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키리 #
명령이 내려졌지만, 움직일 수 있는 이는 없다.
번의 박력에 꽁꽁 옭아매었기도 했지만, 이래도 되나 싶은 거다.
“..태자님.”
지금까지 묵묵히 듣고 있던 노장이 나섰다.
“잠시, 따로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페트릭이다.
“..벨버른을 위한 일이다.”
번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망국의 왕에겐 그의 옛 백성들을 괴롭히는 간악무도한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페트릭은 머리를 흔들었다.
“압니다.”
잠깐 뜸 들이던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자리를 옮길 필요를 못 느낀 거다. 어차피 태자는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렇다면 곧 모두가 알게 될 일이었으니까.
“그리 어렵게 돌아가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
“이 벨버른에는..”
300년간 이어진 벨버른 왕실엔 한 가지 보물이 있었다. 신이 선물했다고 알려진 그것은 왕가의 상징이자, 왕을 증명하는 도구로 여겨졌는데, 이미 망해버린 나라라 할지라도 백성들에겐 충분히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게 있었나?”
“예. 그걸 가져온다면..”
이런저런 수작 없이 말 한마디로 많은 이들을 동원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번은 안다. 과학과 개념이 그토록 발달했던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버젓이 나타났던 현상이니까. 왜, 옛 대통령을 추억하며 집회를 벌이거나 지역주의, 미신, 근거 없는 종교 따위를 신봉하는 자들도 많지 않았던가? 이렇게 힘든 때일수록 이런 것들이 잘 먹히는 법이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
“그게 어디..”
있지? 라고 물으려던 번이 멈칫했다.
“아니다. 나중에 듣지.”
아무리 친위대라지만, 번은 이리도 철두철미하다.
“그리고 본 태자를 위하는 마음은 고마우나, 이건 그리 풀어선 안 되는 일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채업자 보듯 손가락질 받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방구석에서 바닥을 긁는다고 삶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움직여야 뭐라도 손에 잡히고, 입에 넣어봐야 먹을 수 있는지 아닌지 구분할 거 아니겠는가?
번은 벨버른 백성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려는 거다. 다소 몰인정하고 강제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어떤가? 이렇게라도 해야 시궁창에서 벗어나지 않겠는가?
“하나를 버리면 열을 얻을 수 있다.”
번의 말에 힘이 들어갔다.
“하나만 버리면 굶지 않아도 되고, 꿈을 꿀 수 있다. 내일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나 치가 떨리는 악몽이 아닌, 희망 가득한 꿈을!”
번의 강렬한 눈빛을 보며 페트릭이 묻는다.
“그 하나가 무엇입니까?”
그도 왕이었다. 그래서 안다. 무지한 백성들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가 군주를 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마물이라는 것을. 그런데 이 어린 태자는 그 답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편견이다.”
“……!”
번이 옆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 뜻을 읽고, 미루가 사르륵 볼을 붉히며 손을 잡았다.
“미루는 불과 얼마 전까지 사내의 폭력에 무력하게 당하던 여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열 사내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지 않나?”
모두가 그날 밤일을 알고 있었다.
번은 다른 손을 반대편으로 내민다. 다루가 이끌리듯 그 손을 잡았다.
“다루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언니 치맛자락을 잡고 따랐던 아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지?”
번의 친위대를 이끌고 있지 않은가?
“이들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환경이 주어지면 거기에 적응한다.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인간으로 보고 생각하면 간단한 일이다.”
번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지 않나? 온갖 생물로 살아오며 처절하게 겪어봤으니까.
“지금 벨버른은 가난에 적응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지.”
파리, 토끼, 쥐, 늑대, 사슴, 벌레..
온갖 것들로 살아보며 느낀 건데, 놀랍게도 환경에 가장 빨리 적응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나는 그것을 깨려 한다.”
“아..”
페트릭이 느끼는 바가 있는 듯 신음했다.
“새로운 판을 만들어 벨버른을 적응시키고자 한다.”
사람이 환경에 쉽게 적응한다고 무조건 장점으로 볼 순 없다. 단점도 있다. 너무 가볍게 물들고, 빠르게 포기하며 안주한다는 것. 이럴 땐, 강력한 누군가가 속된말로 멱살 잡고 하드 캐리 해줘야 빌빌거리면서도 따라올 것이다.
