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생기-38화 (38/142)

38. 주운

‘과연 사랑했을까?’

주운은 흰 나무에 등을 기대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세월을 살아왔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이름을 가졌고, 수많은 사랑을 해 왔다. 하지만 난 진정 사랑을 했던 걸까?

주운의 상념은 길어졌다. 시간은 썩어날 만큼 많았다. 몽롱한 눈길이 하늘을 향했다. 뿌연 우윳빛 막 너머로 탁한 회색빛 대기가 답답하게 하늘을 짓누르고 있었다.

과연 그녀에 대한 사랑은 진심이었을까? 아직까지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린 것을 보면 거짓된 감정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왜 유독 샤롤르에게만 특별한 감정을 느꼈을까? 오백 년이 지난 지금껏 잊지 못하는 것일까?

주운은 머리를 털었다. 가슴이 아린 만큼 불쾌한 감정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감히!’

주운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틀어 내리며 중얼거렸다.

자신의 손에 멸망한 왕국이었지만 아직까지 분노가 다 가라앉지 않았다.

이성적인 이들이라면 합당한 대가를 치른 자들에게 분노를 남겨 두지 않겠지만,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 왜? 샤롤르를 되찾지 못했으니까!

탈루한! 버하무디 드 탈루한을 시작으로, 탈루한이란 성을 가진 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남겨 두지 않았다. 가계(家系)가 달라도 성(姓)이 같다면 자신의 분노를 피할 수 없었다. 그 더러운 피를 말려 버리고, 그들의 나라를 멸했지만 떠나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으니까. 바로 이곳 마계의 문으로 말이다.

그때 절대 마을을 떠나선 안 되는 거였다. 마계대전이 끝난 지 겨우 이십 년 남짓, 그 무법한 시기에 그녀를 남겨 두고 떠나다니. 절대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

한 달, 그 촌음(寸陰) 같은 시간에 그토록 큰일이 벌어질 수 있다니?

한 달간의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마을은 불타고 있었다. 약탈당하고, 살해당하고, 강간당하고 있었다. 계곡을 끼고 겨우 이십 가구가 정착한 작은 산골 마을에 왜?

일견해도 이백은 되어 보이는 군대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마을 주민들을 살육하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불꽃과 비명 소리, 불구덩이를 뚫고 도망가는 촌로(村老)를 뒤에서부터 베어 버린 기사의 광소(狂笑)가 넋을 잃은 주운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마을은 이미 죽은 자들로 가득했다. 강간당하고 창에 꿰뚫려 마지막 숨결을 토해 놓는 아낙의 밭은 숨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주운은 달렸다. 마을 끝 샤롤르의 아담한 통나무집까지, 일직선으로 달렸다. 바위가 가로막으면 바위를 깨트렸고, 집이 가로막으면 집을 뚫었다. 놀란 병사들과 기사가 주운을 가로막았지만 단 한순간도 주운의 걸음을 늦출 수 없었다. 주운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누구든 산산이 부서져 나갈 뿐이었다.

샤롤르의 집에는 열 명 남짓한 기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주운은 가로막힌 통나무 벽 너머로 눈물 소리를 들었다.

마계대전에서 살아남은 역전의 기사 열 명이 무도한 침입자에게 응징을 가하려 했지만 곧 그럴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불타올랐고, 얼음덩이가 되어 깨져 나갔다. 주운이 멍한 눈빛으로 다섯 걸음을 떼는 사이에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죽어 가는 동안 주운은 한 번도 기사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마치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곳을 걷듯 천천히 통나무집을 향해 다가갈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익숙한 통나무집의 여닫이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스며든 빛이 어둑한 실내를 비췄다.

