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52화 (52/142)

52. 성장

슬픔에 가장 잘 듣는 약은 세월이다. 그렇게 롤을 잃고 나서 어느덧 반년이란 시간이 흘러 겨울이 찾아왔다. 북부 대륙에서도 북쪽 끝에 위치한 크로아지크 황야의 겨울도 매서웠지만, 마계의 문은 그보다 훨씬 북쪽에 치우쳐 있다. 이곳의 추위는 크로아지크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지만 사람들은 좀 더 침울해지고 좀 더 즉흥적이 되었으며, 좀 더 마물에 가까워졌다. 딱히 슬픔이 이어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 마계의 문이라는 빌어먹을 땅이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어 갔다. 그 사이 또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지키지 못해 마물이 되었다. 자포자기(自暴自棄)하거나 의지가 흔들리면 자신을 지킬 수 없다. 결국 마기에 물든 본능에 잠식당하고 자신을 잃게 되는 것이다.

삼 년 내에 마계의 문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모두가 그렇게 될 것이다. 이제 남은 시간은 일 년! 경계까지의 거리를 생각한다면 육 개월 내에는 출발해야 했다.

조노량은 무겁게 내려앉은 회색 대기를 올려다보며 막사 벽에 대고 소변을 마저 내갈겼다.

마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지만, 또 모르는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해까닥 돌아 버리면 어쩌겠는가?

바지춤을 추스르고 보니 그새 소변이 뾰족하게 얼어붙었다. 곳곳에 하늘을 향해 머리를 곧추세운 소변 줄기들이 널려 있다. 지저분한 소변 덩어리지만, 마치 제현 외곽의 돌탑지를 연상시키는 바람에 조노량의 기분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서둘러 막사 문으로 향했다.

근 일 갑자 반! 중원에서도 이 정도 내공을 쌓은 고수는 흔치 않다. 어려서부터 벌모세수(伐毛洗髓)를 하고 가문의 비전 심법을 익히며 각종 영약을 처먹은 명문가의 자제들이 노년에 가까워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보통 이 정도면 임독양맥을 타동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 행위는 근 백여 년의 운기로 질겨질 대로 질겨진 혈로가 드디어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을 찾아 가로막은 장벽을 헐어 버리는 과정이다. 비록 그런 장구한 세월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조노량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내공의 양만으로 따진다면 부족하지 않다. 불과 삼 년 만에 쌓은 내공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도무지 이 빌어먹을 추위는 적응하기 힘들다. 이렇게 고강한 내공을 겨우 몸을 덥히는 데나 써야 한다니, 한심할 지경이다. 한서불침의 단계에 들려면 도대체 얼마나 높은 경지에 도달해야 한단 말인가?

막사 안 벽난로에는 팔뚝만 한 장작들이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후끈한 열기가 끼쳐 온다. 한결 낫다. 대충 몸을 녹이고 보니 기대원들이 팔씨름을 하고 있다. 이 중 최강자는 당연히 쥬시아누스다. 고골리에게도 박빙으로 버티는 실력이니, 여기서 그를 당할 사람은 없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판은 하이오지와 벤트의 시합이었다.

기대원들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하이오지는 그다지 힘이 센 축에 들어가지 않는다. 당연히 그를 상대하는 벤트도 힘이 강한 자는 아니었다. 소위 말하는 하수들의 고만고만한 시합이다. 그럼에도 제법 여럿이 몰려들어 응원에 열을 올린다. 인간은 어디서건 적응을 한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행위에조차 의미를 부여하고 즐거움을 찾는다. 그만큼 생활이 무료하다는 반증이다.

비교적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는 하이오지와 달리 벤트의 팔뚝에는 비늘이 돋아 있다. 손가락 사이에도 물갈퀴가 자라나 있다.

