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적응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러 어느덧 두 계절이 지나 통곡의 계절이라 불리는 시간이 찾아왔지만, 조노량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 하나 이를 의식하지 않았다. 대지가 얼어붙고, 대기가 얼어붙고, 신성한 땅의 샘도 얼어붙었지만 이상하게도 막사에 틀어박히는 자도 없었고, 움츠려 드는 자도 없었다. 북부 대륙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곳임을 감안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본대가 성지에 도달하기까지 동사로 죽은 인원만 네 명이었다. 당시는 통곡의 계절도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하긴 팔다리가 잘려도 다시 돋아나는 괴물들이니, 추위에 내성이 생겼다 한들 달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내공을 사용할 수 있기에 가장 추위에 강했던 조노량이 이제는 대원들 중 가장 추위에 약한 자가 돼 버렸다.
애써 진기를 돌려 추위를 몰아낸 조노량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지로부터 두어 시간 거리에 위치한 검은 숲이다. 대부분의 숲이 회색 내지는 검은색이라지만, 이 숲은 유독 더 검은 빛을 띠고 있어서 그저 검은 숲으로 부르곤 했다. 이곳이 바로 대원들이 가장 자주 찾는 사냥터 겸 훈련장이다. 숲 안에 서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숲이었기에 덩치가 큰 마물들은 움직임이 제한적이어서 훈련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네 명의 사내들이 각자 편한 자세로 나뭇등걸에 기대서거나 앉아 있었다.
샤마노프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작은 고드름들을 후드득 털어서 오도독 소리를 내며 씹었다. 쉬는 중인 것이다. 쉬는 중인 만큼 아무런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등 이상할 것 없는 장면이지만 건너다보이는 숲 외곽 공터에서 누군가가 홀로 사투를 벌이고 있다면 결코 정상적인 장면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조노량 자신도 아무런 감흥 없이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물과 사투를, 아니, 훈련을 하고 있는 자는 하이오지였다. 불과 일 년 전만 하더라도 오오라를 다루지 못하던 하이오지가 묵빛에 가까운 음산한 오오라를 물씬 끌어올려 마물을 유린하고 있었다.
상대하고 있는 놈은 마물 중에서도 제법 까다로운 축에 드는 괴물 풍뎅이다.
대충 봐도 천 근? 굼떠 보이는 몸집을 하고 있으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 일단 겉모습대로 어설픈 오오라로는 흠집도 내기 힘든 단단한 껍질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예리하기 이를 데 없는 두 쌍의 갈큇발이 무섭다. 여섯 개의 발로는 땅을 굳게 딛고 두 개의 갈큇발을 휘두른다. 거기에 걸리면 인간의 몸 정도는 단번에 동강나 버린다.
조노량은 언젠가 이 풍뎅이와 트롤의 접전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이 풍뎅이는 단 한 번 갈큇발을 휘둘러서 트롤의 허리를 끊어 버렸다. 그러나 이 풍뎅이에게는 갈큇발보다 한층 무서운 무기가 있었다. 바로 돌풍을 동반한 속도와 무게였다.
아무런 사전 동작 없이 갑자기 네 쌍의 겹날개가 펴지고, 펴졌다 싶은 순간엔 이미 십여 미터쯤은 단번에 건너뛰어 버린다. 속도도 문제지만 날개가 일으키는 돌풍에 먼저 중심을 잃어버리니, 피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날카로운 돌기가 돋아난 배 밑에 깔려 버리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무게 탓인지 오래 비행하지 못하고 자주 쓰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수시로 사용했다면 하이오지가 저렇게 여유 있는 모습으로 풍뎅이를 공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자칫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그걸로 끝이었다. 돕기엔 조금 먼 거리니 말이다.
그때 풍뎅이의 날개가 다시 한 번 펴졌다. 하이오지가 풍뎅이의 갈큇발을 피해 멀찍이 물러나는 상황이었다. 그 간격이 한순간에 좁혀졌다.
빠지는 상황에 더해 격한 날갯짓에 따른 풍압(風壓)이 몰아닥치자 하이오지의 스텝이 일순 꼬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 위로 풍뎅이의 거체가 그대로 내려앉았다.
쿵!
회흑색의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찌해 볼 틈도 없었다. 여유 있게 관전하던 일행들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일행들의 눈에는 하이오지가 풍뎅이 아래 깔려 납작해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순간 툴툴거리는 소리와 함께 풍뎅이의 거체 뒤에서 하이오지가 삐죽이 몸을 내밀었다.
“이런 미친 풍뎅이 자식이! 어디 어르신 머리 위에 똥을 싸지르려고?”
일행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어이! 이건 좀 도와줘야겠는걸.”
하이오지가 풍뎅이의 머리를 걷어차며 말했다. 자세히 살펴보자 흰색의 글라디우스가 풍뎅이의 턱 밑으로 들어가 머리 위로 빼꼼히 검봉(劍鋒)을 내밀고 있었다.
풍뎅이의 무게를 이용해 뚫어 버린 것이다.
문외한이 본다면 풍뎅이가 스스로 글라디우스에 뛰어들어 죽어 자빠진 것으로 볼 것이나, 결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교적 약한 턱 밑이라고는 해도 오오라의 밀도가 충분히 높지 않았다면 결코 뚫지 못했을 터였고, 일순간이라도 풍뎅이의 무게를 견디면서 유효한 각도로 검을 세워야 했을 것이며, 검을 박아 넣은 후 풍뎅이의 몸이 땅과 충돌하는 그 촌음의 순간에 몸을 빼내지 못했더라면 여지없이 풍뎅이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풍뎅이의 머리에서 검을 회수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였다.