침대 머리에 양손이 묶인 샤롤르, 그 하얀 어깨가 생기를 잃고 들썩이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들썩이는 샤롤르의 나신(裸身)과 문 쪽을 향해 기울어진 샤롤르의 얼굴. 굳어진 주운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인식하지 못하는 샤롤르의 죽은 눈빛과 그 아래로 한없이 흐르고 있는 가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탄 건장한 남성이 화들짝 놀라 물러서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장면에 주운은 감히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설 생각도 못하고 문 앞에 머물러 있었다.

다음 순간 남자가 롱소드를 집어 들고 돌진하는 모습을 보며 주운은 샤롤르를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남자는 주운을 향해 절반쯤 돌진하다가 굳어져 버렸다. 치켜들었던 롱소드를 내리지도 못하고 눈동자만 굴려댈 뿐이었다. 주운은 당황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으로 굳어진 남자를 지나쳐 샤롤르에게 다가갔다.

샤롤르는 마치 인형처럼 무방비한 상태로 늘어져 있었다. 부풀어 반쯤 감긴 오른쪽 눈두덩에 머물던 주운의 시선이 샤롤르의 가느다란 쇄골을 지나쳐 여전히 빛나는 젖가슴과 매끈하게 뻗은 복부에 닿은 후, 작은 배꼽에 머물렀다. 주운의 떨리는 시선은 그 아래까지 차마 내려가지 못했다. 기괴한 각도로 꺾인 왼쪽 다리와 단검에 꿰뚫려 침대에 고정된 오른 발등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아직도 쿨럭이며 흘러나오는 피가, 침대를 흥건히 적신 붉은 액체가 어디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함부로 그녀를 범한 자는, 성급했을 것이다. 그녀의 여린 성기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남자는 거칠었을 것이다. 그녀는 젖어 있지도 못 했을 것이다.

주운은 그녀의 피로 얼룩진 침대보로 그녀를 감싸 안아 들었다. 주운의 눈에 핏발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주운은 샤롤르를 안아 들고 통나무집을 나섰다. 그 뒤로 남자의 벌거벗은 몸이 두둥실 떠올라 주운을 뒤따랐다. 굳어진 그의 손에는 아직도 롱소드가 쥐어져 있었다.

주운의 난입에 놀란 병사들이 제각기 무기를 찾아들고 허둥대고 있었다. 통나무집을 향해 몸을 날리던 기사의 몸이 터져 나갔다. 피와 살점이 비산(飛散)하여 다른 병사의 몸을 때렸고, 불붙은 마을 집으로 날아갔다. 집이 터져 나갔고, 다시 병사가 터져 나갔다. 기사가 터져 나갔고, 강간당하고 죽어 가던 아낙이 터져 나갔다. 창에 꿰뚫린 소년이 터져 나갔고, 촌장의 시체가 터져 나갔고, 나무가 터져 나갔다.

마을이 모두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수초에 지나지 않았다. 싸늘한 대지 위로 방금 도축된 고기의 체열이 김이 되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주운의 뒤로 허공 삼 미터쯤 떠 있던 남자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주운이 남자에게 ‘넌 누구지?’라고 물었다. 남자는 ‘피아란 왕국의 제1왕자 버하무디 드 탈루한’이라고 애써 위엄 있는 목소리로 경고하듯 대답했지만 목소리에 묻어 있는 두려움과 떨림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로부터 사흘간 버하무디 드 탈루한은 극한의 공포 속에 미쳐 가야 했다.

주운은 식물처럼 잠들어 버린 샤롤르를 안고, 또한 벌거벗은 버하무디를 공중에 매달고 피아란 왕국을 좌에서 우로 아래에서 위로 훑고 다녔다. 잠도 자지 않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사흘간 피아란 왕국의 모든 도시와 영지를 방문했다. 그 사흘간 마계대전에서 겨우 복구되었던 왕국은 복구되기 전보다 더 황폐하게 변해 갔다.