헤엄은 잘 치게 생겼지만 물도 없는 곳에서 물갈퀴라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변이다. 모피 옷으로 덮여 있지만 목덜미 아래쪽엔 아가미까지 감춰져 있다. 실제로 물속에서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에도 숨쉬기에 편하다나?

그나마 팔다리에만 비늘이 돋아 있어서 다행이다. 옷으로 적당히 가리면 표가 나지는 않는다.

벤트는 비교적 변이가 심한 축에 들어가는 자였기 때문에 늘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있다. 지난번 자오코프처럼 이지(理智)를 상실하게 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들 변이 혹은 변화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새로 얻은 기관이나 변화된 신체적 능력이 무르익었다는 뜻이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자니 아주 머리가 어지럽다.

하지만, 자신은? 따지고 보면 자신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이들의 변화가 자신에게는 어이없어 보이지만, 자신의 변화도 이들이 보았을 때는 반칙이나 다름없이 보일 것이다.

조노량은 벤트를 툭툭 쳐 밀어낸 후 하이오지 앞에 앉았다.

하이오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노리앙, 힘으로는 안 될 텐데?”

조노량은 말없이 팔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하이오지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팔을 잡아 왔다. 팔이 길어도 징하게 길다. 마주 잡으니 조노량의 팔은 거의 직각으로 설 정도다. 그 손에서 느껴지는 경력이 만만치 않다. 순수한 힘만으로는 촌각도 버텨 낼 수 없을 것이다. 오른손에 슬쩍 내공을 밀어 넣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샤마노프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의 손을 말아 쥐었다가 떼며 외쳤다.

“시작!”

하이오지가 단박에 넘겨 버리겠다는 표정으로 힘을 쓰기 시작했다.

조노량은 상념에 잠긴 채 자신의 팔을 넘기기 위해 용을 쓰는 하이오지를 바라보았다. 지속적인 힘이라면 몰라도, 단시간에 내는 힘이라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

조노량은 약간의 내공을 더 끌어올렸다.

쿵!

테이블 위로 하이오지의 오른 손등이 부닥치는 소리다.

이곳 사람들이 안다면 놀라자빠질 만한 힘, 내공이다.

조노량은 씩 웃어 주고는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응원하던 사람들이 멍한 표정으로 조노량을 바라보기만 했다.

“마물화가 돼서 그래! 마물화가!”

하이오지가 주변을 둘러보며 ‘왜 나는 힘이 세지지 않는 거야?’ 따위를 외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이어 제각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이어졌다.

조노량은 시끌벅적한 홀을 지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벽난로에는 역시 작은 불꽃이 날름거리고 있다.

장작을 몇 개 더 던져 넣고 멍하니 불꽃을 응시하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소원하던 경지에 올랐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세상이라면 사양하고 싶다. 향수가 밀려들었다. 소소하게 지지고 볶던 제현의 뒷골목이 그리웠다. 돌아가고 싶다.

중원에서 이 정도 경지에 올랐다면 우러름을 받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비참한 꼴은 무어란 말인가?

조노량은 다시 한 번 머리를 흔들었다. 나약해져서는 안 된다.

조노량은 억지로 마음을 가다듬고 침상에 올라 가부좌를 틀었다. 탈출까지 길어야 육 개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내공을 높여 놔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우선 몸에 축적된 탁기(濁氣)를 몰아내며 무아지경에 들었다.

☆ ☆ ☆

밤이라고는 하지만 칠흑 같은 어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문의 겨울은 늘 그렇듯 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무채색의 명암만을 담고 있다. 소리라는 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마계의 문이기 때문에 더욱 적막한 밤이다. 마물들의 울부짖음 소리만 없다면 개울 소리, 풀벌레 소리, 새소리, 무엇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완벽히 침묵하는 밤이다.

그 속에서 제우스는 튕기듯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너무 시끄러웠다.