일단 이 무거운 놈을 뒤집거나 최소한 글라디우스를 회수할 만큼 들어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사냥은 혼자 할 수 있어도 이건 하이오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맛있는 속살을 파내려면 어차피 뒤집어야 했다.
물론 이놈의 등껍질도 단단한 만큼 아주 유용했다. 웬만한 오오라도 견딜 정도로 단단할 뿐만 아니라 가볍기 때문에 방패나 갑옷을 만들기에 최상의 재료라 할 수 있었다. 갑옷의 경우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밴디드 메일(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을 만들어 입기도 하고, 무두질한 가죽을 기름으로 한 번 더 끓여 내 만든 레더 아머의 강도 보강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가죽 사이에 넣는 스케일(scale)용으로는 그만이었다.
하지만 방패나 갑옷이라면 이미 필요한 만큼 확보했기 때문에 지금은 굳이 따로 채취해 갈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굳이 힘들일 필요 없이 연한 배딱지를 노리는 것이 맞다. 샤마노프가 죽어 자빠진 풍뎅이를 향해 군침을 흘렸다. 그때까지도 풍뎅이는 경련하며 갈큇발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질긴 생명력은 영혼이 빠져 나간 후로도 쉽게 안식을 주지 않는 모양이다.
“난 이놈이 제일 맛있더라.”
벤트가 속없이 희죽이며 풍뎅이의 등 위로 뛰어올랐다가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샤마노프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먹는 것 가지고 장난하지 마시지요.”
조노량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마물을 보며 구역질하던 인간이 이제는 입맛을 다신다. 하지만 조노량 역시 입맛이 돌기는 매한가지였다. 놈의 고기는 반쯤 곯은 바닷게의 속살처럼 찐득하고 거무죽죽한 색이었지만, 그 맛은 결코 싱싱한 게살에 뒤지지 않았다. 구린내가 조금 나긴 하지만 연하고 고소한 것이 제법 먹을 만했다.
그 사이 지렛대로 쓸 만한 나무를 고르던 백발의 폴이 오오라를 일으켜 허벅지 굵기의 나무를 단숨에 베어 넘겼다.
조노량이 잔가지를 쳐 내려던 폴을 제지하고 오첩도를 뽑아 들었다. 풍뎅이 앞에서 잠시 진기를 고르던 조노량이 마물의 머리 부위에 오첩도를 세워서 지그시 내리눌렀다. 접쇠를 할 때 생긴 물결무늬에 은은한 빛이 어리며 절반 이상 쑤욱 박혀 들어갔다.
최근 검기의 집약도도 월등히 높아졌다. 같은 삼재검법을 응용해도 검로(劍路)에 미세한 차이가 생겼다. 그 차이는 삼재검법을 완전히 다른 검법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조금만 더 가다듬는다면 새로운 검법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무림의 고수들이 무공을 창안한다는 말을 들어 봤으나, 최근에야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다.
몸을 쓰는 법을 말함이 아니었다. 단지 몸을 쓰는 게 아니고, 몸을 쓸 때 내공을 어떤 식으로 가공하고 어떤 방식으로 전달해야 더 효율적인지, 더 강한 위력을 낼 수 있는지를 일컬음이었다. 내공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동작이 있었고, 필요한 경로가 있었다.
동작에 맞춰 내공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공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동작이 필요했다. 무식하게 절대량만을 소모해 버리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절대 고수의 경지에 오를 수 없는 것이다. 같은 삼재검법을 사용해도 내공의 운용과 검로의 변화에 따라 그 위력은 두 배 세 배 차이가 났다. 그것이 무공의 요체였다. 무공을 창안한다는 것은 초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기의 경로를 만들고 그에 맞는 최적의 움직임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지금 풍뎅이의 등껍질을 갈라내는 별것 아닌 동작에도 그 묘리가 적용되고 있었다.
어느 정도 박히자 조노량은 오첩도를 역수로 쥐고 도배(刀背)에 왼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 상태로 천천히 밀어내자 마치 밀가루 반죽처럼 껍데기가 오려져 나갔다. 그다지 빠르지 않았지만 금세 하이오지의 글라디우스가 떨어져 나오고 속살을 발라낼 만큼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런 깨달음을 얻지 못한 하이오지는 목각을 하듯 천천히 풍뎅이의 등껍질을 깎아 내는 조노량의 모습을 바라보며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오라를 실어 강하게 베어 내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이오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후 골곤 뼈로 만든 단검을 꺼내 들었다. 얇고 굽은 것이 시미터를 축소해 놓은 모양새다. 골곤의 갈비뼈를 이용해 노리앙이 다듬어 준 것으로, 예리하기가 면도를 해도 될 정도였다. 샤마노프도 비슷한 모양의 단검을 꺼내 들고선 뻥 뚫린 등껍질에 달라붙었다. 그 사이에 폴과 벤트가 준비해 온 넝쿨 바구니를 가져왔다. 바구니 두 개면 서른아홉 명이 먹기에 충분하다. 먹을 건 사방에 지천이니 욕심낼 필요도 없었다. 부족하다 싶으면 잠깐 나갔다 들어오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