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거신 고골리
사람이 맞긴 맞는 건가?
형태는 사람이었으나 크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크기로 따지면 쥬시아누스도 컸고, 구루나 허글러도 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몸이 기준이다.
엄청난 거검(巨劍)을 휘두르며 다가오고 있는 존재는 그 기준을 넘어섰다.
말 그대로 구척장신(九尺長身).
그런 말을 들어 보기는 했으나 이야기 속에서나 가능한 말이지, 실제로는 절대 불가능한 크기다. 실제로 그런 크기라면 그건 괴물이라고 불러야 한다.
언덕 아래에서 마물들을 도륙하고 있는 저…… 괴물의 크기는 웬만한 마물들과도 필적할 만했다.
생김새도 덩치만큼 비인간적이었다.
얼굴을 가득 덮다시피 한 붉은 수염과 수사자의 갈기처럼 늘어진 머리카락. 좌우로 쭉 째진 눈매와 회색의 암울한 눈빛.
굵고 짧은 목선을 두르고 있는 징그러운 근육이 언덕처럼 솟은 어깨를 대각선으로 흘러내려 보통 사람의 가슴 두께만 한 팔뚝으로 이어졌다.
가슴과 복부 역시 그에 못지않은 두께를 자랑했으며, 갈리온의 다리를 연상시키는 허벅지 또한 절대 인간의 다리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중요한 부분을 짧은 스커트로 가리고 있었으나, 움직임이 격해질 때마다 흉측한 물건이 덜렁거리며 드러났다.
그런 비상식적인 모습보다 더 그를 마물스럽게 하는 것은 그의 왼손과 피부색이었다. 아니, 짙은 회색빛 피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손가락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달려 있는 망치처럼 생긴 거대한 살덩이는 아무리 억지를 부린다고 해도 인간의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오른손으로는 이 미터가 넘는 투핸드소드를 휘두르며 왼손의 살덩어리로는 마물의 두개골을 깨 부쉈다. 검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려도 뚫을 수 없었던 마물의 두개골이 그의 왼손에 걸리면 여지없이 퍽퍽 부서져 나갔다.
조노량은 너무나 압도적인 광경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언덕에 매달려 있던 마물들의 관심이 위협적인 적에게 돌려졌다. 마물들은 흉성(凶性)을 드러내며 망설임 없이 언덕을 떨어져 내렸다.
조노량을 상대하고 있던 두 개의 뱀 대가리를 가진 마물도 갈등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마치 다 잡은 고기 취급이지 않은가? 이 조노량이 그렇게 우스웠단 말이냐? 아무리 힘이 빠지고 진기가 고갈되었다 해서 너 하나쯤 어찌 못하겠는가?
단전 밑바닥까지 쥐어짜 오첩도를 휘돌렸다.
스겅!
단번에 두 개의 머리가 베어져 나갔다. 마물은 잠시 한눈을 판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그 일검을 내지른 후 조노량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꺾었다. 다행히 그 순간에 언덕을 올라서는 다른 마물은 없었다.
일직선으로 언덕 아래에 도착한 괴인이 급격하게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십여 미터가량 전진하는가 싶더니, 한 아름이 넘는 나무 밑동을 두 동강내 버렸다.
마물들을 상대하다가 갑자기 멀쩡한 나무를 공격하는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괴성을 울리며 쓰러지는 나무 위에서 두 개의 작은 인영(人影)이 솟구치며 떨어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조노량은 헛바람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초록빛 비늘이 가득 덮인 번질거리는 몸체와 박쥐의 날개를 닮은 두 개의 커다란 귀를 가진 존재.
한동안 일행을 패닉 상태로 몰아갔던 바로 그 전투, 그때 보았던 마인들이었다. 일반 마물들보다 월등히 강력했던 존재. 끝내 검은 연기까지 소멸시켰던 존재가 바로 저들이었다.
언제부터 저곳에 있었던가?
나무에서 튀어 나온 마인은 둘이었다.
마인 중 하나가 아래쪽을 향해 불덩이를 날렸다. 지난 전투에서 보았던 기술이다.
불덩이가 괴인을 향해 쇄도함과 동시에 마인의 몸체 역시 불덩이 뒤에서 거꾸로 떨어져 내렸다.
감탄사가 터져 나올 만큼 완벽한 연환(連環) 공격이다.
그러나 조노량은 그보다 뒤에 떨어져 내리는 마인에 주목했다.
두 번째 마인의 몸체가 흐릿하게 번지는 듯하더니 갑자기 둘로 분화되어 버린 것이다.