귓속을 가득 채우며 울리는 소음에, 아니, 간절함이 절절히 묻어 나오는 소리에 도저히 깨지 않고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평소의 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는 정도라면, 지금은 귀에 대고 처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뜻도, 의미도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 그럼에도 그 절박한 감정만은 절절하게 전해진다.

무엇을 어떻게 해 달란 말인가? 원하는 바가 있으면 제발 알아듣게 말을 해 주길!

제우스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좌우 침상에 가지런히 누워 잠들어 있는 일행들의 모습이 보인다. 가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웅크리고 있는 자. 옆 사람을 끌어안고 온기를 탐하는 자. 가지각색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으나 지금 자신의 고막을 찢을 듯 울리는 이 외침을 듣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듣는다면 이런 감정의 파도 속에서 잠들지는 못할 것이다.

이를 악물어 보지만 점점 도를 더해 가는 소리는 결국 참을 수 없을 지경까지 되었다. 이건 차라리 고문에 가까웠다.

이러진 않았는데, 어찌하여?

어떻게든 아침까지는 참아 보려 했다. 이런 계절에 밖으로 나돈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우스는 마물의 가죽을 잘라 만든 모포를 걷어 내었다.

‘외면할 수 없다면 부딪혀 볼밖에.’

개어 놓은 외투를 찾아 깡마른 몸에 걸쳤다. 외투라기보다는 부대자루에 가깝다. 털이 많은 마물의 외피로 재단하고 마물의 힘줄로 엮은 가장 간명한 형태의 의복이다.

제우스는 다른 사람들이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막사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통곡의 계절을 지배하는 바람은 제우스의 의도를 비웃듯이 기습적으로 문을 밀어젖혔다.

퍽! 휘잉

문은 제우스가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안면부를 휘어 갈기고도 모자라 영역 다툼을 하는 무소처럼 거칠게 밀어붙였다.

그 순간 아득해 오는 정신을 부여잡은 것만 해도 제우스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한 제우스는 문에 등을 대고 밀어서야 다시 문을 닫을 수 있었다. 자칫했으면 고요히 잠들어 있는 전 기대원을 깨울 뻔했다.

전부 전사들이니 이 정도 소음을 못 들었을 리는 없다. 다만 섣불리 덥혀 놓은 침상과 모포를 포기할 이유가 없었으리라. 몇몇이 뒤척이고, 일부는 머리끝까지 모포를 둘러쓰긴 했지만 일부러 깨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어떤 놈이 뒷간이라도 가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불침번조차 필요 없을 만큼 안전한 곳이었기에 가능한 반응이었다.

바람 탓인지 벽난로의 모닥불이 한껏 성을 내었고, 던져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허벅지 굵기의 나무토막들이 불티를 토해 놓았다.

제우스는 문득 뜨끈한 무엇인가가 입술과 턱을 적시는 것을 느꼈다. 기대원들이 깨지 않도록 서둘다 보니 코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우스는 문고리를 다시 걸고 침상으로 돌아와 낡고 더러운 리넨 천 조각을 꺼내어 코피를 닦고 다시 코를 틀어막았다. 이전에는 의복이었을 저급하고 거친 리넨 천이지만, 이곳에서는 이보다 부드러운 직물이 없다.

그대로 나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코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나갔다간 순식간에 얼어붙어 안면부에 심각한 동상을 입었을 것이다. 제우스는 돌아온 김에 마물의 털가죽 조각 하나를 꺼내 코와 턱까지 휘돌려 감은 후 모자 속으로 넣어 흘러내리지 않도록 마무리했다.

다시 문 앞에 선 제우스는 심호흡을 한 후 옆으로 서야만 빠져나갈 만큼 작게 문을 열었다. 대비하고 있었음에도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저항이 느껴졌다. 지체 없이 문을 빠져나가 안쪽과 연결된 문고리를 걸었다.

쩡!

문고리를 걸자마자 엄습하는 한파에 드러난 피부의 습기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제우스는 한동안 굳어져 움직이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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