왕을 비롯한 모든 지배 계층이 사라졌고, 그들을 지키려 했던 이름 높은 기사와 마법사가 죽었으며, 군대가 사라졌다. 탈루한이라는 성을 가진 자는 어느 곳에 있건 버하무디의 눈앞에까지 끌려 나와 잔혹하게 분시(分尸)되었다. 공중에 매달려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부왕과 친어미와 누이와 아내와 어린 자식들의 팔다리와 내장이 조각나 길바닥에 뿌려지는 장면을 보아야 했다. 권력 다툼에 밀려 유배되었던 이복동생들의 배가 갈리고 성기가 도려내져 돼지 구루에 던져지는 장면을 보아야 했다. 그 끔찍했던 마계대전에서도 살아남은 오백 년 역사의 왕국이 사흘 만에 몰락하는 장면을 목도해야 했다.

단지 여흥을 즐겼을 뿐인데, 하찮은 화전민 몇 놈을 죽이다가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녀를 발견하는 횡재를 했다 여겼을 뿐인데, 그 결과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탈루한은 미쳤다. 마침내 왕국이 온전히 멸망했을 때, 버하무드는 미친 상태로 주운의 분노를 받아야 했다. 살갗이 미리 단위로 저며져 결국 붉은 고깃덩어리가 되어 갈 때까지, 산 채로 눈알이 뽑히고, 혀가 뽑히고, 고막이 뚫려 어떠한 감각도 남지 않아, 온전히 어둠이 찾아 올 때까지, 그리고 그 상태로 다시 사흘이 지나고서야 버하무드는 겨우 안식을 취할 수 있었다.

샤롤르는 깨어났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죽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힐링을 퍼부었으나 단검에 꿰뚫린 오른 다리와 달리 그녀의 왼쪽 다리는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뼈가 열두 토막이 났으며 일부 구간은 너무 잘게 부서져 도저히 원상 복구가 불가능했다. 여전히 나의 공부는 부족했다.

절뚝거리며 걸을 수 있게 되자 그녀는 말없이 길을 떠났다. 붙잡아도 소용없었다. 여전히 죽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할 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잡으면 섰고, 놓으면 다시 걸었다. ‘어디로 가려 하느냐?’라는 물음에도 그저 멀거니 바라볼 뿐 답하지 않았다.

낮이든 밤이든 그녀는 움직였다. 잠들려고도 하지 않았고, 먹거나 마시려고도 하지 않았다. 육체적 한계에 부닥쳐 기절할 때까지 그녀는 걸었다. 기절했을 때가 그녀의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으나 깨어나면 다시 걸었다. 난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나도 휴식하지 못했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원한다면 일 년이든 이 년이든 깨어 있을 수 있었다. 들판을 건너고, 산을 넘고, 물을 만나면 물을 건네주었다. 전쟁이 끝났지만 곳곳에 숨어든 마물들이 존재했다. 그중에는 상당한 고위 마족들도 존재했으나 나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나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존재는 그녀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내 안위보다는 그녀의 안위가 우선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나자 그녀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나의 보잘것없는 힐링으로는 더 이상 그녀의 몸을 돌볼 수 없었다. 그때쯤 우리는 어느 수도원 앞을 지나고 있었다. 대지의 여신 로리안을 모시는 작고 초라한 수도원이었다. 유아의 걸음걸이보다 두 배는 느린 걸음으로 수도원을 지나쳐 가던 그녀가 몸을 돌려 수도원으로 향했다.

그녀가 걷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그녀의 걸음에 목표가 생겼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텃밭을 가꾸던 늙은 수도사를 지나쳐 오래돼 빛이 바랜 나무문을 두드렸다. 걷는 것 외에 그녀가 스스로 행한 최초의 행동이었다.

조용히 문이 열리고, 텃밭을 가꾸던 수도사만큼 늙고 마른 수녀가 그녀를 맞이했다. 둘 다 아무런 말이 없었고, 나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따라 수도원으로 들어서려 할 때 샤롤르가 몸을 돌려 나를 막아섰다. 가만히 내 가슴에 손을 올리고 내가 수도원으로 들어서는 것을 거부했다. 그녀의 눈빛에 정말 오래간만에 작은 의지가 드러났다. 나를 거부하는 의지였지만 기뻤다.