“가라.”
번은 다시 명령한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듣는 이들의 눈빛이 변했다.
“가서 전하라! 본 태자가 전사를 모집하고 있다고!”
확실한 명분을 주려면, 그럴듯한 이름도 필요할 터.
“부대의 이름을 발키리로 하며 자신의 삶을 손수 개척할 용감한 이들을 내,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라 하여라!”
쁘득.
페트릭의 이가 갈리며, 눈에 불꽃이 일었다.
쿠웅-!
그의 무릎이 바닥에 닿고,
“충!”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왜 이리하지 못했나 회한이 밀려왔지만, 늦지 않았다. 두 눈 크게 뜨고, 똑똑히 볼 것이다. 이 어린 태자가 벨버른을 어떻게 바꾸는지! 그것이 나라를 지키지 못한 왕으로서 이 불쌍하고 가련한 백성들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 될 것일지도 몰랐다.
.
.
.
뚝딱뚝딱.
오랜만에 도시에 망치질 소리가 가득했다. 원체 빈집이 많았기에 새로 짓지 않아도 조금만 보수하면 대 인원을 소용할 수 있는 공간은 넉넉했다.
하나 상단이 파산을 선포하고 잠적하자, 벨버른 백성들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농사가 잘되어 추수를 기다리는 이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진 거다. 그러자 간소한 봇짐 짊어진 여인들이 요세인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자기 입 하나 줄여 가족들 배불리 먹이려는 기특한 마음으로 떠난 장녀, 어머니의 채무를 없애고자 죽을 각오로 떠난 딸. 오갈 때 없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흘러드는 이들까지 사정은 각양각색이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배고프고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이라는 것 말이다.
"여긴가..?"
키리리도 그 중 하나였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동생과 악착같이 버텨왔지만, 얼마 전 동생마저 병으로 죽어버렸다. 살길도 캄캄하여 콱 강물에 뛰어들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기엔 용기도 없었고, 어디 가서 몸이라도 팔아 빌어먹고 살려해도 사줄 남자가 없었다.
그렇게 오갈데 없던 차에,
소문을 들었다. 요세인에 가면 굶지 않아도 된다고. 반신반의하며 떠난 길이었지만, 도착해서 딱 하루 지냈을 뿐인데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거기! 뭘 넋 놓고 섰어! 줄 서라고! 줄!”
공터엔 2천 명이 넘는 여자들이 바글바글했다. 남자 하나 없이 여자만 이렇게 많이 모여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저 위에 나무로 만든 5m짜리 탑에 서서 호령하는 여자도 생소했다. 딱 봐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같은데, 스물도 안 되어 보이지 않나?
“모두 주목-!”
그녀의 뾰족한 음성에 여자들이 입을 다물고, 올려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쉽지 않았을 거라는 것 잘 안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 했다. 너희는 이미 절반의 성공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의 외침에 여자들의 얼굴에 뿌듯함이 감돌았다. 최근에 칭찬받아본 적이 언제였더라? 별거 아닌 작은 말한마디가 웃음이 절로 번질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다루라고 한다. 발키리 사단장이며 오늘 너희의 입소식을 맡은 교관이기도 하다!”
낯선 단어들에 고개를 갸웃하는 이들이 많았다. 왜 아니겠는가. 발키리 부대 구성 자체를 21세기 대한민국식으로 만들었는데.
“그러나 모두가 발키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3일간 너희의 적성과 의지를 판별할 것이다. 자신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잡지 않겠다!”
이들이 벌써 5기째였다.
얼추 2천 명이 되면 새로운 기수가 훈련을 시작했는데, 이미 8천 명 정도가 발키리의 이름으로 뼈를 깎는 시련을 경험하는 중이었다.
머엉..
여자들은 다루를 보며 그저 입만 쩍 벌렸다. 멋있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1~4기를 거치며 능숙해진 다루는 1기에서 태자께서 직접 입소식을 거행했던 그때를 대부분 카피해 써먹고 있었다. 가령,
“허나 이겨낸다면! 너희는 힘을 얻을 것이다! 가난이 힘겨운가? 굶주림이 싫은가? 이런 세상을 증오하는가? 그럼 싸워라! 약한 자는 절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 용서는 강한 자의 특권이다! 일단, 강해져서 판단하라! 이 빌어먹을 세상을 용서할지, 말지!”