눈앞의 마물을 상대하느라 애초에 세 마리였던 것을 둘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라는 결론을 내릴 찰나, 이번에는 셋으로 늘어났다.
‘허!’
탄식밖에 나오지 않았다. 세상이 미쳤거나 자신이 미쳤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괴인은 ‘커흥’ 하는 괴성과 함께 거검을 휘둘러 불덩이를 쳐 내더니 떨어지는 마인들을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괴인의 움직임도 마인들 못지않게 신속하고 깔끔했다.
괴인의 공격을 피해 공중에서 방향을 틀어 버린 마인들이 땅에 착지함과 동시에 그 자리에 괴인의 거검이 내리꽂혔다.
먼지가 풀썩 피어올랐다. 하지만 마인들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 사이에 마인이 하나 더 늘었다.
마인들은 괴인을 중심으로 좌우로 빠르게 돌아가며 날카로운 손톱을 연속으로 내질렀다. 하지만 괴인의 반응 역시 절대 느리지 않았다.
괴인은 엄청난 크기의 거검을 회초리 휘두르듯 눈부시게 회전시켜 마인들의 공격을 격퇴시켜 버린 후에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짓쳐 들어갔다. 그 모습이 얼마나 신속했는지 일진광풍(一陣狂風)이 몰아치는 듯했다. 분화된 마인 중 하나가 거기에 걸렸다.
퍼석
크아악!
크지 않은 격타음과 함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검을 정면으로 받은 마물은 마치 허깨비처럼 소멸해 버렸다. 반면 네 명의 마인이 동시에 입을 벌려 비명을 내질렀다.
움직임은 제각각인데, 비명은 합창을 해대고 있다.
‘허!’
조노량은 다시 한 번 탄식했다.
무림에는 ‘이형환위(移形還位)’라는 보법이 있다. 몸과 그림자를 분리시킬 정도로 빠른 경신법(輕身法)이다. 수위가 높아지면 마치 몸이 여러 개로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빠른 움직임으로 잔상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다.
저들처럼 하나의 실체를 이루는 형태는 아니다. 저들의 모습은 잔상도 아니고, 그림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제각기 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멈춰서 공격을 하는 놈도 있고, 괴인의 뒤를 잡기 위해 빠르게 휘도는 놈도 있었다. 절대 잔상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지쳤다고 해도 그 정도도 분간해 내지 못할 만큼 무디진 않았다.
그런데 거검에 당한 마인은 마치 스스로 잔상이라고 주장하듯이 한순간에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반면 남은 네 명의 마인은 자신이 당하기라도 한 듯 동시에 비명을 질러대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남은 마인은 총 다섯이었다. 불덩이를 던져대는 하나와 두 자 길이의 손톱을 세우고 달려드는 네 명의 쌍둥이…… 아니, 또 늘었구나.
‘……망할 세상!’
괴인은 망치와 거검을 동시에 휘둘러 불덩이를 쳐 내고는 마인들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기세가 흉포하기 그지없다.
그런 괴인을 상대로 마인들은 빠른 움직임으로 치고 빠지는 형태로 대처하고 있었다.
불덩이를 던지는 마인이 견제하는 틈에 손톱을 세운 마인들이 괴인의 주변을 회전하며 타격을 가하는 방식이었다.
괴인과 마인들의 전투는 마치 수레바퀴가 돌아가듯 눈부시게 휘돌았다.
그 여파로 거대한 숲이 공터로 변해 가고 있었다. 단단하기 짝이 없는 나무들이 퍽퍽 터져 나갔다. 그때마다 회색빛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투핸드소드의 뽀얀 우윳빛 그림자가 회전할 때마다 마른 대지가 따라 솟구쳤다.
마인들은 물러나며 공격을 했고, 괴인은 따라붙으며 공격을 했다. 그러는 사이 다시 두 명의 마인이 소멸되었고, 두 명의 마인이 늘었다.
몸을 분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마물의 분화 한계가 다섯 마리인 것 같았다.
하긴, 무한정 늘어난다면 숲이 마인들로 꽉 찼을 것이다. 더구나 전투의 결과로 보건대, 허상들도 모두 동일한 물리적 힘을 가진 듯 보였다. 괴인의 몸에 늘어 가는 상처를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정도만 해도 공포스러운 기술이다. 하나가 다섯이 되고, 줄어들면 줄어든 만큼 다시 생겨난다.
