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재회
천 마리의 오크, 고골리라면 이겨 낼 수 있을까? 인간 같지 않은 자이니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과연 천 마리 오크와의 난전에서 무사할 수 있었을까? 몸을 빼낼 수 있었을까? 오크 하나하나는 강하지 않다. 하지만 무리를 이룬 오크는 강하다. 지능이 높기에 협공을 할 줄 알고, 차륜전도 할 줄 안다. 전투에 특화된 종족답게 놀라운 반사 신경과 민첩성을 갖추고 있다.
마물을 완력으로 때려죽일 정도로 힘도 세다.
오크의 근육은 인간의 근육보다 효율이 좋았다. 그런 근육량이 인간의 배를 넘는다.
근육의 절대량에 있어서도 효율 면에 있어서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오크의 힘은 일반적으로 인간과 비교해 열 배에 해당한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인간처럼 마나를 다루거나 검술을 익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사를 상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리를 이루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물을 힘으로 때려잡는 오크의 무리가 천을 넘어간다면 고골리는 몰라도 나머지 일행은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아찔했지만, 탈 없이 평원을 건널 수 있었다.
평원에 대규모 오크 무리가 모여 있기 때문인지 기형 마물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어쩌면 오크 무리에 의해 싹쓸이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일행이 평원을 가로지르는 데는 두어 시간이 소요되었다.
평원을 가로지른 후 작은 숲과 언덕 하나를 더 넘은 후에야 고골리가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춰 세웠다. 세 번째 휴식이었다.
멀쩡한 모습의 고골리와 다르게 제대로 서 있기 어려울 정도로 지쳐 있던 일행은 그의 신호가 있자마자 회색 대지 위로 몸을 뉘였다. 대지의 냉기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설령 얼음판 위에 눕더라도 숨을 고르는 것이 먼저였다.
고골리는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일행을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껄껄 웃으며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워 주는 생각 없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그동안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었다.
걱정은 걱정대로 하면서도 오랜만에 느껴 보는 온기에 앞뒤 재지 않고 불가로 모여들었다. 몸이 노곤하게 풀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골리의 얼굴에 슬며시 안쓰러움이 묻어났다.
“강하지 않으면 죽어 주는 것이 예의인 곳이다. 많이 강해져야 할 것이다.”
꿀맛 같은 반 시간의 휴식 후, 두 번째 언덕을 넘어 숲이 우거진 작은 분지로 향했다.
아직 이른 봄임에도 무성한 잎사귀를 잔뜩 매달고 있는 나무들은 음침한 기운을 마음껏 뿜어내고 있었다.
교묘히 가려진 작은 오솔길을 헤치고 숲속 공터로 빠져나왔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태평하게 퍼질러 앉아 제각각 무언가를 뜯거나 잡담을 나누고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다리의 힘이 스르르 풀려 버렸다. 샤마노프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렸고, 차츠라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조노량마저 코끝을 씰룩거렸다. 드디어!
갑작스럽게 등장한 일행을 발견한 사람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고 있던 모든 동작이 일시에 정지되었고, 수십 개의 시선이 일행을 향해 고정되었다. 일시간의 침묵이 깨지며 수십 명이 부산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롤은 입 안 가득 물었던 무언가를 통째로 뱉어 내며 한달음에 달려들었다.
“크헝, 살, 살아 있었느냐?”
마치 짐승의 울부짖음을 닮은 롤의 목소리가 일행의 귓전을 때리고서야 조노량 등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롤은 조노량을 껴안고 펄쩍펄쩍 뛰더니, 차례로 샤마노프와 차츠라를 얼싸안고 울부짖었다.
“크헝, 이 미친것들이 어디를 싸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온 것이냐?”
롤의 뒤를 이어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일행을 둘러싸고 광란에 휩싸였다.
샤마노프는 복받친 감정에 목을 놓아 울어 젖혔고, 차츠라 역시 끅끅거리며 사람들을 얼싸안았다. 조노량조차 연신 코끝을 씰룩거리며 한 사람 한 사람 힘차게 끌어안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확인해 가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본진의 숫자는 얼핏 보기에도 많이 쪼그라든 모습이었다. 동굴 속에서 마지막으로 숫자를 헤아렸을 때가 아흔아홉 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절반에나 겨우 미칠까?
본진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땟국이 자르르 흐르는 얼굴에 피가 엉겨 붙어 원래의 얼굴을 구별하기 힘들 정도였고, 십 년을 입었다 해도 믿을 만큼 낡고 찢어진 옷가지들 하며……. 그야말로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 꼴이었다.
물론 조노량 등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지난밤의 전투가 그들의 옷뿐만 아니라 몸까지 너덜거리는 넝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크리들이 다가와 조노량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 뒤에서 하이오지가 눈물을 흘리며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아, 살아 있었구나.’