이런 말도 곧잘 써먹었다.
“어이! 거기 너!”
다루가 손가락으로 한 사람을 지목했다.
“..예?”
키리리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너는 뭘 잘하지?”
부모님이 살아계실 땐 집안일을 도우며 살았다. 동생과 둘이 남은 후론 산과 들에서 먹을 것을 구하거나 친척 집을 전전하며 손을 벌렸다. 특별한 기술도, 빼어난 미모도 없다. 그래서일까? 말문이 막혔다.
“…….”
답이 없자, 다루가 버럭 소리쳤다.
“발키리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을 원칙으로 한다! 상급자가 물으면, 즉시 대답한다! 죽으라면 죽고, 살라 하면 반드시 산다. 알겠나?”
“네, 네!”
무서워서 얼떨결에 대답한 키리리에게 다루가 다시 묻는다.
“너는 뭘 잘하나?”
“처, 청소요!”
빼액 소리친 키리리를 보며 여자 몇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비웃는 건 아니다. 자신들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다루 역시 무서운 표정을 풀고, 빙긋 웃었다.
“나 역시 그러했다.”
다루는 사람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다. 태자님 곁에 있다 보면 싫어도 이렇게 된다.
“나도 해가 뜨면 물을 길었고, 강에 나가 빨래를 했으며, 매일매일 그 지긋지긋한 청소를 하고 또 했다. 너희들은 알지? 청소는 끝이 없다는 걸.”
공감한 듯 키득거리는 여자들.
그러나 곧 그녀들은 화들짝 놀랐다.
콰앙-!
다루의 발이 바닥을 거칠게 찍었기 때문이다. 삐걱 나무 탑이 휘청일 정도. 큰 소리에 놀라 토끼 눈이 된 여자들을 내려보며 다루가 외쳤다.
“보아라-!”
다루가 주먹을 쥐고,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여자들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같은 여자가 봐도 끝내준다. 저 박력, 기세, 자신감마저. 나이를 떠나, 정말 멋진 언니다.
“너희도 할 수 있다!”
다루가 입소식의 절정을 장식한다.
“발키리가 되어라! 그러면 너희도 여기! 내가 선 자리에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와아..”
“멋져..”
여자들이 넋 놓고, 다루를 올려다보는 그 시각. 인근 건물 4층의 창가에서 한 남자가 피식 웃고 있었다.
“잘하고 있군.”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초선 같다. 뭐, 외형이 그렇단 얘기다.
‘여포가 되지 말란 법도 없지.’
꼭 다루가 아니라도 저기 모인 여자들 중에 어떤 원석이 숨어있을지는 모르는 거 아니겠는가?
-여포가 뭔데? 먹는 거냐?
언제나처럼 악마를 무시하며 번.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후둘후둘..
로브 차림의 여자 하나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후드는 깊게 눌러 써 얼굴를 완전히 가렸고, 밑단은 발목 아래 치렁치렁 끌릴 정도. 그런데도 보인다. 턱 끝에서, 목에서, 앙상한 손가락에서 세월의 흔적이.
“어, 어서.. 제발..”
마녀 융이었다.
오십 후반은 되어 보이는 주름과 거무죽죽한 피부.
“…….”
쓰게 웃으며 번이 그녀에게 팔을 뻗었다.
화악-!
로브가 벗겨지며 그녀의 볼품없는 알몸이 드러났다. 늘어진 젖가슴, 탁한 유실, 손에 잡힐 것 같은 축 처진 뱃가죽과 턱살까지. 번에게서 어둠을 흡수하지 못해 젊음과 생기를 잃어가는 그녀에겐, 전과 같은 아름다움은 털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간질 환자처럼 사지를 발발 떨어대는 그녀에게 번의 손이 닿았다. 하지만 불쌍하다 쓰다듬는 게 아니었다.
와락-!
그녀의 정수리 머리칼을 움켜쥐고, 바짝 당겨 눈앞으로 가져오는 번.
“그래, 죽여달라고 왔나?”