누가 과연 저런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다행히도 하나씩 소멸할 때마다 쌍둥이 마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함께 타격을 입고 있었다. 그 여파로 나머지 쌍둥이들의 움직임과 위력이 조금씩 감소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때때로 마인들은 검은 연기를 상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마물들의 등 뒤로 숨어 가며 괴인의 공격을 차단했다. 그러나 괴인은 검은 연기와 달리 무덤덤한 표정으로 가로막는 마물들을 차례대로 베어 버렸다.
마인들은 마물들을 이용해 약간의 시간을 벌고 있긴 했으나, 급속하게 줄어 나가는 마물들의 숫자로 보건대 그리 길게 기댈 수 있는 전법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괴인의 위력은 압도적이었다.
불덩이를 던지던 마인이 갑자기 높고 소름끼치는 휘파람을 토해 놓았다. 그러자 아직까지 언덕에 붙어 있던 마물들이 뛰어내려 전투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휘파람 소리가 일종의 명령어인 듯했다.
그 덕에 한숨을 돌린 조노량이 거친 호흡을 토해 놓으며 주저앉았다. 이미 탈진 상태나 다름없었지만 긴장의 끈을 놓을 수도 없었다.
마물들을 지휘하고 있는 마인들은 틀림없는 적이다.
그렇다고 마인들과 싸우고 있는 괴인은 아군일까? 글쎄, 아마도 그들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대편 진영의 마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산 넘어 산이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샤마노프가 기듯이 바위틈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아래를 살피더니 질겁하며 주저앉아 버렸다.
“마, 마인?”
떡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던 샤마노프의 눈매가 새초롬하게 가늘어졌다.
“고골리……?”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젓던 샤마노프가 황급히 차츠라를 끌고 나왔다.
샤마노프의 거친 행동에 옆구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토하던 차츠라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거신 고골리?”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조노량은 차츠라의 경악성에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신 고골리라면 조노량 역시 익히 들어 본 이름이다. 크로아지크 검투반의 전설을 어찌 들어 보지 못했을까?
헤트르 폰티나, 어둠의 클라흐, 거신 고골리! 이 세 명의 이름은 그야말로 크로아지크의 전설이었다.
25년 전, 그들로 인해 처음 크로아지크 수용소에 검투단이 탄생했다.
크로아지크 검투단은 탄생 2년 만에 당시 아도니아 최강의 검투단으로 불리던 로티우스 검투단을 몰락시키며 아도니아 검투계에 등장했다. 그야말로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파란이 일어난 것이다. 로티우스 검투단을 몰락시킨 것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하듯, 그 후 10년간 아도니아 검투장은 그들의 독무대였다. 한 개의 검투단이 10년간 독주한 예는 역사적으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들은 아도니아 시민들에게 가장 잔혹한 검투 시합을 보여 주었고, 가장 열광을 받았다.
그들의 규칙은 죽음이었다. 때문에 상대 검투사들은 시합장에 들어오기 전부터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도전했던 검투사들은 대부분 죽거나 불구가 되었다.
‘죽이기 전에 반드시 주관자의 허락을 받아라.’
그들로 인하여 검투의 규칙까지 바뀌었지만 그들의 폭주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검투장에서는 얼마든지 우연한(?)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아직까지도 크로아지크 수용소에는 그러한 전통이 남아 있었다. 조노량 역시 그 전통을 요구받은 적이 있었다.
‘죽일 수 있다면 죽여라!’
이것이 크로아지크 검투단의 구호였다.
아도니아 검투장을 공포에 떨게 했던 그들이 사라진 건 12년 전이었다.
12년 전, 그해 첫 시민궁 시합을 끝으로 그들은 크로아지크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수많은 억측이 떠돌았지만 아도니아의 시민권을 대가로 은거했다는 설과 처형을 당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증명된 바가 없었다.
그 전설의 주역 중 하나가 바로 거신 고골리였다.
그들과 함께 생활했던 검투사 중 현재까지 살아남아 크로아지크를 지키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광전사 롤이었다.
하지만 차츠라도 고골리를 알아보았다. 하긴 그들은 켈커티스에서도 최강 전사들이었으니, 연배상 차츠라가 알아본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출정을 위해 시가행진을 하는 그를 보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가 지휘하는 부대의 젊은 병사였을 수도 있다.
그 사이에 쌍둥이 마인 하나가 또 꺼지듯 소멸해 버렸다. 무적으로 보이던 마인들이 인간의 손에 명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마인 하나를 소멸시킨 고골리가 양팔을 들어 올리며 마물처럼 포효했다.
