 축에 속했고, 현재도 무시하지 못할 능력을 지닌 브리오티스가 하이오지에게 패배하는 사건도 있었다. 하이오지의 승리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늘 웃는 얼굴에 조금은 어수룩한 성격이지만 샤마노프와 함께 A클래스를 대표하는 강자 중 하나인 브리오티스가 하이오지에게 패했다는 것은 이변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무에서 브리오티스는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하이오지를 무너트리는 데에는 실패했다. B클래스에 겨우 턱걸이하는 수준이었던 하이오지를 말이다.
당시의 브리오티스는 절대 약하지 않았다. 그의 글라디우스는 강하고 빨랐으며, 힘은 이전의 쥬시아누스를 능가할 지경이었다. 유연한 건각(健脚)은 솟아나는 각도를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런 글라디우스를 막아 낸 것은 검이 아닌 하이오지의 팔뚝이었고, 그의 건각을 견뎌 낸 것은 하이오지의 맨몸뚱이였다. 오오라를 사용하지 않았다지만 골곤의 뼈로 만든 글라디우스를 가죽 뱀브레이스만으로 막아 내었다. 팔뚝이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공격이었지만 툭툭 털어 내고 만다. 바위라도 단숨에 쪼갤 것 같은 발차기도 그저 몸으로 받아 내며 버텼다.
대무 내내 단 한 번의 공격도 성공시키지 못한 하이오지의 비해 브리오티스의 공격은 수도 없이 하이오지를 두들겨댔지만 하이오지는 끝내 견뎌 내었다. 곧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흐느적거렸음에도 하이오지의 눈은 초점을 잃지 않았다.
브리오티스의 주먹이 왼쪽 눈구덩이로 꽂힐 때에도 오른쪽 눈을 브리오티스의 다음 동작을 끈질기게 관찰하고 있었다.
하이오지의 대단한 맷집도 맷집이지만, 괴물처럼 변해 버린 브리오티스가 겨우 두 시간 만에 녹초가 된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하이오지의 전투 방식 탓이었다. 브리오티스는 두 시간 내내 단 한순간도 쉴 수가 없었고, 단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잠시라도 쉬었다가는 하이오지의 글라디우스가 치명적인 공격을 해 올 것 같은 위협을 받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늘 실없는 미소를 흘리던 브리오티스의 입꼬리가 굳어지고, 거친 숨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더 무서운 것은 이 모든 결과가 절대 하이오지 스스로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지극히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행위였다. 브리오티스는 하이오지의 전투 패턴에 말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극단적인 한계까지 몰렸던 것이다. 하이오지는 대무에서 이기고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자신이 이긴 것인지, 어째서 브리오티스가 녹초가 되어 나가 떨어졌는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브리오티스는 하이오지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갈긴 후 이렇게 말했다.
“네가 이긴 걸로 하자.”
뒤통수에 가해진 충격을 해소하기 위해 앞쪽으로 두어 발자국 전진하며 자세를 바로잡던 하이오지는 언뜻 브리오티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분통을 터트렸다.
“왜 뒤통수까지 때리는데? 곱게 기권해도 되잖아?”
그러고는 무척 억울해했다. 이기긴 분명히 이겼는데, 혼자만 만신창이가 돼 버렸기 때문이다.
“한 대라도 때려 봤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이게 대무가 끝나고 하이오지가 남긴 말이다.
정상적인 승리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실전이었다고 하더라도 하이오지가 지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됐다. 하이오지는 두 시간 내내 단 한 차례도 치명적인 일격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단 하이오지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능력을 인식했든 인식하지 못했든 모두들 이렇게 변해 갔다.
그리고 일부의 변화는 변화가 아니라 변이에 가까웠다. 지금은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하이오지와는 다른 형태로 무한 체력을 자랑하던 롤이나, 무지막지한 힘과 함께 온몸이 강철처럼 단단해져 버린 쥬시아누스에게는 그래도 변화라는 표현을 써 줄 만했지만 몇몇의 변이는 그야말로 눈을 의심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중 크리들의 변이도 만만치 않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옆구리에 돋아났던 촉수가 슬그머니 들어가 버렸다. 마치 변이된 세포가 치료되어 멀쩡해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속단이었다. 크리들이 사악한 미소를 보인 순간 조노량은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라 버렸다. 크리들의 몸 곳곳에서 순간적으로 돋아난 촉수가 조노량을 감싸고, 그 각각이 머리를 곧추세워 자신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리들의 사악한 미소와 마치 뱀처럼 흔들거리는 촉수들은 섬뜩함을 넘어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관자놀이에서 뻗어 나온 두 가닥의 가느다란 촉수와 어깨에서 돋아난 촉수, 옆구리와 허벅지에서 돋아난 촉수까지……. 그 징그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직까지는 섬세한 컨트롤도 힘들고 힘도 충분하지 않지만, 촉수가 돋아나는 위치는 조절이 가능하다고 했다. 위치는 물론 길이와 두께까지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말았다.