조노량은 크리들의 생존이 믿기지 않았다. 그의 부상은 결코 작지 않은 것이었는데,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다니? 비열한 하이오지 자식이 해냈구나.
본진이 머물던 동굴을 찾았을 때 보았던 식인의 흔적, 마음 속 깊이 찜찜한 기분을 거둘 수 없었는데, 크리들의 생존이 확인되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조노량도 크리들을 굳세게 끌어안고는 뒤에서 눈물 짓고 있는 하이오지를 향해 주먹을 들어 보였다.
이 친구, 이 친구! 네놈은 비열하면서도 멋진 놈이다.
예니에프, 쥬시아누스, 브레우스 등이 차례로 일행을 감싸고 기쁨을 표현했다.
그때 광란의 상봉식을 치르던 사람들이 스르르 물러섰다. 그 틈 사이로 커트리안과 스마르가 일행을 향해 걸어 나왔다.
커트리안의 미지근한 눈빛이 자신을 향하자 조노량은 또 다른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여전히 굳건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커트리안이 양팔을 벌려 조노량을 굳세게 끌어안았다.
“돌아와 줘서 고맙다.”
귓가를 울리는 낮은 목소리. 습기가 배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두어 차례 조노량의 등을 두드리던 커트리안이 몸을 물려 조노량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팔뚝을 툭툭 치며 미소 지었다. 무척 단순한 동작이어지만 그 작은 동작에 조노량은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이유 없는 서러움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코를 씰룩이며 참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커트리안이 조노량의 뺨에 흐리는 눈물을 훔쳐 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은 마치 ‘힘들었겠구나, 이제부터 내가 맡으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조노량과의 해후를 마친 커트리안이 몸을 돌려 샤마노프를 바라보았다.
“커트리안 님…….”
커트리안이 자신을 향하자 샤마노프는 커트리안의 이름을 겨우겨우 부르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커트리안의 시선이 샤마노프의 왼쪽 팔뚝으로 돌아갔다.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삐죽이 돋아난 살집 몇 개만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고생이 많았구나.”
커트리안은 조노량에게 그랬듯 샤마노프를 굳세게 안아 주었다.
샤마노프는 커트리안의 어깨에 기대어 훌쩍이다가 꺼이꺼이 목을 놓아 버렸다.
드디어 본진에 합류한 것이다. 비록 초라하게 쪼그라들었으나 얼마나 염원하던 본진이던가? 석 달 가까이 사선을 헤매다가 겨우 만난 본진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 선택할 필요가 없고, 책임질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은 커트리안이 해결해 줄 것이고, 그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면 될 뿐이다. 그런 점이 샤마노프를 안심시켰다. 비록 여전히 마계의 문에 떨어져 있지만 마음이 놓이고 안정되었다.
뒤에 서 있던 롤이 큰 소리로 끼어들었다.
“그것 보라구! 내가 살아 있을 거라고 했잖아! 이 미친 것들은 그렇게 쉽게 죽을 놈들이 아니라고 했잖아! 으하하!”
그 말을 들으며 샤마노프는 잠들 듯이 쓰러졌다. 누적된 피로와 부상, 갑작스럽게 풀어진 긴장감이 주는 여파였다. 진작 쓰러졌어도 시원치 않을 상태에서 지금까지 버틴 것만 해도 용했다.
기절하듯 쓰러졌지만 그의 입가에는 편안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커트리안은 그런 샤마노프를 살며시 받아 안아 조심스럽게 스마르에게 넘겼다.
커트리안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차츠라는 한쪽 무릎을 꿇고 기사의 예를 행했다. 커트리안은 그런 차츠라의 어깨를 잡아 올려 일으켜 세웠다.
“차츠라, 이런 예를 취할 필요가 있겠느냐?”
커트리안은 따듯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차츠라를 위로하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침착함을 되찾았던 차츠라는 커트리안의 따뜻한 한마디에 감정이 격동됨을 느끼고 애써 울음을 참아 내었다.
“많이 힘들 텐데, 조금 쉬도록 해라. 그리고 노리앙.”
차츠라를 품에서 떼어 놓은 커트리안이 다시 조노량을 불렀다.
조노량은 짧게 대답하며 커트리안을 바라보았다.
“힘들겠지만 그대가 봐 줘야 할 사람이 있다.”
커트리안은 손짓을 해 조노량을 가까이 오게 한 후 팔을 가볍게 끌어 안쪽으로 인도했다.
커트리안의 안내에 따라 당도한 장소에는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구별이 가지 않는 참혹한 형상의 사람이 하나 누워 있었다.