조노량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게…… 사람이었단 말인가?”
헤트르 폰티나, 어둠의 클라흐, 거신 고골리. 그들을 직접 본 적이 없었지만 적어도 그 이름만큼은 익숙했다.
하지만, 마계의 문에서 그들 중 하나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 마물스러운 괴인이 진정 고골리란 말인가?
그 고골리가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 ☆ ☆
오래지 않아 전투의 양상은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그 장면을 보며 얼이 빠진 일행은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단 한 명이? 저 짧은 시간에?
마인은커녕 마물들만으로도 죽음을 생각해야 했다. 아니, 그가 조금만 더 늦게 나타났더라면 생각할 것도 없었다.
마물들은 물론 마인들까지 압도적인 힘 앞에 맥을 못 추고 있었다. 범에게 달려들다가 무리째 쫓기는 늑대 떼 꼴이랄까?
마침내 분화 마인도 힘이 빠졌는지 더 이상 분신을 만들지 못하고 고골리의 망치에 피떡이 되고 말았다. 회색 대지에 뿌려진 선명한 초록빛이 도리어 현실감을 상실케 했다.
“내 이름은 고골리,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자다! 내 육신은 물들었으나 내 정신은 온전히 나의 것일지니, 어둠의 종속들은 길을 터라!”
흉포함과 거친 기세가 홀로 숲을 채웠다.
웬만한 기세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조노량이지만 고골리의 기세에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기세조차 꺾인 삼류 무사는 검을 겨뤄 보기도 전에 이미 상대에게 목숨을 맡긴 것과 같다. 특히 일정 수준에 다다른 무림인을 상대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경험으로 체득한 바였기에, 조노량은 실력은 모자랄지 모르지만 그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았다. 모자란 실력은 악과 끈기 그리고 치사함으로라도 메워야 한다는 절박함을 가슴에 품고 제현의 뒷골목을 살아왔다.
그것은 이 빌어먹을 세상에 떨어져서도 다르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몸을 낮출지라도 필요할 때는 아낌없이 독기를 드러냈다. 힘은 없더라도 최소한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의 지위는 유지했다. 그건 오직 하나, 그 어떤 존재에게도 스스로 기죽지 않을 만큼의 담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조노량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워 단단히 대지를 디뎠다. 그리고 한껏 가슴을 벌렸다.
적일지도 모르는 자, 싸워 보기도 전에 위축된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넋이 빠진 일행 앞에 종내 하나 남은 마인이 몸을 빼는 모습이 보였다.
마물들을 한갓 짚더미인 양 베어 내며 달려드는 고골리를 감당치 못한 것이다. 겨우 여남은 마리 정도 남아 있던 마물들이 마인의 길을 트기 위해 온몸을 던져 고골리의 길을 가로막았지만, 오래지 않아 전멸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그 짧은 틈에 불꽃을 뿜어내던 마인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마인을 놓친 것을 확인한 고골리는 ‘어흥’ 하고 짐승 같은 포효를 터트린 후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켰다.
숲을 가득 채우던 흉포함이 천천히 사그라졌다. 그러나 붉게 충혈된 두 눈은 아직 기세를 거두지 않았다.
그는 초록빛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거검을 곧추세우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일행이 위치한 언덕 위를 향했다.
“언제까지 그곳에 있을 텐가? 내려올 힘조차 잃었단 말인가? 켈커티스의 후예여!”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아직까지 엎드려 있던 샤마노프와 차츠라가 몸을 일으켜 세운 후 외쳤다.
“정녕 고골리 당신이란 말입니까?”
“나를 아는가?”
안도감을 느낀 차츠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3군단 1사 제4기대 출신 어린 차츠라가 제5기대 기대장을 뵙습니다.”
고골리가 의외라는 듯 눈을 가늘게 뜨다가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어린 차츠라라? 전혀 어려 보이지 않는군. 하지만 좋다. 아직까지 나를 기억하는 자가 남아 있다니, 나쁘지 않다.”
“많이…… 변하셨군요?”
본인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지만 조노량이 느끼기에는 떠보는 것이 틀림없는 말투였다.
“내 이름은 고골리! 정의로운 켈커티스의 시민이며, 부러지지 않는 켈커티스의 검! 고골리다. 그리고 나 고골리는 인간이며, 또 앞으로도 인간일 것이다! 젊은 친구여, 이제 그만 언덕에서 내려와라! 가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외모는 마물에 가까울 정도로 흉측하게 변해 있었으나 인간임을 당당히 외치는 모습에 차츠라는 의심을 털어 버리는 것은 물론 진한 감동마저 느꼈다.