그에 비하면 샤마노프의 팔뚝에 돋아난 촉수는 양반이었다.
게다가 주위 경물 속으로 녹아드는 차츠라의 능력은 수련에 의한 것인지 변이에 의한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비단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아메조프는 어느 날 메뚜기처럼 도약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무려 칠 장 반을 솟구쳐 올랐다. 경공을 최대한 발휘해도 오 장을 넘기지 못했는데 아메조프는 육체적 능력만으로 자신을 월등히 넘어선 것이다.
심지어는 육체 자체가 무너져 마물의 그것처럼 변해 버린 자까지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자가 바로 A클래스에 랭크되었던 자오코프라는 사내로, 종내에는 이지를 상실하고 흉성을 드러내는 바람에 스마르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한 사건도 있었다.
육체적인 변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얼핏 보면 정상인 것 같다가도 간혹 마물과 같은 흉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스마르조차 제대로 통제를 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두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마물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기대원들 간의 싸움으로 발생한 결과였다. 하나는 죽임을 당했고, 죽인 자는 자살을 택했다. 죽은 자를 그렇다 치더라도 죽인 자까지 자살을 택하다니? 극과 극을 치닫는 감정 변화와 서로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일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최근에는 커트리안이 직접 나서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커트리안의 지시에는 비교적 순종적이었다.
마계 원정이라 했던가, 그들이 돌아오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물화가 진행되어 종내 결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을 테니까.
사정이 이렇다 보니 더 이상 연환 대무를 진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져 버렸다. 서너 조 정도나 봐 줄 만할까? 아니, 그마저도 감정이 격해지기 시작하면 감당이 어려웠다.
그래서 이렇게 각자 알아서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훈련장의 분위기가 이토록 무겁고 어두운 데에는 달리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크로아지크 기대의 중추며 가장 강력한 전사였던 롤의 실종 때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다섯 명의 기대원을 이끌고 사냥 겸 훈련을 나갔던 롤이 실종 사건. 그 전모는 이랬다.
늘 그랬듯이 롤은 몇 마리의 마물을 유인해 기대원들의 훈련 상대로 붙여 주고 있었다. 그러던 중 흔히 군대라고 말하는 대규모 마물들에게 노출되고 만 것이다. 게다가 마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넷이나 포함된 무리였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롤을 포함한 여섯이서 뚫을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고, 가장 적임자는 두말할 것도 없이 롤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롤다운 행동이기도 했고 말이다.
나머지 기대원들이 도주하는 사이에 롤은 마물들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애초 계획은 되든 안 되든 어느 정도 시간을 벌고 나서 빠지는 것이었으나, 사실상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마물의 군대 한복판을 탈출해 나온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정작 기대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그 당사자가 롤이었기 때문이다.
마물화가 진행되기 전에도 광전사로 불리던 롤이다. 그런 롤이 전투를 시작했다. 그것도 미치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전투를!
하지만 누가 있어 롤을 대신해 그 많은 마물들을 상대로 시간을 벌 수 있었을까? 선택도 뻔했고, 결론도 뻔했다.
롤은 마물의 군대를 향해 단기(單騎)로 돌진해 갔다. 그때 살아 돌아온 헤리엇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갈대숲이 갈라지듯 마물들의 무리가 둘로 갈라져 길을 내주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가 딛는 자리마다 초록의 피가 고였고, 그가 나아가는 허공으로는 마물들의 육편이 튀어 올랐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물들에 의해 그 육신이 가려졌을 때 롤의 광포한 웃음소리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지만, 그 광소 소리가 수많은 마물들의 울부짖음을 뚫고 대기를 가득 메우자 모든 마물들이 주춤거리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사자후라도 토해 낸 걸까?
소식을 듣고 전 기대원이 출동했을 때는 살아 있는 마물의 무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수십이 넘을 것으로 보이는 마물들의 신체 조각이 수백 미터를 격하고 흩어져 있었는데, 성한 모습을 한 시체는 단 한 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곳곳에 땅이 패고, 바위가 부서졌으며, 그 위로 붉고 푸른 마물들의 피가 가득 덮었다. 시산혈해(尸山血海)라고 할까?