내 앞에서 수도원의 낡고 약한 문이 닫혔지만 난 감히 그 문을 넘어설 수 없었다.

텃밭을 일구던 늙은 수도사가 쟁기를 내려놓고 나에게 다가왔다.

“자네는 강대한 마법사로군.”

거짓을 고할 수 없는 진실의 눈을 가진 수도사였다.

“애초에 내정된 그녀의 운명일세. 자네라 해도 바꿀 수 없는 일이네.”

그리고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이곳에 머문다면 그녀에게 안식이 주어지지 못할 거네.”

그래서 난 다시 걸었다. 언제나 내 앞에서 작은 걸음을 떼어 놓던 샤롤르가 없었지만 내 걸음걸이는 빨라지지 못했다. 아주 느리고 안정되지 못한 걸음걸이로 오랫동안 수도원이 바라보이는 들판을 건너갔다.

☆ ☆ ☆

그렇게 수도원을 떠나왔으나 난 수도원을 떠날 수 없었다. 수도원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석 달이 지나도록 수도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의 마법으로 그녀가 살아 있음은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녀가 보인 거부의 몸짓을 기억하며 차마 그녀를 만나러 가지는 못했다. 다시 석 달이 지나고 드디어 그녀가 수도원 밖으로 몸을 드러냈다. 건강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신이 돌아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며 늙은 수도사와 함께 텃밭을 일궜다. 그리고 살포시 미소 지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미소였다.

다시 몇 개월이 지났다. 그녀의 얼굴이 햇볕에 그을려 건강해 보이던 어느 날, 난 그녀를 찾았다. 들판을 가로질러 천천히 걸어갔다. 거칠어진 손으로 쟁기를 끌던 그녀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건강해 보이는군.”

그녀에게서 성력(聖力)이 느껴졌다.

“로리안의 품에 귀의했으니까요.”

역시.

“수녀가 되기로 한 건가?”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죄악이 씻기길 기원하고 있어요.”

새삼 분노가 솟구쳤다.

“수천의 피로도 당신의 상처를 대신할 수 없다!”

그녀는 슬픔이 가득 찬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돌아가 주세요. 이제 샤롤르는 없답니다.”

한참 동안, 눈물을 떨굴 듯한 그녀의 젖은 눈을 바라보다가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의지를 읽었기 때문이다.

돌아서는 나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 생에서 꼭 함께 행복하길.”

다음 생에서라? 다음 생? 그런 것이 있기나 한 걸까?

그녀는 틀렸다. 설사 다음 생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난 영원을 걷는 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들판을 가로지르며 생각했다.

‘당신의 죄악이 씻기길 기원하고 있어요…….’

설마?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한 결론이었다. 나 때문이었단 말인가? 그녀의 복수가…… 아닌 나의 복수였단 말인가?

그녀에게 상처를 낸 것은 버하무디였지만, 그녀의 상처를 후벼 파고 아물 수 없을 정도로 벌려 놓은 건 나였구나. 그녀의 분노가 아닌, 나의 분노가 왕조를 멸하고, 수많은 피를 뿌렸던 거였다.

언제부터인가 난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나 보다. 아니, 나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죄악이…….’

수천의 인간을 죽이면서도 마치 개미를 눌러 죽이듯 아무런 감응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분노만 토해 놓았다.

‘죄악이 씻기길…….’

과연 언제부터 난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었던 것일까? 인간의 목숨 따위는 하찮게 여기게 되었던 것일까?

‘기원하고 있어요…….’