차츠라와 일행들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추스르며 언덕을 내려갔다.
“현재의 소속은?”
“밝힐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그늘에 종사하고 있는가?”
살짝 얼굴을 찌푸리던 고골리는 어차피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는 듯 시선을 샤마노프에게 돌렸다.
“그대는?”
“2군단 3사 제7기대 기대장 샤마노프입니다.”
고골리는 샤마노프를 일별하고 조노량에게 시선을 돌렸다.
“특이하게 생겼군. 그대는?”
고골리에게 질문을 받은 조노량은 어이가 없었다. 저런 모습을 하고도 도리어 자신에게 특이하게 생겼다고 할 수 있는가?
“크로아지크 검투반의 조노량이오.”
“크로아지크 출신임은 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 있을 이유가 없지! 난 소속을 물었다.”
“그게…… 잘 모르겠소.”
“뭣?”
고골리의 충혈된 눈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켈커티스의 전사가 소속도 모른다?”
고골리의 시선이 다른 둘을 향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이자도 일행이 맞느냐고 묻는 듯했기에 샤마노프가 나서서 대신 말했다.
“분명 켈커티스 연합 소속입니다. 다만 오지 징집병 출신이라…….”
“한낱 졸병 출신을 이곳에 보내? 이 마계의 문에? 졸병을?”
그 말에 샤마노프가 서둘러 변명을 했다.
“그는 A클래스입니다.”
확신은 없지만 그가 크로아지크에서 활동하던 시기에도 클래스가 나뉘어졌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 말에 고골리의 붉은빛 눈에 이채가 어렸다.
“두 번째 클래스?”
반색을 하며 샤마노프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톱이었습니다.”
고골리의 찌를 듯한 시선이 조노량의 신체 구석구석을 훑다가 혼잣말인 양 나지막이 읊조렸다.
“설마 주인이 말한 자가 이자였던가? 나로선 가늠하기 힘들군.”
어색한 상견례가 끝나고 일행은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마인 하나가 도주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제 마물들이 몰려들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남쪽을 따라 서둘러 걸음을 놓는 일행의 등 뒤로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고골리가 방금 정리를 끝낸 언덕 아래 폐허가 된 숲에서였다.
두 개의 그림자는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서서 사라져 가는 일행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흐, 그들을 도와줄 이유가 있습니까?”
“옛정이라지 않습니까? 사람이라면 정이 있어야지요, 티프.”
호리호리한 몸매에 준수한 외모가 돋보이는 젊은 사내. 하지만 그런 외모와는 달리 창백한 안색이 음침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사내는 손에 쥐었던 몇 개의 물체를 바닥에 던져 내렸다.
발치께에서 데구루루 구르는 물체들은 제대로 된 구형이 아니었던 듯 곧 구르기를 멈추었다. 초록빛 비늘로 가득 덮인 박쥐날개 모양의 귀를 가진 물체, 마인들의 머리였다.
사내의 손에서 떨어진 마인의 머리는 다섯 개였다.
손바닥을 털어 낸 사내가 밝은 웃음을 자아내며 질문을 한 사내, 티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티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크흣, 사람이라고요? 지나가던 좀비가 웃겠습니다.”
“좀비가 웃기도 합니까?”
“클클, 말을 말죠.”
“그 말은 나를 무시하겠다는 말인가요?”
정색을 하는 사내의 몸에서 음침한 기세가 일었다. 그러자 티프는 급히 안색이 굳어지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영혼의 주인이시여, 미천한 종의 허언을 용서하소서.”
“푸하하하, 이거 천하의 티프가 어째서 농담과 진담도 구별 못 하는 것입니까? 그만 일어나세요, 장난이었습니다.”
“옛! 주공.”
“루드라 부르라 했지요?”
사내의 이름은 루드였다. 한때 조노량과 한 소조를 이뤄 생활했던 4반의 신출내기. 또한 크로아지크를 탈출해 사라진 삼인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예, 루드 님!”
“쯧,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그나저나 이번 일로 그분들이 진노하실 것입니다.”
그 말에 루드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대꾸했다.
“흥, 내가 어째서 그들의 눈치를 봐야 합니까? 힘도 어느 정도 회복했고, 또 어차피 모시는 주인도 다릅니다만?”
티프는 어두운 안색으로 대답했다.
“클,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 땅은 그분의 권능과 권속(眷屬)들로 채워진…….”