역겨운 마물들의 피비린내로 인해 그 자리에 서 있기가 곤욕스러울 지경이었다. 도무지 일개 개인이 벌인 일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놀라운 점은 그 마물들의 시체 더미에서 마인의 시체도 두 구나 발견됐다는 점이었다. 롤이 어느 정도 강해진 것은 짐작하고 있었으나 수십의 마물들은 물론 마인들까지 도륙했다는 점에서 그의 능력은 조노량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한 발 더 나아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전투, 마물화되기 전에도 가장 마물스러웠던 롤이었기에 가능했던 전투가 아니었을까?
그 어떤 존재에게도 굴하지 않았을 롤, 마지막 순간까지 광소했을 롤의 모습이 그려졌다.
롤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끝내 도주에 실패한 기대원의 시신 일부를 수거했을 뿐, 롤의 신체는 작은 조각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롤의 실종 이후에 성지의 분위기는 극도로 침울해졌다.
시신조차 수습해 오지 못한 그날, 하루 종일 설원의 여행자가 울려 퍼졌다. 훈련도 중단되었고, 떠들거나 다투는 자도 없었다. 남은 인원은 이제 총 서른여섯 명. 그날 하루에 잃은 인원이 두 명이었다. 그중 하나인 롤을 잃은 손실은 하나라는 숫자로 설명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광전사라는 별칭까지 가지고 있는 롤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적을 대했을 때의 모습일 뿐, 평소의 롤은 털털한 아저씨였다. 그는 출신이나 인종, 심지어 클래스에 대한 차별도 두지 않았다. 그저 모두를 한결같은 모습으로 대했고, 누구에게나 격을 두지 않았다. 스스럼없이 농담을 던져왔고, 툭 치고는 껄껄거리며 지나갔다. 훈련 중 롤에게 심하게 당했던 자도 훈련이 끝나면 대놓고 투덜거릴 정도로 뒤끝 없는 존재로 여겨져 왔다.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았기 때문일까? 일부 어린 기대원들에게는 형이나 아버지 비슷한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고, 말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본인 또한 기꺼이 그런 관계를 받아들였다. 이런 곳에서 기댈 수 있는 건 결국 서로의 어깨일 뿐이었기에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롤의 단짝이었던 예니에프는 아이처럼 울었다. 쥬시아누스는 붉어진 눈을 감추기 위해 뿌연 하늘을 한없이 노려보았다. 심지어는 커트리안조차 처소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나오지 않았다.
만일 스마르마저 냉정을 유지하지 못했더라면 그날의 손실은 둘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통곡하던 예니에프가 자신의 검을 들고 허적허적 나서는 이유를 아무도 몰랐으니까 말이다.
예니에프는 롤이 죽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직도 혼자서 싸우고 있을 거라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함께 싸우기 위해 롤을 찾아 나서려는 거였다.
하지만 추적에 특화된 차츠라마저도 고개를 저은 상황에서 경험이 부족한 예니에프가 추적에 성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희생만 늘리는 셈이었다. 어쩌면 또 다른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랐을 것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성적인 사고를 유지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예니에프를 막아선 것이 스마르였다. 예니에프는 스마르에게 세 차례나 따귀를 얻어맞았고, 그때야 상황을 파악한 쥬시아누스가 발광하려는 예니에프를 끌어안았다. 예니에프는 쥬시아누스의 품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다가 목을 놓아 울었다.
그렇게 긴 하루가 지나갔지만 아직까지도 그 하루가 온전히 지나간 것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성지의 분위기는 늘 침울했다.
샤마노프는 깊은 상념에 빠져 훈련장을 배회하고 있던 노리앙의 손이 크리들의 등줄기에 살짝 가서 닿는 것을 보았다. 크리들이 촉수가 과하게 뻗어 나가 자칫 옆에서 훈련하던 뮤트의 옆구리를 찌를 뻔한 순간의 모습이었다. 조노량의 손이 스치자 크리들의 촉수는 뻗어 나가다 말고 멈춰 버렸다. 아니, 촉수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굳어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손이 스쳐가자 굳어 있던 크리들의 몸이 풀려났다.
노리앙은 자신이 기대원들에게 점혈술을 보여 주었다는 것도 모르고 계속 자신만의 상념에 잠겨 있었다.
몸이 풀린 크리들과 이를 지켜보던 샤마노프는 터무니없이 강해진 데다가 이상한 기술까지 구사하는 노리앙을 쳐다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교환했다.
‘변이가 너무 많이 진행된 것 같아, 그렇지?’
<6권에서 계속>
6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