그런 나를 위해서? 그런 것인가?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사랑했었기에 그녀는 나를 몰랐다. 어쩌면 나도 그녀와의 사랑이 단지 유희라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이……, 그게 아니었는데? 아, 이해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내가 그녀에게 보여 준 모습은 인간이 볼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나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거기서 지옥을 봤을 것이다.

왜 배려치 못했던가? 그녀는 아직 여물지 못한 소녀였을 뿐이다. 끔찍한 고통을 받고 강간당한 여린 영혼이었을 뿐이다. 그녀에겐 복수가 아닌 안정과 사랑이 필요했던 거였는데, 난 잔혹한 복수를 선물해 주었다.

‘당신의 죄악이 씻기길 기원하고 있어요.’

어쩌면 난 그녀의 영혼이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을 만큼 그녀의 영혼이 회복되었음을 로리안께 감사드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영혼에 아물 수 없는 상처를 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기에 한참 동안 그녀를 보러가지 못했다.

그로부터 삼 년 후 용기를 내어 다시 수도원을 찾았을 때, 그녀는 이미 수도원을 떠난 후였다.

늙은 수도사가 나를 맞아 수도원 안으로 이끌었다. 절대 넘어설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낡은 수도원의 나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홀이라기보다는 거실에 가까운 작은 공간이었다. 낡고 헐은 가구 몇 개와 로리안의 성물(聖物)이 정갈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입구로부터 북쪽엔 기도를 위한 깔개와 촛대가 놓여 있었고, 남쪽엔 빛이 바랜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탁자로 나를 인도한 수도사는 조금 쓰고 떫은 차를 내온 후에야 나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크리스티나 성녀님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라네.”

달리 말하지 않아도 크리스티나가 그녀의 세례명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말을 뗀 후 수도사는 덤덤히 몇 가지 사실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녀가 성력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과 그로 인해 이 년 전에 나르폴리시의 신전으로 옮겨 갔다는 것 그리고 그 얼마 후 제3차 마계 원정대에 자원해 떠나갔다는 것…….

난 충격에 휩싸여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수도사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내실로 들어가 뭔가를 꺼내 왔다. 로리안의 상징물 중 하나인 팽이였다. 나무로 어설프게 깎은 작고 볼품없는 팽이였다.

“자네가 찾아오면 주라더군.”

수도사는 팽이를 내 찻잔 옆에 가만히 놓아두고 말을 이었다.

“우주만물은 균형 속에 존재한다는 의미 외에, 만사(萬事)가 귀의(歸依)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는 성물일세. 성녀님과 자네의 인연은 언젠가 다시 이어질 것이네.”

여전히 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만들었다는 팽이를 쥐고 사흘간 그 탁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리로 날아왔다. 이 마계의 문으로 말이다. 이미 그녀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주운은 오랜 회상에서 깨어났다. 그들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역시 가디언을 둔다는 것은 여러모로 편리한 일이다. 주운은 낡고 초라한 팽이를 만지작거리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답답한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는 그냥 무심히 지나칠 뻔했다. 인간이 마계의 문에 들어서는 것이 드문 일이기는 했지만 아예 없는 일도 아니었다. 모험가 무리도 있었고, 도망자들도 있었다.

숫자가 좀 많다는 것과 제법 강한 전사들이라는 것 역시 그다지 흥미를 끌 만한 요소는 아니었다.

나이를 잊을 만큼 오래 살게 되면 웬만한 일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더구나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는 애초에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대부분의 일이 한 번쯤 겪어 본 일이고, 뭐 겪어 본 적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 결과는 대충 짐작할 만했다. 설사 짐작이 빗나가더라도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하고 넘겨 버릴 정도로, 모든 일이 심드렁했다.

‘이곳도 이젠 더 이상 조용한 장소는 아니군.’