루드는 가소롭다는 듯이 티프의 말을 끊어 냈다.
“그만한 군대를 거느리고도 기형아 한 놈을 어쩌지 못하는 놈이 무슨 마왕이라고? 대가리에 똥만 찬 미련퉁이 자식들일 뿐입니다.”
“컬! 듣습니다.”
“듣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입니까?”
그때 마인이 도주했던 동쪽으로부터 검은 물체 하나가 날아와 루드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가셨던 일은 잘 해결되었겠지요?”
머리를 숙이고 예를 취하는 거구의 사내를 향해 루드가 질문을 던졌다.
그 말에 거구의 사내는 허리춤에서 머리 하나를 꺼내 루드에게 바쳤다. 마인의 머리였다.
루드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는 말없이 몸을 일으켜 루드의 오른쪽 뒤로 돌아가 턱을 치켜들고 꼿꼿이 섰다.
물경 이 미터에 이르는 거구의 사내는, 놀랍게도 4반의 부반장인 허글러였다.
여전히 거만하다 느껴질 정도로 당당한 모습이었으나, 분위기는 전과 달리 어딘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졌다. 물씬 풍겨 내던 전사의 기질이 아닌, 먹이를 두고도 딴전을 피우는 투견 같은 느낌이랄까? 여전히 무심한 듯하면서도 주변을 옭아매는 끈끈함을 간직한 분위기였다.
“역시, 부반장님은 일처리가 확실하다니까. 고생하셨습니다. 아함, 그나저나 재미는 있었습니다만, 밤을 샜더니 곤합니다. 이제 그만 쉬러 갈까요?”
루드는 크게 하품을 한 후 설렁설렁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입에서 나지막이 노랫소리가 흘러 나왔다.
“머리를 삶았으니 언젠가 귀도 익겠지요. 루루~ 지루하더라도 솥뚜껑을 열면 안 된답니다.”
☆ ☆ ☆
*주운*
초원에는 평화로움이 가득했다.
서쪽 수평선은 이른 노을을 받아 밝은 오렌지 빛으로 산란되고 있었다. 발목을 덮는 키 작은 잔디 사이에 숨은 귀뚜라미들이 노래를 준비하고 있었고, 진하지는 않지만 먹구름이 분명한 작은 구름들이 노을을 받아 예민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녀는 생명력이 가득한 봄날의 초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분홍색으로 예쁘게 물들인 그녀의 나풀거리는 원피스는 바람을 맞아 이리저리 살랑거리며 날아다녔다.
비를 내릴 만큼 진한 구름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넓은 초원 위로 부드러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봄의 햇살을 받아 따스하게 데워진 비였다.
샤롤르와 난 보슬비를 맞으며 초원을 뛰어다녔다. 물기를 머금은 풀잎이 바짓가랑이를 촉촉하게 적셨지만 무슨 상관이랴. 그녀가 저리 좋아하는데, 무엇인들 반갑지 않겠는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가슴이 부풀 지경이었다. 작고 귀여운 우리 샤롤르는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껑충한 원피스가 젖어 허벅지에 자꾸 달라붙자 울상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비를 피해 후박나무 아래로 달려갔다.
거기서 서로를 사랑했다.
풋풋한 젊음이 가득한 아름다운 얼굴과 그 아래로 뻗은 가는 목덜미를 쓰다듬고, 아직 여물지 않은 두 개의 젖무덤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가녀린 사슴처럼 떨고 있었지만 기대와 두려움이 혼재된 눈빛을 하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깊은 호수와 같은 그녀의 눈빛은 마치 세상 밖으로 통하는 통로처럼 나를 빨아들였다.
내 손끝이 그녀의 배꼽을 지나 작고 앙증맞은 수풀에 도달하자, 그녀는 내 목덜미를 끌어당겨 눈길을 맞췄다.
‘눈을 보여 줘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녀와 함께 이번 생애는 아름다울 것으로 믿었다.
그렇게 하겠다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다짐했다.
수백 년을 살아오며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다섯 번을 결혼했지만, 한 번도 진정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는 것만 같았다. 그건 오직 그녀를 만났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다. 그만큼 샤롤르는 특별했다. 그녀에게는 내 영혼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우린 행복했다. 외지인임에도 불구하고 마을 주민들은 나를 식구처럼 따뜻하게 대해 줬고, 우리가 결혼해 작은 오두막을 하나 차지할 것이라는 데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수백 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우연과 우연이 겹쳐, 불행과 불행이 겹쳐 동시에 몰아닥친 걸까? 아니면 나에게는 이런 사랑이 있어선 안 된다고 믿는 신들의 저주일까?