몸은 검은 이끼와 나뭇잎 등으로 감싸여 있었고, 얼굴 부분만 살짝 드러나 있었다. 드러난 얼굴만 보자면 살아 있는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움푹 팬 눈구덩이를 비롯해 유난히 불거진 광대뼈와 듬성듬성 남은 푸석한 머리카락까지, 마치 해골에 얇은 거죽을 둘러씌워 놓은 듯한 모습이었는데, 거죽마저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그 거죽 위로 검푸른 색의 핏줄이 거미줄처럼 거죽을 뒤덮고 있어 괴기스러운 느낌까지 자아냈다. 마치 오래된 미라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조노량이 커트리안에게 고개를 돌리고 의문을 표했다. 이미 죽은 자라면 굳이 커트리안이 조노량을 이곳으로 이끌지 않았을 것이다.
커트리안은 고갯짓만으로 누워 있는 자를 살펴보라는 의사를 표했다.
조노량은 몸을 굽혀 그의 코끝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약해진 숨결이 느껴졌다. 역시 죽은 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숨 자체가 이미 차가워져 있었고, 그것마저 금방이라도 끊길 듯 불규칙했다.
“누군지 알아보겠나?”
조노량은 머리를 저어 보였다. 낯익은 구석을 찾아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신관이다.”
아, 조노량은 그제야 제우스라는 존재를 생각해 냈다. 하지만 이 미라와 다름없는 얼굴에서 제우스를 떠올리는 것은 무리였다.
“소중한 자다. 그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겠나?”
커트리안의 말을 이어 뒤따라온 롤이 큰 목소리로 거들었다.
“그래 노리앙, 제우스를 살려 주게. 이 친구, 이 친구…….”
롤은 안타깝다는 듯이 말을 잇지 못하고 가만히 제우스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제우스를 가장 탐탁지 않게 여기던 사람 중에 하나가 롤이었다. 그런 롤이 마치 소중한 존재를 대하듯 조심스럽게 미라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는 것이다.
그때 스마르가 메마른 음성으로 끼어들었다.
“그의 희생 덕에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었다.”
스마르와는 첫 대화였기에 조노량은 그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취해 보였다.
하지만, 참 기막힌 상황이다. 이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지난번 동굴에서와 같이 제우스에게 힘을 주라는 말인데,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지난번의 결과는 우연일 뿐이었다. 자신은 절대 다른 사람의 진기(眞氣)를 도인(導引)할 수 없을뿐더러, 더더욱 이런 환자를 대상으로 진기를 불어넣는다는 것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다. 외기가 침입하는 순간 숨이 끊어질 것이 분명했다.
조노량은 터무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다니 다들 제정신인가?
하지만 커트리안은 무심한 눈빛으로 조노량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차피 죽음이 확정된 상태다.”
마지막 시도라는 이야기다.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조노량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이 재촉하기 시작했다.
“이봐, 노리앙! 뭘 망설이는 거지? 지난번처럼 기도 한번 해 주면 되잖아?”
예니에프가 답답하다는 듯이 조노량을 바라보았다.
“나도 신관님 덕에 살아 있는 거네. 내 대신 죽어 가고 있단 말일세.”
조노량의 등 뒤로 다가선 크리들이 조심스럽게, 하지만 간곡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동굴에서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노리앙의 기도가 이 젊은 신관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것을! 그것이 노리앙이 속한 부족이 가진 특이한 주술(呪術)의 힘인지, 혹은 노리앙 자신의 특수한 능력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분명 노리앙의 기도는 효험이 있었고, 죽어 가고 있는 제우스 역시 간절히 노리앙을 찾았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리앙이 망설이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 간단한 일이지 않은가?
그냥 기도만 해 주면 될 일인데……. 그래서 신관이 살아나면 좋고 설사 나아지지 않더라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을 텐데, 어째서 망설이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정작 조노량 자신은 이들의 맹목적인 믿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 젊은 신관에게 힘을 주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우연일 것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기대란 말인가?
조노량 역시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도 기억했다. 그냥 형식적으로 진기를 운용했을 뿐이다. 아니 실제적으로 그에게 전달된 진기는 없었다. 그저 피륙을 따뜻하게 해 주려 했을 뿐. 그것만으로도 그는 경기를 일으키며 나가떨어지지 않았던가?
난감할 따름이었다.
커트리안까지 나서서 이러는데, 어떻게 이해시켜야 한단 말인가?
진기니, 도인이니 따위를 설명할 길도 없을뿐더러, 정작 그런 짓을 한 적도 없지 않은가?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배우지도 않은 진기도인을 시도하려 했다간 백이면 백 이 젊은 신관을 죽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행위는 그의 죽음을 확정지을 뿐이다.
왜 자신에게 이 신관의 목숨을 거두라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