조용한 산맥이라도 하나 찾아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때는 제법 조용한 곳이었는데, 새로운 마물들이 나타난 이후로 많이 시끄러워졌다. 그들과 함께 나타난 못생긴 마물들은 그래도 참아 줄 만했다. 감히 내 휴식을 방해할 만큼 간덩이가 부은 마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겁 없는 마족 나부랭이들은 주제도 모르고 자꾸 귀찮게 한다. 그중 일부는 나로서도 무척 피곤한 존재들이다.

늙다리 드래곤 놈들이 왜 레어를 만들고 가디언까지 두는지 이해할 만하다.

드물긴 하지만 드래곤슬레이어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진 용사 나부랭이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턱도 없는 것들을 일일이 상대해 주는 건 아주 귀찮은 일이다.

그런 이유는 아니었지만 주운 역시 십이 년 전 이곳으로 추방된 인간 셋을 구해 가디언으로 삼아 버렸다. 인간이면서도 상당한 영격을 갖췄던 존재, 폰티나 때문이다. 지능이 있는 존재들이기에 심부름을 시키기도 좋았다.

아니, 어쩌면 심심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인간 세상에 나가 본 지도 오래되었고 말이다.

늙다리 드래곤 놈들은 간혹 폴리모프를 하여 유희를 즐기기도 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한동안 나가 보지 않았지만 가끔 새로운 인생을 즐기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고 보니 가장 최근에 인간 세상에 나갔던 적이 언제였던가? 한 이백 년 되었군. 뭐, 대단한 인생은 아니었다. 이 나이에 드래곤 놈들처럼 영웅놀이나 하고 있을 정도로 유치하지는 않으니까.

난 소박한 생활과 정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왕국에 소속된 평범한 3서클 마법사 짓을 하며 한 오십 년 살았다. 조금 지겨워질 쯤 당시의 아내가 병으로 죽었다. 물론 살릴 수도 있었지만 그래 봐야 십 년? 그만큼 더 살아 봐야 그게 그거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다가 나 역시 실의에 빠져 사망한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무덤에서 적당히 숨죽이다가 그곳을 벗어났다. 그리고 세포를 활성화했다. 늙은 몸을 유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조금은 불편하다.

병 따위는 문제가 아니지만 장기들의 기능이 약화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한 사십 년에 한 번씩은 다시 세포를 활성화한다. 벌써 수십 번 반복한 일이니 숨 쉬는 것만큼 익숙한 느낌이다.

생각이 엉뚱한 데로 빠져 버렸다. 시간이 남아돌다 보니 뭐든 천천히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생각한다고 할까? 그렇지, 그 특이한 자에 대한 생각을 했었다.

그자의 기운은 지금껏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특이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조금 더 들여다보니 엄청난 에너지를 몸속에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 오랜만에 놀라고 말았다.

이 세계에서 그 정도의 에너지를 몸속에 품을 수 있는 존재는 마족들을 제외하곤 드래곤이 유일하다. 물론 자신도 다량의 마나를 품고 있지만 특수한 케이스다.

그렇다면 저자는 드래곤인가?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드래곤이었다면 단번에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린이든, 레드든, 블루든지 간에 각각 자신이 종속된 마나의 냄새를 풍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기운도 풍기지 않았다. 마치 속성이 부여되기 전 자연체 그대로의 느낌이라고 할까? 조금만 주의를 흐트러트리면 아무런 기운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자연 속에 녹아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가 품고 있는 에너지는 마나가 아니었다. 원시 에너지, ‘근원’이었다.

만약 이곳이 어둠의 마나로 가득 찬 마계의 문이 아니었다면 쉽게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흥미로운 일이 생겼다.

그래서 가디언 둘을 보냈다. 어차피 마계의 문에서 마물이 아닌 존재가 쉴 곳이라고는 이곳뿐이다. 그에게도 좋은 일이고, 그의 일행들에게도 좋은 일이다.

지금쯤이면 충분히 힘들었을 터, 감사해할 것이다. 물론 이곳의 진짜 주인이 그들을 받아들여 준다면 말이다.

아직까지 부정한 존재가 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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