회상에서 깨어난 주운은 서둘러 눈가를 훔쳤다.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노인의 얼굴을 하고서 눈물이나 질질 짜고 있다니.
볼 사람도 없었지만 주운은 힐끔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맑은 대기와 하얀 나무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우윳빛 막이 눈에 들어왔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계의 문에서 유일한 해방구(解放區)라고나 할까?
주운의 시선이 나무들 중 하나에 머물렀다. 어쭙잖은 모습의 키 작은 나무였다. 비뚤어지고 구부러진 줄기와, 흰색 나뭇잎을 겨우 몇 잎 매달고도 위태롭게 처져 있는 가지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주운은 저 나무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주변에 곧고 멋지게 뻗은 줄기를 가진 그 어떤 나무들보다, 저 휘어지고 볼품없는 나무야말로 이 공간을 지탱하고 있는 진정한 힘이었다.
주운 자신조차도 섣불리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하고 신성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저 작은 나무의 힘은 어디까지일까?
이게 가능한 일일까? 마계의 문 한복판에 지름이 이 킬로미터나 되는 거대한 결계(結界)를 유지할 수 있다니.
만약 자신이 온힘을 다 쏟아 내 홀리필드를 펼친다면? 한 시간도 유지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럴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그러나 저 나무는 무려 오백 년간 이 공간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저 나무가 작고 볼품없는 모습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저 나무가 유지하고 있는 이 공간은 그 어떤 부정한 존재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신과 자신의 가디언들을 받아들여 준 것은 고맙고도 신비한 일이다.
이제 자신의 가디언들에 이끌려 당도하게 될 인간들의 운명도 저 나무가 결정할 것이다. 이곳으로 이끈 것은 자신의 의지였지만, 이 공간에 존재할 수 있느냐는 오직 저 나무의 선택이다.
☆ ☆ ☆
밤새워 기진하도록 싸우고 당장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부상을 당했음에도 차츠라는 달리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의문이 들었지만 어쨌거나 달리고 있었다.
치명적인 대부분의 부상보다 오히려 거치적거리는 것은 발의 상처였다. 관통된 것에 비해 결코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출혈이지만, 낡은 가죽 구두에 자꾸 피가 고여 들어 거추장스럽기 그지없었다. 통증은 둘째 치고 미끄덩거리는 피가 자꾸 발을 헛돌게 하고 있었다. 그 덕에 벌써 몇 번이나 굴러야 했다.
또 한 번 구르고 나서는 더 이상 짜증을 참지 못하고 신발을 벗어 버렸다.
한결 낫다.
썩은 나뭇가지와 불결한 흙덩이가 벌어진 상처를 헤집고 속살로 파고들었다. 디딜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에 머리카락까지 쭈뼛 서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낙오될 수는 없다. 애써 무시했다. 그래,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다. 얼마든지…….
“제군들, 늦어도 반나절이면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 볼 수 있을 거다.”
얼마나 달렸을까? 우렁우렁한 고골리의 목소리에 차츠라의 정신이 돌아왔다.
이런 바보 같은? 아무리 안내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 생각 없이 달려왔다니, 그늘에 종사하는 자로서 완전히 실격이다.
차츠라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방향도 맞았고, 대규모 인원이 이동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아, 드디어! 이 개월이 넘는 추적 끝에 결실을 보는구나.
샤마노프는 벌써부터 들떠 희죽이고 있었지만, 노리앙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무지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차츠라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그는 고골리가 나타나기 전까지 일행의 실질적인 리더였으며 대부분의 무력이었다. 냉철하고 차분한 판단과 결단력 있는 행동 그리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보여 주었다.
차츠라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정작 수십 년간 그런 훈련을 받아 왔던 자신은 극한의 상황에 몰리자 모든 것을 잊은 듯, 매 순간순간 감정의 기복에 따라 제멋대로 행동해 버렸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임무가 임무이다 보니 지금껏 죽음의 위기에 몰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닐진대, 여기에서처럼 감정적이 되어 본 적이 없었다. 이 고약한 땅에서는 도무지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다.
고골리는 한마디 말로 지친 일행을 위로한 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와중에도 마물들은 계속 출현했다. 하지만 그 어떤 마물도 고골리의 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나타나는 족족 고골리의 검과 망치에 피떡이 되기 바빴다. 하지만 숲을 벗어나 드넓게 펼쳐진 평원에 도달했을 때, 고골리는 처음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대략 천 마리쯤?
숲을 빠져나온 일행의 앞에 펼쳐진 광경은 마물의 시체를 가운데 두고 수십 마리씩 모여앉아 식사 중인 오크 떼의 모습이었다. 보통의 오크보다 머리 하나 정도 큰 회색 오크 떼가 한참 마물들의 속살을 파먹고 있는 한복판에 온전히 몸을 드러낸 것이다.
평소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늘 앞서 마물들의 기운을 눈치채곤 했던 노리앙조차 멍한 표정으로 고골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너무 지친 탓일까? 아니면 고골리라는 존재가 경계심을 누그러트렸던 탓일까?
반면 고골리는 이미 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껏 그래왔듯이 무시한 듯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숫자는 절대 무시할 만한 숫자가 아니었다.
“이런 빌어먹을! 이 정도였나? 난감하군.”
놀라기는 오크들 역시 마찬가지인 듯 초록빛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살점을 든 채로 굳어 있었다.
잠시간의 정적은 서둘러 글록을 잡아 가는 오크들의 부산한 움직임에 깨져 나갔다.
“염병, 좆 됐군.”
언제부터인가 욕설을 입에 담기 시작한 샤마노프가 단창을 고쳐 쥐었다.
오크들은 일행이 빠져나온 숲 입구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일행을 둘러섰다. 하지만 섣불리 달려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오직 고골리만을 향해 있었다.
고골리는 오크들이 둘러싸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오크들 사이를 유심히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저들 사이에 혹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보이나?”
일행은 그가 말하는 존재가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마인들마저 궁지로 몰아넣었던 검은 연기에 대한 기억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다행히 오크들 틈에는 어떠한 다른 존재도 보이지 않았다. 드문 일이었다. 기형 마물들과 대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한 진영. 그들의 주력 중 하나가 바로 회색 오크들이다. 그러나 그동안 보아 왔던 회색 오크는 단독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군대는 대륙에서 흔히 몬스터라 칭하는 존재들, 즉 오우거나 고블린, 트롤, 심지어는 언데드 몬스터인 좀비 등이 혼재된 군대였다.
눈앞에 보이는 오크 무리는 그 어떤 다른 존재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순수한 오크들로만 이루어진 무리였다.
고골리도 그 사실을 확인했는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무리는 없겠군.”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하얀색 거검을 어깨에 걸친 고골리가 앞으로 성큼 나섰다. 그러자 오크들은 이빨을 드러내며 이 사이로 ‘취익’ 하는 위협성을 토해 놓았다.
그때 유난히 검은 오크 한 마리가 다른 오크들을 헤치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검은 오크가 앞으로 나서자 다른 오크들이 알아서 길을 열어 주었다. 아마도 우두머리쯤 되는 오크인 듯했다.
다른 오크들보다 크기도 했지만 그보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두꺼운 몸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절대 뚱뚱하다고 표현될 몸은 아니었다. 온통 울퉁불퉁한 근육질로 뒤덮인 당당한 몸집이다. 뭐 아무리 당당하다고 해도 고골리 앞에 서면 초라할 뿐이지만!
검은 오크는 전혀 위축됨이 없이 고골리를 향해 마주 섰다.
검은 오크가 마물의 넓적다리뼈쯤으로 보이는 무기를 들어 올렸다.
“치익!”
곧이라도 전투가 개시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순간, 검은 오크의 시선이 고골리를 넘어 조노량 등에 미쳤다.
그 순간 굳게 다물려 있던 오크의 입이 헤벌쭉 벌어지며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검은 오크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고골리는 오크의 행동이 의외라는 듯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검은 오크는 좌우로 호위하듯 다가서던 한 떼의 오크들을 향해 뭐라고 떠들더니 뒤로 돌아서서 팔을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저거, 저거? 노리앙?”
샤마노프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일행을 둘러보았다.
조노량과 차츠라도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두어 달 전 만났던 오크를 떠올린 것이다. 마물들을 자신들에게 떠넘기고 유유히 손을 흔들며 사라졌던 오크가 생각난 것이다. 유난히 몸이 두꺼웠던. 그리고 검은빛을 띤 피부하며, 생김새까지는 구별하기 힘들었지만 그 오크일 것이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검은 오크가 뒤로 물러나자 일행을 에워쌌던 오크들도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고골리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일행을 돌아보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던져 왔다.
“혹시 친한 오크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